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고 만든 것'에 해당되는 글 60

  1. 2016.04.24 [검사제]담배
  2. 2016.04.24 [검사제]십자가
  3. 2016.04.24 [검사제]눈
  4. 2016.04.24 [검사제]속죄
  5. 2016.04.24 [검사제]성녀
  6. 2016.04.24 [검사제] 술마시는 김최
  7. 2016.04.24 [검사제]견진성사
  8. 2016.04.24 [검사제]목욕탕에 간 김최
  9. 2015.03.29 [쿠로바스]대부
  10. 2014.09.28 [또봇]회장님과 나 2
  11. 2014.07.08 [또/봇]시를 읽는 오후
  12. 2014.06.09 [한니발]백정 살인 사건
  13. 2014.05.11 [로키*꿈]kiss kiss kiss
  14. 2014.03.09 [한니발]죽은 순교자를 위한 제의
  15. 2014.02.14 [한니발]만찬

[검사제]담배

"무슨 담배를 그렇게 피우십니까."
"수도원장님도 안 하신 잔소리를 왜 네가 하냐. 어린 놈이."
"너무 많이 피우시니까 그렇죠. 좀 적당히 하시지."
범신이 피우던 담배를 비벼 끄고 새 담배에 불을 붙이자 준호가 싫은 표정을 지었다. 8개월만에 만난 준호는 본당 생활 잘 하고 있냐는 질문에 대충 고개를 끄덕였고 범신은 살이 빠진 것 같다는 질문에 그냥 피식 웃기만 했다. 인사를 교환한 다음 본당에 찾아온 범신을 따라 인천과 서울의 경계쯤에 있는 동네에서 구마의식을 했다. 부마자가 아주 힘도 넘치고 팔팔해서 둘 다 애를 많이 먹었다. 창문도 한 장 깨지고 부마자가 휘두른 주먹에 범신이 얻어맞기도 했다. 진땀이 나도록 기도한 끝에 구마의식은 마무리가 되었고, 정리를 하고 깨진 창문에 대해 집주인에게 사과를 한 다음 나오자 이미 늦은 밤이었다. 아파트 입구에서 범신이 담배를 하나 빼 물었고, 다 피운 다음에 새 담배를 꺼내자 나온 대화였다.
"좀 익숙해져봐."
"자주 뵐 것도 아닌데 익숙해져서 뭐 하게요."
"하 그놈 참. 너네 본당 신부님은 안 피우시냐?"
"네, 주임신부님도 안 피우시고요, 아니 요샌 어지간하면 다 금연구역인데 좀 끊으십쇼. 불편하지도 않으십니까."
"신부가 주님 외에 세속에서 마음 둘 데가 뭐 얼마나 있다고. 이거라도 피워야지."
준호가 노골적으로 싫은 표정을 지었다. 범신이 인상을 썼다.
"아가토, 넌 뭐 내가 좋아서 피우는 줄 아냐?"
"안 좋은데 왜 피우시는데요."
"이것 말고는 답이 없어서 그런다, 답이."
준호는 그때 범신의 표정을 자세히 보지 못했다. 지치고 피곤한 표정이 범신의 얼굴에 스쳐지나갔다. 준호의 앞에서 한 번도 보인 적 없는 표정이었고, 봤으면 준호는 그 얼굴을 잊지 못했을 것이다. 
"네가 아직 덜 깎이고 덜 다쳐서 그래. 너도 야, 나중에는."
"나중에는요?"
"아니다, 말을 말자. 뭐 너는 꿋꿋해서 기쁘다."
범신이 피식 웃으며 손을 모았다. 당신의 종 아가토를 보호하소서, 아멘. 범신을 따라 손을 모은 준호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신부님, 담배 좀 줄이세요."
"요샌 잔소리도 속성으로 교육받고 오니?"
"아뇨, 무슨 말씀이 그러십니까. 저는 신부님 걱정되니까 그럽니다. 몸에도 좋지 않은 걸 왜 피우세요."
준호는 눈 앞의 젊은 신부를 빤히 쳐다보고는 피식 웃고 담뱃갑을 열어 새 담배를 입에 물었다.
"아니 신부님."
뭔 신부가 사람 말을 귓등으로도 안 들어. 입속으로 중얼거리는 새파랗게 젊은 신부한테 등을 돌리며 준호는 피식 웃었다. 새파랗게 어리고, 어린 만큼 꺾이지 않는 맛이 있었다. 시퍼런 날을 숨길 생각도 못 하고 버럭거리는 게 웃기고, 예전에는 자신도 저랬을까 싶어 그저 웃음만 나왔다. 준호는 라이터에 불을 붙였다.
"예전에 어느 신부님께 담배를 배웠어. 배웠다기보단 물이 든 거 같지만. 아무튼 신부님께 왜 피우시는지 여쭤본 적이 있거든."
"주여, 그 분은 뭐라십니까?"
"맞혀봐라. 맞히면 이번 장엄구마에 쓸 돼지 정도는 내 손으로 구해 보마."
"이런 법이 어디 있습니까?"
"어허, 보조사제는 입 다물고. 어디 어른 말씀하시는데."
자기 말투가 예전 범신의 말투를 닮아간다는 데 생각이 미친 준호가 낄낄 웃으며 담배 연기를 훅 내뿜었다. 젊은 신부가 질색을 하며 성호를 그었다.
"들어서 알겠지만, 아무도 알아주지도 않고 아무 보상도 없을 테고, 세상에서 가장 낮고 낮은 일만 하면서도 세상이 너를 꺼릴 거다."
준호는 젊은 신부를 향해 입을 열었다. 신부가 진지한 표정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것이 느껴졌다. 나도 아마 저랬겠지.
"그러니 이거라도 해야 살 맛이 좀 나지 않겠니. 안 그러냐?"
"최 신부님은 술도 담배도 다 하시면서 뭘 그러십니까."
"어허, 주님의 성스러운 보혈을 함부로 입에 올리지 말라."

뭐 저런 꼴통신부가 하며 혀를 차는 부제의 모습을 보며 준호는 담뱃재를 털었다. 어느새 담배필터 근처까지 불이 붙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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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20일 전력 120분 백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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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사제]십자가

준호는 삼위일체를 믿고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으며 언젠가 그분이 다시 오실 것을 믿었다. 어려서부터 오래 고민한 끝에 생긴 믿음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머리로 열심히 고민한 끝에 믿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된 것에 가까울지도 모른다.  준호의 믿음은 굳건했다.  오래 고민한 끝에 만들어진 믿음이었으니 굳건하지 않을 수 없었다. 베이컨이었나, 신을 믿는 것이 믿지 않는 것보다 확률적으로 나으리라는 괴상한 궤변은 철학 수업 시간에 들은 이야기였다. 다들 제법 그럴싸하다고 웃었으나 준호는 별로 웃기지 않았다. 신이 있어야만 내 동생의 혼이 어느 곳에 남아 있어서, 언젠가 받게 될 구원을 기다리게 될 것이다. 
애초에 동생의 죽음은 악마의 짓 같은 것이었다. 이유도 없이 사람을 해하는 것이 악이 아닐 리 없다. 그것은 악이다. 그리고 인간의 이성이 설명할 수 없는 악이 있다면, 그 악에 대항하는 선이 있을 것이고, 신도 존재할 것이다. 준호의 믿음은 그렇게 시작했다. 신학적인 근거며 이론에 대해 계속 찾아보았다. 성경을 모두 읽고, 구원에 대해 신부님께 질문하고, 천국과 지옥과 연옥에 대해 찾을 수 있는 것은 다 찾아보았다. 결론은, 사람은 모두 죄를 지은 자이지만 자신의 죄는 더더욱 깊고, 동생의 영혼이 정말로 있다면 동생의 구원은 멀고도 아득하다는 것이었다. 동생의 혼이 구원받을 수 있기를, 내가 어떻게든 방법을 알아내기를, 할 수 있는 것은 뭐든 시도해 보고 그 중에 답이 있기를. 준호가 가진 죄가 깊은 만큼 믿음은 굳건했다. 가톨릭대학교를 다 뒤져도 준호와 같이 믿음이 깊은 자는 찾기 어려울 것이다. 그 굳은 믿음으로 예비신학교 시절을 거치고, 똑똑한 아들이 신부가 된다니 말도 안 된다고 화를 내는 아버지를 설득하고, 본당 신부님을 감동시켰다. 준호는 신을 믿었다.
성호를 긋고, 십자가 아래서 기도하는 생활이 이어졌다. 이 십자가에 매달려 우리 죄를 사해주신 분을 믿고 따른다면, 이분과 같이 희생을 한다면 어쩌면 거기에 답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게 아니라면? 배우면 배울수록 동생이 자신에 의해 구원받을 수 있는지에 대한 확신은 엷어졌다. 준호는 방황하는 신학생이 되었다. 공부가 어려운 것도 아니고, 신앙이 부족한 것이라면 말이 이상하지만 준호의 신앙은 신부가 되기에는 약간 부족했을지도 모른다. 정말로 기도에 너무 열심이어서 성적이 나쁜 것이라고 말해도 틀린 것은 아니었다. 자신이 갈 길이 이것이 맞는지에 대한 의문에 답을 얻기 위한 회의와 고민의 기도가 이어졌다.

사실은 그래서, 구마의식이라는 것에 회의적이었다. 준비는 철저히 했다. 준호는 원래 뭐든 철저히 하는 편이었다. 땡땡이도 치려면 확실히 치고 술도 마시려면 확실히 마시고, 월담을 하려거든 시시하게 하지 않아야 했다. 악마에 대해서 공부하고, 자료를 모두 읽어 암기하고, 서취노트의 내용을 읽고, 의식에 필요한 것을 준비하고, 기도문을 확실하게 기억했다. 하지만 정말 거기에 뭐가 있기는 한 거냐고 계속 질문을 해야 했다. 무언가가 있는데 아무도 뭐가 있는지 말을 해 주지 않았다. 악마라니. 종교가 악마를 쫓는다는 것은 일종의 비유가 아닌가, 사람들의 마음에 서린 불안을 없애주고 나쁜 마음을 풀어주는 것. 그것이 구마일 거라고 생각했다. 자신이 동생의 구원을 바라서 신부가 되려고 하듯, 무언가 바라는 것을 들어주고 수렁에서 건져내는 것이 종교에서 말하는 악일 것이라고. 하지만 다들 악마가 있는 것처럼 행동했다.
그래, 악마가 있어야 신이 존재한다. 그러므로 사제는 악마의 존재를 의심할 수 없다. 하지만 준호는, 악이 있어도 악마가 있으리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는 신학생 최준호 아가토는, 아무도 이야기해주지 않지만 뭐가 있다는 사실이 답답했다. 가장 답답한 것은 김신부라는 사람이었다. 자신이 하는 일이 뭐다 어떻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너 나 좀 도와야겠다고 다짜고짜 말을 붙였다. 박수사의 집 문을 두들기며 그 애가 불쌍하지도 않냐 한 번만 더 해 보자 하던 절박한 모습이 와닿아서, 준호는 그와 같이 일을 해 보기로 결심했다. 그 애가 불쌍하지도 않냐는 말이 너무나 와닿았다. 불쌍한 아이를 위해서. 
하지만 정작 그 불쌍한 아이는 뇌사상태에 들어 있었고 그 원인이 김신부일지도 모른다는 말을 들었다. 그를 감시하라고 명령받았다. 김신부에게 불손하게 굴었던 것도 그래서일 것이다.  사실은 이 자가 악일지도 모른다고 잠시 생각했다. 어린 여자아이를 성추행했건, 구마라는 핑계로 죽음으로 몰고 갔건, 무당을 가까이하고 여자 분비물이니 뭐니 하는 괴상한 짓거리를 하는 정신나간 자이건, 사람 신경을 긁어대는 무신경함이건, 이 사람이 하는 일에 대한 불신과 회의가 가슴 밑바닥에 가라앉아있었다. 하기야 성찬을 준비하며 성호를 긋고 십자가 아래에서 기도하면서도 준호는, 거기에 있는 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인지하지 못했다. 뇌사상태라던 아이가 말을 하며 자신을 풀어달라고 애원할때부터 준호의 마음 속에서 뭔가가 삐걱거렸다. 공포는 아니었다. 오히려 수치심과 불안감에 가까웠다. 원초적인 날 것 그대로의, 인격마저 부여된 악이 쇳소리를 내며 저주를 퍼부어대기 시작했다. 준호의 믿음과 신앙이 낱낱이 파헤쳐지는 순간이었다.

그래서 준호의 믿음은 밑바닥에서 새로 시작했다. 생각해보면 그랬다. 악이 있다고 믿고 있었으면 악마도 믿었어야 할 일이고, 자신이 죄사함을 얻기 위해 희생하기로 했으면 희생이 뭔지 다시 생각해 볼 일이었다. 준호는 자신의 보잘것없는 믿음과 약한 영혼을 돌아보고, 신발도 신지 못하고 도망나오면서 긁힌 발바닥의 아픔을 생각해보았다. 비참하고 절망적인 순간에도 고통을 호소하는 몸과, 그 몸 안에 담긴 힘없는 마음에 대해서 생각해보았다. 신앙에 대해 뭘 안다고, 구원에 대해 뭘 알았다고 나 같은 게 사제가 되겠다고. 알 수 없는 큰 힘들이 한 번에 자신을 휩쓸고 갔고 준호는 그 사이에 휩쓸려 쓸려가듯 도망을 쳤다. 그리고, 그때와 똑같이 도망쳐 나온 자신에 대한 혐오와 함께, 평생을 매달렸던 십자가가 마음 속에 떠올랐다. 여기까지 왔는데, 평생 구원을 하고 구원받겠노라고 매달렸는데, 여기서 답을 구하지 않으면 어디에서 답을 구할까.
불쌍한 애를 구하고 불쌍한 신부님도 구하고 나도 구하자. 준호는 그렇게 결심하고 우선 신발을 찾기로 했다.

물 속에서 빠져나오며 준호는 그때까지 했던 생각을 털어냈다. 복잡하게 생각할 거 없이 일단 믿고, 따르고 보자고. 그러다보면 누구를 구해도 구하지 않겠냐고. 그거면 됐다고 생각한 순간, 어느새 물 밖이었고 자신은 살아있었다. 여름이라도 한강에서 빠져나온 몸은 추위와 피로에 덜덜 떨렸지만, 난간에 매달아놓은 묵주를 다시 손에 쥐었을 때 묵주 끝에 달린 십자가가 따뜻하게 손바닥 안에 감겼다. 이제 돌아가지도 고민하지도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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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1월 13일 전력 120분 백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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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사제]눈

"어, 신부님. 눈 오는데요."
"허, 어쩌냐. 차 막히겠다."
인천 어느 본당에서 구마를 요청해서 낮 즈음에 성당에 왔다가 구마가 끝나고 문을 열어보니 날은 다 저물었고 눈이 내리고 있었다. 준호는 눈을 빛내며 눈을 쳐다보고 있었다. 제법 굵은 눈이 솜털처럼 공중에서 흔들거리며 떨어지고 있었다. 성당 앞마당 그늘진 곳에는 얇게 눈이 쌓여 바닥은 희미한 회색을 띠고 있었다.
"이야 함박눈입니다, 신부님. 올 겨울엔 눈이 영 쌓이지를 않던데 오늘은 제법 쌓이겠어요."
"눈 오면 좋아하는 거 그 뭐냐, 애랑 개밖에 없다며. 넌 어느 쪽이냐."
성당 처마 밑에 기대서서 담뱃불을 붙이고 있던 범신이 탄식했다. 준호는 부루퉁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에이 신부님. 저도 이제 부제 아니고 신붑니다. 너무 낮춰 부르지 마십쇼."
"지가 지를 높이는 교만은 퍽이나 신부답습니다 최 아가토 신부."
범신은 한숨을 쉬고는, 피로한 얼굴로 담배연기를 허공에 내뱉었다. 담배연기가 눈 속으로 퍼져가는 모습을 준호는 멍하게 쳐다보았다. 평소보다 밀도가 높은 찬 공기 속으로 따뜻한 하얀 연기가 스며들어가고 있었다. 
"담배가 신기하냐?"
"아뇨 그렇다기보다는, 눈이랑 잘 어울려서 그럽니다."
"...너 신부 하지 말고 문학이나 전공하지 그랬니. 룸펜이 딱 적성이네."
"요즘 누가 룸펜 같은 말을 쓴다고요. 하여간 나이 드신 티를 그렇게 내시네요."
퉁명스럽게 말하면서도 준호는 담배를 피우는 범신을 계속 쳐다보았다. 눈발이 점점 굵어져 세상이 하얗게 물들어 가는데, 자신과 범신만 검은 색이었다. 하얀 담배 연기는 계속 물감 풀어지듯 공기 속에 퍼져갔다. 검은 수단 끝의 하얀 로만 칼라마저 공기중에 흩어질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범신은 한 개피를 다 피우고 새로 불을 붙였다.
"이것만 피우고 들어가자. 너도 본당 들어가야지."
"어차피 막차 전까지만 들어가면 됩니다."
"최신부 빠져가지고, 요새 신부는 막 늦게 다니고 그래도 되나? 본당 관리 안 하냐?"
"눈 오는 날이잖습니까. 오늘 같이 아름다운 날에는 주님도 지각해도 봐주시고 그럽니다. 이런 날에는 그리운 사람을 만나야 된다고, 그 무슨 시에 나오지 않습니까."
엉뚱한 시를 엉뚱한 데에 갖다붙인 준호의 실수를 눈치채지 못한 듯 범신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리운 사람 좋아한다. 새끼 빠져가지고. 그리고 눈 그거 뭐가 좋다고. 미끄러지기 딱 좋구만. 예전에 어느 노신부님이 이런 날 소주 마시고 걸어가다 넘어지셔서 다리를 아주 호되게 다치셨어. 병원 갔다가 얼마나 혼났는지."
범신은 어딘가 그리운 눈으로 먼 곳을 쳐다보았다. 정기범 신부님을 회상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나는 여기에 있는데 왜 신부님은 다른 곳에 계시는 겁니까. 준호는 조금 울컥해서 투정부리듯 말을 했다.
"신부님, 제가 신부님 보조사제인데 어떻게 보조사제 시절만 회상하시고 그러십니까. 저 여기에 있는데."
순간 눈 사이로 담배연기가 뿌옇게 피어올랐다. 시야가 하얗게 물들어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즈음,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아가토. 너야말로 왜 보조사제였던 적만 떠올리느냐. 네 직분은 그게 아니거늘."

눈을 떴을 때는 창 밖에 눈이 하얗게 쌓여있었고, 발자국 하나 없이 하얗기만한 눈밭이 시야에 하나가득 들어왔다. 최준호 아가토 주임신부는 한숨을 쉬고,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불을 붙였다. 자신도 그 때의 신부님만큼 나이를 먹었고, 머리가 희끗희끗 세어갔다. 하지만 악몽은 변함이 없고, 꿈에서조차 그리운 얼굴도 보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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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2.26. 전력 120분 백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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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사제]속죄

정동 프란치스코 회관은 가톨릭 관련 행사가 아니라도 각종 인문학행사에 대관처로 사용되는 일이 많다. 한창 이슈가 된 사회학 도서의 출간에 앞서 저자와 독자들의 만남이 기획되어 있어, 조용한 듯 북적거리는 회관 앞에 수도복을 입은 젊은 수사가 서 있었다. 헐렁해 보이는 갈색 수도복의 등에 달린 후드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앳된 얼굴의 대학생쯤 되었을까, 어깨즈음까지 오는 머리에 머리띠를 한 여성이 다가오자 수사는 조용히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었다.
"아, 저기 혹시...최준호 아가토 부..."
"네, 최준호 아가토 신부입니다. 이영신 자매님이시군요."
"아, 이제 신부님이시겠네요..."
영신은 얼굴을 확인하려는 듯 고개를 들어 앞을 쳐다보았으나 준호는 후드를 벗지 않았다. 단호하면서 어색한 인사가 이어졌고, 영신은 자신의 실수라도 지적받은 양 고개를 숙였다.
"아니요, 저도 못 알아봤습니다. 머리도 기르시고, 시간도 많이 지나고 해서요."
"아."
"좋아 보이시네요. 다행입니다."
목소리 때문인지, 영신은 놀란 듯 준호를 쳐다보았다. 준호는 긴장한 얼굴로 서 있는 영신을 향해 조금 웃어보였으나 후드를 눌러쓰고 있는 탓에 입꼬리밖에 보이지 않았다.
"아, ...고맙습니다."
영신은 고개를 푹 숙였다. 
"고맙긴요, 잘 지내시는 걸 확인할 수 있으서 저도 기쁩니다."
준호의 목소리는 부드러웠지만 목이 꽉 잠겨 있었다. 영신을 마지막으로 본 것은 범신이 영신의 눈을 감겨주며 울부짖던 마지막 순간 뿐이었다. 어린 소녀가 결국 죽었나보다, 하는 슬픔도 잠시뿐이었고 마르베스를 강물에 던지기 위해 목숨을 걸고 뛰느라 잠시 영신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못했었다. 나중에야 소녀를 위해 성호를 그을 수 있었다. 죽지 않고 살아있다는 말을 들었을 때는 정말 기뻤고, 축하인사라도 전해주고 싶었지만 준호가 영신을 만날 수는 없었다.  범신이 재판을 받을 때도 영신의 부모가 출석을 했지 영신이 오는 일은 없었다. 미성년자잖아, 애들은 흉한 꼴 보는 거 아니다. 푸른 옷을 입고 손이 묶여 있으면서도 범신은 태연했다. 
영신의 얼굴이 흐려졌다. 
"아, 죄송해요...좀 더 일찍 인사를 드리고 싶었는데 제가, 아무 것도 못 했어서..."
"압니다. 자매님이 잘못하신 건 아무 것도 없어요."
둘 다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영신의 어머니는 그 후 영신이 성당에 나가려는 것조차 반대했다. 네가 거기를 왜 가니, 네가 살아난 건 운이 좋아서지 신의 가호 같은 거 아니다. 신의 가호가 있었으면 저 신부가, 아니지 저건 신부도 아냐, 어떻게 너한테 그러니. 네가 뛰어내리게 만들어. 죄값을 치러야지.
엄마하고 내가 신부님한테 그렇게 한 거잖아요. 신부님이 날 구한 거야, 엄마는 아무 것도 모르잖아. 살아난 건 난데 왜 내 말을 아무도 믿지를 않아? 경찰한테 가서 얘기 해야 해, 신부님은 잘못 없어. 엄마 제발. 아빠도 내 말 좀 들어봐요. 울면서 소리를 질러도, 사정을 해도 아무 것도 달라지지 않았다. 성당에도 나가지 못한 채 재활치료에 1년을 묶여있던 영신이 범신이 청송교도소에 수감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진 것은, 학교에 나갈 수 있게 되고 나서였다.
고개를 숙이고 있던 준호가 한참만에 잠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저도 원장님 말씀만 듣고 나왔습니다만...제가 여기에 있는 줄은 어떻게 아시고 연락을 하셨어요?"
"아, 저 그때 박해진 교수님한테 치료받고 있어서, 아직도 가끔 정기검진하러 교수님한테 가요. 교수님 조르고 학교 신부님들 졸라서, 부, 아니 신부님 여기 계시다고 들었어요. "
"학교 신부님?"
"저 가톨릭대 성신교정 다녀요."
"아, 그럼 신학과...졸업반이시겠네요."
"아뇨, 이제 1학년이에요. 어머니가 반대하셔서. 다른 대학 다니다가 다시 들어간 거라서요."
둘 다 입을 다물었다. 행사가 끝나고 사람들이 모두 이동을 해서인지, 다시 골목은 한산했다. 영신은 고개를 들었다. 유리문 너머에 자신의 얼굴이 비치고 있었고, 갈색 수도복이 보였다.
"그러면 최신부님은, 그분 따라서 계속..."
"네. 그러기로 했습니다. 제가 해야지요."
준호는 마지막으로 범신을 면회갔던 날을 떠올렸다. 아가토야, 네 신부님. 아니지, 이제 아가토 신부님이네. 사제서품도 다 받고, 주님의 은혜가 참으로 놀랍다. 그런 말씀 마십시오. 신부님 덕분입니다. 내가 뭘 했다고. 신부님 덕분에 저는 여기에 있고, 신부님은 거기에 계시지 않습니까. 죄송합니다. 저만... 아니다, 아니야. 핏덩이는 학교 다녀야지. 넌 잘못한 것도 없잖아. 신부님도 잘못하신 거 없잖습니까. 세상의 법이 그러하니 따라야지 어쩌겠냐,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주는 것이라고 주님도 그러셨다. 그러니까 아가토, 다녀와라. 바티칸에서 불렀지? 힘들게다. 신부님도 하셨으니 저도 할 겁니다. 미련한 놈...
마지막 인사가 미련한 놈이 다 뭡니까, 제가 미련한 건 주님도 다 아시는데 뭐하러 그런 걸 말을 해요. 준호는 울음을 간신히 삼키고 평온한 목소리를 낼 수 있을 때까지 숨을 몰아쉬었다. 영신도 아마 여기까지 자신을 만나러 오는 길이 힘들었을 것이다. 자신이 힘든 것만큼. 후드를 벗지 않는 것이 견딜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눈을 마주치고 얼굴을 보며 이야기하면, 더 많은 것이 떠오르고 더 마음이 아플 것이다. 그래도 참고 여기까지 왔으니, 명색이 신부인 내가 참아야지. 준호는 영신을 내려다보며 미소지었다.
"꼴통이라고 그렇게 욕하셨으니 뭐 어쩌겠습니까. 자매님도 너무 신경쓰지 마세요. 저야 이게 일이고요."
"저, 졸업하면 수녀가 될 거예요."
뜻밖의 말에 놀란 준호가 영신을 쳐다보았다. 영신은 진지한 얼굴로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자매님. 수도는 힘든 겁니다."
"알아요. 하지만 마음을 정했어요. 신부님 같은 수도자가 될 거예요."
"부모님은 알고 계세요?"
영신이 고개를 끄덕였고 준호는 성호를 그으며 탄식했다. 주님 뜻이 이런 것이었습니까. 범신이 이걸 봤다간 혀를 차며 둘 다 내 말은 듣지도 않고 주님 말씀만 듣는다며 뭐라고 했을 것이다. 이러려고 저희가 만났나 봅니다, 신부님이 뿌린 밀알이 이렇게 돌아오네요.
"그분...이 기뻐하지 않으실지도 몰라요."
"신부님..."
영신은 눈 앞에 있는 자신 대신, 준호도 아는 어느 신부를 부르며 고개를 숙였다. 코를 훌쩍이는 소리가 들렸다.
"잘 지내시겠죠? 천국에 가셨을 거예요 분명히."
"그분은 주님 곁에 계시겠지요."
준호가 성호를 긋자 영신이 손을 모았다. 김범신 베드로의 영혼이 편히 쉬기를.
"최신부님께는 꼭 죄송하고 고맙다고 인사하고 싶었어요. 그런데, 그분께는 어떻게 인사를 드려야..."
마지막도 못 보고 어떡해요, 우리 신부님. 혼자서 그 쓸쓸한 데서...영신이 훌쩍거리며 우는 동안 준호는 먼 하늘을 쳐다보며 말했다.
"괜찮습니다. 다 아실 거예요. 아마 지금쯤 주님 곁에서 줄담배 피우면서 우리 이야기를 하고 계실 겁니다. 주여, 저 두 꼴통을 보십시오. 제 말은 지독히도 안 듣습니다, 하면서요."

영신이 울먹이며 입꼬리를 끌어올려 웃었다. 아마 자신도 똑같은 표정을 짓고 있을 것이다. 저 착한 아이가 자신을 걱정하기라도 하면 신부님이 아가토 네가 감히, 하며 자신을 야단칠 것이다. 준호는 후드를 깊이 눌러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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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2.13 백업. 전력 12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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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사제]성녀

만약 모래알보다 작은 기적이 오늘밤 일어난다면

그녀는 성녀가 되고, 온갖 성스러운 일이 일어날 거야
-이상은, <성녀>

신학적 견지에서 기적에 대해 말해보라면, 아주 조심스럽고 섬세하면서도 다양한 해석이 나올 것이라고 생각한다. 신의 은총이 실천되는 방법으로서의 기적. 놀랍지만 사소한 것. 뭐 그런 식으로 범신은 기적을 이해해 오고 있었다. 비록 꼴통신부라는 소리는 듣고 있었지만, 신부가 아니라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다. 적어도 그가 가진 신심에 대해 의심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러니까 평범한 신부들이 가진 그런 평범한 신심이라고, 본인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언제나 그렇듯이, 평범한 신부로서 자신을 따르는 아이에게 신앙에 대해 설명했었다.
"신부님, 학교에서 남자애들이랑 싸웠어요."
"어이구, 왜 그랬어. 사이좋게 지내야지."
"그치만 신부님, 걔네가 성경에 나오는 기적이 어딨냐고 다 미신이라고 그랬어요. 아 주일학교에서 설명 들은 것만 이야기 잘 해 줬어도 내가 이기는 건데! 근데 걔네가 듣지도 않고 막 놀려서 짜증나서 좀 때렸어요. 그래서 막 선생님께 혼나구, 엄마한테도 혼나구. 생각할 수록 화 나요."
분한 기색이 가득한 얼굴을 보니, 제대로 못 쏘아붙이고 온 게 분한 모양이다. 초등학생 남자애들이 다 그렇지. 여자애들이 무슨 이야기만 하면 옆에서 트집이나 잡아대고 못살게 굴고. 담임선생님 책상에 매미허물을 올려놓고 좋아하던 자신의 어린 시절을 떠올린 범신이 피식 웃었다.
"그래서, 다음에 이기게 설명 잘 해 달라고?"
"아이 신부님, 벌써 이겼어요. 그래도 설명은 해 줘야 하니까요."
영신이가 작정하고 걷어찼으니 그 남자애들도 많이 아팠겠지. 범신은 성호를 긋고 짐짓 엄숙한 얼굴을 지었다.
"그렇다고 때리면 못 써, 이영신."
"네 신부님. 그래도 가르쳐 주세요. 기적은 진짜 있는 거죠?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도, 나자로를 살리신 것도, 떡이랑 물고기 나눠먹이신 것도 기적이잖아요, 그쵸?"
"그럼. 하느님과 예수님이 계신 것처럼 기적도 어디에나 있는 거야."
"그런데 왜 우리는 못 봐요?"
아이가 눈을 깜박이며 묻는 질문에 범신은 웃었다. 늘 아기 같았는데 벌써 이만큼 커서 첫 영성체도 하고, 신앙에 대해 질문도 하는 걸 보니 세월이 참 빨랐다. 언젠가 자기도 똑같은 질문을 한 적이 있었고, 그 때 무슨 답을 들었더라. 아 그래. 주일학교 선생님께선 너한테 보이면 그게 기적이겠냐며 웃으셨다. 범신은 아이가 알아들을 수 있게 쉬운말을 고르느라 잠깐 생각을 가다듬었다.
"기적은 어디에나 있는 거야. 우선 생각해 봐라, 매일매일 밤 되면 해가 지지?"
"네."
"그런데 그 다음날 되면 해가 뜨잖아. 얼마나 신기해.  그치? 게다가 영신이가 이렇게 신부님하고 만난 것도 기적이잖아. 영신이는 꼬마고, 신부님은 수도원에서 기도하는 신부님인데, 하필 이 성당에서 딱 마주친 거야. 이것도 기적이지."
의아한 표정으로 자신을 쳐다보던 아이가 볼멘 소리를 했다.
"에이, 그게 뭐가 기적이에요? 하나도 안 신기하잖아요. 그런 거 말구요 좀 신기한 거 없어요?"
"영신아,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그분이 행하신 것 같은 큰 기적을 바라지 않으실 거야."
"왜요?"
"우리가 매일매일 살면서 기적을 만들려면 말이다, 그게 작지 않고서야 힘에 부쳐서 어디 살겠니?"
범신의 말에 아이는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그렇게 작은데 기적이라고 불러요?"
"그럼. 주님께서는,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작은 걸 매일 해 나가며 사는 것도 기적이라고 부르시는 거야. 영신아, 주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 우리가 한 사람씩 아주 작은 기적을 만들면, 그게 모이면 참 멋있어 보일 거야. 그걸 그분이 보시기에 얼마나 아름답겠어."
아이는 한참을 고민하다 범신을 보며 방긋 웃었다. 이 순간도 참으로 기적에 가깝지 않은가. 범신은 진심으로 기도했다. 이 아이가 신실한 주님의 딸로 자라게 하소서.

범신은 오래 전, 웃을 때면 빠진 이가 보이던 어린 꼬마와 주고 받던 대화를 떠올리고 잠시 하늘을 우러러 보았다. 그렇습니다, 주님. 기적이 정말로 있다는 것을 제가 이렇게 절실히 믿습니다.  제 기도를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명동의 큰 길 너머로 명동성당이 보이고 있었고, 제법 넓은 길은 사람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거리는 평온하고, 까마귀니 쥐니 하는 불길한 것들은 자취도 보이지 않는 멋진 주말 저녁이었다. 그리고 범신은 그 거리에서 사람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신부님! 이거! 이거 드세요!"
"영신 자매님, 천천히 걸으세요. 퇴원하신지 얼마 되었다고."
자신을 부르는 소리가 들려 돌아보니, 영신이 환하게 웃으며 달려오고 있었고 준호가 손에 편의점 로고가 찍힌 종이봉투를 들고 따라 왔다. 영신이 뛰어 온 거리를 성큼성큼 걸어 따라잡은 준호가 손에 든 봉투를 범신에게 내밀었다.
"자매님이 편의점 간 게 이거 때문이더라고요. 한 동안 못 먹어서 먹고 싶다고. 신부님도 하나 드십쇼."
"응, 호빵 아냐 이거. 영신이 호빵 먹고 싶었으면 사달라고 하지."
"아니에요, 신부님. 이거 부제님이 사셨어요."
"그래? 그럼 됐다."
"아놔 저 가난한 신학생입니다. 어떻게 저한테 얻어드실 생각을 하십니까."
"넌 신학교 학사란 놈이 그럼, 이 어린 평신도 아가씨한테 얻어먹냐?"
범신의 핀잔에 준호가 궁시렁거리며 봉투 속 내용물을 꺼냈다.
"맛은 그냥 다 단팥으로 했습니다. 신부님도 그게 좋으시죠?"
"어, 요샌 호빵 속에 피자니 뭐니 이상한 것들을 그렇게 넣더라고. 호빵은 기본이 최곤데."
"그쵸? 부제님도 신부님도 저하고 똑같네요!"
뭐가 그렇게 좋은지 마냥 웃으며 호빵을 반 갈라, 따뜻한 김이 폴폴 올라오는 것을 보고는 만족스러운 얼굴로 크게 한 입 베어문 영신이 호빵을 입에 문 준호와, 호빵을 막 받아든 범신을 향해 행복하게 웃었다.
"신부님, 진짜 좋아요. 호빵도 먹을 수 있고."
"자매님 참 작은 일에 기뻐하십니다. 훌륭하세요."
"당연하죠, 전에 신부님이 저 어릴 때 그러셨는데요, 이런 작은 하루하루가 다 기적이니까 소중하게 생각해야 한다고요. 맞죠, 신부님?"
"응? 어, 너 그거 기억하고 있었구나." 
"그럼요, 당연하죠. 그러니까 이건 진짜 쬐끄만 기적이지요,그쵸?"

오늘 나에게 기적이 무어냐 묻는다면, 호빵을 입에 문 소녀의 얼굴이라 답하겠나이다. 범신은 속에서 울컥 치받쳐 오르는 것을 간신히 삼켰다. 모래알 같은 기적이 반짝거리는 성스러운 주말 저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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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2.05 전력 120분 백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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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사제] 술마시는 김최

범신은 눈 앞에 들이밀어진 것-소주 두 병과 종이컵과 새우깡 한 봉지가 든 비닐봉지-을 쳐다보았다.

"원래 술 안 마십니다, 그랬었잖아."
"제가 그랬습니까?"
봉지를 들고 있는 놈, 그러니까 눈을 껌벅거리면서 순진한 척을 하고 있는 핏덩이의 뺀질거리는 미소를 구겨버리고 싶다는 충동을 억누른 범신은 봉지를 받아들었다.
"너 봉사활동 나온 놈이 이래도 되냐."
"뭐 어때서요. 저는 지금 수도원에서 파견나오신 수사신부님께 일을 배우는 겁니다, 어디까지나 공식적으로."
신학교 개그는 왜 30년이 다 지나도록 갱신도 되지 않는지 모르겠다. 주님의 놀라우신 뜻 어쩌고 하며 성호를 긋는 어린 놈을 쥐어패고 싶다. 정신부님, 예전에 저 구박하실 때 이런 기분이셨습니까. 그분의 영혼에 평안을, 성호를 그으며 잠시 기도를 올린 범신의 앞에 쪼그리고 앉은 준호가 씩 웃었다.
신학교의 학사들은 방학 때도 본당으로 가서 지내며 미사를 도우며 전례를 공부하거나 하는 것이 일이다. 준호의 주소가 용인이었으니 이 성당이 아마 본당이리라. 수도회에서 용인 모 성당 신부가 잠시 해외에 갈 일이 생겼는데-신학 세미나라고 했다.- 미사를 집전할 신부가 더 필요하다고 범신을 보냈다.  주일 앞뒤로 한 사흘만 도와주면 된다고 했다. 주소를 보고 몰몬교도처럼 미끈하게 생긴 얼굴을 떠올린 범신은, 방학 때도 아닌데 설마 그놈이 있겠나 하고 편안한 마음으로 용인으로 갔다. 그리고 보좌신부가 우리 본당 출신 부제라고 준호를 소개할 때 그만 사레가 들려 거하게 쿨럭거리고 말았던 것이다.
"너 왜 여깄어?"
마침 부제를 가르쳐야 하는데 저도 일손이 바쁘니 미사 보고 모임 지도할 동안 좀 부탁드립니다, 사람 좋게 웃으며 보좌신부가 사제관을 나가자마자 범신은 미간을 찌푸렸다.
"수업의 일환입니다. 제가 방학 때 좀 오래 쉬었잖습니까. 어차피 주말 지나면 또 들어가 봐야 합니다."
주중에는 수업을 빡세게 듣고 주말에는 여기저기 다니면서 방학 때 못 한 걸 메꾸고 있다며 준호는 한숨을 쉬어 보였다. 구마가 끝나고 쉬느라 방학 다운 방학을 즐기지도 못한-어차피 신학생의 방학이란 게 고행의 연속이기는 하지만- 준호를 보며 범신은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보좌신부가 펼쳐놓은 일지며 여러 자료-말하자면 성당을 꾸려나가며 배워야 할 인간관계에 대한 것들이다-을 훑어보았다.
"대체 저 보좌신부는 나한테 지금 뭘 가르치라는 거냐."
"아무래도 현장의 목소리를 이야기하시려는 거 같았는데요, 저희가 하긴 어려운 얘기죠?"
"내가 뭘 하겠냐. 난 평신도들과 미사 드린지도 오래 됐어."
"부제가 가져야 할 마음가짐 같은 건 뭐, 저는 잘 하니까요."
"잘 하긴 뭘 잘해. 됐고 야, 나 잠깐 좀 쉴란다. 너 나가 있어. 가서 성경이라도 읽고 있던가."
"신부님, 그럼 저희 진짜 수업 하나 할까요?"
낄낄 웃으며 잠깐 나갔다가 온 준호의 손에 들린 봉지를 보고 범신은 한숨을 쉬었다. 지금 이 미친놈이 사제관에서 낮술을 하자는 건가.

보좌 신부님 돌아오실 때까지 한 시간 반 정도 시간이 비어요. 제가 그동안 꼭 하고 싶었는데 못 했던 걸 하려면 기회가 지금 뿐이라서 이럽니다. 서품 받기 전까지 저는 계속 바쁠 테고, 신부님도 금방 가실 거고, 아무래도 밤에 모이기는 어렵잖습니까. 하며 웃는 준호의 얼굴이 어이가 없다. 허락한 걸로 알았는지 종이컵에 소주를 따르고 새우깡 봉지를 뜯는 손길이 날렵하다.
"너 신학교에서 어지간히 마셨나보다?"
"에이 무슨 말씀이십니까. 학교 규정에 학교에서 술 마시지 말라셨습니다."
"규정은 개뿔. 그래 잔이나 줘 봐라. 빨리 마셔서 없애야지 원."
범신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반 정도 채워진 종이컵이 범신의 손에 쥐어졌다. 잔을 받자 마자 홀짝 넘긴다. 낮에 마시는 소주는 유난히 달고 쌉쌀하다. 잔을 내려놓자 마자 준호는 공손히 새우깡을 내밀었다.
"얼씨구, 왜 이렇게 유난스러워. 내가 먹는다. 내려놔."
범신의 잔을 다시 채워주고, 이번에는 범신이 따라주는 잔을 두 손으로 받은 준호는 고개를 돌리고 잔을 비웠다. 크, 하고 인상을 찌푸리는 폼이 술을 잘 마시지는 못해도 좋아한다는 건 알겠다. 소주 한 병은 일고여덟 잔이면 금방 동이 나서, 몇 잔 말 없이 주고받자 한 병이 다 비워졌다. 새 병을 딴 범신이 준호에게 한 잔 따라주었다. 술잔을 받느라 손을 모으고 앉은 준호의 자세가, 꼭 성체를 모시는 것 같다고 생각한 범신은 피식 웃었다. 내가 참 불경하기 그지없구나, 그때 준호가 입을 열었다.
"고마웠습니다."
범신은 공손한 자세로 무릎을 모으고 앉은 준호를 쳐다보았다. 뜬금없는 인사에 조금 놀랐다. 무슨 흰소리냐고 한 마디 하려던 범신은 준호의 표정을 보았다. 술 마신 놈 답지 않게 단정하고 굳은 얼굴이었다. 그냥 튀어나온 소리가 아니다. 오래 준비했던 말일 것이다.
"신부님이 아니었으면, 오늘의 저도 없습니다."
"......"
"정말로 고맙다고 꼭 말씀드리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죄송했습니다. 그 날은,"
"됐다, 뭐 지난 일을 갖고 그래. 그런 거 마음에 담아두면 마음이 녹슨다, 이놈아."
"......네."
"아, 그리고 고마우면 좀 좋은 걸로 가져오던가. 깡소주가 뭐냐."
그냥 웃는 준호를 보며 범신은 새우깡을 집어 입에 욱여넣었다. 그날 잔을 받지 않아서 계속 미안했던 거다, 뺀질거리긴 해도 꼰대라서 내심 미안해서 언젠가 꼭 사과하려고 기회만 보고 있었던 거다. 그리고 기회가 되자마자 앞뒤 안 가리고 잽싸게 잔을 준비했겠지. 아직 새파랗게 어린 녀석이 성실하기도 하다, 범신은 기특한 어린 부제를 쳐다보았다. 준호는 겸연쩍은 얼굴로 웃었다.
"나중에 본당 가면 미사주라도 드리겠습니다."
"필요 없다, 이놈이 주님의 보혈을."

언젠가 사제가 되면 이놈은 정말로 열심히 주님의 어린양들을 인도하는 목자가 될 것이다. 음으로 양으로 주님 뜻을 따르며 신실하게 살 거다. 그리고 그때는 이놈한테 이런 공치사를 듣지 않아도 될 정도로 훌륭하게 잘 클 것이다. 나보다 좋은 사제가 되겠지. 주여, 당신의 종 아가토를 굽어살피소서. 범신은 입안으로 기도를 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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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 마시는 김과 최- @wh_priests님의 리퀘입니다. 감사합니다!
2015.12.03 백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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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사제]견진성사

준호는 학교로 돌아갔다. 기도와 공부와 묵상이 이어지는 나날이었고 공백 같은 건 없었던 것처럼 준호는 다시 학교에 녹아들었다. 요새 최준호 아가토 형제가 성실해졌다고 원감신부가 칭찬했으나 그냥 웃어넘겼다. 성실으로 위장한 고행의 나날이었다. 그날 한강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자신이 어떻게 살아 돌아왔는지 누구에게도 말할 생각이 없었다. 그 후로 무수히 많은 악몽을 꾸었음에도-다행히도 개가 나오는 악몽은 수가 줄어들었다. 그것이 유일한 위안이었다. 이전보다 진실된 기도를 올리고 그리스도를 더 찬미하게 되었음에도 준호는 괴로운 마음을 어쩌지를 못했다. 거룩한 길임에도 불구하고 괴롭다니 어불성설이었다.  마음 속에 자그마한 죄의식이 싹터 준호를 괴롭혔으나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했다. 심지어 고해를 할 때에도 말을 못 했다. 이밖에 알아내지 못한 죄도 용서해 주시옵소서, 하고 읊조릴 때 가슴 한켠이 따끔거렸다.

그러나 그날, 같이 모든 것을 보고 들었으며 자기 가장 약한 부분을 알고 있는 사람한테라면 어쩌면 무언가를 이야기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그 무뚝뚝하고 깡패 같은 신부와 친하냐고 누가 물으면 준호는 그냥 일로 만나서 알게 된 신부님이라고 말할 생각이었고 아마 그도 그렇게 말할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준호는 습관처럼 프란치스코 수도회로 편지를 보냈다. 답장이 자주 오지는 않았고, 준호도 자주 편지를 보내지는 않았다. 구마가 끝나고 수도회로 다시 돌아간 범신은 여기저기 불려다니고 이것저것 수습하느라 정신없는 나날을 보내고 있노라고 학장신부가 얼핏 말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었다. 준호가 범신과 편지왕래를 한다는 것을 들은 학장신부는 주님이 하시는 일을 내가 어찌 알겠냐며 고개만 절레절레 저었다. 학장 신부의 묵인 아래 준호는 범신과 실낱같은 교류를 이어갔다. 다만 그 후로 다시 구마를 하는 일은 없었다. 그런 일이 그렇게 자주 벌어지지도 않았거니와, 정식으로 구마 사제가 되려거든 일단 서품이나 받으라고 범신이 호통을 쳐대서, 일단은 준호도 그 문제에 대해서는 말을 하지 않고 있던 참이었다. 이제 와서 날 인정 안 하시려나 하며 툴툴대던 준호에게, 김 베드로 신부가 학교 방문을 하며 널 보자고 하더라며 말을 전한 것은 학장신부였다. 언제 오시느냐는 질문에는 모르겠다고 답해서 준호를 한 번 더 열받게 했다. 지금 뭐 훈련시키나.

범신이 정신부의 유품 정리 겸 대신학교에 들른 것은 영신의 구마가 끝나고 2개월 반 정도가 지난 후였다.  어느새 가을이 되었고 학교를 돌아다니는 신학생들의 옷도 조금 더 두꺼운 것으로 바뀌어 있었다. 범신은 학장신부를 만나 준호의 안부를 묻고는 인상을 쓴 다음 몇 가지를 이야기했다. 떨떠름한 얼굴의 학장신부에게 고개만 끄덕여보이고 학장실을 나온 범신은 수덕관 앞에서 담배를 한 가치 빼물었다가 다시 집어넣었다. 요즘은 학교에서 금연이던가. 휘적휘적 걸어가던 범신은 수단을 입고 걸어가는 신학생을 붙들고 말을 걸었다. 다행히 7학년생이었다. 기숙사 가는 길이거든 최준호 아가토를 불러오라는 말에 학생은 얼른 뛰어갔다.
"최아가토, 웬 신부님이 찾으셔."
"신부님?"
"응, 낯선 분인데."
저녁 식사 후 대침묵 시간 직전의 짬을 이용해서 참고문헌을 뒤적거리고 있던-연구과 수료논문의 주제는 악의 존재가 신앙에 미치는 영향이었다- 준호는 무섭게 생긴 신부님이 찾는다는 말에 급하게 책을 덮고 기숙사 밖으로 나갔다.
"너 좀 말랐다."
"펑크난 학업 때우느라 좀 바빠서요. 잘 지내셨습니까."
"뭐 주님 덕분에 그럭저럭 산다. 바쁘냐?"
"네. 바쁩니다."
괜히 퉁명스럽게 대꾸하는 준호를 보며 범신은 혀를 찼다.
"잠깐 나하고 이야기 좀 하자."
"곧 대침묵 시간인데요."
"사제의 말에 순종하지 않는 부제도 있냐. 일단 좀 앉자."
평소엔 순종하건 말건 관심도 없으면서 이럴 때는 사제의 권위를 내세운다. 가만보면 아주 치밀하고 무서운 양반이라니까. 투덜대던 준호는 안경 너머에서 번쩍이는 범신의 시선을 느끼고 얌전히 뒤를 따라갔다. 
사람이 잘 지나가지 않는 으슥한 자리를 찾은 것을 보고 범신이 뭔가 중요한 이야기라도 꺼내나 싶었으나, 범신은 그냥 영신이가 학교에 잘 돌아갔고, 유급은 했지만 한 살 어린 반 애들하고도 잘 지낸다는 이야기며 조카가 귀엽다는 이야기며, 졸업논문을 쓰려거든 이러이러한 책을 찾아보고 이런 논문을 읽으라는 별 시덥잖은 이야기만 꺼냈다.  논문 주제가 참으로 고식적인 것이 너답다는 비아냥에 발끈한 준호가 몇 마디를 던졌고 범신은 재밌다는 듯 웃으며 준호의 속을 긁었다. 못된 양반, 사람 입에서 말을 이런 식으로 끌어내게 하다니. 결국 준호는 울며 겨자 먹는 기분으로 범신에게 이야기를 꺼냈다. 그냥 툭 던지듯 다시는 한강에는 들어가고 싶지 않다고 한 말을 범신이 놓치지 않았던 탓이다. 유황불에 타들어가는 환각과, 억지로 묵주를 쥐고 다친 다리를 끌고 다리 위를 걸어가던 순간과, 돼지를 끌어안고 물에 뛰어들던 순간까지 이야기하자 범신은 신음하며 성호를 그었다.
그때, 라고 말하고는, 둘 다 잠시 말이 없었다. 준호의 눈 아래 그늘진 부분과, 셔츠 사이로 보이는 그때보다 마른 팔을 쳐다보던 범신이 혀를 차고는 말했다.
"새로 태어났으면 그냥 주님 종이야. 나 죽었소 하고 버텨야지."
"알고 있습니다."
"머리로만 아는 거하고 실제는 다르지. 고해성사는 언제 했어?"
"지난 주에 했습니다." 
"주님께 솔직히 말씀드려라 힘들다고."
"고해신부님께는 그런 이야기 못 드리는 거 아시잖습니까."
고집스럽게 말하는 준호를 보며 범신은 이마를 짚었다. 아직 핏덩이라 버티는 법을 모른다. 그냥 꼿꼿한 척 하는 게 능사가 아닌데. 아직 어린 놈이 멀쩡한 척을 하고 있는 걸 보니 머리가 다 아팠다.
"물로 새로 태어났으면, 그 다음은 뭐냐. 기름부음이지?"
세례성사 다음에 견진성사를 받을 때에는 이마에 기름으로 십자를 그린다. 인상을 쓰며 자신을 쳐다보는 아직 젊다 못해 어린 신부를 보며 범신이 말했다.
"교리 모르냐."
"아는데요. 기름부음으로 인장을 찍어 세례를 완성시키는 견진성사. 하느님께서는 또한 우리에게 인장을 찍으시고, 우리 마음 안에 성령을 보증으로 주셨습니다, 코린토 2서 1장 21-22절. "
"알기는, 내가 오늘 너 확실하게 가르쳐줘야겠다. 가자, 기름부음 받으러."
"네? 묵주기도 바칠 시간인데요? 그리고 대침묵인데요?"
"잔말 말고 따라 와."

어영부영 범신의 손에 끌려간 곳은 대학로 구석에 있는 고깃집이었다. 젊은이들이 왁자지껄 떠들고 있었고 연기가 자욱한데다 공기의 일부분이 알코올에 푹 절어 있었다.
"왜, 와 본 적 없어?"
"네, 이쪽은 그다지...그것보다 신부님, 뭐 하시게요?"
"기름칠. 아, 여기 일단 삼겹살 3인분 하고요, 소주 한 병요."
어이없는 광경에 준호의 입이 벌어졌다.
"기름부으신다더니 세상에 이게 뭡니까?"
"맞잖아 기름."
준호가 미간에 주름을 잡았다.
"거룩한 성사를 이렇게 막 갖다붙이셔도 됩니까. 죄 받으십니다"
"주님께서는 다 아신다."
범신은 준호의 손에 집게와 삼겹살 접시를 쥐어주었다.
"제가 굽습니까?"
"당연하지, 오늘은 네가 봉사해야 되는 거야. 너 임마 돼지 덕에 사람 된 줄 알아. 얼마나 고맙니? 그러니까 돼지를, 최대한 맛있게 구워서 소명을 다 하게 하는 거다, 실시."
"주님, 거룩한 성사를 망령되이 일컫는 이 사제를 구원하소서."
궁시렁거리며 고기를 굽고 있었지만 준호의 표정은 유순했다. 범신이 왜 자신을 여기에 데려와서 하필 돼지고기를 먹고 있는지 알 것도 같았다. 몸과 마음에 성유를 붓고 정화를 시키고, 성령이 임하여 세례의 의미를 굳건히 다지는 것이다. 한 번 뒤집은 고기가 치익 소리를 내자 가위로 자른 준호가 손으로 범신을 가리켰다. 젓가락을 든 범신이 엄숙하게 선언했다.
"Accipe signaculum Doni Spiritus Sancti.(성령 특은의 인호를 받으시오.)"
"Amen."
준호는 웃으며 성호를 그었다. 쌈을 싸서 입에 넣자마자 범신이 준호의 잔에 소주를 따라주었다.
"저 술 안 마십니다."
"나보고 그걸 믿으라고?"
졌다.  범신에게 잔을 받아 고개를 돌리고 단숨에 들이킨 준호가 문득 생각난듯 말했다.
"그 돼지 이름이나 지어줄 걸 그랬죠."
"얼씨구, 그랬다간 진짜 꿈에 나와 임마. 악몽에 돼지까지 추가되면 좋냐?"
"돼지꿈은 길몽이랍니다."
어이없는 얼굴로 웃는 범신이 준호를 한 번 더 쳐다보았다. 괜찮은 척을 잘 하는 놈이라 분명히 속은 꺼멓게 타들어갔을 것이다. 자신이 그랬던 것처럼. 하지만 오늘은 악몽에 시달리지 않고 잘 잘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준호도, 범신도.
"평화가 당신과 함께."
"또한 사제와 함께."

견진성사를 맺는 인사를 입에 올리자 준호가 바로 받아쳤다. 성호를 그은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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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1.30 백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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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사제]목욕탕에 간 김최

"아빠랑 목욕 안 해! 물에서 더 놀 거야 수영할거야!" 

"어허 안 돼, 저기 무서운 아저씨가 이놈 한다?"
목욕탕은 소리가 잘 울린다. 바로 등 뒤에서 실랑이를 하는 부자가 주고받는 대화가 자기 귀에까지 들리는 것이다. 졸지에 애한테 이놈 하고 호통을 칠 팔자가 된 범신이 눈썹을 꿈틀거렸다. 범신의 등을 밀며 아이고 주님 우리 신부님 등에서 국수가락이 나오다니 이게 기적인가 봅니다 하며 너스레를 떨던 준호는 낄낄거리며 웃었다.
"신부님 무섭게 생기신 건 세상이 다 아나봅니다."
"시끄럽다, 등이나 대라."
짝 소리가 울려퍼지고 준호가 울상을 지었다. 
"신부님, 어찌 사제되신 몸으로 사적인 복수를 저지르십니까." 
"하 거 존나 시끄럽네. 야 때 밀 때 원래 등 때리고 그러는 거야, 모르냐?" 
"모릅니다! 게다가 아픕니다!"
"어허, 학교에서 목욕 제대로 안 하냐. 이놈 더러운 거 봐라. 하긴 사내놈들만 모아놨는데 깨끗할 리는 없지만 그래도 어허, 이거, 어이구, 부제님 목욕 안 하십니까."
근엄한 얼굴로 악담을 툭툭 던지며 등을 미는 손길에 사감이 가득하다. 아무래도 아까 괜히 놀렸나보다. 억울해진 준호는 울상을 지었다.
"와 억울하네 진짜. 신부님은요?"
"나는 대중탕 못 온 지 6개월이 넘었다 이놈아. 혼자 등 미는 게 쉬운 줄 아냐."
마르베스의 손이 닿아 시커멓게 썩어들어가는 몸으로 목욕탕은 커녕 반소매 옷도 입지 못했을 것이다. 생각없이 입을 놀린 게 되어버린 준호가 미안한 마음에 사과를 하려고 하는데, 등 뒤에서 목욕을 하네마네 실랑이하던 부자가 큰 소리로 외치는 소리에 둘은 굳어버렸다.
"아빠랑 목욕 안 한다니까! 나 혼자 할 수 있다고!"
"아이고 윤호야, 저 삼촌도 아빠랑 같이 목욕하러 왔잖아?" 
마구 등짝을 문지르던 손이 공중에서 멎었다. 매서운 눈빛이 두 쌍 아이와 아버지에게 쏟아진다.
"지금 저희 이야기 하시는 거예요? 이분이 저희 아버지라고요?"
준호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항의했다. 범신도 질세라 목소리를 높였다.
"내가 이 놈 애비라니, 내가 싫습니다. 이놈 이거 나한테 배우는 신학생인데 어찌나 말을 안 듣는지 원."
"저도 싫습니다. 무슨 신부님이 이렇게 험악해요."
이구동성으로 투덜거리는 걸 본 아이가 바로 입을 다물고 아버지에게 몸을 맡겼다. 덩치 큰 두 신부의 투덜거림이 제법 무서웠던 것이다. 아이 아버지는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게 김윤호 아빠 말 좀 잘 듣지. 신부님들이셨나봐요. 하도 닮으셔서 부자지간인 줄 알았네요."
둘은 서로 얼굴을 마주보고, 대놓고 싫은 표정을 지어보였다. 이런 꼰대랑/이런 미친 신부랑 닮다니 오 주여. 똑같이 중얼거리고는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내가 수도원 안 들어갔으면 그래 뭐 너만한 아들이 있었을지도 모르지."
"신부님이랑 결혼하실 자매님이 안 계시니 그럴 리 없습니다."
"내가 뭐 어때서. 나도 어려선 인기 많았어."
"주님이 지켜보고 계십니다. 거짓말 하지 마십쇼."

뭐야 이놈이. 아이고 말을 말자,됐고 등이나 마저 밀자. 투덜거리며 범신의 손에 몸을 맡긴 준호는 제법 꼼꼼하게 등을 문지르는 손길에 하품을 크게 했다. 둘 다 무사히 뜨끈한 물에 몸을 씻으며 쉴 수 있다니 이 또한 주님 은총이라. 습관처럼 성호를 그으며 준호는 감사기도를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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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1.29 백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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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로바스]대부

이 연성으로 말씀드릴 것 같으면 작년 8월 젬의 100번 달성표 보상 연성으로 쓴 것으로 올리는 걸 까먹었다가 이제 다시 올리는 것입니다 쩜쩜쩜



[또봇]회장님과 나

요새 이런다고 바빴어요.

부릉모터스는 사원복지가 잘 될 거 같습니다. 악당이니까 오히려 더 잘 할 거 같은 느낌...안젤라가 속았다고 화낸 거 보면 가능성 있잖아요.

 

부릉 모터스의 새 회장은 면담을 요청하는 노조위원장의 공문에 흔쾌히 답을 했다. 회장실 비서가 전화해서 그날 시간을 비워놓았으니 와 주시라고 했다. 몇 번은 튕기거나 자신을 노골적으로 피하는 회장들에 익숙해져 있었던 노조위원장은 조금 당황했다. 금속노조 산하 부릉 모터스의 노조는 그 중에서도 강성으로 소문이 났다. 빨간 띠 부르고 여덟자 구호를 목 터져라 외치면서 시위를 해 대는 이미지로 워낙 유명하다보니 싫어하는 것도 이해는 갔다. 하지만 근무조건 최악이라고 소문난 부릉모터스였다. 모 대기업도 요새는 노조가 있는데 무슨 노조라면 흰 눈을 뜨고 보는지. 처음에는 대화로 해결하려고 했던 게 잘 되지 않았던 것 뿐이었다. 인사부장과 치고 받고 싸웠으며 전임회장 사무실을 점거해 보기도 했고 시위도 뻑적지근하게 해 봤다. 그런데 회장도 참 끈질긴 인사였다. 임원진들과 똘똘 뭉쳐서 노조라면 흰 눈으로 보는 게 아닌가. 임금인상이고 사원복지고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처우 개선이고 뭐 하나 제대로 되는 게 없었다. 이번에는 비정규직을 정규직으로 바꾸는 데 꼭 성공하고 말 것이다. 노조위원장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금속노조가 대한민국 최대의 강성노조가 된 데는 다 이유가 있다. 열악한 노동환경을 개선하기 위한 선배들의 피와 땀이 그나마 월급이라도 남들만큼 받고, 제 목소리를 내게 만들어 준 것이다. 발악하지 않으면 아무 것도 얻지 못한다는 것을 공장에서 기계만도 못한 취급을 받으며 배웠던 옛날 7, 80년대 노조의 정신을 이어받으려고 노조위원장은 노력했다. 21세기에 들어 운동권이라는 것이 옛말이 되고 시대착오가 되었을 때 마지막으로 노동운동에 뛰어들었던 위원장이 이제 50대가 되었다.

30대 초반 젊은 회장이라고 했는데 세상 물정을 모르는 부잣집 아들이 무슨 회장이라고. 한국에서 부가 세습되는 과정은 좀 문제가 있다. 젊고 어린 남자애가 회장 자리를 꿰어찼는데, 회사에서는 다들 낙하산이라고 떠들어대고 있다.

그냥 사회를 책으로만 배워서 어줍잖은 동정심으로 노조를 이해하려고 드는 놈이면 박살을 내서 머리를 한 번 깨 주면 말이 통할 것이고, 순진하고 철없는 부잣집 도련님이면 쉽게 요리하기 좋을 것이다. 동지들의 밥줄이 나에게 달려있다! 심호흡을 하고 회의실 문을 열자, 백발이 제일 먼저 눈에 띄었다. 평범한 남색 줄무늬 정장 차림에 앳된 얼굴의 젊은 남자가 하얀 머리를 하고 서 있었다.

뭐야 저거. 젊은 남자는 손에 커피잔을 들고 있었다. 회장이랑 둘이만 보기로 했는데 저 어린 남자애는 뭐지. 회장실 비서가 남자였는데 혹시 그 비서인가. 엉거주춤한 자세로 문을 잡고 서 있던 노조 위원장은 회의실 안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어린 남자애와 자신 둘 뿐이었다. 설마 저 어린 게 회장일 리가.

“아, 저.”

“노조위원장이십니까.”

백발 남자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네, 그, 신임 회장님은...”

“제가 권리모입니다. 앉으세요.”

20대로 보이는 앳된 남자는 손에 들고 있던 커피잔을 내밀었다. 엉겁결에 커피를 받아든 노조 위원장은 그냥 자리에 앉았다. 뭐 저렇게 어린 게 회장이야.

 

앉자마자 준비해 온 제안서를 읽던 젊은 회장은 인상을 찌푸렸다.

“무슨 비정규직이 이렇게 많아요?”

“네?”

비정규직이 얼마나 많은지에 대해 열변을 토하려던 노조위원장은 잠시 멈칫했다. 내가 할 말을 왜 회장 니가 하십니까? 라는 말을 참은 것이 대단했다. 회장이 서류에 형광펜으로 줄을 그었다.

“월급 적게 주고 부려먹는 게 제일 나쁘지. 안 그래요? 제대로 월급받아 가면서 일해도 야근하다 보면 죽을 맛이잖아요. 생산라인에 계시는 분이 제일 잘 아시겠지만. 일은 똑같이 하는데 월급을 적게 주려고 비정규직 하는 거잖아요.”

노조위원장은 왜 내가 할 말을 회장이, 그것도 열을 올려가면서 성토하듯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회장은 정말 진심으로 분노하고 있었다.

“아니 뭐, 그건 그런데요.”

“게다가 야근수당을 이거밖에 지급 안 했다고요? 해도해도 너무하네.”

야근 수당만 제대로 받았으면 내가 도운네 아이들한테 분유를 한 통 더 사다먹이고 장난감을 하나 더 사 줬다, 하는 투덜거림이 들렸다.

“분유가 뭐라고요?”

“네?”

“아뇨, 방금 누구 애들한테 분유 어쩌고 하셔서 그럽니다.”

꼭 드라마에서 갓 빠져나온 것처럼 멀끔하게 앉아있던 젊은이의 등이 갑자기 무너졌다. 자세는 여전히 꼿꼿했지만, 뭔가가 빠져나간 것 같았다. 퀭한 두 눈이 크게 벌어졌다. 말을 잃고 망연자실해 있는 사람을 보고 노조위원장은 불안한 기분이 들었다.

“회장님?”

“아, 제가 혼잣말을....”

간신히 대답을 한 젊은 회장은 침울한 얼굴로 먼 곳을 쳐다보았다. 저 사람 갑자기 왜 저러나 싶어 노조위원장은 가만히 회장의 앳된 얼굴을 쳐다보았다. 갑자기 왜 시무룩해져서 저러지. 아까 한 말은 또 뭐고? 불안하게 흔들리던 눈동자가 자기 등 뒤의 먼 데를 쳐다보았다. 잠시 후 회장의 눈빛이 다시 아까와 같은 것이 되었다.

“다시 하던 이야기 하죠.”

뭔가 기괴한 위화감이 들었으나 노조위원장은 거기에 대해 입을 열지 않았다.

 

한참 이야기를 하던 리모가 제안을 했다.

“일단 적어오신 건 잘 알겠습니다. 지금 저희가 이걸 다 할 수 있는 형편은 아니에요. 탁아소는 사무실 늘린 다음에 짓겠습니다. 비정규직 고용은 차차 해야 하고요. 그렇지만 일단, 야근 수당에 대해서는 확실하게 하겠습니다.”

“너무 많이 깎으시는 거 아닙니까. 일단 야근수당이랑 사원복지, 그리고 비정규직이 우리 노조에서 제일 중요하게 여기는 부분입니다. 그 외의 부분은 양보한다 쳐도 저건 좀 어려운데요.”

“위원장님도 제가 깎을 거 아시고 100 적을 거 150 적어오신 거 아닙니까. 우리 타협해서 60-70까지만 갑시다. 저도 취임한지 얼마 안 돼서 아는 것도 없고.”

“설마 이쪽이 을이라고 생각하고 막 나오시는 건 아니겠죠?”

“설마요. 제가 연구직 출신이라 직원 복지에는 관심이 많은 편입니다. 그 부분은 믿어주셔도 좋아요.”

“뭐, 좋습니다. 하반기에 또 만나서 진행할 땐 깎으시면 곤란하고요, 우리 노조는 언제건 불의에 항의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점만 명심하십쇼.”

눈에 힘을 주며 대답하자 젊은 회장은 히죽 웃었다.

“앞으로 자주 뵙겠네요. 잘 부탁드립니다.”

노조위원장은 어딘가 이상한 새 회장이 조금 마음에 들었다. 사람이 좀 이상하긴 했지만, 일단 말이 통할 것 같았다. 위선이면 어떻고 젊어서 물정을 모르면 어떻냐. 일단 말이 통한다는데.

 

새 회장이 등장하고 회사 탕비실이 풍족해졌다.

밥심 모카 골드, 통칭 밥모골이라 불리는 노란 커피믹스와 헬식스밖에 없던 탕비실에 야근 근무자들을 위한 간식 명목으로 녹차며 루이보스, 허브차 티백과 식빵, 컵라면과 토스터기가 추가되었다. 은근슬쩍 과일이 추가되는 날도 있었고-그 계절에 제일 싼 과일들이나마 과일이 있다는 건 좋은 일이었다- 어디 양계장이랑 계약을 했다면서 회사식당에서 계란을 잔뜩 삶아놓기도 했다. 사원들은 공돌이 출신 회장이라더니 월화수목금금금 저거 먹고 일하라는 뜻인가 하고 수군거렸다. 그러나 야근수당이 제대로 나온 월급명세서를 보고 다들 경악했다. 죽도록 야근을 하라는 뜻이냐고 야유를 보내던 노조위원장은 돈으로 야근을 시키다니 애초에 야근을 많이 해야 하는 풍조가 정상이 아니라며 투덜거렸으나 야근수당 자체에 대해서는 노조 전체를 대변하여 환영하는 입장을 밝혔다. 돈이 제대로 나오는데 불평하는 사람은 없다. 헬식스 먹고 호랑이 기운을 내서 야근을 하겠노라 입을 모았다. 다들 새 회장이 돈이 어디서 나서 저러냐고 뒷말들이 많았으나 그 며칠 후 발표된 신기술을 보고 납득했다. 회사의 주가가 신나게 오르고 있었다. 돈 벌어서 직원 복지에 쬐끔 투자한다는데 임원진이 불만을 가질 리도 없었고 해서, 브룽모터스의 탕비실은 나날이 아늑해지고 있었다. 게다가, 회사 총무부에서 탕비실에 투자하는 가장 큰 이유는 따로 있었다.

"우리 탕비실 이렇게 운영해도 회장님 화 안 내세요?"

신입 연구원이 순진한 얼굴로 묻자 주임은 뭘 모르는 놈, 하는 표정으로 신입을 쳐다보았다.

"몰랐냐? 회장님 우리 회사에서 제일 야근 많이 하잖아. 그래서 밤에 탕비실 가면 자주 봐. 너도 좀 있으면 만날 걸?"

"회장이 왜요?"

"우리 신기술 다 그 사람 작품이잖아. 특허만 몇 갠데."

주임은 눈쌀을 찌푸리고는 뭔가를 떠올리듯 먼 산을 보았다.

"그러고보니 학교 다닐 때 꼭 회장님이랑 닮은 후배가 있었는데...설마. 걔는 멀쩡했어. 호피 같은 거 안 입고. 어, 안젤라 선임, 우리 학교 다닐 때 회장님 닮았던 걔 이름이 뭐였지?"

"...몰라요."

어쩐지 퉁명스러운 말투로 대답한 선임연구원은 손에 커피를 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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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봇]시를 읽는 오후

전에 트위터에서 썰 풀었던 

"권리모가 세모 문제집 보다가 학교 다닐 때 제일 싫어했던 시 영역 읽던 중 박목월의 아버지인가 하는 시 보고 이제 시가 이해가 간다고 좋아했으면 좋겠다. 그리고 시를 읽은지 2n년 만에 처음으로 울었으면 좋겠다.
왜 그 시 있잖아 내 신발은 십구문 반
시는 나이들어야 이해가 가는 법,학교 다닐 때 억지로 읽은 시가 가슴 속에서 부풀어 오르는 걸 느낀 마흔 줄 공돌이가 싱숭생숭해서 잠못들고 옆집 홀아비 불러 술이나 마셨으면." 

그걸로 쓴 건데요
....문제는 짧은 썰이 요 아래 나올 글보다 재미없다는 겁니다. 왜 이런 걸 5800자나 썼을까...




공돌이에게는 인문학적 소양이 없다는 말은 맞는 동시에 틀린 말이다. 적어도 권리모는 그렇게 생각했다. 물리학과 수학은 철학의 적자(嫡子)이다. 이 세계가 어떻게 이루어져 있나를 탐구한다는 점에서는 적어도 과학이 철학과 동등하다고 생각한다. 정치철학이나 인간존재에 대한 탐구와는 또 다르지만 철학이 그것만 다루는 것은 아니니까. 애초에 세상이 어떻게 존재하는지에 대한 탐구에서 시작했으니 말이다. 게다가 현대의 사변적인 철학과 이론물리학, 수학은 분명히 맞닿아 있었다. 철학자가 수학 공식을 가지고 저서를 만든 예도 봤었지. 수학의 증명과 철학의 논증도 굉장히 닮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공계 학생이 그런 책을 즐겨 읽을 거라고 보통은 생각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공학도에 대한 숱한 편견이란. 리모는 기계를 다루는 사람들은 매우 단순한 사람들이라 말도 논리적으로 하지 못하고, 논리적으로 사고를 전개할 수 없다는 편견을 생각하며 쓴웃음을 지었다. 공학자도 사람이다. 매체에서 묘사되는 미친 과학자처럼 아무 생각 없이 오로지 자신의 연구를 위해서만 움직이지도 않는다. 과학도 사회적 관계망 사이에 놓인 학문이고 그 사회가 우선시하는 가치에 의해 좌우되는 부분이 있었다. 근대의 과학과 지금의 과학이 추구하는 바는 같을지라도, 그것이 사회에서 어떻게 작용하는가는 또 다른 문제니까. 그러므로, 공학도도 인문학적인 사고는 가능하다는 것이 권리모의 믿음이었다. 아니, 그런 사고를 굳이 인문학이라고 번역해서 이공계에 종사하는 사람들과 은연중에 분리하는 자세 자체를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시를 읽고 소설을 이해하는 일은 어려운 일이었다. 고등학교 때 제일 싫었던 과목이 한문이고 그 다음이 국어였다. 문법은 재미있고 논술도 할 만 했지만 문학만 보면 책에서 손을 놓고 싶었다. 대체 사람은 왜 시를 쓰는 것일까. 하다 못해 가정 수업에서는 요리하는 법이라도 배우거늘 국어 시간에 배우는 시는, 도대체가 그 쓸모를 짐작하기가 어려웠다. 도운과 함께 들었던 고등학교 시절의 문학 수업을 떠올렸다. 지금 자기 나이쯤 되었을까, 키가 작고 표정이 부족하던 국어 선생은 시 같은 거 왜 배우냐고 울부짖는 과학도들에게 항상 그렇게 말했다. 시는 나이가 들어서 보면 또 읽는 맛이 다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걸 언제 읽어야 되느냐, 10대에 읽어야 된다는 거죠. 알다시피 뇌는 어릴 때 제일 잘 돌아가요. 이건 여러분이 나보다 더 잘 알 거 아냐. 그러니, 지금 머릿 속에 부지런히 넣어 놓으세요. 언젠가, 나중에 나이 들어서 인생이 뭔지 좀 알게 되면, 그때 시를 읽는 겁니다. 읽으려고 해도 아예 모르면 못 읽으니 지금 배워 놓는 거예요.
그때 자신은 아이들과 함께 선생님의 말에 힘껏 야유했고, 너희도 시간이 지난 뒤에는 뒤에는 내 말을 이해하게 될 거라는 교과서적인 답변만 들었을 뿐이다. 그때 도운은 뭐라고 했더라? 제법 진지하게 그 말을 듣고 있었던 것 같다. 국어 성적은 자기보다 좋지도 않았으면서 수업은 정말 열심히 들었었지. 리모는 교복을 입고 웃고 떠들던 시절을 떠올렸다. 확실히 뭐든 배우고 싶고 해 보고 싶어 안달이 나 있었다. 세상 모든 것이 재미있어 보이는 동시에 따분해 보이던 신비로운 시절이었다.

도운에게 로봇을 같이 만들어보자고 한 것도 벌써 20년도 훨씬 전의 일이었다. 확실히 시간은 착실하게 흘렀다. 자신도 시간의 영향을 받았다. 늙었다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더 이상 젊다고만 말하기는 어려웠다. 그때처럼 뭐든 쉽게 이해가 되지는 않았다. 쉽게 배우거나 생각을 바꾸기도 점점 어려워졌다. 나이가 들면 계산도, 식을 이해하는 것도 한창 때처럼은 되지 않는다고 했다. 그런 점에서 아마 앞으로 점점 더 덜 젊게 생각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때보다 덜 무모하고, 덜 서투르다는 점은 좋았다. 배움에는 때가 있고, 배운 것을 깨닫는 것에도 때가 있는 법. 어려서 싫어했던 과목들은 모두 그런 메시지를 자신에게 주는 과목이었다. 확실히 소설도, 어쩌다 가끔, 일 년에 한두 권 읽을까 말까 하기는 하지만 나이 들어 다시 보니 어려서 읽을 때와는 느낌이 다르기는 했다. 상처받고 배우면서 어른이 되어간다는 게 이런 거겠지. 리모는 옆집에 사는 자신의 친구를 떠올려 보았다. 어릴 때부터 어른스러웠지만, 요즘은 더 뭐랄까, 어른스럽다고 해야 할지, 아버지다운 모습이라고 해야 할지, 아무튼 어릴 때와 다른 모습을 보이곤 했다. 자신보다 오랜 시간 동안 아버지의 삶을 경험해 왔기 때문이겠지. 뭔가 단호하고, 심지 굳은 인간이 된 것 같았다.
언젠가는, 자신도 저 아이의 아버지로서 떳떳하고 당당할 수 있을까.

세모는 시험이 끝났다고 하나두리에 오공이까지 같이 놀러나갔다. 노래방에 갈지 당구장에 갈지 고민하는 눈치였지만 아마 2:2로 게임을 하러 갈 것 같다. 오공이가 양학 수준으로 게임을 잘 한다던가. 애들 노는 게 자신이 10대 때와 큰 차이가 없다는 게 신기한 일이었다. 중간고사가 끝나고 아이들이 집을 비운 늦은 오후, 저녁 찬거리를 준비하지 않아도 좋고 하루 정도는 연구실에서 나와도 좋은 날이었다. 그 황금 같은 오후에 리모가 선택한 것은, 집안 청소였다. 로봇 청소기를 매일 돌리기야 하지만 청소는 기본적으로 사람 손이 가야 하는 일이다. 세모 시험 기간 동안 수학 공부를 봐준다 간식을 해 준다-만들다 실패해서 주방을 엉망으로 만들었다는 게 진실이지만- 하다 보니 청소를 며칠 못 했다. 먼지도 좀 털고 정리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평소에는 세모가 집안일을 하지만, 시험기간 사흘 정도는 집안일을 안 해도 된다고 말해뒀다. 무척 걱정스러운 얼굴이었지만, 이럴 때라도 좀 아이답게 자기 눈 앞의 문제만 신경쓰는 걸 보고 싶었다.
주방 렌지 아래까지 세제를 묻혀서 닦고, 거실 소파 아래까지 청소한 다음 세모 방으로 들어갔다. 연구실은 일단 집 청소를 한 다음 나중에 청소할 생각이었다. 솔직히 리모는 조금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문을 열었다. 방을 좀 어지럽혔을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이 없지 않았다. 하지만 세모의 방은 이 집에서 가장 깨끗했다. 세모가 펴둔 국어문제집이 그대로 놓여 있는 게 다였다. 뭐든 열심히 하는 아이였고, 무슨 과목이건 잘 하려고 열심이었다. 학교 선생님들은 세모가 참 어른스럽고 반듯하다고 칭찬하곤 했다. 애가 너무 반듯하고 어른스러워도 안 되는데. 리모는 아직도 이 아이가 자신을 아버지라기보다 양아버지로 인식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걱정스러웠다. 어려서 본 소설 속의 착한 여자아이는 친어머니에게는 엄마라고 부르면서 살갑게 굴었지만, 나중에 들어온 착하고 예쁘고 고운 새어머니에게는 절대로 엄마라고 부르지 못했었다. 정말 좋아하는데도 엄마보다는 어머니 소리가 먼저 나오더라는 소설 속의 묘사가 생각이 났다. 세모가 칭찬 받을 때마다 뿌듯한 것도 사실이었지만 한편으로 걱정되는 것도 사실이었다.
이게 아버지의 마음이라는 건가. 솔직히 아직도 낯선 기분이었다. 하지만 매일매일이 새롭고 즐거웠다. 자전축이 비틀리고 우주가 재구축되는 경험이기도 했다. 도운에게 언젠가, 애가 생기니 패러다임이 바뀌는 기분이라고 했더니 도운이 아인슈타인 전의 물리학과 아인슈타인 후의 물리학과 같은 기분이라고 대꾸했다. 우린 안 될 거라고 한참을 웃었던 기억이 났다. 아마 남들이 들으면 무슨 비유가 그렇냐고 하겠지만, 그들의 세계에서는 그 이상 가는 비유가 없었다. 아버지가 되기가 참 어찌나 어려운지. 아이가 자기에게 오고 벌써 몇 년이 지났고, 그간 죽을 고생도 하고 서로 의지하면서 살았지만, 아직도 자신이 아이의 아버지가 맞는지는 가끔 알 수 없었다. 자신에게는 이 아이가 하나뿐인 아들이고 가족이었지만, 그 아이도 그렇게 생각해 줄까. 중학생이 된 지금도 아이는 다정하고 상냥해서, 사춘기라고 속을 썩여대는 다른 집 아이들의 이야기가 먼 나라 이야기 같았다. 하지만, 그건 친부모자식간이라 가능한 일이겠지. 리모는, 자신이 아직 아버지로서 부족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다정하기만 해도 안 되고, 엄하기만 해도 안 되고, 마음을 있는 대로 표현하되 절제할 줄 알아야 하고, 아이가 원하는 것을 해 주되 지나치지 않아야 하고...의식을 하기 시작하면 머리가 아파온다. 숨 쉬듯 자연스럽게 아버지로 존재하는 옆집 사는 친구를 생각하며 리모는 자신이 아직도 부족해서 세모가 저렇게 반듯하고 어른스러운가 하고 생각했다.
리모는 무심결에 세모의 책상 위에 있는 문제집에 손을 댔다. 어릴 때 부모님은, 자신이 책상 위에 펴 놓고 간 공책이며 책을 꼭 읽어 보고, 숨 넘어가게 웃거나 야단을 치거나 했다. 글씨가 왜 그러니, 수업 시간에 뭐 한 거니. 세상에 이 글 좀 봐. 리모가 이런 생각도 다 하네. 자신은 한 번도 아이가 공부하는 책을 그렇게 본 적이 없었다. 수학 문제라면 같이 풀어봤고 과학 공부라면 함께 해 봤지만, 그 이상을 해 본 적은 없는 것 같다. 부모님이라면 아마, 아이를 야단치는 것도 칭찬하는 것도 좀 더 쉬웠을지도 모른다. 세모가 연필을 꽂아놓은 페이지를 편 리모는, 아주 오래 전 학교에서 선생님이 하셨던 말씀이 머릿속에서 터지듯 굴러나오는 기분이 들었다. 시는 나이 먹어서 읽어야 진짜로 이해를 할 수 있는 거야.

    가정
                  박목월


 지상에는
 아홉 켤레의 신발.
 아니 현관에는 아니 들깐에는
 아니 어느 시인의 가정에는
 알전등이 켜질 무렵을
 문수(文數)가 다른 아홉 켤레의 신발을.
 
 내 신발은
 십 구문 반(十九文半).
 눈과 얼음의 길을 걸어,
 그들 옆에 벗으면
 육문 삼(六文三)의 코가 납짝한
 귀염둥아 귀염둥아
 우리 막내둥아.
 
 미소하는
 내 얼굴을 보아라.
 얼음과 눈으로 벽(壁)을 짜올린
 여기는
 지상.
 연민한 삶의 길이여.
 내 신발은 십 구문 반(十九文半).
 
 아랫목에 모인
 아홉 마리의 강아지야
 강아지 같은 것들아.
 굴욕과 굶주림의 추운 길을 걸어
 내가 왔다.
 아버지가 왔다.
 아니 십 구문 반(十九文半)의 신발이 왔다.
 아니 지상에는
 아버지라는 어설픈 것이
 존재한다.
 미소하는
 내 얼굴을 보아라


아, 이래서 나이를 먹어야 시를 이해할 수 있다고 말한 거구나. 리모는 20년도 훨씬 전의 국어 수업이 이제야 제대로 끝난 기분이 들었다. 

그렇구나, 아버지가 된다는 것은. 오래 전 이 시를 보았을 때는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보이는 기분이었다. 이제 좀 있으면 세모는 분명 자신보다 키가 클 것이고, 신도 더 큰 것을 신을 것이다. 벌써 의수나 의족도 처음에 만든 것에 비해 얼마나 커졌는지 모른다. 그래도, 맨 처음에 이 아이를 데려 왔을 때 만들었던 작은 손발은, 아직도 자기 것처럼 기억하고 있다. 자기 손을 꼭 잡고 걷던, 차가운 손도. 자신의 손과 차갑고 작던 아이의 손의 대비며, 출소한 자신을 붙들고 울먹이던 아이며, 자기 때문에 힘들었을 때 울음을 참던 아이의 얼굴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때마다 아이를 지키기 못했던 것을 자책하던 자신의 모습도 떠올랐다. 얼음과 눈으로 벽을 짜올린 지상과 연민한 삶의 길을 지나서 온 집이라. 어쩐지 울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문제집을 놓고 세모의 방을 청소할 때까지도 괜찮았건만, 코를 훌쩍거리면서 청소기를 돌리던 리모는, 손으로 눈을 문지르다 결국 연구실에서 정비하던 제트와 제로를 수면모드로 전환해 놓고 혼자 소리 죽여 울었다. 20여년 전에 이해 못했던 것을 긴 시간이 흐른 뒤에 이해하게 되었으니 20년 분만큼 울 일도 많을 것이라고 혼자 생각했다.

아이들이 저녁을 밖에서 먹고 들어온 다음, 도운이 하나와 두리를 붙잡고 늦었다고 잔소리를 한참 하고 저녁 부실하게 먹었다고 또 한참 잔소리를 하고 대충 정리를 한 다음, 애들이랑 드라마라도 같이 볼까 하던 찰나에 전화가 왔다. 아이들은 리모컨을 잡고 서로 채널을 돌리겠다고 신경전을 벌이고 있었다. 그만 하고 서로 양보하라고 한 마디 한 다음 켠 전화에는 리모의 얼굴이 떠 있었다.
-도운, 뭐 하냐.
“잘 준비 하지.”
늦은 시간에 전화하는 일이 잘 없는 친구가 갑자기 전화를 해서 조금 놀랐다. 혹시나 무슨 일이 있는 것은 아닌가 생각하며 도운은 최대한 상식적인 답을 했다.
-그럼 자는 거 아니네?
“뭐 그렇지.”
-그럼 나랑 술 한 잔 하자.
“나야 좋지만, 애들은?”
-애들은……뭐 알아서 자야지. 이제 중학생이잖아.
“뭐 할 말이라도 있어?”
어쩐지 리모의 목소리가 좀 가라앉아 있다고 생각했다. 정작 리모는 엉뚱한 대답을 했다.
-우리 고등학교 때 문학 선생님 기억 나냐?
“응? 갑자기 무슨 소리야.”
-아니야. 아무튼 그럼 내가 너네 집으로 갈게.
“응? 우리 집엔 아무 것도 없는데?”
-내가 가져 간다. 안주는 됐고 물이나 준비해. 내일 숙취로 죽기 싫거든.
뭘 얼마나 퍼마시려고 이러나. 제법 비장하게 말하고 끊는 리모의 목소리를 들으며 도운은 잠시 멍하게 있다, 하나와 두리에게 얼른 올라가서 자라고 말했다. 아빠와 아저씨는 지금부터 좀 진지하게 긴 이야기를 해야 할 것 같다고.
어쩐지 독한 게 마시고 싶어서, 세모 모르게 연구실에 숨겨둔 비장의 중국술을 꺼내 들고 가면서, 리모는 언젠가 세모를 데리고 서점에 가서, 같이 책을 골라서 읽어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내가 좋아하는 책을 알려주고, 언젠가 너도 내가 이해하는 것을 이해하게 될 것이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그 날이 그렇게 멀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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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니발]백정 살인 사건

토끼님과 연성 교환 커미션을 하기로 했습니다. 저는 개화기 배경으로 한니발을, 토끼님은 중세 유럽 전쟁터를 배경으로 스팁버키를 쓰기로 하셨지요. 그 결과물입니다. 게재 허락 감사합니다. 





한성 시내에서 ‘반인’이 살해당했다.

-뭡니까, 그 ‘반인’이란 건?

-소를 도축하고 파는 것을 허락받은 대학의 노예입니다. 성균관, 이라고 하나요?

소 도축장에서 소를 잡던 자는 성균관 앞 반촌(泮村)에 살던 반인(泮人)이었다. 성균관에 소속된 노비 집단으로, 성균관 앞에서 살며 고기를 잡아 제사에 쓸 쇠고기를 대며 성균관의 살림을 돕는 집단이었다. 아주 오래 전 개경에서 왔고, 더 오래 전에는 재가승처럼 먼 북쪽에서 온 사람들이라는 말이 있었다. 윌 그레이엄은 종로를 지나 성균관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백정은 살해당했고, 허벅지와 등의 일부가 없어진 사체가 발견되었다. 포도청에서 입단속을 시켰지만 소문은 반촌을 중심으로 빠르게 퍼졌다. 유생들 사이에서, 궁인들 사이에서, 온 도성의 백성들 사이에서. 

사건 자체도 큰 것이었지만 소문의 내용도 흉흉했다. 양인들이 들어오고 세상이 흉흉해 졌다는 소문이 퍼져갔고, 강상의 도리도 모르는 야만적인 양인들이 조선에 들어와 세상의 법도가 뿌리부터 무너진다는 구체적인 소문이 무척 큰 힘을 가지고 퍼져갔다. 그래서 정부요인 호위차 조선에 와 있던 경찰국장 잭 크로포드가, 수사관 윌 그레이엄을 파견한 것이다. 윌 그레이엄은 물웅덩이가 조그맣게 고인 진흙길을 터벅터벅 걸어가고 있었다. 흰옷 입은 조선사람들이 그를 피해 걸어갔다. 윌 그레이엄이 한성 주재 미국 외교관의 일원이 된 것은 우연이라기보다는, 어쩌다 벌어진 실수 같은 일이었다. 그저 본국에서, 적응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그에게 새로운 환경이라도 접해보라며 윗선이 배려를 해 주었다. 하지만 이 나라는 자신이 알던 세상과 달라도 너무나 달랐다. 

-이곳에 노예가 있습니까?

-아, 흑인 노예와는 좀 다릅니다. 미스터 그레이엄. 인권에 관심이 있으신가요?

그리고 잭 크로포드는 윌 그레이엄을 위해, 다른 사람을 한 명 더 보내주었다. 포장이 되지 않은데다 좁고 꼬불꼬불한 조선의 흙길을 걸어가면서 구두에 흙탕물 한 방울 튀기지 않고 우아하게 걸어가는 사람이었다. 단정하고 우아한 것이 굉장히 위화감이 드는 인물이었다. 비단 조선의 거리가 아니더라도 위화감이 들 것이다. 이 사람은 대체 누구지. 윌 그레이엄은 조금 전에 받은 명함에 적힌 이름을 떠올렸다.

-한니발 렉터 박사라고 했습니까. 하지만 조선에는 의료 업무차 오셨다고 들었는데요.

-인류학에 관심이 있습니다. 조선의 민속을 조사하고 있지요.

마흔을 넘겼을까, 단정하게 정장을 하고 중절모를 쓰고 지팡이를 짚은 채, 여기가 뉴욕 맨해탄이기라도 한 것처럼 태연하게 걸어가는 키가 큰 남자는 무척 정중하게 말을 했다. 

-하지만 오늘은 사건의 수사를 위해 여기에 파견되었습니다. 사실은 아침까지는 개성에 있었지요. 개성에서 여기까지 자동차를 보냈더군요. 조금만 멀리 있었어도 큰일날 뻔 했습니다. 

자동차가 움직이는 것을 구경하느라 몰려든 조선 사람들을 헤치고 사람을 찾느라 애를 많이 먹었습니다. 윌 그레이엄은 속으로 잠깐 불평을 늘어놓았다. 눈 앞에 있는 사람은 무척 친절하고 정중하며 유능해 보였지만, 위화감은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뭔가 친숙한 느낌도 든다는 점을 부정할 수가 없었다. 그것이 무엇인지 윌 그레이엄으로서는 알 길이 없었다. 화제를 돌려보았다. 

-법의학자이십니까?

-법의학을 알고 계시는군요. 어느 정도는 맞습니다. 하지만 제가 여기에 온 이유는 다른 것이지요. 혹시 정신분석학이라고 들어 보신 적 있는지요.

-신문에서 봤습니다. 프로이트라는 자가 황당한 이야기를 한다고들 하더군요.

인간의 정신에 이성의 지배를 받지 않는 부분이 무척 많다는 그 이야기를 하는 자 말인가. 그런 것을 믿는 의사는 처음 본다고 윌 그레이엄은 생각했다. 그는 무척 단호하고 정중한 태도로 말을 하면서, 무언가를 관찰하듯 윌 그레이엄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 인간은, 정신에 주의를 기울일 때가 되었습니다. 사람은 육체와 정신으로 이루어져 있지요. 하지만 지금까지 인간은 육체의 병만 보고 있었습니다. 

-의사면서 그런 것을 믿습니까? 

-신기한 일이지요. 정신을 육체보다 우위에 두는 문화가 발달했으면서 정작 아픈 정신은 돌아보지 않았던 것이 말입니다. 

윌 그레이엄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잭 크로포드 국장의 판단은 과연 옳았다. 이 자는 사건을 수사하는 데보다 윌 그레이엄 자신을 통제하는 데 더 큰 도움이 될 것이다. 그래서 파견한 거다. 

 

懸房, 이라는 기호는 글자일까 그림일까. 커다란 현판이 매달린 건물 앞에는 화려한 옷을 입은 별감들과 포졸들이 가득했다. 미리 설명을 들은 것일까, 못마땅한 얼굴로 두 사람이 지나갈 길을 터 주는 군관들이 보였다. 태도는 고분고분했지만 윌 그레이엄은 분명히 들었다. 양귀신들이 피 냄새라도 맡고 왔나, 하는 명백한 비웃음을. 조선어는 아직 잘 모르지만 내용은 분명했다. 그곳에는 불온한 공기가 떠돌고 있었다. 이 작은 나라는 러시아와 일본과 중국 사이에서 끊임없이 고통받고 있었고 자신의 모국도 이 나라가 받는 고통에 얼마간 가담하고 있다는 것은 윌 그레이엄 자신도 잘 알고 있었다. 거기다가 자신들의 외모는 이 나라에서는 너무나 이질적이었다. 새로운 것은 종종 공포스러운 것이거나 혐오스러운 것이거나, 혹은 둘 다이다. 아마 자신은 이 나라에서는 둘 다겠지. 

-저 간판은 뭐지요?

-글자입니다. 이곳의 말로 매다는 방, 그러니까 고기가 매달려 있는 푸줏간이라는 말이지요.

도축장 안은 피 냄새로 가득했다. 소피 냄새는 아니었다. 바닥에는 토막난 시체가 누워있었다. 여기 사람들은 빨리 시체를 치우기를 원했지만, 윌 그레이엄이 현장을 둘러보고 난 다음에 장례를 치르도록 양해를 구했다. 게다가 부검도 필요했다. 시체를 조사한다니 이 사람들에게는 무척 충격적인 일이리라. 아마 이런 부분도 조선 눈에는 무척 야만적으로 보이겠지. 자신을 향해 쏟아지는 따가운 시선에 윌 그레이엄은 눈살을 찌푸렸다. 

-사람들을 물려 주십시오.

영어와 조선어로 사람들이 뭐라고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사람들이 먼발치에서 현장을 들여다보려고 까치발을 하고 웅성대는 풍경이 눈에 선했다. 넌더리를 내며 문을 닫는 조선인 경찰도 있었다. 여기서는 경찰이라고 부르지 않던가, 뭐 상관없다. 아무래도 뭘 해도 여기에선 미움받을 수밖에 없으려나보다. 원래 시체가 걸려있었던 갈고리며 바닥에 튄 피를 한참이나 바라보던 윌 그레이엄은, 조금 난처한 표정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닫힌 문 안에는 한니발 렉터 박사가 남아있었다. 자신들을 향해 언성을 높이던 사람들이 보이지 않자, 아주 미세하게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다.

-좀 특수한 방법으로 수사합니다. 들으셨겠지만.

-괜찮습니다.

박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호기심 어린 표정이었다. 윌 그레이엄은 조금 당황했다. 정말로 다 들었다면 저렇게 나올 리 없다고 생각했다. 왜 나가지 않았느냐는 뜻이 분명히 전달되었을텐데도 박사는 반응하지 않았다.

-정말 들으신 겁니까.

-물론이지요. 잭 크로포드가 하는 일입니다.  

-악마의 소행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으십니까.

세일럼에 마녀가 나타났다는 소동이 벌어진 이후 고작 백 년도 지나지 않았다. 아직도 사람들은 자신들이 알지 못하는 것을 두려워했고, 윌은 그런 점에서 공포를 불러일으키곤 했다. 그 자신이 그 점을 가장 잘 알고 있었다.

-저는 과학을 믿는 사람입니다.

박사는 미소지었다.

-그리고 다 들었기 때문에 여기에 온 것입니다.

역시 뭔가 알고 있는 것은 틀림없다. 하지만, 과연 어떨지. 윌 그레이엄은 시체가 걸려있는 벽을 노려보았다. 그리고 눈을 감았다. 

현장에 있었던 모든 정보들이 물처럼 밀려들어왔다.


윌 그레이엄은 놀란 듯 흠칫하며 감았던 눈을 떴다. 세상이 핏물에 잠긴 듯 모든 것이 검붉어 보여 어지러웠다. 정신을 차리는데 시간이 좀 걸리려나 보다. 그때 웬 사슴머리가 달린 괴물이 입을 열었다.

-뭐 좀 알아내셨습니까.

헛것을 보는 건가. 흠칫 놀라 앞을 보니, 한니발 렉터였다. 벽에 걸린 소뼈들이 꼭 사슴뿔처럼 보였던 것 같다. 사람을 짐승으로 보다니. 박사는 윌 그레이엄의 얼굴을 살피고 있었다. 윌 그레이엄은 자신의 감정을 감추기 위해 고개를 숙였다. 

-어떻게 죽였는지는 확실히 알겠습니다. 굉장히 힘이 센 사람이었군요. 시체는 푸줏간 앞에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습니다. 맞지요?

-그랬다고 들었습니다.

-게다가 베어간 부위 말입니다. 그거 베어진 흔적이 좀, 특이해요. 소고기랑 비슷한 데가 있습니다. 

윌 그레이엄은 고개를 찡그렸다. 살인도구는 도살장에 있던 날카롭고 큰 칼이었다. 덩치가 상당했던 백정을, 무슨 수를 썼는지 제압해서 큰 칼로 찌른 다음, 거꾸로 매달아 피를 빼고 고기를 썰어갔다. 사람을 푸줏간에서 고기처럼 죽인 것이다. 그야말로 인간 취급을 하지 않겠다는 의지마저 느껴졌다. 윌의 설명을 들은 한니발 렉터 박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현장에서 본 것을 적고, 사진사가 와서 현장 사진을 찍어가는 동안 박사가 지나가는 말처럼 물었다.

-그런데 왜 이곳 사람들의 방식을 안다, 고 말하는 겁니까.

-범인이 이 나라 사람이 아니라고 확신하니까요.

-그런 것도 읽어낼 수 있습니까.

-제가 찾아내는 것은 어쩌면 범행동기일지도 모릅니다.

윌은 몸을 돌렸다. 

-잭 크로포드에게 가십니까?

-보고는 내일 하도록 하겠습니다.

분명하게 말하고 돌아서는 윌 그레이엄을 보는 한니발 렉터의 눈에 일종의 이채 같은 것이 어렸다. 그 눈빛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늦은 저녁, 북촌에 있는 한니발 렉터의 집에 윌 그레이엄이 찾아왔다.

-연락도 없이 찾아와서 놀라신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괜찮습니다. 당신의 방문이라면 언제든 좋아요.

과장된 환영인사라고 생각한 윌 그레이엄은 미간을 조금 찌푸리고 화제를 돌렸다.

-좋은 곳에 사시는군요.

-이 나라에 사는 다른 외국인들을 따라해 보았습니다.

신발을 벗고 들어가는 것이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을 위해 실내에는 슬리퍼가 놓여 있었다. 윌 그레이엄은 댓돌을 밟고 올라가 슬리퍼를 갈아신고, 방에 들어갔다. 콩기름을 먹인 장판에 보료며 족자가 걸려있는 와중에 책상용 의자가 몇 개 놓여있었다. 조선식 방에 소파는 좀 놓기 어려웠던 모양이다. 의자에 앉자 잠시 후 박사가 차를 내 왔다.

-저녁 식사 시간인데 식사를 하시지 않고요.

-괜찮습니다.

-쇠고기찜을 좀 해 봤습니다만, 드시겠습니까.

-고기를 사셨나요?

윌 그레이엄의 목소리가 날카로워졌다. 

-물론입니다. 조선에서 의외로 좋은 고기를 파는 푸줏간이 많더라고요. 윌. 아, 윌이라고 불러도 되겠습니까?

-좋으실 대로요, 박사님. 

박사는 미소지으며 찻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윌은 눈을 빛내며 박사를 쳐다보고 있었다.

-오신 용건에 대해 물어도 될까요?

-잭에게 가기 전에, 당신한테 확인해 보고 싶은 게 있어서 왔습니다.

-어떤 부분에 대해서요?

박사는 윌의 얼굴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백정이란 사람들은 이 나라에서 어떤 위치인 거죠?

-아, 천민이지요. 여기 사람들과는 혈통이 좀 다르다고 해야 할까요. 그거 아십니까. 그 사회에 속하지 않은 이방인들이 사회에 편입될 때는 가장 낮은 계급으로 편입되지요.

박사가 말했다.

-그렇습니까?

박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이들도 모두 천민으로 이곳 사회에 편입되었습니다. 조선의 북쪽에 중국인 부락이 있는 것을 알고 있습니까? 이들 말로 여진족이라고 불리는 부족 사람들이 사는 마을인데 거기 사는 사람들은 조선인과 통혼도 할 수 없고 조선인들이 하기 꺼려하는 천한 일을 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윌이 박사의 눈을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군요. 그게 궁금했습니다.

-어째서요?

-일단 박사님, 오늘 사건 현장에 대한 제 의견을 좀 들어 주십시오.

-그건 좋습니다만, 왜 저에게 먼저 오셨죠?

-그래야 한다고 판단해서입니다. 

-좋아요, 윌. 당신의 의견이 궁금하던 참입니다.

렉터 박사가 말하자 잠시 침묵이 이어졌다. 입을 다물고 있던 윌이 잠시 후 입을 열었다.

-백여년 전부터 이곳의 백정들은 한성 내의 도축 및 고기 판매를 독점해 왔습니다. 그들은 꾸준히 천천히 부를 쌓아갔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불만이 많았습니다. 돈은 있지만 신분은 얻지 못했으니까요.

박사가 동의의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정확합니다, 윌. 이곳 사람들에 대해 많이 조사했군요.

-그런데 이상한 일이 일어난 겁니다. 자신들 같은, 신분제 외부에 있는 사람이 등장했는데 그들은 조선 사회에서 아무런 차별을 받지 않았어요. 물론 사람들은 그들을 좋아하지 않았지만, 뭐라고 해야 할까, 그래요. 일종의 특권을 가지게 된 겁니다. 참으로 이상하게 보이지 않았겠습니까. 사실 이들이 우리를 보는 눈빛이, 아까 그 백정들을 보는 눈빛과 다르지 않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동의하시나요?

박사는 평소 자신을 보던 조선인들의 무례하기 짝이 없는 표정과 말을 떠올렸다. 코쟁이라는 둥 외국 괴물이라는 둥 밑도 끝도 없는 천박한 말을 내뱉던 사람들이었다.

-우리들 외국인은 이들에게는 또 다른 천민이지요, 마음속으로는.

-조선의 예의도 모르고, 조선말도 모르는 기괴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이 나라 관리며 왕족들과 대등하게 이야기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천한 품성을 지닌 노랑머리 외국인들이 말입니다. 이들은 그게 싫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푸줏간의 백정 김씨는, 그래서 그 누구인지 모를 외국인에게 무례하게 굴었으리라. 검은 머리의 사람들이 모여살던, 견고한 상하질서로 이루어진 조선이라는 나라에, 잘못 들어온 외국인들.

왜 저들은 다른가, 하는 사소한 물음이었으리라. 천민들 가운데 개화 문물에 관심을 가진 이는 의외로 많았다. 양반들은 가지지 못한 베깡도 있었고, 고기를 팔며 모은 재산도 있었다. 그러나 아직 다른 세상은 오지 않았고, 양반님들 위에 다른 양반님들이 온다고 했다. 평범한 백정 김씨는 아마 그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았으리라. 

그리고 그는 무례한 죄로 살해당했다. 

-이게 제 디자인입니다.

긴 이야기가 끝나고, 평소답지 않게 말을 많이 한 탓에 목이 말랐는지 테이블 위에 있던 차로 목을 축였다. 반은 감탄, 반은 놀란 표정으로 박사가 말했다.

-그렇군요. 굉장한 비약입니다만 잭이 말했습니다. 당신은 범인의 심리를 범인과 같이 이해하고 그의 눈으로 사건 현장을 본다고요.

-그 비슷합니다.

-하지만, 이 조선 땅에는 의외로 많은 외국인이 있습니다. 그들 중 누구라고 생각하는 거죠?

-그렇게 볼 때, 범인은 박사님, 당신입니다.

윌 그레이엄은 무덤덤한 얼굴로 말했다.

한니발 렉터가 매우 신기한 것을 보듯 윌 그레이엄을 쳐다보았다.

-왜 나죠?

윌이 인상을 찌푸리고 박사를 쳐다보았다.

-제가 현장에서 읽어낸 겁니다. 범인은 피해자를 음식물처럼 다루었어요. 무례한 것을 매우 싫어하는 사람이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당신의 저녁 메뉴가 쇠고기더군요. 그 푸줏간에 들렀던 외국인이 당신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지나친 비약입니까? 

박사는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너무나 담담한 표정에, 윌은 하고 싶지 않았던 말까지 내뱉고 말았다.

-혹시 오늘 식탁의 쇠고기가, 범인의 살일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아닌가요? 먹을 수 있을만큼 잘라간 것 아니었습니까.

모욕적인 발언이었다. 그러므로 화를 내며 강하게 부정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박사는, 한니발 렉터는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박사의 미소를 본 윌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제 추측이 맞지 않기를 바랐습니다. 

-아니오, 알아봐 주어서 상당히 기쁩니다.

-진심입니까?

-물론입니다. 이렇게 기뻤던 적이 없었어요. 내 살인을 한 눈에 알아보다니, 무척 마음에 듭니다. 

-우리는 친구가 될 수 있겠지요

윌은 얼굴을 찌푸렸다.

-거절합니다. 당신은 수배자입니다. 본국으로 돌아갈 수 없으며, 

-어지럽죠?

말을 끊은 박사가 미소짓고 있었다. 차, 그걸 마시는 게 아니었는데.


정신을 차려보니 자신의 손이 묶여 있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난 걸까. 윌은 시간을 가늠해보려고 했지만 머리만 깨질 듯 아프고 아무 것도 짚이는 것이 없었다. 그때 눈 앞에 박사가 나타났다.

-깼군요.

평소와 다름없이 수트를 입고 있었다. 여행가방을 하나 들고 있다는 점만 평소와 달랐다.

-어디로 가려는 겁니까

대답하지 않고, 박사는 다른 말을 꺼냈다.

-윌, 왜 나한테 먼저 온 겁니까.

-뭐라고요?

-잭한테 먼저 가는 게 나았을 겁니다. 당신은 범인이 나라는 걸 알고 있었어요. 아닙니까?

윌은 고개를 숙였다.

-결국 당신은 날 잡을 마음이 없었던 건지도 몰라요. 당신은 살인마의 집에 오면서, 아무 대책도 세우지 않고 누구에게도 연락을 하지 않았더군요. 내가 당신을 죽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하지 않은 겁니까.

-……비약이 심하군요.

-그렇게 말할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당신이 사건을 읽는다면, 저는 당신의 심리를 읽지요. 윌, 당신은 나를 잡을 마음이 없었어요.

-왜 그렇게 생각하죠?

-당신은 나와 동류니까요.

윌은 기분나쁜 표정으로 박사를 노려보았다.

-살인마의 마음을 완전히 이해하면서, 당신이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주장하면 곤란하지 않습니까.

박사는 아이를 타이르듯 부드럽게 말했다.

-당신을 죽여서 먹는 것은 어렵지 않아요. 아니, 오히려 즐거울지도 모르죠. 무례한 인간보다 훨씬 나은 식사가 될 겁니다. 하지만 그러지 않겠습니다.

허리를 굽힌-바닥에 앉아있는 윌의 눈높이에 맞춰-박사는 윌의 뺨을 쓰다듬고, 어깨를 톡톡 쳤다.

-이건, 그렇죠. 친구에 대한 우정의 표시입니다. 내가 나가는 것 정도는 마음 편하게 보세요. 물론 당신이 날 잡지는 못할 걸 압니다.

-난 당신 같은 사람이 아닙니다.

-그건 윌, 당신 주장일 뿐이고요.

그 말을 끝으로, 의식이 끊겼다. 단단한 몽둥이로 뒤통수를 맞은 모양이라고, 나중에 등장한 잭 크로포드가 말했다.


정작 윌이 그 집을 빠져나간 것은 이틀 뒤였다. 집안 살림을 도우려고 고용한 조선인 행랑아범이-라고는 해도 자기 집에 살면서 정해진 날짜에 와서 장작을 대 주고 일을 해 주는 것 뿐이다. 그는 한니발이 집에 어떤 고기와 살인도구를 갖춰 두었는지 알지도 못했다- 집에 들렀다 윌을 풀어준 것이다. 집의 부엌에는 기기묘묘한 조리도구와 함께, 땅속에 짚에 싸고 소금에 절여 보관해 둔 각종 고기가 나타났다. 그게 뭔지 누구도 알고 싶어 하지 않았다. 그리고 다시 세상은 조용해졌다. 조선인 살해 혐의로 수배된 닥터 한니발 렉터가 실종된지 몇 달이 지나고, 먼 동유럽에서 그를 보았다는 제보가 들렸으나 윌 그레이엄은 그것을 믿지 않았다. 그는 분명히 자신을 지켜보고 있으리라. 어디에서인지는 몰라도.



[로키*꿈]kiss kiss kiss

4월  27일에 트위터에서 #첫번째로_멘션온_캐릭터와_두번째_캐를_키스시킨다 태그를 해 봤지요.

그랬더니 로키와 샌드맨이라고 달아주셔서 둘이 붙여봤습니다. 로키도 사람 멀쩡하게 사귈 스타일은 아닌데 우리 꿈이 그쪽 방면으로 너무....소질은 없는데 외로움은 많이 타서...

세 번째는 토니 스타크였으므로, 잘 하면 꿈이 아이언맨한테 순정을 바치고 우는 이야기가 될 뻔 했지 말이에요. 썼던 글에 조금 살을 붙여 올립니다.



로키는 눈 앞에 있는 창백하고 시커먼 사람을 찬찬히 쳐다보았다. 자신과 닮은 얼굴로 보였다. 기분 탓인 것인가. 마르고 창백한 남자는 길고 검은 옷자락을 끌며 천천히 걸어왔다. 

"아스가르드의 신이자 서리거인이 아닌가. 환영하노라." 

꿈은 무미건조한 말투로 말했다. 

"여기에서 무엇을 찾는 것인가." 

과연 뭐든 알고 있다더니. 로키는 긴장으로 가라앉은 목소리를 다듬었다.

"오래된 존재에게 인사드립니다."

자신이 허리를 굽힐 수 있는 몇 안 되는 존재이다. 이들을 거슬러서 좋을 게 하나 없다고 들었다. 영원의 일족은 일곱 남매인데 그들 중 하나라도 허투루 봤다가는 큰일 날 것이라고 했다.

"예의바른 인사 치고는 상당히 무례한 눈빛이군. 뭔가."

"오래된 존재를 보는 것은 처음라 그러니 이해해 주었으면 합니다." 

"보통은 그렇다. 그러니 새삼스러워할 것 없다." 

오딘보다 오래된 지혜를 가지고 있는 존재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찾으려면 꿈을 찾으라고, 오래된 마법사들이 말했다. 로키는 창백한 얼굴에 자리잡은 시커멓고 끝을 모를 눈을 쳐다보았다. 저 허공 속에 지혜가 있다고? 마른 우물같기도 하고 우주 같기도 한 눈이 눈 앞에 펼쳐져 있었다. 정말로 여기에서 뭔가를 얻어 갈 수 있을까. 로키는 마음을 다잡았다.

"지혜를 청하러 왔다는 것 또한 알고 있겠군요." 

"꿈에게 지혜를 찾다니 영문 모를 자가 아닌가." 

"나는 힘을 원합니다. 하지만 가장 큰 힘은, 지혜를 갖는 것이지요."

"지배하고 싶다면 욕망에게 가 봐라. 그는 네가 원하는 것을 줄 수 있을 게다."

꿈의 메마른 목소리에 어이가 없다는 듯한 감정이 실렸다. 로키의 눈에 이채가 돌았다. 이 자는 내가 생각하던 크고 무서운 존재와는 조금 다른 것 같다. 

"그보다 더 큰 것을 원합니다."

"뭐 좋다. 여기에 머무르면서 찾아보아...뭘 보는 겐가." 

로키가 꿈의 코 앞에 얼굴을 들이댔다. 예전부터 힘이 있고 강한 존재를 좋아했었다. 이자는, 자신이 알고 있는 존재 중 가장 강하지만 그만큼, 무해하기도 하다. 아마 자신에게는 무해할 것이다. 악몽같은 인생이었는데, 새로운 꿈 하나쯤 더해진다고 이상할 게 뭐 있겠는가.

"꿈이 죽음보다 잔인하고 냉혹하다고 들었소." 

"그렇다." 

로키는 꿈의 무서움에 대해 자신에게 경고하던 오래된 종족들의 말을 떠올렸다. 하지만 그런 건 이제 아무래도 좋다.

 "무서우면 무서울수록 좋소."

"무슨 뜻인가?"

"공포는 나를 고양시켜주거든"

 로키는 천천히, 얼굴을 울여 꿈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갖다댔다. 꿈이 얼빠진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은, 아마도 얼굴을 너무 가까이 겹쳐 시야가 흐려진 탓이리라. 호흡이 섞이는 데는 의외로 시간이 많이 걸렸다. 꿈의 혀놀림은 서툴렀고 심지어는 어떻게숨을 쉬어야 하는지도 모르는 것 같았다. 입술을 뗐을 때, 이 우주에서 가장 오래된 존재라는 꿈은, 놀랍게도 숨을 헐떡이며 입술을 문지르고 있었다. 아까 그 표정은 착각이 아니었나. 조금 놀란 로키에게 꿈이 말했다

"이것은 진지하게 교제해 보자는 신호인가." 

이 자는 안 될 것이다. 로키는 지혜라는 것이 사실은 존재하지 않는 개념은 아닌가 고민해 보았다. 

"지고한 존재여, 농담이 지나친 거 아니오." 

"너, 나를 가지고 놀았나?"

"그런 게 아니지 않소!"

"뭐...남성과 교제해 본 적은 없지만 이번 기회에 내 취향의 폭을 넓혀 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진지한 거요? 정말? 진심이오?"

꿈이 울상을 지었다. 아, 제발 좀. 공포로 고양되기 전에 우울한 얼굴에 질식되겠네. 로키는 한숨을 쉬었다.



[한니발]죽은 순교자를 위한 제의

발렌타인데이 합작입니다. 주최하느라 고생하신 주최님과 합작에 참여해주신 분들, 그리고 읽어주신 분들께 한 번 더 감사인사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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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렌타인 데이의 순교자는 로마의 젊은이들을 위해 죽었다고 한다. 물론 정말 그랬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다산의 신을 위한 로마의 축제를 못마땅하게 여긴 기독교인들이 그 축제의 날을 순교한 성인을 위한 날로 만든 거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애초에 당일에 순교한 성 발렌티노가 누구인지도 모른다. 고작 몇 백년 전 어느 사제의 설교에서 시작된, 기이하다면 기이한 날이다. 더구나 혼인하기 위해 죽음을 무릅쓰다니, 그것부터가 말이 되지 않는다. 로마의 군인들이 그렇게 낭만적인 혼인에 목을 매는 사람들이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로마 군대에 사실혼 관계였던 군인이 얼마였다던가. 그것도 기독교 사제가 집행하는 결혼식을 위해서. 전설이 생긴 지도 천년하고도 수백 년이 더 지났고, 사랑을 고백한다는 낭만적인 포장을 뒤집어쓴지도 몇백 년이 지났다. 이제 와서 본래의 전설이 어떤 것이었는지, 왜 그런 전설이 생긴 것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아무튼 발렌타인 데이는, 축제였으리라는 점이 중요하다. 카니발에는 언제나 폭식의 향연이 따르기 마련이다. 기나긴 금욕의 뒤에 펼쳐지는 향연이라면 그럴 만한 가치가 있게 치러져야 한다. 금욕적인 순교가 폭식과 상관이 없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 순교 또한 제 살을 깎아 남을 먹이는 행위가 아닌가. 살을 씹고 피를 마신다는 점은 같다. 그러므로 자신의 식탁에서 벌어질 탐식이라면 환영이다. 단 식탁에 앉을 자가 식료품이 아닌, 동족일 경우에 한해서. 
그 동족과의 식사에서 가장 방해가 되는 것은 동족 자신이다. 윌 그레이엄은 먹는 행위에 관심이 없다. 무엇을 내줘도 맛있다고 하지 않는다. 무엇이든 그냥 먹는다. 이렇다할 느낌 없이 그저 씹어 삼키기만 하는 것을 먹는다고 불러도 좋을지 모르겠다. 그에게 먹는 행위는 연료를 공급하거나 불안한 마음을 어느 정도 가시게 하거나 어색함을 없애주는 행위에 불과한 것 같다. 그렇게 추측해 본다. 하지만 카니발에 참가하는 것도 동족으로서 할 일이다. 본인은 모르겠지만. 왜 축제의 핵심에는 외부인을 끼워 넣지 않겠는가. 같은 무리 안에서 은밀하게 행해지는 축제라는 것도 분명히 존재한다.

카니발이므로, 고기이다. 나머지야 어쨌건 메인은 육식이다. 살을 찢고 육즙을 삼키는 것이 본질이다. 그리고 시류에 편승하기로 한다. 버터를 녹이고 크림을 약간 부은 다음 육수를 넣고, 크렘 드 카카오를 조금 붓는다. 초콜릿이 들어가지 않았는데도 초콜릿 향이 살짝 돈다는 점이 흥미롭다. 지금까지도 이런 자들은 많았지만, 진심으로 동족으로 여길만한 자는 많지 않았다. 하다못해 동료로 느낄 만한 자도. 밑준비가 끝난 다음에야 비로소 카카오 함량이 높은 요리용 초콜릿을 녹인다. 잠시 저어주자 버터가 들어간 초콜릿소스의 표면에서 매끄러운 윤기가 돌았다. 다른 재료는 넣지 않는 게 낫다. 스테이크 감으로 소금과 허브에 절여둔 고기는 마침 알맞게 굽기 좋은 상태다. 프라이팬을 데웠다. 올리브유를 발라놓은 고기가 팬에 올라가자마자 좋은 소리를 내며 익었다. 겉만 살짝 익힌 레어가 적당하다. 진한 소스 때문에 윌 그레이엄도 껄끄러워하지 않을 것이다.
고기가 익을 동안 몇 가지 준비만 더 하면 식사준비가 끝난다. 고기에 어울리는 좋은 와인을 준비했고, 가니쉬도 예쁘게 썰어놓았다. 윌 그레이엄의 눈에야 먹을 것으로 부리는 사치 정도로 보이겠지만 사치를 부린 음식은 맛있어 보인다. 특히 몸이 아플 때에는 아주 사소한 것이 감동적인 법이다. 지금 그는 열에 신음하며 누워있다. 예의 그 병이다. 열에 들떠 환각을 보다 여기까지 온 것이다. 
어째서 여기까지 왔을까. 참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리고 한편으로 사람이 사람을 믿게 하는 것은 의외로 간단한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자신에 대해 조금만 생각해 보면 수상한 점이 많았을 것이다. 홉스가 죽기 전의 정황도 그렇고 애비게일도 그렇다. 윌 그레이엄이 거기에서 자신이 범인임을 아직도 알아내지 못한 것이, 가끔은 의아하기도 하다. 아마 어쩌면, 자신을 조금은 수상하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윌은 자신을 믿었다. 믿는다기보다는, 본능적으로 여기에 와야 한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는 것이 아니고 그러므로 믿는 것이다. 그는 아마도 여기에 정답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 정도도 해내지 못해서야 동족이라고 할 수 없다. 
그래서, 조금 더 몰아붙이면서 당근과 채찍을 동시에 써 보기로 했다. 간단한 처방으로 열은 조금 내릴 수 있었다. 하지만 굳이 그렇게 하지 않고 그대로 둔 것은 가장 약해지고 궁지에 몰렸을 때, 가장 잡기 좋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약해지지 않으면 먹이조차 줄 수 없는 최상의 사냥감이다. 그리고 오늘은 우선 먹는 것부터다. 아주 작은 양으로, 조금 맛을 보고 나면 새로운 맛과 향을 가진 음식이 나오도록. 단 것을 먹고 나면 짭짤한 것을, 바삭한 것을 내 온 다음에는 입에서 녹는 거품 같은 식감을, 그리고 순한 것을 먹은 다음에는 자극적인 것을. 계속 먹을 수 있는 비결은 거기에 있다. 먹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도 예의상 먹을 수 있을 정도의 양과 다양한 맛으로. 그리고 꼭, 축제답게 먹는 것을 즐길 수 있도록. 차갑게 식힌 성게 무스의 상태를 점검해 본 다음에야 식사준비가 끝났다. 팬에서 고기를 덜어내 접시에 담고, 초콜릿 소스를 부어 장식했다. 접시의 테두리에 소스를 살며시 덜어내 장식해 레이스처럼 무늬를 만들어내는 동안 늘어붙은 초콜릿이 가는 실처럼 접시 가에 떨어진 것을, 손으로 훑었다. 평소답지 않은 일이었다. 손 끝에 묻은 초콜릿은 씁쓸하고, 끈적거리고 약간 달았다.
접시를 식탁에 올리도록 윌 그레이엄은 일어나지 않는다. 몸을 뒤척이며 앓는 소리를 낸다. 당신에게 필요한 것은 먹는 행위 그 자체이지. 소파에 누워있는 그의 귓가에 나직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윌, 일어나요."
열에 들뜬 몸으로도 재빠른 동작으로 일어난 윌 그레이엄이 경계하는 표정으로 자신을 보는 것이 즐거웠다.
"박사님."
적을 보는 표정으로 자신을 노려보았다는 것을 본인이 인식하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 눈이다. 그렇게 자신을 보는 것이 좋다.
"약을 먹기 전에 좀 제대로 먹는 게 좋겠습니다."
환자를 걱정하는 담당의의 표정이라면 아주 잘 만들어낼 수 있다. 아니 실제로 걱정하고 있으니 만드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저는……."
물론 사양할 줄 알았다.
"한 번도 내 집에서 제대로 식사한 적이 없지요."
"박사님, 그건 지금 중요하지 않아요."
"아니요, 먹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이야기했습니다. 환자에게 의사로서 말하는 겁니다, 윌."
"그런 거야 이해하지만 지금 시간이 없잖습니까."
"그게 제일 문제죠. 지금 제대로 먹고 낫지 않으면 수사를 할 수 없을 겁니다."
단호하게 거절하려던 윌 그레이엄이 뭔가 어물어물하더니 입을 다물었다. 저런 점이 좋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동시에 실망스럽기도 했다. 먹는 것이 자신의 일부이거늘 어떻게 저렇게 먹는 것에 소홀할 수가. 이 식탁이 어떤 비의를 담고 있는지 그는 모른다. 그 비밀을 아는 자만이 사실은 이 식탁을 참으로 즐길 수 있는 것이다. 
"별 거 아닙니다. 부담스럽지 않을 정도의 양으로만 준비했어요."
평소보다 식탁 위의 장식을 줄이고 접시를 작은 것을 준비한 것만으로도 윌 그레이엄의 얼굴에는 안심한 기색이 떠올랐다. 예를 들어 이 수프의 육수에 얼마나 많은 채소와 고기가 들어갔는지를 안다면, 이 접시가 어떤 물건인지 안다면 저런 표정은 짓지 못하겠지. 블루 칼라로 태어나서 자란 윌은 자신 주변의 생활 수준 이상의 무언가를 접했을 때 윌의 반응은 불쾌함에 가까웠다. 자신과 다른 이질적인 것에의 거부감이다. 이 초콜릿 소스를 만들기 위해 들어간 초콜릿이 어떤 것인지, 그리고 이 고기는 자신이 얼마나 공들여서 사냥하고 다듬은 것인지. 식재료가 무엇인지 말해주고 싶다는 충동이 들었다. 이래도 이 모든 것이 이질적일까. 사람을 죽이는 자에게 공감하고 사람을 먹는 자의 심정을 알면서.
"박사님?"
잠시 손을 멈칫한 것을 알아챈 윌 그레이엄이 이상한 눈으로 자신을 본다.
"아, 아닙니다. 윌, 그럼 맛있게 먹어요."
정찬 코스의 순서를 지키지 않은 것은, 우선 이것을 먹여야 한다는 신념에서였다. 방금 구워낸 따뜻한 스테이크가 핏덩어리처럼 식탁에 올라가 있었다. 윌 그레이엄도 그렇게 느낀 것일까. 잠시 주저하던 그가 포크와 나이프를 잡았다.
"박사님도요, 즐거운 식사를."
그가 스테이크를 썰어 입에 넣는다.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미소를 지었다. 발렌타인이 축제라면, 축제의 끝은 육식이어야 한다. 힘을 주어 입 속에 든 인육을 씹자 살이 찢겼다.
즐거운 식사를. 당신에게도 즐거운 축제(cannibal)이기를.


[한니발]만찬

한니발 추수감사절 합작에 냈던 글입니다.

그리고 한니발로 글 쓰면서 먹방만 하는 거 같아서 엄청 찔리지 말입니다.




‘독은 들어있지 않습니다. 음식에 그런 짓을 하지는 않아요.’

만찬

언젠가 저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한니발은 기억 속에서 동일한 문장을 끄집어 내었다. 어떤 치즈를 쓸지 고민하다 떠오른 문장이었다. 동시에 이름 두 개가 떠올랐다. 토바이어스라는 이름이었다. 자신이 동류임을 알아보고 관심을 끌기 위해 도발적인 짓을 했던 자였다. 동시에 자신의 환자였던 프랭클린을 기억해 냈다. 프랭클린은 자신과 비슷한 사람에게 관심이 많았다. 아마도 그 둘이 친구가 된 것은 프랭클린이 더 많은 에너지를 썼기 때문이겠지. 프랭클린이 토바이어스를 자신에게 소개한 것도, 연결고리를 하나 더 만들고 싶었기 때문이었으리라. 가엾은 프랭클린. 먹지도 못할 상태로 죽게 된 것은 자신이 원한 바는 아니었다. 하지만 스스로 자초한 죽음이니 딱히 애석할 것도 없지. 한니발은 실처럼 풀려나오는 기억을 끊었다. 요리할 때 잡념은 좋지 않다. 치즈는 꽁떼와 고다, 고르곤졸라를 내기로 하고, 한니발은 고기를 썰 때 쓰는 칼을 꺼냈다.
오븐에서 넓은 세라믹 그릇을 꺼내 뚜껑을 열자 기름에 푹 잠긴 고기가 제 색을 내고 있었다. 콩피는 기름에 음식을 삶는다는 저항감만 없으면 참 좋은 요리다. 고기의 제 맛을 살리는 데 좋다. 삼겹살이나 오리고기도 쓰지만, 지방질이 없는 부위도 나쁘지 않다. 아마 오늘은 지방이 적은 고기라, 오히려 맛이 잘 들었을 것이다. 오래 삶은 고기가 붉은 기 없이 푹 익어 있었다. 고기를 살며시 들어 도마에 놓자 고기젤리처럼 살짝 흔들리는 것을 보니 조리가 잘 된 모양이다. 한니발은 칼날을 들어 고기 위에 얹었다. 칼이 살 속에 박히는 느낌은 언제나 친숙하면서도 새로웠다. 죽은 것 속에 칼을 찔러넣을 때와 산 것 속에 칼을 찔러넣는 느낌은 분명히 다르다. 뜨겁게 익힌 고기에서 전해지는 미묘한 저항감이 칼날을 타고 손끝으로 올라왔다. 죽은 자의 살로 요리하는 것 자체는 좋아하지만, 고기를 썰다 가끔 죽은 자에 대한 생각이 나는 것은, 불쾌할 때가 있었다. 이 고기를 썰며 프랭클린과 토바이어스를 떠올렸다. 가엾은 프랭클린. 그는 아마 토바이어스를 질투했으리라. 프랭클린은 자신과 친해지려 했고 자신과 닮고 싶어 했다. 하지만 서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안다고 다 친구가 되는 것은 아니지. 둘 다 자신의 친구는 될 수 없었다. 동시에 음식도 될 수 없었다. 프랭클린도 토바이어스도 먹지 않았다. 프랭클린은 음식이 될 수 있었지만 먹지도 못하게 죽었고, 토바이어스는 음식이 아니었지만 결국은 음식과 다를 바 없는 짓을 했다.
한니발은 그들이 음식이 되었다면 어땠을까 생각해보았다. 아마 맛있는 음식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을 요리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사람은 사람을 먹지 않고, 자신은 자신과 동류라 고백해온 이를 먹지 않았을 것이다. 프랭클린은? 동류는 아니지만, 그의 무례함은 기이한 데가 있었다. 자신과 같아지기를 열망하다니. 될 수 없는 것을 바라는 것은 탐욕이다. 자신과 같아지려는 시도 자체도 동족이 아니면 의미가 없다. 그 이상을 바라는 것은 탐욕이고, 탐욕스러운 자를 먹고 싶지는 않았다. 한니발은 섬세하고 까다로운 사람이었고, 그런만큼 분명한 기호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만큼은 예외이다. 무례함은 댓가를 치러야 한다.
오늘의 식탁은 탐욕을 주제로 꾸며 보았다. 고기를 다 썰어 접시에 얹고 막 냄비에서 다 끓은 토마토 소스를 한 숟가락 떠냈다. 벽 너머에 있는, 식탁 앞에 앉아 음식을 기다리고 있을 사람을 생각하며 고기 위에 붉은 소스를 얹었다. 손질 잘 된 붉은 머리는 염색이었으리라. 이 토마토 소스에는 인공색소는 전혀 들어가지 않았지만.
그나마 채식주의자라 아마 고기에 잡맛이 들지는 않았을 것이다. 무척 자신만만하고 뻔뻔한 인간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남의 것 중 조금이라도 맛이 있겠다 싶은 부분은 그게 뭐든 상관하지 않고 긁어가 팔아먹는 삼류 신문 기자가, 타인의 피와 내장으로 제 몸을 덥히는 인간 주제에 채식주의자라니. 인생에는 종종 이런 아이러니가 등장하고, 이럴 때 자신은 그저 웃으며 요리나 할 뿐이다. 이만큼 웃게 만들었으니 좀 더 아름답게 만들어서 접시에 올려주도록 할까. 한니발은 접시 가장자리에 소스를 동그란 무늬가 생기도록 뿌렸다.
방금 썬 허벅지살 콩피를 마지막으로, 만찬이 완성되었다. 한니발은 메뉴를 한 번 더 살펴보았다. 비계가 적긴 해도 여성이라 어느 정도 지방은 남아있었다. 그래서 어뮤즈 부쉬부터 메인요리까지, 많은 것을 할 수 있었다. 지방이 많은 배 부분으로 만든 테린에 캐러멜화한 양파를 올린 어뮤즈 부쉬를 와인과 함께 낸 다음에 염소젖치즈를 올린 샐러드가 나갈 것이다. 샐러드에 공을 많이 들였다. 식탁에 올라간 자가 생전에 좋아하던 음식이라 그랬던 것 같다. 붉은 색을 내는데 토마토와 비트가 유용했다. 평소보다 강한 맛의 샐러드는 생전 그녀의 삶을 떠올리게 할 것이다. 단 맛도, 짠 맛도, 신 맛도, 지방질도 넘쳐나도록 많은 것이 그녀에게 잘 어울렸다. 수프는 육수로 콩소메를 만들었다. 간에 푸아그라를 섞어 퓌레를 만들어 버터로 구운 닭고기 소테 위에 끼얹었고, 허벅지살로 만든 콩피가 애초에 준비하려던 등살 스테이크보다 역시 나았던 것 같다. 치즈는 향과 맛이 강한 것이 올라갈 것이고, 식후의 디저트는 바끌라바로 정했다. 베어물면 머리가 지끈거릴 만큼 단 것으로 준비했다. 지나치게 강하고 지나치게 탐욕스러운 식탁이었다. 이 식탁에 절제 같은 미덕은 없다. 당연한 일이다. 탐욕은 대죄이다. 남의 영역을 탐내고, 남의 것을 탐냈다. 물론 그래서 유용하기도 했지만, 선을 넘어오려고 하는 가증스러운 짐승에게 그 이상을 허락할 수는 없지 않은가. 토바이어스도 그렇고, 그어놓은 선을 태연히 무시하는 자는 딱 질색이었다.
한니발은 붉은 색으로 장식된 허영과 탐욕으로 가득한 접시를 잠깐 쳐다보았다. 무례한 행동에 대한 댓가치고는 분에 넘치는 호사가 아닌가 싶었지만, 이 만찬은 꼭 이 정도로 풍성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제 이 만찬은 이것을 받아 마땅한 사람에게 돌아갈 것이다. 그리고 이 만찬을 대접받을 이도 접시를 보며 이 만찬을 즐길 수 있기를 바랐다.
접시를 받쳐 들고 식탁으로 걸어가자, 경계의 눈빛으로 쳐다보는 갈색 고수머리 남자가 있었다. 어딘가 불안한 표정으로, 하지만 수틀리면 이쪽을 치고 나올 기세로 노려보는 남자의 표정이 한니발은 내심 흐뭇하다. 당신은 여기에 올 수 있는 사람이고, 내 친구이니까. 이 정도로 나에게 무례해도 상관없다. 무엇보다 당신이 여기까지 왔다는 게 중요하다. 날 공격하건, 나와 동류가 되건, 일단은 당신이 스스로 내 세계로 들어온 거고 모든 것은 거기서부터 시작한다, 윌 그레이엄. 한니발은 문득 눈앞에 앉아있는 최상의 먹이에게 칼을 꽂아보고 싶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동시에 친구의 손을 잡고, 가장 훌륭한 음식을 먹이며 살육에 대해 이야기해보고 싶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 말을 입에 올리지 않는다. 대신 다른 말을 꺼낸다.
“독을 넣지는 않았습니다. 음식에 그런 짓을 하지는 않아요.”
윌의 표정이 흐려진다. 이 음식이 무엇인지, 누구인지 윌이 알까? 알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 음식을 음식으로 즐길 수 있다면, 자신과 윌은 친구 이상으로 가까운 무언가가 될 것이다. 그게 무엇인지는 한니발 본인도 잘 모른다. 모르는 것에 대한 기대감과 긴장으로 가득찬 한니발은 입꼬리를 살짝 올려 희미하게 웃는 얼굴을 만들었다.
“내 만찬에 참석해 줘서 고맙군요, 윌. 환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