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명히 교실 자기 자리에 얌전히 앉아 교과서를 펴 놓고 있었다. 영어시간이었다는 건 기억이 난다. 그런데 눈을 떠 보니 영어선생님이 파르르 떨며 의자에 앉은 자신의 얼굴을 노려보고 있었다. "카가미 너 이녀석! 마치고 바로 교무실로 따라와!" 영문도 모르고 21분 뒤 교무실에 들어간 카가미는 자다가 교과서를 공처럼 던져서 선생님의 머리에 날렸다고 한들 고의가 아닌데 도대체 뭐라고 사과하면 좋단 말인가를 한참 고민했다.
"일단 수업 중에 잔 것부터 사과하는 겁니다, 카가미 군." "아놔 빡쳐. 너도 잤잖아!" 연습 시간 내내 툴툴거리는 카가미를 보다 못해 쿠로코가 한 마디 하자 카가미가 도끼눈을 뜨고 쿠로코를 노려보았다. "전 모든 수업 시간에 자지 않습니다." "나도 늘 자진 않아!" 카가미의 반박에 세이린 농구부 전원이 피식 웃었다. "어이구, 안 잤으면 영어가 40몇 점이 나와?" "일본 영어 이상하다고요. 쓸데없이 섬세해요!" "됐다 됐어." 휴가가 피식 웃자 나머지 학생들도 모두 낄낄 웃으며 카가미의 걸작인 시험지에 대해 토론했다. 쓰기는 쓸데없이 유창하게 필기체로 써 놓고서 맞는 게 없었다며 웃는데, 카가미의 귀에 조용한 목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다음에 이어지는 쿠로코의 한 마디에 카가미의 귀가 쏠렸다. "저는 눈에 잘 띄지 않으니까요." 쿠로코는 그때 카가미의 표정이, 4kg짜리 스테이크를 눈 앞에 두었을 때와 비슷했다고 나중에 회고했다.
"쿠로코 그것 좀 가르쳐줘!" "싫습니다." "왜!" "카가미 군한텐 무리예요." 쉬는 시간 내내, 그리고 연습이 끝나고 정리하는 내내 쿠로코를 붙잡고 늘어지는 카가미를 보며 다들 한숨을 쉬었다. "애초에 수업 시간에 안 자면 되잖아." "어떻게 그게 되냐!....요." 아이다가 시끄럽다고 한 마디하자 카가미는 드디어 내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을 만났다는 듯 하소연을 시작했다. 학교에 농구하러 나오는 카가미 입장에서는 모든 수업 시간이 운동했으니 푹 쉬라는 주문으로 들린다는 것이었다. 게다가 연습량이 보통이 아닌데다 카가미가 혼자서 하는 연습도 있으니 필연적으로 피곤할 수밖에 없어서 점심시간 끝나고는 항상 잔다고 했다. "그런데, 이자식은 안 걸리고 저만 걸리잖아요!" 카가미는 정말로 분하다는 듯 온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손을 파들파들 떨었다. 어찌나 분해 보이는지 그만 미토베가 주머니를 뒤져 눈물을 닦을 손수건을 찾기 시작했다. "안 울었어!.....요. 아무튼! 억울하잖아요. 이자식은 암만 자도 아무도 몰라요!" "아니 그거야, 쿠로코는 쿠로코니까." "그러니까 그걸 가르쳐 달라고!" 카가미는 이제 쿠로코한테 매달려 사정할 기세였다. 보던 코가네이가 결국 웃으며 바닥을 굴렀고 츠지다가 그러는 거 아니라고 하다 자기도 같이 웃었다. 결국 농구부 전원이 둘을 놓고 웃기 시작했고 카가미는 그야말로 빡친 표정으로 그들을 노려보았다. "아 닥쳐요! 뭐가 웃기다고!" "너 지금 선배한테 닥치라고 했냐." ".....죄송함다." 아이다의 한 마디에 카가미가 금방 수그러들었다. 어쩐지 불쌍하다는 표정으로 카가미를 보던 아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내일 내가 교실에 가서, 자기 좋은 자리를 물색해 주지." "감독 정말이ㄴ...이에요. 고맙다....요" "훗 맘껏 고마워하렴." 카가미의 얼굴이 확 펴졌다.
그리고 다음날 점심시간 1학년 B반에 찾아온 아이다는 카가미의 책상 앞에서 어이없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카가미, 쿠로코가 자도 안 들키는 이유는 말이야. 애초에 쿠로코가 존재감이 없는 탓도 있지만, 더 중요한 원인이 있어." "뭐라고?" "너 키 몇이니." "190이다....요." "그러니까 눈에 띌 수밖에! 넌 수업 시간에 그냥 앉아만 있어도 눈에 띌 체격에 인상이잖아!" 일본 남성의 평균 신장 171. 카가미의 신장은 190. 게다가 고등학교 1학년 교실. 또래들보다 머리 하나는 큰 카가미는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럼 키 큰 놈은 못 자는 겁니까." "넌 키만 큰 게 아니잖아. 내가 교사라도 넌 눈에 띄어." 카가미는 슬픈 표정을 지었다. "그럼 수업 중에 자는 건 포기해야 됩니까." "사각지대를 찾아....아니 잠깐. 여기가 사각지대잖아." 맨 뒤에서 두 번째, 눈에 잘 띄지 않는 자리는 카가미가 앉아있다는 것만으로도 눈에 확 들어오는 자리가 되어 있었다. 카가미는 정말로 슬픈 표정을 지었다. "쿠로코 자식이 이렇게 부러워보긴 또 처음이네! 아!" 소리를 지르며 책상에 엎드린 카가미의 뒤로 무언가가 드러났다. 그리고 아이다가 힉 하고 놀란 다음 바로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선배 왜 그래요?" "카가미 너 있지." "네?" "하여간 누가 바보 아니랄까. 니 뒤에 앉아있는 애가 누군지 생각을 좀 해 봐." 카가미는 뒤를 돌아보고, 세이린 농구부의 식스맨을 확인한 다음 그제서야 눈치챘다는 듯 머리를 감싸쥐고 소리 없이 입을 뻐끔거리기 시작했다. ".......!" 쿠로코는 카가미의 등 뒤에서 읽던 책을 덮으며 인사했다. "카가미 군, 오늘 이쪽 보는 거 처음이네요." "너, 너......!" "네, 카가미 군 덕분에 잘 자고 있습니다." 심지어 수업 중에 다른 책도 볼 수 있지만 일단 수업은 들으니까요. 쿠로코는 덤덤하게 말했다. 카가미의 이마에서 힘줄이 툭툭 불거졌다. "너 당장 다른 자리로 꺼져!" "안 됩니다. 우리 학급은 지정석이에요." "담임한테 바꿔달랠거다!" "싫습니다." "왜!" "전 카가미 군의 그림자니까요." "그런 빛과 그림자냐!" 카가미가 절규하거나 말거나 쿠로코는 책에 열중하고 있었다. 세이린 고교 농구부 최고의 콤비-빛과 그림자는 다른 부분에서도 빛과 그림자로서 역할을 다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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