마사 노먼 원작의 잘자요, 엄마('Night, Mother)를 바탕으로 하는 희곡입니다. 그러고보니 은혼에서도 한 번 했었죠 이거.
이야기를 듣고 같이 이 설정으로 글을 쓰기로 해 주신 라일라 님께 감사인사 드립니다. 덕분에 다시 이걸 보고 새로 쓰게 됐어요.
토르와 로키가 나옵니다. 그리고 이 희곡은 제가 아는 중 가장 비극으로 꼽는 희곡입니다.
잘 자, 형. (‘NIGHT, Brother)
지구, 아마 스타크 재단의 일부로 추정되는 방. 뒤편에 출입구로 쓰이는 금속제 문이 보인다. 제법 푹신해 보이는 양탄자가 깔려있고 탁자에는 커피잔, 커피포트, 과자 몇 종류가 든 소쿠리가 있고 탁자 양 옆으로 소파가 두 개씩 놓여있다. 침대에는 누운 흔적이 있지만 시트며 이불은 새 것이다. 전체적으로 깨끗하고 물건도 제법 고급품으로 보이지만 생활감이 적고. 언뜻 봐서 토르가 여기서 살고 있는 것 같지만 잘 보면 생활감이 전혀 나지 않는, 하루 저녁 묵어가는 여관 같은 느낌이 나게 만들어야 한다. 여기는 완벽하게 현대적인 공간이고 토르는 이 공간과 완벽히 어울리지 않아야 한다.
출입구는 무대에서 정면으로 해서 열리게 되어 있는데 이것이 무대장치의 포인트이다. 그것은 평범해 보이지만 완벽한 無로 통하는 것 같은 분위기를 내야 한다. 이 문이 모든 움직임의 초점이다.
막이 열리고 조명이 탁자 쪽만 비춘다. 조명이 켜지면 토르가 보인다. 그는 관객석 기준으로 오른쪽 소파에 호쾌한 포즈로 앉아있다. 복장은 갑주차림이 적당하고, 발밑에는 묠니르가 놓여 있다. 소쿠리에서 손바닥만한 쿠키를 꺼내 두 입만에 먹어치우고 커피를 원샷한다.
토르 : (호쾌하게) 하나 더! …어라, 맞다. 여기선 마시고 컵을 깨지 않지.
토르는 얌전히 던지려던 컵을 놓고 커피 포트에서 커피를 한 잔 더 따른다.
토르 : 미드가르드인들은 검소하고 소박하다는 것을 이럴 때 느끼지. 마신 컵을 다시 쓴다....멋져. 참 건실한 덕목이야. 게다가 커피는 맛있고. 쿠키도 맛있고. (커피를 한 모금 벌컥 소리를 내며 마신다) 캬아. 다만 술이 부족해서 조금 슬프군. 미드가르드의 술은 너무 싱거워. 게다가 여기 동의해 주는 사람도 별로 없지. 아아, 아스가르드의 꿀술이 그립군. 색은 벌꿀과 같고 맛은 진하며 달콤하기까지 하지. 미드가르드에도 그 미덕을 아는 자가 있으면 좋으련만.
토르가 커피를 마시며 혼자 한탄하는 동안 로키가 출입구를 조용히 연다. 역시 갑주 차림이지만 투구는 쓰고 있지 않다. 처음에는 관객의 눈에 잘 띄지 않아야 한다. 평소보다 조금 더 활기차 보이는 모습이다. 사실 로키가 요 최근 몇 년간 이렇게 컨디션이 좋았던 적은 별로 없다는 것을 인지해야 한다. 토르는 잠시 인기척을 못 느끼고 있다 자기 앞에 서 있는 로키를 보고 활짝 웃으며 커피잔을 내려놓는다.
토르 : (기쁜 목소리로) 아우야!
로키 : 누가 아우야.
토르 : 너는 내 아우고! 나는 네 형이지!
로키 : (소파에 앉으며)학습능력이 없는 건가. 같은 소리 반복하는 것 좀 그만해.
토르 : 그렇지만 넌 내 동생인걸.
로키 : (얼굴을 찌푸리며)아, 좀. 됐다고.
토르는 시무룩한 표정을 짓고 로키는 토르 맞은편 소파에 앉는다.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토르 : 그런데 어쩐 일이야?
로키 : (피식 웃으며) 왜.
토르 : 어, 그. 재갈도 없이 돌아다니는 거 말이야. 넌 어쨌건 여기선 범죄를 저질렀고...
로키 : 그래서, 여기 오면 안 된다?
토르 : 아니, 물론 형제의 방문은 언제나 환영이지만.
토르가 쿠키를 내밀고, 잔을 찾아서 내밀지만 로키는 커피에 입도 대지 않는다. 토르도 마찬가지다. 토르는 잔을 들고, 로키는 그냥 손을 모으고 앉아있다. 어딘가 평소와 분위기가 다르다는 것을 토르도 어렴풋이 알고 있다. 둘은 아무 말도 없이 3-5초간 서로 쳐다보고 있다. 잠시 후 분위기를 바꿔보고 싶다는 티를 내며 토르가 어색하게 입을 연다.
토르 : 음, 로키. 이제 내일이면 아스가르드로 가야 하는데.
로키 : 이봐, 잠시만 그 이야기는 하지 않으면 안 되나?
토르 : 으음, 하긴 싫겠구나. 미안하다.
로키 : 뭘 답잖게 사과야.
토르 : 그렇지만 이렇게 잡아두는 건 고의가 아니었어. 너도 우리 뜻을 이해하지?
로키 : (비웃으며) 퍽이나.
토르 : 하지만 로키.
로키 : 그만 하라고. 변명 아니면 할 말이 없나?
토르, 아무 말도 못 하고 로키는 기분 나쁜 얼굴로 팔짱을 끼고 있다. 그래도 평소 같은 분위기가 되어간다고 토르가 마음속으로 조금 안심하는 순간, 로키가 아주 평온한 목소리로 입을 연다.
로키 : 아참. 사실 할 말이 있어서 왔어.
토르 : (기쁘게)뭐지?
로키 : 나 자살할 건데.
잠시 정적이 흐르고, 토르는 얼굴을 찌푸리고 머리를 긁다 먼 산을 보다 한참 뒤에 입을 연다.
토르 : 로키, 농담은 그렇게 하는 게 아냐.
로키 : (눈썹을 치켜올리며)농담으로 보이나?
토르 : 갑자기 말이 안 되잖아. 네가 그럴 이유가 어딨어.
로키 : (웃으며)자살은 이유가 있어서 하는 게 아니야. 없어서 하는 거라면 모를까.
토르 : 이해가 안 되는데.
로키 : 굳이 이해받고 싶지도 않았어.
토르 : (벌떡 일어나며) 무슨 소리냐! 그러면 왜 나한테 이야기 하는 거냐. 게다가 아스가르드의 왕자가 자살이라니! 말이 되는 소리냐.
바닥에 있던 묠니르가 토르의 손에 끌려올라온다. 토르가 묠니르를 세게 붙잡는다. 망치를 잡는다기보다 망치에 의지하는 것 같다. 아이들이 불안할 때 담요를 끌어안는 것처럼 잡고 있다. 로키는 토르의 표정을 한참 쳐다보다 한숨을 쉰다.
로키 : (한숨 쉬며) 좀 진정해, 이야기 좀 하자.
그제야 토르가 로키를 쳐다본다. 이야기 좀 하자는 말이 로키의 입에서 나온지 셀 수 없을 만큼 오래되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놀란 것 같다.
토르 : (못 믿겠다는 얼굴로) 이야기?
로키 : 그래, 이야기. 그러니까 일단 좀 진정해.
로키가 손으로 앉으라는 신호를 보내고 토르는 홀린듯 로키가 손짓하는 대로 앉는다.
토르 : (태연하려고 애쓰며)그러니까 지금 네 손으로 목숨을 끊겠다고.
로키 : (정말로 태연하게)그런데?
토르 : 로키, 그런 말 하면 못 쓴다.
로키 : 못 쓴다고, 훈계하는 것처럼 말하지 마.
토르 : 형이 동생을 훈계하는 게 왜 나쁘지?
로키 : 아직도 형 흉낸가. 좀 지겹네 이제.
토르 : (상처받은 표정으로) 지금 그게 문제야?
로키 : 문제지 그럼. 난 토르 오딘손이 내 형인게 싫다고.
토르 : (주먹을 움켜쥐며) 로키 오딘손!
토르의 주먹이 앞으로 나간다. 그러나 로키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다.
로키 : (비난하듯) 이야기 하자고 그랬잖아. 주먹으로 이야기해?
토르, 억지로 그러듯 주먹을 거둔다. 로키가 한숨을 쉰다.
로키 : 이야기라고, 이야기. 기껏 말해주러 왔더니 대접이 고작 이거야? 좀 기분 나빠.
토르 : 나라고 동생이 죽겠다는 이야기를 듣는 건 좋은 줄 아느냐?
로키 : (눈썹을 치켜올리며) 하하, 그러니까 내가 말 안 하는 게 낫다 이거? 닉 퓨린가 하는 애꾸한테 내가 죽었단 소릴 전해 듣고 싶은 거야?
토르 : 그런 게 아니잖아.
토르는 어디론가 무슨 신호를 보내려는 것처럼 손을 꼼지락거린다. 로키는 그것이 무슨 뜻인지 알아본다.
로키 : (낮은 목소리로) 하지 마.
토르 : 올파더께서 아셔야 해.
로키 : 하지 말라니까!
토르 : 내 힘으로 못 말린다면 아버지라도 말리셔야지!
로키가 벌떡 일어나 탁자를 넘어서 토르의 멱살을 잡는다.
로키 : 부르는 순간 바로 죽어버릴 테다. 올파더라도 여기서 내가 죽는 걸 말릴 만큼 빠르지 못 할 걸? 절대 하지 마.
토르 : 하지만 로키.
로키 : (단호하게) 싫다고 그랬다.
토르 : 고집부리지 마.
토르 : 아버지 때문에 그래? 그래서 이러는 거야?
로키 : 웃기고 있네. 이건 내 문제야. 아스가르드 같은 거랑 아무 상관이 없어.
토르는 로키가 진심임을 안다. 연락을 포기하고 자리에 앉는다. 대신 화제를 돌려보려고 애를 쓴다.
토르 : 갑자기 왜 그러냐. 무슨 일이야.
로키 : 일은 무슨.
토르 : 아무 일도 없는데 그런 생각을 해?
로키 : 기분은 평온해. 지난 천 년간 이랬던 적이 없을 만큼.
로키는 말갛게 웃는다. 표정은 어둡지만 굉장히 평온하다는 느낌이 나야 한다. 오히려 토르가 좀 더 불안정해 보일 지경이다. 한참을 허둥대던 토르는 간신히 할 말을 찾는다.
토르 : 사람이 아무 일도 없는데 죽지는 않아!
로키 : 왜 못 해? 그리고 난 이미 죽었는데.
토르 : 네가 왜 죽어, 넌 내 동생이고 아스가르드의 왕자인데.
로키 : (그 말을 부정하듯 웃으며) 이봐, 사람들이 착각하는 게 있는데 말이야. 잘 들어봐. 일단 자살은, 문제가 있다고 하는 게 아냐. 문제가 없다고 판단했을 때 죽는 거야. 그리고 다음, 난 네 동생도 아니고, 아스가르드의 왕자도 아니야. 오딘의 아들은 더 아니지. 그리고, 로키 오딘손은 이미 죽은 거 같아.
토르 :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는 얼굴로)잘 모르겠어. 문제가 없는데 왜 죽으려고 하는 거야. 그리고 넌 내 동생이잖아. 서리거인이라도 내 동생이야. 내 동생이 뻔히 눈뜨고 있는데 무슨 소리냐.
로키 : (말없이 쳐다본다)
토르 : (눈빛에 눌려서)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해.
로키 : (비아냥거리듯)그러시던가.
토르 ; (할 말을 찾지 못하다가) 저, 아버지가 문제라면 내가 도와줄게.
로키 : 내가 고작 그걸로 죽으려고 한다고?
토르 : 그럼 아냐?
로키 : 그냥 별로 더 살고 싶은 마음이 안 나는 것 뿐이야.
토르 : (한숨 쉰다) 살고 싶은 마음이 안 나다니. 그런 게 어딨어. 뭣 때문에 그러는데. 져서 싫은 거야? 그런 건 아무도 신경쓰지 않아. 네가 음모를 꾸며서? 그게 뭐 어떤데?
로키 : (비웃듯) 단순하기는.
토르 : 아버지도 널 용서하실 거야.
로키 : 퍽이나 그러겠네. 잘 생각해봐. 난 말이지, 올파더의 원대한 계획 중의 일부라고. 너를 아스가르드의 군주로 만들기 위한. 뭐 내 자리도 거기 하나쯤 있긴 했겠지. 하지만 이미 난 거기 앉을 수 없어. 왜인지는 잘 알잖아.
토르는 왜 그러냐고 묻는 대신 고개를 돌린다. 로키도 더 이상 말 하지 않는다. 서로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잘 알고 있다. 토르는 필사적으로 말을 돌린다.
토르 : 너, 사실 음모 더 꾸미고 있었지 않아? 다른 빌런들은 어쩌고.
로키 : 몰라. 멍청한 악당들 따위 알 게 뭐야. 내가 없다고 그놈들이 미드가르드를 탐내지 않을 리도 없고. 어떻게 되겠지. 알 게 뭐야. 애초에 미드가르드 같은 거, 상관없어. 딱히 탐내서 여기 온 것도 아닌데.
토르 : 상관 없다고?
로키 : (쿡쿡 웃는다)
토르 : (화를 가라앉히면서) 그런데 왜 그런 거냐, 로키. 필요도 없다면서 왜 그렇게 무리하게 미드가르드에 군림하려고 한 거고, 왜 그렇게 무리해서 어설픈 악당을 연기한 거냐.
로키 : (더 큰 소리로 웃는다.) 무리?
토르 : 내가 아는 너는 그렇게 단순한 악당이 아냐.
로키가 눈을 가늘게 뜨고 토르를 노려본다.
로키 : 글쎄, 아는 게 다는 아니지 않아?
토르 : 난 널 믿는다.
로키 : (웃으며) 순진하기는. 아직도 그렇게 몰라?
토르 : (약간은 필사적으로)나와 싸우고 싶은 거라면 그냥 싸우자.
로키 : (어이없어하며)그걸 지금 말이라고 해?
토르 : 난 너를 전사로 인정하는 거야.
로키 : 이러니까 내가 화가 나는 거라고. 강자의 관용이라...이건 기만이야. 집어쳐.
토르, 가만히 로키를 쳐다본다.
로키 : 왜.
토르 : 역시 너 어딘가 편치 않은 거지.
로키 : 말짱합니다. 그놈의 녹색 괴물한테 얻어터진 거 정도야 뭐.
토르 : 아니, 넌 분명히 지금 어디가 아픈 거야. 마음이 아픈 거지. 우리가 잘못한 게 있으면 사과하마.
토르는 필사적이다. 로키도 그것을 안다.
로키 : 과거 때문에 죽진 않아. (사이) 그럴 수 있다면 이럴 필요가 없지.
토르 : (희망을 가지고)그래, 로키. 죽을 필요가 없어!
로키 : 아니, 그래서 죽는 건데.
토르의 얼굴이 일그러진다.
로키 : 문제는 현재라고.
토르 : 그래, 역시 우리가 잘못한 거야. 내가, 아버지가.
로키 : 내 말 듣고 있어? 문제는 현재라고!
토르 : (듣지 않고) 처음부터 내가 형으로서 처신을 잘 해야 했어.
로키 : (짜증내며) 시끄러. 그만 좀 하라니까.
토르 : 뭐가 그렇게 싫은 거냐?
로키 : 전부 다.
토르 : 뭐라고?
로키 : 말 그대로야. 전부 다 싫었는데, 이젠 싫어하는 것마저 싫어.
토르 : 내가 뭘 하면 마음을 돌리겠어?
로키 : (웃긴다는 투로)하긴 뭘 해.
토르 : (희망을 가지고)세상이 마음에 안 든다면 내가 대신 부숴줄 수도 있어. 새로 만들 수도 있고. 아스가르드도 그래.
로키 : 그래?
토르 : (밝아진 얼굴로)네가 원한다면!
로키가 웃는다.
로키 : 토르 오딘손. 너는 절대 못 그래.
토르 : 내가 왜 못 해?
로키 : 넌 아스가르드의 적자고 미드가르드를 수호하는 자잖아. 퍽이나. 네 세계의 기반을 네 손으로? 웃기지 마.
토르 : ......
로키 : 그런 말이 날 더 화나게 만드는 거야. 아직도 모르겠어?
토르가 조용히 로키를 쳐다본다.
로키 : 토르, 지옥을 본 적이 있어?
토르 : 아니. 지옥이라면 모른다.
로키가 의외라는 듯 웃는다.
토르 : 왜 웃지?
로키 : 아니, 아니야. 설마 네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올 줄.....아니, 너니까 가능한 거겠지.
토르 : 무슨 소리야?
로키 : 됐어. 지옥에 대해 말해줄게. 평생 다시는 보고 싶지 않은 꼴이었지. (웃는다) 너는 지옥을 못 봤다지만, 난 그게 뭔지 알아. 어찌나 끔찍한지 당장이라도 그 지옥을 떠나고 싶을 거야. 하지만 넌 못 떠나지. 왜냐하면 넌 거기가 지옥이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거든. 게다가 너는 그 지옥을 천국으로 바꿀 수 있지. 하지만 나는 달라. (웃는다) 내가 있는 곳은 지옥이고 그것은 영원히 바뀌지 않아. 그래서 생각을 좀 바꿔봤지. 그랬더니 내 마음이 내키면 언제고 지옥을 부술 수도 있고 지옥을 떠날 수도 있어. 괜찮지 않나? 그거면 됐어, 난.
토르 : 그렇게 생각하면 안 돼.
로키 : 글쎄, 어쨌건 너는 세상에 정 붙일 데라도 많지 않나.
토르 : 정 붙일 데?
로키 : 미드가르드인 친구라거나. 어벤저스 같은 웃기는 놀이. 다들 너를 좋아하잖아?
토르 : 친구가 필요한 거야?
로키 : (분노한 목소리로)사람 우습게 만들 거야?
토르 : (아차 하는 얼굴로)아, 그게 아니고....
로키 : 됐어.
로키는 목이 마르다. 토르가 눈치를 채고 커피를 따라준다. 둘은 커피잔을 하나씩 놓고 얌전하게 커피를 마신다. 언뜻 보면 화기애애해 보이기도 한다.
토르 : (미간을 찌푸리며)맛이 없군.
로키 : (찻잔을 놓으며) 그러게. 쓰기만 하네.
토르 : 아스가르드 술이 맛있지. 먹고 싶지 않아?
로키 : 아니, 됐어.
토르는 어색하게 커피를 조금 더 따라 마신다.
토르 : 난 아직도 네가 뭘 하겠다는 건지 모르겠다.
로키 : 그러게. (키득키득 웃는다.) 난 아직도 날 말릴 수 있다고 착각하는 네가 놀라워.
토르 : 농담이라고 하면 안 되는 건가.
로키 : 나도 농담하고 장난 칠 때와 장소는 알아.
토르 : 그리고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지.
로키 : 그렇지. 그러니까 죽겠다고.
토르 : 그 죽겠다는 말 좀 그만할 수 없냐.
로키가 토르를 노려본다.
로키 : 아직도 내가 장난을 치고 있다고 생각해? 어리광이라고 생각해? 죽겠다고 했잖아. 기껏 알리러 왔더니 한다는 소리가 고작 그거?
토르 : 그럼 왜 나에게 죽겠다고 알리려는 거야?
로키 : .......
로키가 처음으로 대답을 하지 못한다. 토르, 기세를 몰아서 말을 잇는다.
토르 : 나를 믿는다는 뜻 아냐? 나에게 말려달라는 뜻 아니냐고.
로키 : 그런 거 아니야.
토르 : (듣지 않고)형제한테 그런 말을 하다니 정말 너무하잖아. 그게 아니라고? 아니면 왜 내게 왔지? 악당 노릇을 할 거면 제대로 하라고! 아니면 나를 쳐! 아버지가 널 인정하지 않을거라니, 그건 네 생각일 뿐이잖아. 안 그래, 분명히 답은 있을 거다. 너는 내 동생이야. 아스가르드가 알아주는 마법사라고. 네가 할 일이 없고 설 땅이 없어서 악당이라니. 아스가르드의 반역자라니. 말이 되지 않아! 여기 녀석들도 사실 널 좋아할 거야.
점점 목소리가 커지고, 토르 본인도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 잘 모르는 듯하다. 로키는 가라앉은 표정으로 토르를 쳐다보다 경멸하는 표정을 짓는다.
로키 : (냉소적으로)웃기지 말고.
토르 : 많은 사람들이 널 좋아해.
로키 : 그래서?
토르 : 네가 할 수 있는 일도 많아.
로키 : 그래서 어쩌라고.
토르 : 이런 식으로 극단적으로 나오지 마.
로키 : 착각하지 마. 나한테 주어진 건 없어.
토르 : 차라리 물어뜯어.
로키 : 뭐?
토르 : 그래서 마음이 풀린다면 얼마든지 물고 뜯고 싸워. 세상을 향해 싸움이라도 걸면 좋잖아. 넌 트릭스터잖아. 그게 네 일일지도 몰라. 그래, 지구를 혼란하게 하고 아스가르드를 혼란하게 하는 거. 그래서 마음이 풀린다면 괜찮아. 그렇게라도 해. 응?
로키 : 그래서, 자신이 있으시다 이거군
토르 : 무슨 자신?
로키 : 내가 무슨 사고를 쳐도 너와 오딘이 해결할 거라는.
토르 : 그런 뜻이 아냐!
로키 : 아니기는 무슨.
로키가 아무 말 없이 음산하게 웃는다.
토르 : 난 네가 악당 노릇 하는 것도 좋아.
로키 : (비꼬듯)그러세요?
토르 : 그러지 마.
로키 : 뭘.
토르 : 비꼬지 마.
로키 : (입꼬리를 올리며)왜, 마음 아파? 대단한 형이네. 이 마당에 자기 마음 아픈 게 중요한가?
토르 : ......
토르는 완전히 상처받은 표정이다.
로키 : 됐어. 뭐 마음 아파할 거 없잖아. 내가 동생도 아닌데.
토르 : 아니야. 넌 네 동생이야.
로키 : (웃으며)입양한 동생이라며?
토르 : 하지만 그것까지 포함해서 동생이잖아.
로키 : 그래?
토르 : 그래! 그간 아무 일 없이 잘 지내왔잖아.
로키 : (자기 자신을 가리키며)아무 일이 없다?
토르는 로키의 얼굴을 아무 말도 하지 못한다.
토르 : 하지만 로키, 이제라도 회복할 수 있어. 다들 널 믿어줄 거야.
로키 : 누가 믿어줄 건데?
토르 : .......
로키 : (한숨쉰다)됐네. 이제 와서 헛소리 말고, 넌 잘난 너대로 네 갈길을 가. 난 그냥 트릭스터 로키로 놔두라고. 반역자로라도 놔둬줘.
토르 : 어떻게 내가 그렇게 하겠어?
로키 : 넌 이미 그랬어.
토르와 로키, 마주본다. 토르는 로키가 하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안다. 그리고 로키가 자신을 증오하는 것도 안다. 동시에 자신을 원망하지 않는 것도 안다. 로키는 토르가 이 모든 것을 다 아는 것을 안다.
로키 : (한숨을 푹 쉬고)됐어. 상처받을 것도 없고, 우울해할 것도 없고, 화낼 것도 없어. 이건 내 개인적인 문제야. 너와는 상관이 없어.
토르 : (격해진 듯) 네가 하는 일이면 뭐든 나랑 상관이 있지. 로키. 넌 내가 미운 거잖아. 차라리 나를 죽여!
로키 : 그러면 죽어줄 거야?
토르 : .......원한다면.
로키는 한숨을 쉰다.
로키 : 바보도 저런 바보가 없지. 됐어. 난 내가 해야 할 일을 잘 알아. 그러니 그걸 하지. 여기서 널 죽이는 건 내가 할 일이 아니야.
토르 : 로키!
로키 : 날 더 비참하게 만들지 말았으면 좋겠어.
토르 : 내가 죽으면 넌 승자가 될 수 있지 않아?
로키 : ...머리를 좀 써. 제발.
토르 : .......역시 너에게 좀 더 신경을 썼어야 했어. 아버지도 그렇고, 다들 너를 좀 더 이해했어야 했는데.
로키 : (덤덤하게)과거는 상관없댔지. 네가 뭘 한들 내 마음이 바뀌진 않아.
토르 : 다시 생각해줘.
로키 : (타이르듯)네가 구해주길 바란 게 아니야. 그저 알려주고 싶을 뿐이지.
그때 토르가 벌떡 일어나 로키의 옆으로 가 어깨를 끌아안는다. 로키가 움찔한다.
토르 : 로키, 날, 이 형을 버리지 마라.
로키 : 저리 꺼져!
토르 : 농담이 아니다. 세상을 버리지 말고, 나를 버리지 마라.
로키 : 꺼지라고!
토르 : (더 힘을 주며)내가 너 없이 어떻게 살아. 동생 하나 지키지 못하는 자가 무슨 군주냐.
로키 : 넌 나 없이도 괜찮아. 아니 내가 없는 게 낫지.
토르 : ......
둘 다 로키가 본인도 믿지 못할 말을 한다는 것을 안다. 로키가 한참 애를 써서 토르의 팔을 푼다. 이제 둘은 가까이서 마주보고 있다. 한참 서로 쳐다보고 있다 로키가 말을 꺼낸다.
로키 : 가끔 이상한 생각이 들었지. 뭐 그렇게까지 이상할 거 없을지도 모르지만. 아무튼 그 날 이후, 마음을 굳힌 다음 가끔 생각한 게 있어. 날 여기 붙들어 놓고 있는게 과연 뭘까. 머무를 가치도 없는데 뭘 위해 여기 있을까. 그리고 형이나 아버지는 그게 뭔지 알까 하고. 내가 마음 붙일 데가 있었으면 어땠을까. 차라리 좀 더 바보라서 아무 것도 몰랐으면 좋지 않았을까 하고.
토르 : (힘없이)아냐. 세상은 아름다워. 고생하고 먹는 슈와마도 맛있고.
로키 : 그래? 잘 됐네. 너한테라도 살 만하다니 좀 기쁘군.
토르 : (놀라며) 그게 아니잖나.
로키 : 뭐, 너라면 그렇게 말할 줄 알았어. 넌 세상이 아름답다고 믿으니까.
토르 : 그렇지도 않아.
로키 : 아냐. 너에게 세상은 아름답지. 그래서 자기 목을 노리는 피 안 섞인 동생도 아름다워 보이는 거고. 네 눈에 비치는 세상은 조화로워서 나 같은 녀석이 있을 자리도 있거든. 그런데 난 아냐. 게다가 네가 보는 세상이 나는 싫어. 넌 내가 그 말을 듣고 마음을 돌리길 바랐나? 너무 무르군.
토르 : 로키.
로키 : (웃으며)됐어. 그게 잘 어울리지 너에겐. 아, 이제 갈 시간이네.
토르 : (허둥대며)토, 토니 스타크에게 술이라도 얻어올게!
로키 : 됐어. 지금이 딱 죽기 좋은 시간인데 뭐.
토르 : 로키, 아직 밤은 길어. 그렇지...텔레비전이라도 보지 않을래?
로키 : 괜한 짓 하지 말랬지.
토르는 필사적으로 할 말을 찾는다. 로키는 천천히 일어나 출입구 쪽으로 걸어간다. 토르는 로키의 등을 본다.
토르 : 그, 그래. 아버지에게 뭐라고 하면 좋아?
로키 : 아하, 오딘? (멈춰서서 낄낄 소리내며웃다 몸을 돌려 토르를 보고 다정하게 웃으며) 뭐 오딘만이 아니네. 분명히 어느 놈이고 내가 뭐라고 했냐고 물어보는 놈이 있겠지. 그냥 모른다고 해. 우린 서로를 증오하는 형제였고, 그날도 평소처럼 물어뜯다가 내가 갑자기 잘 자, 토르, 이러고 나가버렸다고. 그러더니 죽었고.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다고.
토르 : 그걸 누가 믿어? 나라도 못 믿을 말을.
로키 : 믿지. 로키는 변덕스럽고 알 수 없잖아? (웃는다.)
토르 : 하지만 어머니께라도 이야기하고 싶어. 어머니는 널 사랑했잖아.
로키 : (고통스러운 표정을 짓는다)안 돼.
토르 : 어머니 가슴에 못질을 할 테냐.
로키 : (이를 물고)개인적인 문제야 이건. 오늘밤은 너와 나만의 거지. 다른 놈이 끼어드는 꼴은 안 보고 싶어.
로키의 진지한 표정을 본 토르는 자신이 아무 것도 하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토르 : (기계적으로) 알겠네.
로키 : 음, 내가 죽고 나거든 아버지한테 연락해. 오딘이 화내겠지. 그거 좋군. 내 시체는 수습해 줄 수 있어?
토르 : 그러고 싶지 않아.
로키 : 아니, 하기 싫어도 할 수 있어. 내 마지막 부탁인데 그걸 못 들어줘?
토르 : (긍정하듯 고개를 숙인다.)
로키 : 아마 내가 죽은 걸 보면 닉 퓨리 놈이 펄쩍 뛰겠네. 호크아인가, 그 녀석이 복수하겠다고 설치겠는데. 하하, 못 봐서 아쉽군.
토르 : …….
토르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서 그냥 가만히 있는다. 로키는 다정하게 웃으며 문 쪽으로 걸어간다. 로키가 문 앞까지 걸어간 순간 토르는 로키를 잡으려고 일어난다.
토르 : 로키!
토르가 로키 쪽으로 다가오는 순간, 로키가 토르의 머리를 두 손으로 잡는다. 놀라 토르가 굳은 동안 이마에 키스한다. 토르가 멍하니 앞을 보고 있는데 로키가 손을 떼고 토르의 머리를 놓는다. 환하게 웃으며 말한다.
로키 : 잘 자, 형.
토르가 막으려고 하지만 로키는 매우 빠른 동작으로 문을 열고 나간다. 마치 뱀이 빠져나가는 것 같다. 토르가 문을 잡고 열려고 하는 순간 기괴한 비명 같은 것이 들린다. 꼭 웃음소리 같다. 토르는 바닥에 무너지듯 쓰러진다. 천장을 보며 한참동안 숨을 제대로 쉬려고 노력한다. 자세를 추슬러서 바르게 앉는데 한참 시간이 걸린다. 간신히 목소리를 쥐어짜 한 마디 한다.
토르 : 왜 하필 마지막에 형이라고 불러주는 거냐, 이 나쁜 놈.
더 이상 말이 나오지 않는 듯, 손으로 눈을 가리고 한참 앉아있다 손을 내린다. 얼굴에 눈물 흔적은 없다. 마음을 정한 듯 눈을 감고 공중을 향해 말을 건다.
토니 스타크가 꽤나 심각한 표정을 짓고, 한창 체력단련 중이던 스티브 로저스에게 다가갔다. -캡틴, 방패를 좀 빌려줄 수 있어요? -무슨 일인데 방패를? 스티브가 덩달아 심각한 표정을 지었고 토니는 어디까지나 심각하고 정중한 어조로 대답했다. -지구인들의 상호 이해와 평화를 위한 연구에 필요합니다. -연구는 좋은데, 거기 왜 방패가 필요하나? -음, 거기까진 설명드리기 복잡하지만, 이것만은 맹세하죠. 일단 팀 내에서 써 보면 팀원들 간의 사이가 좋아질 거라는 건 확실합니다. 토니는 진지하고, 확신에 찬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의 눈을 한참 들여다보던 스티브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거라면 좋아. 다만 나도 조건이 하나 있는데. -뭐죠? 약간 긴장한 어투로 토니가 묻자 스티브가 미소하며 답했다. -손상이 가지 않게 잘 다뤄주게. -라져. 짐짓 경례를 해 보이는 토니를 보고 후에 어떤 참상이 벌어질지 짐작했어야 했다고 스티브 로저스, 캡틴 아메리카는 나중에 두고두고 그일을 곱씹으며 후회했다. 답지 않게 정중할 때 알아봤어야 했다고.
잠시 후, 스타크 빌딩 옥상. 캡틴을 제외한 어벤저스가 갑작스러운 토니의 소집을 받고 모였다. "친교를 위한 한국식 만찬이다!"라는 말의 뜻을 곱씹으며. 심지어 클린트는 토니한테 지령을 받았다며 그 한국식 만찬에 필요한 물건을 사서 오기까지 한 상태였다. 누구도 거절할 거라고 생각 안 했다 이거지, 나타샤 로마노프가 혼자 투덜대고 있을 때 매끈하게 잘 닦인 방패를 든 토니가 나머지 어벤저스 앞에 나타났다. 무척 신나고 즐거워 보이는 얼굴이었다. 토니는 좌중을 한 바퀴 둘러본 다음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친교를 위한 한국식 만찬에 온 걸 환영하네. -대체 그게 뭐야? 로마노프가 투덜대자 토니는 피식 웃으며 클린트 쪽을 보았다. -자자, 지금부터 해 보면 압니다. 클린트, 아까 전달한 목록대로 쇼핑했지? -물론. 클린트가 양손에 든 비닐봉지를 내밀었다. -어 로마노프 요원은...이거, 이거, 이걸 씻어와. -왜? -만찬 준비를 좀 거들어 줘. 우리 모두 나눠서 일을 할 거야. 쇼핑해 온 클린트 요원은 잠시 쉬고. 뭔지는 몰랐지만, 우리라고 했으니 아마 다 같이 일한다는 뜻이리라. 다들 말 없이 수긍했다. 나타샤는 비닐봉지를 뒤져 큼직한 꾸러미 몇 개를 꺼냈다. -향이 독특한데, 허브인가? -참깨의 잎을 따서 먹는대. 그 나라 전래의 허브라더군. -으흠. 나타샤가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옥상에 수도시설은 없기 때문이다. -어, 배너 박사님은...이 레시피대로 소스를 만들어줘. -......소스? -응. 이게 맛을 좌우한대나 중요한 거니까 부탁해. 비율이 생명이야. 박사는 온화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커리도 뭘 섞느냐에 따라 맛이 다르지. 알겠어. 익숙하진 않지만 해 보지. 근데 그 소스 이름이 뭔가? 토니는 같은 공학도인 박사에게 신뢰의 눈빛을 보내며 웃었다. -쌈장, 이라던데. -난 뭘 하면 되나? 상황을 관찰하던 토르가 심각한 얼굴로 물었다. 토니가 비닐봉지에 남아있던 꾸러미를 열었다. -자넨, 나랑 고기를 굽지. 제일 중요한 거야 이게. 토르의 표정에 화색이 돌았다. 그러나 토니가 비닐봉지에서 고기를 꺼내는 순간 근심에 찬 표정이 되었다. -왜 이리 심각해...보던 중 제일 심각하다. 왜 그래? 돼지 안 먹어? -아니, 돼지고기는 훌륭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게 대체 무슨 일인가. -응? -고기를 이리 얇게 썰어서야 뭐가 되겠나! 자고로 고기란 육즙이라네. 통째로 강한 불에 익혀서 썰어 먹을 때, 고기에서 떨어지는 육즙은 실로 예술이라 할 수 있지. 그런데 왜 이리 얇게 썰었나. 이래서는 썰어 먹을 수 없네. 토르는 진지하게 말을 꺼냈다. 비닐봉지 속의 돼지고기는, 베이컨을 닮았으나 베이컨이 아닌 그냥 고기라는 점이 달랐다. 누구도 이런 고기를 본 적이 없었다. 클린트와 토니, 쌈장을 만들던 부르스 배너는 토르를 알고 지내던 중 그가 이렇게 긴 문장을 쉼없이 말한 게 처음이라는 사실에 놀라야 하는 건지, 육즙에 대한 애정에 감동해야 하는 건지를 잠시 고민했다. 먼저 입을 연 것은 토니였다. -토르, 이것은 지구의 극동의 전통음식이야. -그런가. -그 나라에선 돼지고기건 소고기건 이렇게 얇게 썰어서, 센불에 바싹 익혀서 콩을 발효시켜 만든 특별한 소스를 발라 채소에 싸서 먹지. 특히 이 부위, 삼겹살은 더더욱 그래. 무슨 말인지 알겠지? -채소쌈? 그래서야 어디 고기 맛을 제대로 보겠나? -아 좀. 로마에 왔으면 로마법을 따라. -여긴 로마가 아니잖나. -비유법이다 비유법....암튼 그래서, 불을 켜고... 토니는 아까 지구의 평화를 위해 빌려온 캡틴 아메리카의 방패를 내밀었다. -여기에 구워 먹는 거야. -어 잠깐, 그건 좀 아닌 거 같은데. 배너 박사가 진지한 표정으로 토니의 말을 가로막았다. -어째서? 캡틴도 허락했다고. 토니가 방패를 양손으로 꼭 붙잡고 말했다. 후에 토르의 말에 따르면, 그때 뭔가 감이 좋지 않았다고 한다. 그가 허락했다고 말해놓고 손으로는 방패를 붙잡고 있는 꼴에서 묘한 기시감을 느꼈다나. -아니, 그런 게 문제가 아니야. 배너 박사는 온화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사용하던 방패고, 페인트 성분을 생각하면 거기 고기를 굽기 적당하지 않을 거라고 지적하고 싶었는데. 음, 스타크? 자네 표정이 이상하네. 무슨 일 있나? 토니의 표정이 풀어졌다. 이 역시 후에 배너 박사가 회고한 바에 따르면, 뭔가 수상해서 한 마디 찔러보고 싶었다고 한다. 그냥 장난이었다며 박사는 웃었지만, 토니는 그가 가장 무서웠다고 했다. -음 그럴 땐 말이죠. 방법이 다 있어요. 토니는 등 뒤에서 토치를 하나 꺼냈다. -이렇-게. 토치로 표면에 불을 붙이자 방패가 시커멓게 색이 변하고, 위에 있던 페인트가 끓어오르듯 표면에서 움직이기 시작했다. 파란 불이 방패 위를 왔다갔다 하자 페인트는 아래로 흘러내리다 기화해 날아가고, 방패는 달아오른 흔적도 보이지 않고 잠시 후 제 색을 찾았다. 알루미늄 비슷한 광택이 나는 본바탕이 드러났다. -자, 완성. 설거지하기 쉽게 하려고 여기 은박지를 깔기도 하는데, 우린 그냥 하죠? 토니가 씩 웃었고 토르가 토치를 향해 박수를 보냈다. 박사가 아무 말 없이 은박지를 내밀었다. -에이. -나중에 캡틴이 방패에서 돼지고기 냄새가 난다고 하면 할 말이 없잖아요. 그냥 깔고 구웁시다. 그게 우리도 편해요. -음 잘 닦아서 페인트칠해서 보낼 건데요 뭐. 기왕 토치로 구웠는데. 아깝잖아요? 토니가 열심히 말했고 박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때, 쉬고 있던 호크아이가 가장 중요한 질문을 던졌다. -스타크, 그런데 뭐로 굽나? -아, 그거? 토니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아주 장난기 어린 표정으로, 옆에 있던 큰 상자를 열었다. 상자 뚜껑이 열리자 꼭 캠핑 가서 바비큐 해먹을 때 쓰는 것 같은 도구가 나타났다. 어쩐지 쨘 하는 소리도 들렸지만 아무도 박수를 쳐주지는 않았다. 토니는 무척 섭섭한 표정을 지어보였지만 토르가 박수를 치려다 배너박사의 약간 짜식은 듯한 표정을 보고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 -흠, 이제야 본격적이군. 불은 어떻게 붙이나? -아, 그게 제일 중요한 거야. 토니가 이번에야말로, 하는 표정으로 뭔가를 내밀었다. 모두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테서렉트?! 전원이 비명을 지르는 가운데 토니는 만족스러운 표정을 짓고 웃었다. -특수재질 방패라서 어지간한 걸로는 고기 구울 만한 불을 제대로 지피기가 어려워서 그래. 그래서 하는 수 없이. -하긴 방패에 열이 잘 전달되진 않았던 것 같군. 배너 박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호크아이는 이게 지금 말이 되는 것인가 되지 않는 것인가를 천천히 따져보기 시작했고, 토르는, 팔짱을 끼고 미간을 찌푸렸다. -어이, 천둥신. 왜 그래? -감히 테서렉트로 고기를 굽겠다고? 토르가 분노했다. -하지만, 그래서 이걸로 고기를 굽지 말라는 법은 또 어딨어? -그렇지만, 테서렉트의 힘은 중요하고, 이것은 너희 미드가르드 인들에게 큰 에너지원이 될 것이다. 그 중요한 것을 함부로 쓰겠다고? -함부로라니, 말이 심하잖아. 난 분명히 친교를 위한 한국식 만찬을 열겠다고 이야기했어. 이게 우리한테 하찮은 일이야? 이봐, 생각해보라고. 너희 아스가르드에서도 친교를 위해 만찬 정도는 열지 않아? 그 만찬에서 가장 중요한 음식이 뭔지 생각해보라고. 너희도 아마 만찬에 술과 고기는 빠지지 않을 거야. 설마 너희가 다 채식주의자는 아닐 테고 말이지. 그렇지? 반박을 못 하는 걸 보니 확실하군. 우리도 똑같은 거야. 만찬엔 고기가 필요하고, 아까 분명히 너도 고기 굽는 데 찬성했어. 그런데 이제 와서 고기를 구울 불이 없으면 무슨 소용이야. 이건 돼지고기고, 날로 먹으면 기생충에 감염된다고. 그리고, 이 고기는 말이지, 이런 쇠로 된 불판에 구워서 기름을 살짝 빼고 먹는 게 제맛이라고 분명히 그랬어. 게다가 한국에서는 말이지, 마늘도 김치도 고기와 같이 구워서 맛을 더한다고 했어. 고기를 구울 때 나오는 기름으로 그것들을 구워먹는 거랬다고. 심지어는 밥까지 볶아 먹는대! 알겠어? 불판과 불이 없으면 이 만찬이 성립되지 않아! 토니는 토르에게 질문을 퍼붓고, 어디서 났는지 봉투 사이에서 마늘이며 김치며 햇반이라고 적힌 플라스틱 용기가 담긴 비닐봉지를 꺼내어 가리켜보였고, 토르는 멍한 얼굴로 뭔지 모를 식재료 두어가지를 관찰하다 대답했다. -으음. 밥 볶 먹는 게 뭔지 모르겠네. 김치도. -나도 전에 미사일 팔러 한국 가서 술에 취해서 먹어본 적밖에 없어서 잘은 몰라. 그렇지만 뭐 나쁘지 않았다고. 김치도 잘은 모르지만 원조랬으니 뭐, 따라해야지? 여차하면 인터넷 검색으로 요리법은 찾을 수 있을 테고. 아무튼 그래서, 내 말 알겠지? 할 거지? -취지에는 동감하네. 하지만 나는 불 붙이는 것만은 돕지 않겠어! -그래, 그럴 줄 알았어. 토니는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그가 버튼을 누르자 잠시후, 옥상에 양손을 묶이고 재갈이 채워진 사람 하나가 등장했다. -로키? 호크아이가 벌떡 일어났고, 토르가 환한 얼굴로 로키에게 다가갔다.
강하원 님 리퀘로 받았던 글입니다. 찰스와 에릭이 나오는 글이라고 하셔서 선생노릇하는 찰스 이야기 써 드리기로 했는데 사실 여기 나오는 찰스가 선생이 맞는지는 잘 모르겠어요.
늦었지만 8월 2일 생일도 다시 한 번 축하드려요.
찰스 F. 자비에 교수의 수업은, 교수가 휠체어를 밀고 교실에 들어오며 교실을 한 번 둘러본 다음 입을 여는 것으로 시작한다. 대개 내용은 늘 다르다. 잠이 안 올 땐 운동을 하는 게 좋단다, 머리가 아프면 잠시 쉬렴, 예습을 안 해왔다고 뒤에 숨을 거 없다. 난 과제가 있다고 분명히 이야기했단다. 걱정이 있으면 교장실로 오너라, 일단 신경 쓰이더라도 마음은 비우는 게 좋아, 이와 같은 이야기이다. 누구에게 하는 이야기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하지만 수업이 끝나고 나면, 꼭 한 명 정도는 있다. 밤에 학교 주위를 달리는 학생, 멍하니 바람을 쐬는 학생, 머리를 긁으며 교과서를 펴는 학생, 눈치 보며 교장실로 가능 학생 등이. 자비에 교수의 ‘처방’은 유명한 편이다. 어떻게 저게 가능할까에 대해서는 학생 중 아무도 의문을 가지지 않았다. 교수님은 강력한 텔레파스니까, 우리 마음쯤 읽는 건 어렵지 않을 거라고 학생들은 생각했다. 다들 그렇게 생각하고 지내던 어느 날, 학생 하나가 교수님은 역시 강력한 뮤턴트라서 우리 마음쯤 읽는 건 아무 것도 아니라고 말을 했을 때, 역시 텔레파스인 한 학생 하나가 이의를 제기했다. 그는 아무 것도 읽지 않는다고 했다. 학생들은 믿지 않았다. 그러나 텔레파스인 학생들이 너도 나도 이의를 제기했다. 우리가 교수님의 힘을 느끼지 못하는 걸 봐선 읽지 않으시는 게 분명하다고. 그래서 읽는다,와 읽지 않는다, 두 파로 학교가 갈라져 학생식당을 점거하고 치열하게 논쟁중인 토요일 저녁이었다. 창을 뒤로 하고 책상에 걸터앉은 매그니토는 사건의 전말에 대해 듣고 키들키들 웃었다. “정말 안 읽나?” 휠체어에 앉아 서류를 살펴보던 찰스 F. 자비에 교수, 프로페서 X는 피식 웃었다. “벗이여, 이런 말이 있지. 내가 모르는 책은 세상에 없는 책이다. 그러니 나도 읽지 않은 것이나 같다네.” 매그니토가 프로페서 X 쪽을 돌아보았다. 헬멧 안에서 두 눈이 재미있다는 듯 번쩍거렸다. “음흉해졌군.” “관록이란 거지. 다수의 인간을 상대할 때는 어느 정도의 처세술과 허세가 필요한 법이네.” 프로페서 X가 어깨를 으쓱했다. “난 이제 막 선생이 된 풋내기니까.” “굳이 그런 트릭을 쓸 거 있나. 많은 인간이라면 좀 더 쉬운 방법이 있지 않나.” 매그니토가 말했다. “나는 많은 인간을 다루는 법을 약간은 알지. 자네가 어떻게 생각할지는 몰라도.” 프로페서 X가 짧은 웃음을 터뜨렸다. “이런이런, 이봐. 자네는 우리 학교의 적이네. 나한테 교육법에 대해 가르친다고 내가 듣겠나.” “들어주면 나는 편하고 좋지.” “자네 농담이 늘었어.” “이 또한 관록으로 봐 주면 감사하겠네.” 매그니토는 책상에서 내려와 우아하게 절을 했다. 프로페서 X가 박수를 쳤고 두 사람은 무슨 사교장에서 부채를 부치던 18세기 여성들처럼 잠시 매우 우호적인 표정으로 서로 웃어보였다. 갑자기 프로페서 X가 입을 열었다. “하지만 사실 거의 읽지 않네.” “흐음.” 매그니토는 그냥 고개만 끄덕였다. “그럴 거 같았어.” “그런가?” “하지만 쉽지는 않았을 텐데.” “아니야. 그렇지도 않네. 내 눈을 피하는 건 과제를 안 했거나 뭔가 빼먹었다는 뜻이지. 조금만 추리해 보면 답이 나와. 잠을 못 자서 눈가가 푹 꺼진 것도 이유는 몇 가지고. 평소 그 애가 뭘 하고 다니는지 생각해보면 답도 나오지.” 프로페서 X는 온화한 표정으로 웃었다. 자신만만하던 유전학박사 찰스 자비에의 얼굴과는 다른 종류의 자신이 있는 얼굴이었다. 매그니토가 그 얼굴을 한참 쳐다보았다. “자네 참 사람이 나빠.” “어디가?” “자네 학생들은 자네로 인해 행복하겠지만, 자네로 인해 슬퍼지겠지.” “과찬이군. 난 그런 사람이 못 돼.” “아니, 내 말 믿게.” 매그니토는 손을 들어 힘을 쓰는 자세를 취해보였다. 그 방에 철로 된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알고 하는 행동이었고, 프로페서 X도 그 점을 잘 알고 있었다. “우리 아이들이 자네를 이기면 되는 문제 아니겠나.” “이상한 데서만 자신만만하군.” 둘은 그저 피식 웃었다. 18세기 궁정의 예의범절 같은 묘한 웃음이 떠도는 밤이었다. 아직 학생들이 논쟁을 끝내지 못했는지 식당 쪽에서 떠들썩한 목소리가 들렸으나 그 방안에 효력을 미치지는 못했다. 둘은 웃으며 쓸데없는 이야기를 잠시 나누었고, 매그니토는 조용히 사라졌다. 그리고 그제서야 프로페서 X는 휠체어를 밀며 방 밖으로 나갔다. 이제 안전해졌으니 아이들을 재우러 가자.
무대는 서울대공원. 전국의 모든 공원과 아쿠아리움은 다 나올 예정입니다. (이 설정은 힟님 썰을 차용했습니다.)
서울대공원에 못 보던 물개가 한 마리 늘었다. 이름은 흑자(黑子)라고 부른다고 했다. 에버랜드에서 서울대공원에 넘긴 물개였다. 이 녀석이 있으면 동물원에 좋은 일이 있을 거라며, 생긴거나 크기나 재주에 비해 비싼값을 받고 팔았다고 했다. 사육사들에겐 이 물개를 잘 가르쳐 입장료에 기여하라는 특명이 떨어졌다. 조그맣고, 잘 먹지도 않는 물개라고 해서 사육사들은 흑자가 들어오던 첫날부터 좋아하는 생선을 준비하느라 애를 먹었다. -에버랜드면 기적의 세대가 있는 동물원 아냐? 뭘 좋아할지 모른다며 꽁치, 고등어, 청어, 양미리, 그 외 여러 생선이 가득 든 양동이를 운반하던 남자 사육사가 손에 뭔가 들고 한참 기록하고 있는 여자 사육사에게 물었다. -응. 저녀석도 올해 두 살이래. 기적의 세대라는 이야기지. -그런데 에버랜드에서 왜 기적의 세대를 다른 동물원으로... -아 회장님이 물개보다 사자라고 했대. -빌어먹을 천민자본주의....헉 큰일났다! -왜? -흑자가 없어졌어! 사육사는 양동이와 수첩을 떨어뜨리고는 머리를 싸잡고 절규했다. -이상하다, 문도 닫혀 있었는데 어디갔지. 흑자? 흑자야- 어딨어? 두 사육사는 넓지도 않은 물개 우리를 이잡듯 뒤지기 시작했다. 심지어 남자 사육사가 수조에 뛰어들어가겠다고 옷을 벗고 있는데, 등 뒤에서 작은 소리가 들렸다. -뀻. (여기 있어요) -흐아아아악! 두 사람이 동시에 소리나는 쪽을 쳐다보았다. 분명히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았던, 하늘빛을 띤, 엷은 회색 피부를 한 조그마한 물개가 파르스름한 눈을 들어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놀란 남자 사육사가 물에 빠지는 소리 빼고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여자 쪽이 얼빠진 얼굴로 소리쳤다. -어? 어? 아무리 뒤져도 없었는데? 흑자 너 어디 있었어? -뀨우우웃. (아까부터 있었는데요.) 조그마한 물개는 조금 불만스러운 목소리로 대답하고, 양동이에 든 생선 중 방어를 찾아내 앞발로 잡고 먹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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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 쪽이 휴가, 여자 쪽이 리코입니다.
새벽에 일 하다가 미쳐서 끄적거리고 갑니다. 사람이 며칠째 같은 작업물만 잡고 있다보면 돌게 마련...정신차리면 좀 수정보고 다듬고 보강할게요.
그냥 어떤 걸 쓰고 싶은지 정리...사실 내가 커플링이라고 해봐야 진지하게 각잡고 연애하기는 어렵고. 이녀석들은 농구가 매개가 되지 않으면 교류조차 어려운 면이 있으니까.
게다가 이녀석들 고교생 치고도 너무 심하게 담백하지 않나 싶다. 사실 말이야 바른 말이지 쿠로코, 모모이가 수영복 입고 끌어안고 부비적거리는데 미동도 안 하는데 저래도 괜찮은 걸까? 응? 고1이면 지나가는 가슴큰 여자애가 기지개켜느라 단추 사이로 가슴골만 보여도 서는 거 아니었냐고. ...는 농담이고, 다들 인생의 중심이 농구에 있어서 그 이외의 것에 마음쓸 여가가 있을지 잘 모르겠다.
굳이 노멀커플로 치자면 휴가와 아이다를 밀어주고 있으며, 어쩐지 아오미네는 그냥 농구만 생각하다 정신차려보면 모모이가 같이 살아줄 것도 같다. 농구바보 놔뒀다간 무슨 일을 칠지 몰라 걱정돼서.
말이 좋아 BL이지 그냥 키세가 쿠로코를 동경하는 이야기...나, 카가미와 쿠로코가 빛과 그림자인 이야기나 아오미네와 쿠로코가 다른 길을 가게 된 이야기....는 평범한 원작 아닌가. 원작의 감정교류선이 매우 훌륭하다고 생각한다. BL 적 의미가 아니라도. 그래서 딱 그 정도 선을 파 보고 싶다. 딱히 여기서 두 인물간의 연애가 필요한 게 아니라서.
하지만 TS라면 좀 달라질지도. 그래서 쿠로코 테츠나를 한 번 해 봐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더블오 때 그랬듯, 이 세계관으로 AU는 좀 어려울 것 같다. 이녀석들 다이쇼 시대에 갖다놔도 농구하고 대한민국에 갖다놔도 농구할 놈들이라.
9. 오늘은 먹물 취향 근성으로 애들 취향에 대해 생각해 봤다.
내가 얼마나 먹물만 핥았는지는 전에 핥은 장르나 캐릭터 보면 각이 나오는데 일단 프로페서 X, 닥터(이자는 먹물이 분명히 들었다.), 게다가 명실공히 엘리트 집단 후계자인 오펜 같은 애들은 기본이고, 닐 디란디나 긴토키한테도 먹물을 아낌없이 퍼부었던 전적이 있다. 심지어 사람들이 걔 사상이 뭔지 의심하는 즈라의 경우, 내 즈라는 젠더 스터디까지 공부한 혁명가다(...) 방향이 이상해서 그렇지.
그런데 아오미네는 원작공인 학교 공부 때려치운 운동소년에다 읽는 책은 죄 그라비아뿐...하지만 기쁘게도 쿠로코는 취미가 독서고 교실에서도 도서부원이고 책을 엄청 좋아한다. ...하지만 왜 쿠로코는 나츠메 소세키 취향일 거 같은가. 다자이니 안고니 하는 거 읽긴 하지만 아주 좋아하진 않을 거 같다. 메이지 작가라면 소세키, 다이쇼 시대라면 아리시마 다케오? 읽은 적은 없고 이야기만 들었는데 어째 저 작가일 거 같은 기분. 그리고 코바야시 다키지도 좋아할 것 같다. 쇼와시대 작가라면 음...글쎄 누굴 좋아할런지. 생각해보니 내가 쇼와 중기 작가는 잘 모르겠다. 아! 나카지마 아츠시! 1940년대 작가지만. 정말 50년대 이후는 잘 모르겠다. 그렇다고 순문학만 읽느냐면 장르도 안 가려서 쿄고쿠도도 읽고 라노베도 너무 모에에 치중하지 않으면 읽을 거 같고, 추리라면 얘는 미야베 미유키도 좋아할 듯. 외국 작가도 좋아할 거 같고. 쑤퉁이나 위화 같은 작가들 작품도 좋아할 거 같고 모파상, 플로베르도 좋아할 거 같고 독일권이라면 단연 괴테.
어 사실, 십이국기 읽으면서 태왕이 아오미네 닮았다고 생각할 거 같은 쿠로코는 좀 좋다.
카가미는...이놈도 책 안 읽을 놈이다. 일단 문자가 익숙하지 않은 티가 난다. 일어도 영어도. 일어라면 매일 보는 교문에 적힌 세이린이라는 이름을 한자로 못 쓰는 실력도 그렇고,(물론 세이린의 凛이 어려운 한자인 건 맞는데 일본어가 모국어인 시점에서 한국인 기준으로 보면 안 된다.) 일본어를 읽고 쓰는 게 익숙하지 않은 티가 난다. 그리고 영어? 문어로서 영어가 익숙하다면 시험을 그렇게 칠 리 없다. 생존용으로 말하고 듣는 건 배울 수 있지만 읽고 쓰는 건 그렇게 배우기 어렵다. 하지만 카가미도 미국에서 중학교는 다녔으니 아무 것도 안 읽지는 않았을 테고, 그래서 굳이 좋아하는 작가가 있다면 아마 헤밍웨이겠지. 단순하고 간결하며 강하다.
휴가는 시바 료타로보다 아사다 지로. 애 근성을 보면 그쪽일 가능성이 높다.
아이다는...얜 소설책보단 사회과학이나 스포츠과학 책을 주로 읽을 거 같은데. 강상중 책 같은 것도 잘 읽을 거 같고 가라타니 고진도 재미있게 볼 거 같다. 그러니까 뭔가 파고 드는 종류는 다 좋아할 듯.
이즈키는 다쟈레 잘 하는 작가는 무조건 좋아할 거 같다. 그래서 그런 작가가 누가 있더라.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하지만 영어 말장난이라서 좀. 일본 번역이 어떤지 모르겠네.
키요시는...키요시니까, 일본 나이든 사람들이 어떤 책 좋아하더라. 음 얘야말로 다이쇼 문학 주로 읽을 거 같다. 할아버지가 학교 다닐 때 읽은 작품들! 키쿠치 칸, 시가 나오야! 사토 하루오!
그리고 쿠로코랑 키요시가 책 취향 잘 맞아서 떠드는 거 보고 싶다. 둘이 같이 카와바타 야스나리 읽는 거.
키세도 책 레알 안 읽게 생겼는데 라노베는 좋아할 거 같다. 최근 붐은 아마도 문학소녀 시리즈? 하지만 이놈은 자기가 나오는 잡지 정도만 읽겠지. 나르시시스트니까.
미도리마는...와카 외울 거 같다. 카루타 게임 하면 잘 할 듯. 백인일수 같은 거 다 외우고 있을 거다. 말투 때문에 편견이 있는데 이놈 최애 고전은 헤이케 모노가타리일 거 같다.
무라사키바라는 헨젤과 그레텔(...) 과자집 나오잖아.
으 사실은 인간실격 읽는 아오미네 갖고 썰 풀고 싶었는데...아오미네는 인간실격의 정서를 이해할 거 같다. 아오미네는 승자고 오만한 패자지만 저놈은 사실 제일 갖고싶은 건 못 가졌고 그래서 의식이 분열하고 있다고 믿고 있거든.
(8월 5일)
8. 오늘 모 모임에서 저녁 먹다 테니프리 이야기가 나왔는데
뭐 한참 이야기 하다 보니 고무술 이야기가 나오더라고. 그래서 어 그 고무술, 그거 쿠로바스에도 나와요. 그랬더니 거기 앉아계신 분들이 모두 뿜...친구는 쿠로바스 그거 슬램덩크 계 농구만화 아니었냐고 그러는데 음...음 사실 슬램덩크도 리얼계긴 하지만 고교생이 거기까지 가면 무섭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쿠로바스는, 사실 농구 맞나 의심스러운 게 없지 않잖아? 안 될 거야 아마. 그러면서 그거 보다보면 농구 규칙이나 용어가 학습되고 이해되는 부분도 있고 어떤 면에선 운동물 같은 부분도 있으니까.
하지만 그래도 운동을 통해 여러가지 의미를 깨우쳐간다는 점이 좋았던 거긴 하지.
사실 이 만화에 꽂힌 부분은 다른 게 아니라 좋아하던 게 싫어지는 건 참 슬프다고 하는 대사. 거기서 침몰했던 걸로 기억한다. (8월 4일)
7. 오늘이 카가미 생일이구나. 축하한다.
생일 케이크 대신 특대형 햄버거나 샌드위치를 만들어서 위에 초를 꽂아주고 싶다. 아니면 농구공 케이크.....글쎄 저놈 일단 질보다 양이고(난 슈퍼 롱 바게트 물고 있던 카가미를 잊을 수 없다.) 게다가 양키(...)라서 어린애 입맛일 거 같다. 그러니까 육류, 탄수화물은 좋아하는데 채소류는 잘 안 먹고, 가리는 채소 많고 쓴 거 잘 못 먹고 담백한 게 무슨 맛인지 잘 모르는 애 입맛.
복지리 같은 거 먹으면서 맛없다고 징징거리는 카가미나, 커피 마시라고 주면 쓰다고 안 마시는 카가미나, 술 마시라고 주면 써서 싫다는 카가미나, 가이세키 요리 같은 거 먹으러 가면 무순은 무순이라서 싫고 오이가 있어서 안 먹고 죽순 이상해서 안 먹고 무 맛 없어서 안 먹는다고 하다가 조부모 밑에서 자란 키요시 선배와 일단 주는 건 다 먹는 쿠로코와 그날 밥을 샀을 것 같은 키세한테 야단맞는 게 보고 싶다. 초밥 먹으러 가선 성게니 연어알이니 하는 건 먹지도 못하고 오징어랑 새우랑 마끼류만 먹고 있는 카가미가 보고 싶다. 가끔 연어 정도는 먹을 수 있을 것도 같다. 이게 생일 축하냐고 물으면 할 말 없고. (8월 2일)
6. 이제 11화 봤다. 휴가....그냥 전국무장 팬인 역덕이 아니라 전국바사라 팬이었니...세상에 피규어가 전국바사라야. 그걸 또각또각 부러뜨리는 아이다 강인하다. 사실 아이다 휴가 커플에 관심 있다. 농구와 역사 덕후에 비뚤어진 남친이랑 워커홀릭 여친 괜찮잖아?
5. 엔하 위키 쿠로바스 항목을 봤다. 난 음, 이 작품 속 애들을 이미 이모나 고모의 눈으로 보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내가 걔네 이모 나이는 아닌데(...) 어쩐지 그냥. 애들이 농구공 들고 뛰는 게 보기 좋은 거다.
이래도 괜찮은 거냐.
4. 키요시 선배 성우가 하마다 켄지라고 해서 급뿜. 내가 아는 하마다 켄지는 콜라사워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불사신에 무적인 콜라사워가 키요시 한테 내 행운 좀 나눠주마 하면서 주먹으로 한대 퍽 치는 게 떠오른다. 애가 아프다고 하니까 자기는 아파본 적이 없어서 모르지만 참 안 됐다고 보던 키요시가 미안해질 정도로 걱정해주면 좋겠다. 키요시는 예의 그 썰렁한 농담으로 맞받아치다 그걸 이해 못 한 콜라사워가 어흑어흑 울며 대령님께 달려갈지도. 나중에 키요시가 나는 괜찮다고 콜라사워를 위로해주면 좋겠다. 근데 의사소통 어떻게 하지. 영어인가? 게다가 애초에 콜라사워가 키요시보다 한-참 나이 많습니다. (2012. 7. 28)
3. 트위터에 돌던 코로바스-코로 하는 농구 보고 끄적거린 트윗.
주인공이 물개라서 코로 농구를 하는 거야. 그리고 각 동물원별로 싸움이 붙는 거지.용인 에버랜드에는 기적의 세대라는 다섯 물개가 있지. 그 해에 교배시킨 물개새끼 중에 유독 농구 묘기를 잘 하는 다섯 마리가 있는 거야. 그런데 사실은 물 속에서 몰래 패스를 해서 묘기를 성공시키는 여섯번째 물개가 있지. 환상의 식스맨이라고...그런데 이 여섯마리째 물개는 묘기만 부리는 삶에 지쳐서 진정한 공놀이를 찾겠다고 에버랜드를 뛰쳐나가 어느 시립 동물원에서 혼자 농구를 하던 덩치큰 바다표범을 만나 둘이서 공놀이를 하는 거지. 사육사는 다섯 물개를 풀어서 집나간 물개를 찾으려 하고...
...했더니 지인들이 코로바스로 낙서를 해 줬다. 이걸로 뭘 써야 하나 생각 중이다.
2. 어제 글 쓰다 깨달았는데 아오미네의 심리를 좀 파 보고 싶다. 고딩 주제에 애가 어쩜 저렇게 괴상하담. 딱 천재지만 10대라는 기분이 드는 애가 둘인데 카가미랑 아오미네. 아직 아카시는 잘 모르겠다. 카가미는 운동계 천재라 명쾌한데 아오미네는...좀 복잡하다. 여러 심리가 자기 안에서 부딪히는 게 보임. 그래서 중학교 땐 그냥 동네형님이었는데 고등학교 가서 토오쌍놈(...)이 된 건가 싶고. 남자애들 사춘기치고도 늦지만. 그건 나 역시 마찬가지인데 여기서 되고 싶은 게 아니라 하고 싶은 걸 찾아가는 10대 애들을 보면서 치유받는 동시에 비뚤어진 천재의 심리를 파 보고 싶은 마음이 동시에 드는 거다. 이게 뭐야.
1. 그래서 영 카페인 때문에 맛이 간 김에 한 마디 하자면 저는 아오미네가 지독한 권태감에 사로잡혀 있다가 카가미랑 있는 쿠로코를 보고 결핍감에 눈을 뜨는 게 보고 싶습니다. 카가미는 되는데 나는 안 되는 거. 인간으로서, 선수로서 부족한 뭔가요. 권태와 결핍이 같이 있는 건 어떤 더러운 기분일지 상상이 안 가는데 아오미네는 그게 될 거 같아서 신납니다. 그리고 이 밝은 치유계 스포츠물에서 이딴 걸 찾는 저는 글렀다고 생각합니다.
키요시 선배X젬코(린)이라는 설정입니다. 제 지인 젬의 최애 키요시 선배와 그녀를 위한 드림입니다. 2015년 여름이 배경으로, 선배가 학교를 졸업하고 세이린 농구부 감독이 됐다는 동인설정이 함께합니다.
“키요시 선배!” 하네다-부산행 비행기가 도착하고 한참 후, 트렁크를 끈 장신의 남자가 공항 입구로 들어왔다. 너는 목소리를 높여 남자의 이름을 부른다. 목소리가 너무 작아서 안 들리지는 않을까, 잠시 걱정한다. 하지만 남자는 웃으며 마주 손을 흔들고 네 이름을 부른다. “우와, 린!” 린, 은 일본인 친구들만 부르는 이름이다. 일본인 친구들은 네 이름을 부르기 어려워하며 이름 첫 글자를 딴 애칭을 지어부르곤 했다. 맨 처음에 부르기 시작한 것이 누구인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남자가 너를 린이라고 부르기 시작한 것이 네가 고등학교 1학년이 된 해의 봄이라는 것은 분명히 기억한다. 그 후로 너는 평범하고 평범해서 별 것도 아니라고 생각하던 자신의 이름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게 들리는 경험을, 남자가 이름을 부를 때마다 하게 된다. 성큼성큼 걸어오는 남자의 모습이 점점 커지고, 너는 배경의 모든 사물들이 소실되고 남자의 모습만 확대된 듯 또렷하게 보이는 신비한 경험을 한다. 2008년 겨울, 병원에서 그 남자를 만난 이래 늘 있어온 일이지만 8년이 지나도 익숙해지지 않는 광경이다. 너는 잠시 어지러움을 느낀다. 심장이 빨리 뛴다기 보다, 간신히 뛴다는 느낌이다. 아마 이대로 가만히 있으면, 심장이 몸 밖으로 빠져나와 버릴 거야. 너는 머릿속을 돌아다니는 엄청나게 많은 말 중 가장 평범하고 눈에 띄지 않을 말을 고른다. “첫 방학 축하해요.” “응, 무슨 소리야. 소학교부터 지금까지 내내 방학은 있었는데.” “에이, 그거 아닌 거 알면서.” “하하, 농담이지.” 아무렇지도 않게 웃는 남자를 보며 너는 가슴을 쓸어내린다. 아무래도 모국어가 아닌 언어는, 1주일만 쓰지 않아도 금방 녹이 슨다. 방학이 되고 2주, 번역 아르바이트를 한다고 해도 일본에서처럼 일본어를 쓰지는 못한다. 특히 말하는 데서. 남자의 말을 못 알아들었으면 어떡하나, 웃자고 하는 말에 정색을 하고 대답해서 마음을 상하게 하지는 않았을까. 마음 졸인 만큼, 남자의 웃는 얼굴을 보며 몰래 한숨 쉰다. 매사 어설퍼도 이 사람한테는 그러고 싶지 않다고 생각한다. 이 사람이라면 자신이 실수해도 웃어 넘겨줄 거라는 것도 알지만, 너는 그런 만큼 더 마음을 졸이게 된다. “선배 숙소는요?” “어, 요 앞에 토요코인 있지. 아무래도 일본어가 익숙한 데가 좋아서.” “저희 집에 하루 와도 괜찮아요. 외할머니도 괜찮다고 하셨고.” “너도 친척 집이잖아. 괜찮아. 그리고 집에 함부로 남자 들이는 거 아니다. 너희 외할머니께도 실례야.” “에이, 그거야 선배니까.” “뭐냐. 린 좀 너무하는 거 아냐? 나도 남자로 좀 봐 줘라.” “선배야 선배죠.” 지금까지 오랫동안 너와 남자는 종종 저런 대화를 주고 받았다. 남자로 안 보인다는 말은 절대로 하지 않는다. 그렇게 말하면 거짓말이 되고, 너는 남자에게만은 거짓말을 하고 싶지 않다. 그 말에 마음 설레던 날도 있다는 것을 너는 인정한다. 하지만 남자는, 키요시 텟페이는 그저 너를 걱정해서 그러는 것 뿐이라는 것을 안다. 친절하고, 예의바르고, 품행방정하고, 가끔은 너무 단정해서 구식 남자라는 소리마저 듣는 남자니까, 너를 걱정하는 거라고, 그러니까 착각하면 나중에 너만 더 힘들어진다고 생각한다.
너는 대학 4학년 여름방학을 한국에서 보내고 있었다. 초등학교 3학년, 그러니까 아홉 살, 아니 한국 나이로 열 살때부터니까 13년을 일본에서 살았지만, 농구부 합숙을 돕던 고등학교 때를 제외하고는 매년 여름과 겨울은 한국 외할머니 댁이나 이모 댁에서 지내곤 했다. 돌아가면 취업활동을 시작하겠지. 아마 한국에서 보내는 마지막 방학이 될 것이다. 그리고 일주일 전에 연락이 왔다. 여보세요, 린? 오랜만이다. 응, 우리도 방학 했어. 그래서 말인데 나 한국 놀러갈 거야. 응, 바닷가 아는 데 있어? 나랑 좀 놀아주라. 가이드의 세 끼 식사를 책임질 테니까. 네 고향은 바다와는 먼 내륙 도시. 너는 고향에서 가장 가깝고 외국인에게도 편한 바다를 찾아본다. 포항이나 영덕보다는 부산이나 거제도. 너는 남자에게 몇 군데 해수욕장에 대한 정보를 메일로 보내줬다. 남자는 거제도 몽돌 해수욕장에 관심을 보인다. 우와 바닷간데 전부 돌이야, 게다가 동글동글해, 예쁘다! 그쵸, 예쁘죠. 선배 마음에 들면 거기 갈래요? 부산에선 한참 가야 하지만. 응, 린도 좋다면 나도 좋아. 너는 잠시 아르바이트로 하던 번역일에 매달린다. 남자가 한국에 온다는데 그까짓 아르바이트가 문제랴 싶지만, 자신이 아르바이트를 놓고 남자를 만나러 간 것을 알면 남자는 분명히 난처한 표정을 짓고, 다음에는 화를 낼 것이다. 남자는 격노하는 일이 적고, 특히 너에게 화를 내는 일은 더 적다. 하지만 그런 만큼 더 화내게 만들고 싶지 않았고, 무엇보다 남자에게 일을 소중하게 여기지 않는 사람으로 보이고 싶지 않았다. 너는 너 자신을 포장해 본 적이 없다. 포장은 내용물에도 가치가 있을 때 하는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남자에게만은, 정말로 좋은 사람, 괜찮은 사람으로 보이고 싶다고 생각한다.
공항 근처에서 이른 점심을 먹고 체크인을 마친 남자는 너와 함께 거제도행 버스를 타러 이동한다. 남자는 돼지국밥을 보며 무척 재미있는 음식이라고 말한다. 식탁에 놓인 밑반찬의 이름을 하나하나 물어보고, 어눌한 한국어 발음으로 발음해 보고, 옆자리 할아버지들과 아주 살갑게 인사를 나누고, 시내버스 창 밖으로 보이는 부산 풍경을 재미있어하고, 시외버스 정류장 풍경을 하나하나 살펴본다. 거제도까지 가는 길에 펼쳐지는 논과 밭을 보며 일본과 같다고 즐거워한다. 남자가 공항에 일찍 도착한 덕분에 당일치기로 거제도 여행을 할 수 있다. 남자는 절대로 1박 2일은 안 된다고 단호하게 말했고, 너는 당연히 남자라면 그러리라고 생각하면서도 약간 아쉬워하는 자신을 발견하고 조금 어이가 없었다. 그래도 버스 옆자리에서, 너는 창가에, 남자는 통로 쪽에 앉아서 이야기 하며 가는 것은 즐겁다. 옆에 앉아서 에어컨 바람을 조절해 주고, 안전벨트를 매 주는 남자가 그저 고맙다. 손이 어깨 위로 올라올 때, 심장이 뛰어 그만 고개를 숙인다. 아무 생각 없이 하는 행동 하나하나가 기쁘고, 기쁜 것이 부끄럽다. “조금만 더 가면 도착해요. 선배 앉아있기 힘들지 않아요?” “응, 괜찮아. 무릎도 많이 좋아졌고.” “학교는요? 합숙훈련 끝나고 오는 길이라면서요. 어땠어요?” “응, 여전하지. 이젠 그게 전통 같아서 재밌어. 심지어 올해도 슈토쿠 애들이랑 마주쳤다니까.” 남자는 올해 4월,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너와 남자의 모교의 체육교사가 되었다. 무릎을 다쳐 더 이상 현역 농구선수로 뛸 수없게 된 남자는 체육대학으로 진학했다. 고 2때, 윈터컵이 끝나고 난 후 모두의 앞에서 약속했다. 세이린의 농구부 감독이 되겠다고, 너희들이 만든 농구부를 계속 지키고 키우겠다고. 그때 쿠로코 군이, 휴가 선배가, 아이다 선배가 그 말에 어떤 대답을 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그 말이 끝나자마자 제일 먼저 운 것이 너이기 때문이다. 선배는 네 등을 토닥이고, 눈물을 닦아줄 손수건도 소매도 없어서 자신이 유니폼 위에 걸쳤던 티셔츠를 내밀었다 다시 집어넣으며 난처해 했다. 결국 다들 울었던 것 같기는 하다. 대학을 졸업하던 날, 졸업식장에 찾아온 2009년 세이린 농구부원들은 남자를 들어 헹가레치며 세이린 농구부 감독 만세를 외쳤다. 키가 191cm인 남자를 공중으로 던지는 장면은 꽤 장관이라 졸업식장에 모였던 사람들이 모두 둘러서서 구경했던 기억이 난다. “아하하, 올해 농구부는 어때요?” “너희 때랑 똑같지 뭐. 참, 꼭 카가미 같은 녀석이 하나 들어와서 아주 귀엽다고 이야기 했냐? 되게 재밌어. 의욕 넘치고.” 남자는 웃는다. 너는 문득, 이 남자가 정말로 어른이 다 되었다고 생각한다. 처음 만났을 때도 한 살 많았던 남자는 무척 어른 같았다. 키와 손이 커서만은 아니었다. 할아버지 같이 토라야키니 흑사탕이니 하는 것들을 좋아하고, 할아버지 같은 말투를 가끔 써서 그런 것도 아니었다. 세이린 고교 농구부를 만든 키요시 텟페이라고 불릴 때부터 이미 어른이었다고 너는 생각한다. 너는 언제까지고 이 사람을 따라잡을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한다. 남자는 언제나 네 앞에서 등을 보이고 있다. 그런 점을 좋아하지만, 너는 이 사람한테 어울리는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하면 약간 우울해진다.
몽돌 해수욕장은, 몽돌이 있기 때문에 그렇게 불린다. 파도에 깎이고 깎여 동글동글해진 돌을 몽돌이라고 부르는 모양이다. 500원짜리 동전 만한 돌이 바닷가를 가득 채우고 있고, 소란스러운 사이로 돌이 달그락대는 소리가 들린다. 너는 남자와 돌을 밟으며 바닷가에 가서, 파도가 잘 보이는 자리에 앉았다. 너와 남자는 잠시 입을 다물고 귀를 기울인다. 이곳에 오면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이, 소리를 듣는 것이다. 돌 사이로 빠져나가는 파도 소리가 들린다. 밀려온 파도가 빠지는 소리가, 거품이 꺼지듯 가라앉았다, 다시 차오른다. 차르륵 차르륵 하는 소리를 듣고 있자니 마음 한 켠이 간지럽다. 한참 말 없이 앉아있었다. 네 옆에서 남자가 파도에 귀를 기울이는 기척이 느껴진다. 아무 말 없이 그냥 한참 앉아서 몇 번이고 몇 번이고 파도 소리를 듣는다. 소리가 차오르고 꺼지는 동안 네 표정을 보는 남자의 시선이 느껴진다. 남자가 바다를 보고 있을 때 너는 몰래 남자의 얼굴을 훔쳐본다. 고요하게 가라앉은 얼굴이 아름답다고 생각하고, 남자가 보는 자신의 얼굴도 그렇게 고요하게 가라앉아 있기를 소망하지만 자신이 없다. 잠시 표정 관리를 못 하는 자신을 보며 남자가 웃는다. 왜웃는지 모르지만 따라 웃어본다. 바닷가를 걸어본다. 굽 낮은 샌들 밑으로 돌멩이의 감촉이 느껴진다. 걷기 힘들어서 잠시 비틀대면 남자가 부축해주기도 한다. 손이 커서 안정감이 있다. 서로 아는 다른 사람 없이, 딱 둘이서, 옆에 있는 사람들과는 다른 말로 소통하는 공간이 있다는 것 자체가 즐겁고, 특별한 곳에 남자를 데리고 온 게 기쁘다. 너는 하루 종일 아무 말도 없이 남자만 보고 있어도 질리지 않겠지만, 남자는 그게 아닐 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수영하고 싶냐고 물어도 남자는 말이 없다. 하긴 수영이 문제면 일본에도 수영장은 많지. 너는 문득 남자가 굳이 혼자 한국을 방문한 이유가 궁금해진다. 그것도 2박 3일 일정으로. 오늘은 몽돌 해수욕장을 보고 내일은 부산 시내를 본다고 하지만, 굳이 혼자 한국까지 와서 볼 만한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그때 남자가 불쑥 입을 열어 너는 생각을 멈춘다. “한국에서 뭐 하고 있었어?” “그냥요. 한국 음식 먹고 싶던 거 먹고, 한국말로 수다 떨고, 어릴 때 친구들 만나고……한국어 책 보고요. 선배는요?” “학기말 마무리 하고 합숙 가고 뭐, 조금 바빴지.” “수업은 힘들지 않아요?” “뭐 초짜가 다 그렇지. 그래도 난 체육이라 나가서 수업하는 일이 많지만……가끔 교실 수업할 때 말이야, 학교 다닐 때 수업 시간에 잤던 건 좀 반성되더라. 교단에 서니까 진짜 다 보이더라고.” “영어 선생님도 그러셨어요. 고1 때 카가미 군이 수업 시간에 잘 때마다 앞에선 다 보이니는데 조는 거 모르는 척 해주시는 거라고.” “아, 그 선생님, 요즘도 종종 수업 시간에 자던 애들 교무실로 불려와서 혼난다.” “카가미 군 같은 애들 많나봐요.” “애들은 다 같으니까.” 남자는 웃는다. “돌아가면 취직활동 하겠네.” “네. 그런데 좀 걱정돼요.” 난 선배처럼 그렇게 자신 있게는 못 할 거 같아요. 차마 그 말을 입에 올리지 못하고 너는 머뭇거린다. 남자는 네 머뭇거리는 기미를 눈치챘는지 조금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는다. 언제나 그렇듯 너는 자신없어 하고, 남자는 네가 자신 없어할 때마다 엄한 말을 하고, 기운을 북돋아 주고, 현실적인 말을 해 준다. 네게 필요한 것을 다는 아니라도, 조금씩은 내어 준다. 너는 은근히, 남자가 이번에도 기댈 자리를 만들어주지 않을까 생각한다. 하지만 이번에 남자가 고른 선택지는 현실적인 대안인 것 같다. “음, 역시 외국인이라서. 일본이 외국인이 살기 좋은 나라는 아니니까.” “그렇죠. 13년을 살았는데 살면 살수록 어려워요.” 남자의 표정이 약간 불안해졌다. 8년을 만난 만큼, 표정을 읽는 것은 자신이 있다. 하지만 너는, 남자가 너에게 조언이건 위로건 뭔가 말을 할 때 그런 표정을 짓는 것을 본 적이 없다. “그럼, 졸업하면 한국에서 사는 거야?” “음, 모르겠어요. 그치만 한국에서 취직할 가능성도 높아요. 일본어 번역 일 하고 싶기도 하고……. 하지만 워낙 잘 하는 사람이 많으니까.” “린은 어떤데?” “뭐가요?” “한국에서 살고 싶은 거야?” “네, 뭐 그거야. 모국이잖아요. 여기가 편한 부분이 분명히 있죠.” 남자의 얼굴이 흐려진다. 왜 그러냐고 묻고 싶었지만 다음 순간, 남자가 네 손을 잡아끈다. “아, 놀러왔으니까 바닷물에 발 정도는 담가보고 싶어! 자갈과 파도라니 이런 흔하지 않은 기회를 놓치면 후회할 거 같지 않아?” 너와 남자는 맨발로 바닷물에 발을 담가 본다. 파도가 밀려와서 바지자락을 적셨지만 옷이 소금물을 먹어 하얗게 얼룩이 지건 말건 지금은 그런 것은 생각나지 않는다. 거품처럼 사그락거리는 파도는, 모래사장에서 밟던 파도와는 또 달라서 발바닥 아래에서 묘한 느낌을 남긴다. 계속 걷고 뛰고, 자갈밭 위에 앉아 햇살을 쬐는 동안 너는 아까의 불안한 기분을 잊는다.
해가 제법 많이 넘어갔다. 바다 위에 노을이 졌다. 너는 남자와 함께 바다 위에 노을이 내리는 것을 본다. 남쪽 바다는 투명하고 청량감이 있어서 그 위에 떨어지는 노을도 함께 맑아진다. 노을은 파도가 달그락대는 소리와 함께 점점 진해진다. 그리고 사람들도 점점 적어진다. 이제 일어나야 할 시간이다. 남자는 부산으로 가고, 너는, 부산에 있는 친구 집에서 하루 자고 내일 부산 가이드를 하러 간다. 옷을 털며 움직일 준비를 하던 너는, 남자가 어쩐지 머뭇거리는 것을 눈치챈다. 하지만 지금 이동하지 않으면 부산에 도착하면 시간이 늦어요. 버스정류장까지 시간이 많이 걸리는데. 남자는 바닷가에 서서, 무언가 결심한 듯 주먹을 쥐고 먼 곳을 보고 있다. “선배, 뭐 해요?” “있지, 준비한 게 하나 있는데.” “뭔데요?” “음, 그게…….” 너는 남자가 말을 다 잇지 못하는 것을 처음 보았다. 그리고 남자의 얼굴에서 네가 읽지 못하는 표정을 처음 보았다. 낯선 남자가 바닷가에 서 있었다. 너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다. 어쩌면 여기에 오기 전부터 너는 이런 일을 예상했을지도 모르고, 어쩌면 이 모든 게 너무 놀라워 지금 아무 것도 안 들리고 안 보이는 것일지도 모른다. 아니다. 네 눈엔 불안한 표정으로 너를 주시하는 남자가 보인다. 너는 어쩌면 지금 두 사람은 같은 것을 보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들어줬으면 좋겠어.” 남자는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네가 대학에 들어갔을 때 한국에서 유행했던 노래다. 너는 신입생 시절 내내 이 노래를 입에 달고 살았고, 교육학부와 문학부로 나뉘어 자주 보기 힘들었던 선배는 가끔 만날 때마다 네가 듣는 노래에 관심을 보였다. 가사 뜻을 알고 싶다고 해서 번역해 준 적도 있다. 여수가 어떤 도시냐고 물어서 지금 엑스포 열리는 도시라는 것 외에는 그 도시에 대해 아는 게 없던 너는 당황해서, 여수 밤바다에 얽힌 사연을 인터넷으로 검색해 보기도 했었다. 4년이 지났는데, 그 노래를 기억하고 있었구나. 아니, 일부러 4년 전 그 때, 네가 좋아하는 노래를 물어서 배운 거라는 것을 너는 어렴풋이나마 알고 있다. 얼마나 연습했을까, 한국어 발음까지 거의 정확하다. 그리고 너는 그제서야 이 노래의 후렴구를 기억해낸다. 너와 함께 걷고 싶다, 이 바다를 너와 함께 걷고 싶어, 이 거리를 너와 함께 걷고 싶다, 이 바다를 너와 함께, 너와 함께. 너와 함께.
남자는 전에 없이 진지한 표정으로 너를 보고 있다. 너는 그제서야, 노래는 이미 끝났고, 눈 앞에 남자의 진지한 두 눈이 있고, 네가 남자를 올려다보고 있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남자는 자갈밭에 무릎을 꿇고 너를 바라보고 있었다. “뭐 하는 거예요?” 너는 당황해서 목소리가 떨린다. “하지만 이럴 땐 무릎을 꿇어야 한다고 하던 걸.” “이럴 때가 뭔데요?” “어, 나도 뭐라고 해야할지 잘 모르겠지만.” 너는 남자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는 것을 처음 보았다. 그때서야 너는 남자의 목소리가 떨린다는 것을 눈치챘다. 오늘 하루 종일 느꼈던 위화감은 그것이었나보다. 너는 그제서야, 남자가 굳이 너에게 가이드를 부탁한 이유를 눈치챈다. 남자는 힘겹게 입을 연다. 목소리가, 어깨가 떨리고 있다. 어떤 시합에서도 한 번도 떤 적이 없는 태산 같던 등이, 드디어 이쪽을 보고 있다. “전부터, 생각했던 건데. 계속 말해도 되지?” “…….” 너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다. 남자는 몹시 힘겹게 말을 잇는다. “내가, 한 사람 몫을 하는 어른이 되면, 꼭, 그땐 너한테, 말하겠다고. 그, 내 인생을 줄테니, 대신, 내 옆에 있어달라고.” “…….” “아, 뭐라고 말하면 좋을지 모르겠네. 어, 그러니까, 어, 한국말로, 어. 사랑합니다. 이거 맞나.” 너는 한 번도 떠는 목소리로 더듬거리는 남자가 이렇게 박력 있을 거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다. 입을 열면 눈물이 나올 것 같아서 아무 말도 못 하고 있자, 남자는 불안하고 초조한 눈으로 너를 쳐다본다. 무릎을 꿇고, 멋대로 어깨를 치고 손을 잡아끌던 손조차 어디 둘지를 모르는 어정쩡한 자세로. 남자가 굳이 노을지는 해변을 고른 이유는 붉어진 얼굴을 감추기 위한 전략일지도 모른다고 너는 생각한다. 아마 둘 다 얼굴이 달아올라 제법 볼만하겠지. 하지만 네 입에선 멋대로 말이 튀어나온다. “선배, 왜 그런 말을 해요.” “……응?” 남자는 한층 더 불안한 얼굴로 너를 쳐다본다. 너는, 울먹거리는 목소리로 대답한다. “선배는 그런 거 안 돼도 충분히 멋지고, 어른이고, 대단한데……. 난 그런 거 없어도 된다고요. 그런 거 약속 안 해도 되는데, 무릎은 왜 꿇어요. 그런 말 들을 정도로 내가 대단하지도 않은데 누가 맘대로 무릎 꿇으래요. 선배…….” 너는 결국 울음을 터뜨린다. 일어나요, 일어나란 말이에요. 남자는 네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네가 아는 한 가장 환한 표정으로 웃으며 네 머리를 끌어안는다. 네 머리가 남자의 팔 안에 파묻힌다. “대답 못 들을 줄 알았는데.” 남자가 중얼거리는 소리가 맞닿은 가슴 안에서 울리듯 들린다. 너는 왈칵 눈물을 쏟으며 운다.
대외적으로 진선조가 하는 일은 체제전복을 꾀하는 양이지사를 검거하는 것과 천인이 관련된 범죄에 대한 수사 및 범인인도 등으로 알려져 있다. 헌병과 경찰 업무에 걸쳐있다고 봐도 좋다. 어디까지나 자국민의 보호와 치안 유지를 위한 조직이라는 것이 그 명분이다. 하는 일만 보면 그다지 틀린 말도 아니다. 어쨌건 에도는 평온하다. 혁명을 외치는 목소리는 줄어들고 있고 현재 사회를 움직이는 질서는 잘 유지되고 있다. 인권 탄압이니 자국민의 보호보다 천인의 재산권, 생명권을 우선시한다느니 하는 비난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런 질문을 받은 마츠다이라 카타쿠리코는 한 마디로 대꾸했다. 그래서 뭐 어쩌라고. 그 말 그대로 어쩔 거냐고 물었을 때 대답을 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사실이지 않은가. 그래서 어쩔 거냔 말이다. 어쨌건 진선조는 그런 조직이다. 그리고 그 점에 대해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그러나 정치깡패 아니냐느니 치안 유지를 빌미로 정권의 더러운 부분을 은폐하는 뒷손이라느니 하는 소리에는 각별히 신경을 쓰는 편이었다. 명분이 없으면 활동하기 어려운 조직이다. 무장 경찰이라니 계엄령 하의 정권과 다를 게 없으니 누구라도 여기 대해 지적하면 곤란하다. 정말로 계엄령이 선포되었으면 무장 경찰이 당당히 돌아다니겠지만 실제로 계엄령을 내릴 만한 세력이 일본 내에는 없기 때문이다. 즉 진선조의 위치는, 아주 애매하다. 존재할 수 없는 것이 존재하는 것이다. 누군가가 그 점에 대해 지적하면 끝장이고, 그와 같은 이유에서 그들에게 이미지란 실로 중요하다. 우리는 여러분의 친근한 벗이고 이웃에 있는 존재라고 끊임없이 외치는 것이다. 어리고 예쁜 연예인을 불러다가 1일 국장을 맡기는 웃기는 이벤트부터 은근슬쩍 진선조의 인간적인 면을 홍보하는 전략까지. 그러니까 여러 정치적인 조작이 일어나곤 한다. 그리고 좋지 않은 면은 최대한 언론에 내보내지 않는다. 신원이 불분명한 자들은 은근슬쩍 은폐하고, 나머지는 작은 걸 크게 부풀려서 은근슬쩍 띄워주기도 한다. 사실 말이 좋아 도장의 후계자이고 천연이심류의 계승자이지 그냥 동네 건달보다 조금 나은 수준 아니냐고 비웃는 사람들은 언제나 있었지만 대다수는 그냥 그런가보다 한다. 일단은 천연이심류라니까 듣기 좋지 않은가. 듣기 좋은 말은 속기도 쉬운 법이다. 도장의 계승자, 면허 전수자, 목록 소지자 같은 말은 사람을 현혹시키기 좋은 법이다. 그런 맥락에서 대외적으로 진선조의 부장은 히지카타 토시로로 알려져 있지만, 언론에 잘 노출되지 않는 부장이 하나 더 있다. 그리고 언론에 노출되지 않는 만큼, 이 부장이 하는 일은 대개 더 험하고 더 지독한 데가 있다. 진선조에서 히지카타 토시로 부장을 귀신부장이라 부르고, 엄하고 무섭지만 통솔력 있고 국장 대신 실제로 진선조를 이끌어가는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동시에 사카타 긴토키 부장을, 야차부장이라고 부르며 두려워한다.
야차부장이 한길가에 서있다. 정확히 말하면 이누이 성(星) 대사관 앞에 서 있다. 흰 바탕에 푸른 무늬를 염색한 기모노를 입고 옆구리에 목도를 끼고 어슬렁어슬렁 걷는 폼이 꼭 그냥 이웃집 아저씨 내지는 가부키쵸를 돌아다니는 건달 같아 보인다. 게다가 적당히 풀어진 얼굴에 손에 든 경단꼬치가 매우 실없어 보인다. 역시 평복을 한 대사 하나가 인사를 하는 것처럼 손을 흔들며 다가가서 목소리를 낮추고 말했다. “사카타 부장님, 수상한 놈이라곤 아무도 안 보입니다.” “병신아, 수상한 놈이 나 수상하다고 광고하고 다니냐?” 역시 인사를 하는 듯 어딘가 나사빠진 미소를 지으며 긴토키는 대꾸했다. 나사빠진 미소를 받은 평대사는 마치 크게 야단이라도 맞은 것처럼 우울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그치만 이렇게 사람들이 많은데 이 중 누가 수상하다고 단정짓기는 뭣하잖아요?” “보면 모르냐, 제일 수상해 보이지 않는 놈이 이럴 땐 제일 이상한 놈이라고. 특히 저기 저 놈. 저거 족치면 분명히 뭐가 나온다니까.” “누구요?” “아, 정말 거-” 그때 긴토키의 핸드폰이 진동했다. 어떤 놈이 사람 말씀하시는데 전화질이냐는 듯한 표정으로 핸드폰을 노려본 긴토키는 발신자를 확인하고 히죽 웃으며 전화를 받았다. “어~오오구시 군.” “이름 똑바로 못 부르냐?” “허어, 오오구시 군을 오오구시 군이라 부르지 못하다니 이 어인 변고.” “지랄한다. 아무튼 그쪽은 어때?” “여기? 글쎄.” “넌 도대체가.” “아 아무튼 끊고, 찾았단 말이다. 지금부터 좀 바빠질 거 같으니까 이따 이야기하자고.” 건너편에서 무슨 반응을 보이건 말건 전화를 끊었다. 옆에서 나는 수상한 놈도 통화 맥락도 도무지 알 수가 없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부하를 보고 한 번 혀를 찬 다음, 긴토키는 무성의하지만 눈에 잘 띄지 않는 몸짓으로 한쪽을 가리켰다. 대사관 담벼락 아래 기대어 졸고 있는 탁발승이 보였다. “스님이 왜요?” “야, 종교인이라고 그냥 넘어가냐? 저기서 탁발하는 스님이 이상한 거지. 왜 저기 있냐고. 사람 많은 길거리 다 놔 두고. 탁발을 하려면 번화가나 주택가를 골라야지. 이 근처에 그런 게 있냐? 대사관 옆에서 뭐 주워먹을 게 있다고 저기 저러고 있냐고. 좀 이상하잖아.” 말을 마치자마자 긴토키는 그리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실례함다. 혹시 불 가진 거 없으세요?” 웃으며 말을 붙이자 탁발승은 몸을 움찔했다. “응? 왜 그렇게 놀라세요?” “아무 것도 아니오. 빈도에게 무슨 볼일이신지?” “스님 혹시 불 가진 거 없냐고요.” 긴토키의 목소리를 들은 긴 머리의 탁발승은 어쩐 일인지 아까와는 조금 다른 자세로, 삿갓에 손을 올렸다 금방 내리고, 한참 손이 여기저기를 방황하는 등 조금 당황한 듯한 모습을 보였다. 긴토키는 매우 흥미롭다는 얼굴로 팔짱을 끼고 탁발승이 푹 눌러쓴 삿갓을 노려보고 있었다. 평대사는 조마조마한 얼굴로 그쪽을 보고 있었다. 야차부장이 말한 대로 수상한 자임에는 틀림이 없다. 하지만 뭔가 분위기가 이상했다. 야차부장은 놈을 어느 타이밍에 잡아챌까를 지켜보고 있었지만, 탁발승은 어딘가 혼란스러워보였다. 그래서 탁발승이 한참만에 가라앉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을 때, 그 평대사는 자기가 뭘 들었는지를 판단하느라 꽤 애를 먹었다. “……키.” “응?” “역시 긴토키가 맞구먼. 내 귀가 틀리지 않았어.” 탁발승은 여전히 삿갓을 눌러쓴 채였다. 정확하게 긴토키라는 이름을 부르는 것을 듣고 평대사는 큰일이 났다고 생각했다. 사카타 긴토키의 이름을 아는 사람이 그렇게 많지는 않다. 앞에서 드러나게 활동하는 편이 아닌 자에 대해 안다는 것은 그만큼 양이활동에 깊이 관여하고 있다는 말이다. 긴토키가 팔짱을 풀고 옆구리에 찬 목도에 손을 얹었다. 여전히 웃는 얼굴이었지만 얼굴이 굳어 있었다. “너 누구야?” “누구냐니. 먼저 부른 건 자네 아닌가.” “무슨 소리야. 불 빌려 달랬지 이름 불렀냐고.” 하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쉬고, 탁발승은 삿갓을 벗었다. 눌러쓰고 있던 삿갓 아래에서 얼굴과 긴 머리가 드러났다. “카츠라 코타로?” 지명수배전단에 찍힌 것보다 덜 딱딱하게 굳은 얼굴이 드러났다. 그 얼굴은 다채롭고 복잡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반가운 것도 같고 의아한 것도 같고 놀란 것도 같고 화가 난 것도 같은. 경찰조직 간부를 알아보고 짓는 표정은 절대 아니었다. “뭔가, 즈라라고 부르지 않는 건가?” “즈라는 또 뭐냐, 네녀석 별명이냐?” 긴토키는 이해할 수 없는 말을 들은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그 순간 카츠라의 얼굴이 굳었다. 익숙하던 것이 사실은 자신이 알던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을 때의 표정이라고 하면 적당했으리라고, 그 장면을 지켜보던 평대사는 나중에 잠깐 회상한다. 그 표정을 한 마디로 정의내리기는 어려웠다. 경악, 충격, 그리고 분노, 의심, 그 외의 여러 가지가. 긴토키는 수갑을 들고 카츠라의 팔목을 잡았다. 그리고 다음 순간 카츠라는 긴토키의 팔을 뿌리치고 칼을 겨누었다. “카츠라 코타로. 체포한다. 너도 묵비권을 행사할 수 있고 변호사도 선임할 수 있어. 일단 감옥 안에서.” “……다카스기가 해 준 말이 사실이었군.” 카츠라는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다카스기? 역시 네놈들 한패였나? 요새 그쪽의 움직임이 수상하다더라니.” “우리는 예전부터 한패였네. 자네가 그걸 모른단 말인가.” “너, 날 아냐?” “글쎄. 아는 자인 줄 알았는데 아닌 것도 같군. 자네 누군가?” “날 몰라? 진선조 부장 사카타 긴토키다.” “다른 사람도 아닌 자네가 어떻게?” “무슨 개소리냐?” 칼을 겨눈 채 두 사람은 전혀 뜻이 통하지 않는 대화를 주고 받았다. 분위기는 팽팽해서, 금방이라도 둘 중 하나가 내리치는 칼에 하나의 팔이라도 잘려나갈 것 같았다. 누구 하나라도 먼저 움직이면 팽팽한 대치상태는 깨어지고 당장이라도 둘 중 하나는 어떻게 될 것 같은 분위기가 이어졌다. 서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노려보고 있었다. 카츠라는 회한이 어린 표정으로, 긴토키는 의외의 장소에서 전혀 모르는 사람에게 뒤통수라도 맞은 듯한 불쾌하고 찜찜한 표정으로. “너 정말 누구냐?” “그걸 모르는 자네는 도대체 누군가?” 먼저 질문을 던져 침묵을 깬 긴토키에게 카츠라는 똑같은 말로 답했다. 그리고 한참, 말없이 검을 겨누고 서로를 가늠해보는 시간이 이어졌다. 침묵을 참지 못한 긴토키가 칼을 휘두르려는 찰나, 연막탄이 터졌다. 연기 너머로 팔락거리는 카츠라의 머리카락을 향해 손을 뻗었으나 카츠라는 잡히지 않고, 목소리만 들렸다. “잘 있게 긴토키!” “그러니까 너 이 새끼, 뭐하는 놈이냐고!” 긴토키가 으르렁거렸다. 그러나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고 연기가 흩어지고 카츠라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긴토키는 말없이 벽을 걷어찼다. 그리고 잠시 후, 핸드폰을 꺼내 버튼을 눌렀다. “야, 나다. 이 씨발놈의 새끼들아, 지금 카츠라 코타로가 튀었는데 한가하게 안부 인사가 나오냐? 당장 주변 수색해서 수상해 보인다 싶은 놈들은 죄다 끌고 와. 못 잡으면 너네가 죽을 줄 알아.” 전화기 너머에서 숨을 삼키는 소리가 들리고, 허둥지둥하는 대답이 들렸으나 긴토키는 듣지도 않고 전화를 주머니에 쑤셔넣었다. 그리고 잠시후, 곳곳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렸다. 상사에게 살해당하고 싶지 않은 평대사들의 과잉반응이 웃겼는지 긴토키는 피식 웃으며 벽에 기대어 주변에서 일어나는 작은 소요를 감상하고 있었다. 시간이 조금 흐르자, 아무 소득 없이 돌아오는 진선조 대원들이 하나 둘 긴토키 앞에 모였고 긴토키는 말없이 그들을 노려보았다. 순찰차가 도착했고 제복을 입은 진선조 대원들이 몇, 그들 옆에서 우울한 표정으로 함께 긴토키의 시선을 감당해야 했다. 오늘은 또 왜, 카츠라 코타로가 튀었다더라, 아 존나 재수없네, 우리 이제 죽은 거냐? 그렇다고 봐야지. 이런 작은 대사들이 오고갔으나 긴토키가 한 번 노려본 다음부터 쥐죽은 듯 조용해졌다. “하나 잡았습니다.” 조마조마한 얼굴로 진선조 대원들이 한 명을 연행해 왔다. 키가 작고 이목구비가 흐릿해서 인상에 남지 않을 것 같은 얼굴의 평범한 남자였다. “무슨 말이에요. 양이라뇨, 전 그냥 지나가던 사람이라고요. 경찰이라고 막 이래도 됩니까? 이게 뭐죠?” 긴토키가 눈을 빛냈다. “지나가던 사람 좋아한다. 아까 이 건물 밑에서 얼쩡거리던 놈이잖아.” 남자는 잠시 몸을 움찔거리다 잠시 후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말을 이었다. “그건 약속이 있어서 그런 거고……” “무슨 약속?” “아니, 왜 반말입니까. 경찰이면 그래도 돼요?” “아, 이 새끼 말귀 못 알아먹는 것 좀 보소. 야, 너는 지금 우리한테 말대꾸할 군번이 아니라니까. 니가 여기서 뭔 약속을 했냐고 묻잖아. 묻는데 왜 대답을 안 하냐고, 어?” “…….” 고집스럽게 입을 다물고 있는 남자를 보고 긴토키는 피식 웃었다. “네, 네. 그건 일단 저희랑 같이 간 다음에 이야기해요. 일단 검문에 불응한 죄로 잠시 좀 같이 가셔야겠습니다.” “그런 게 어딨습니까?” “어딨기는, 여기 있다. 야, 이분 차에 태워 드려라.” 말이 떨어지자마자 옴싹달싹 못하게 남자의 양팔을 거머쥐고 가는 평대사들을 보며 긴토키는 코웃음을 쳤다. 순찰차로 이동하는 내내 긴토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평대사들은 잡담 한 마디 주고 받지 않고 조용히 정좌하고 앞만 보고 있었다.
예전에 받았던 리퀘입니다. 에리 님이 하셨던 죽음(엘리자베트)과 만나는 로우위(커피우유신화)입니다.
로우위는 자신과 똑같은 얼굴을 한 존재를 물끄러미 쳐다보다 중얼거렸다. “꿈도 참. 꿈같지 않은 것을 꾸는 군.” 신이라고 해도 꿈까지 마음대로 할 수는 없는 건가. 그렇다면 우주의 법칙은 올바르지 않다. 그렇게 생각했을 때 새카만 정장에 까만 넥타이를 맨-꼭 장례식에 가는 듯한 복장을 한 그것이 로우위 자신처럼 입꼬리를 당기며 웃는 얼굴을 지었다. -우주의 법칙? 재미있구나. 게다가 자신의 인지 체계 밖에 있는 것을 꿈으로 치부하다니 그러면 편한가? 회원 로우위. “꿈치고는 예의가 없구나. 너는 누구냐.” -누구? 글쎄다. 그것은 코웃음을 쳤다. 협회에 이런 능력을 가진 회원이 있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다. 우유협회에도, 자신이 아는 한은 없었다. 그리고 자신이 모르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되다만 신, 리하이가 이런 것을 할 수 있을 리도 만무하다. 저것이 누구의 짓인지, 누가 사주한 것인지 알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그 전에 이 조작된 꿈에서 이 기분나쁜 존재를 쫓아내는 것이 먼저였다. 도망갈 때 흔적을 찾아도 좋고, 패배시켜 입을 열게 만드는 것도 좋다. 로우위는 설득의 능력을 사용하며 입을 열었다. “하긴 누구인지는 중요하지 않지. 우선 이야기를 좀 해 볼까.” 그것은 웃었다. -날 설득하겠다? 입을 열게 만들겠다? 참 보기 드물게 패기 있는 인간이구나. 칭찬해 주마. 그것은 로우위의 말문을 막히게 했다. 설득시키고자 한 대상이 설득을 받아들이는 데 시간이 걸리는 경우는 물론 많다. 하지만 말문 자체를 막히게 하는 일은 처음이었다. 분위기가 달랐다. 게다가 자신을, 우주의 신을 얕잡아보고 있었다. “날 인간취급하지 마라. 역시 리하이 쪽이냐, 아니면 우유 협회?” 로우위는 평소보다 조금은 어렵게 입을 뗐다. 그것은 피식 웃었다. -그까짓 인간들의 몇 천년 단위 장난질 정도로 보여? 유감스럽구나. 그것의 웃는 얼굴이 자신과 완전히 똑같다고 생각했는데 아니라는 것을 로우위는 깨달았다. 그것의 눈빛은 지금까지 살면서 본 무엇과도 다른 것이었따. -우선 로우위, 이 말부터 해 주고 싶구나. 그것의 목소리는 아주 차가웠다. -착각하지 마라. 네가 인간이라고 하건 신이라고 하건 그건 내 알 바가 아니다. 네가 무엇이건 나는 관심이 없어. 로우위는, 이전 발렡타인이 자신을 신으로 인정하지 않겠노라 선언한 순간만큼 분노했다. 분노가 말문이 트이게 했다. “내가 이 우주의 신이다. 우주의 법칙을 만드는 신인데, 왜 네 관심을 구해야 하지? 우주의 법칙은 네가 관심이 있고 없고의 문제가 아니다. 태양이 네 허락을 받고 움직이나? 공기는 네 관심을 얻은 후에야 존재하나? 웃기지 마라. 네가 관심이 있건 없건 나는 신이다.” 그것은 로우위의 선언에도 표정하나 변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게 뭐 어쨌다는 거냐. 그것이 갑자기 로우위의 앞으로 다가왔다. -하긴 태양이니 공기니, 그런 것들을 움직이는 장난도 재미있기는 할 거야. 네가 신이고 법칙을 만든다고 생각하면 그것도 나쁘지 않지. 하지만. 그것이 로우위의 어깨를 세게 잡았다. 로우위는 자신의 어깨에서 느껴지는 감각이 뭔지 잘 알고 있었다. 가끔 사선을 넘는 일을 할 때, 굉장히 차가운 무언가가 스치고 지나가는 섬뜩한 느낌을 받은 적이 있었다. 꼭 그것이 어깨를 잡고 있는 것 같았다. -네가 누구건 뭐건 말이지, 마지막에 내가 있다는 사실까지 바꿀 수는 없는 거란다. 그것이 로우위의 뒷머리를 잡았다. 어깨를 안고 머리를 감싼 포즈만큼은 다정해서 누가 보더라도 연인이 키스를 주고 받는 것 같았지만, 뒷머리를 잡은 손은 지금껏 어떤 회원에게서도 본 적이 없는 힘과 무게감을 로우위에게 전하고 있었다. 깜박이지 않는 무기질적인 눈과 비웃듯 올라간 입이 가까이 다가왔다. 저것이 닿는 순간 끝이다. 뭔지는 모르겠지만 모두 끝이다. 로우위는 신이 되고 생긴 능력을 모두 사용하려 했으나 어느 것 하나 먹히는 것이 없었다. 그것의 찬 피부가 로우위의 뺨에 스쳤다. 이제 끝이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 갑자기 그것의 모습이 사라졌다. -그런 거다. 신? 고작 세상의 법칙 하나둘 가지고 오만하게 굴지 마라, 인간. 그것의 목소리에는 웃음기마저 섞여 있어, 로우위는 신이 된 이래 가장 비참한 기분이 들었다. 무엇인지 알 수도 없는 것에게 졌다. “왜 온 거냐.” 억지로 목소리를 짜낸 것은, 내가 신이라는 자존심은 지키고 싶었기 때문이다. -응? 그러게. 뭐 어차피 또 볼 테니까, 네가 아무리 바라도 이건 변하지 않거든. 그러니까 신경 쓰지 말아라. 그때까지 날 잊지 말고. 그것은 악의 가득한 웃음만 남기고 사라졌다. 로우위가 다시 눈을 뜨자, 슈톨렌이 티피카와 아마렐로가 저격 준비를 마치고 출발했다는 소식을 전했다. 그리고 10분 후를 보건대 그들의 첫 저격은 실패할 것이다. 전지전능한 기분을 만끽하던 로우위는, 마음 속에 가라앉은 공포감이 다시 흙탕물처럼 일어나려 하자 고개를 저었다. 그것이라고 해도, 자신이 신이라는 점을 부정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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