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게까지 책을 보다 눈을 떠 보니 이미 아침 9시가 지났다. 일어나 대충 씻고 기숙사 식당에 내려가다 보니 비가 제법 세게 내리고 있었다. 이렇게 비가 오니 큰일이다 싶었다. 방학 때도 기숙사가 운영은 되지만 학교에 잔류하는 학생이 워낙 적다보니 정해진 시간에 적은 양의 음식만 만들어 내놓곤 했다. 분명히 먹을 게 없을 테고, 학교 매점에 남은 빵도 몇 종류 되지 않을 것이다. 냉장고 안엔 말라비틀어진 냉동만두 세 개와, 썰어먹고 남은 스팸 조각이며 오래된 계란 한 알이 들어있지만 저게 밥이 되지는 않는다. 걱정하며 식당에 내려온 그녀는 식당에서 낯익은 얼굴을 발견하고 비명을 질렀다.
“악 선배!”
“악 선배 아니고 이마요시 선배다.”
이마요시는 태연하게 대답했다. 그녀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애써 눌렀다. 이마요시는 트레이닝복 위에 얇은 셔츠 한 장을 걸치고 식당 문 앞에서 팔짱을 끼고 있었다. 왜 들어가지 않으시냐 물어보려던 찰나 이마요시가 먼저 입을 뗐다.
“니 밥은?”
“이제 일어나서 못 먹었어요. 선배는요?”
“어? 아침에 일어나서 혼자 운동 좀 하다 보니까 이래 됐다.”
와 이래 배가 고프노, 하며 이마요시는 투덜거렸다. 아마 새벽같이 공부하고 잠깐 몸을 푼다는 게 혼자 농구연습이라도 하게 된 것 같았다. 수험생이라고 해도 농구에 미련이 없지는 않을 테다. 그녀는 어쩐지 이마요시가 안쓰러웠다.
“선배 그럼 제가 빵 좀 사 올까요?”
“아이다, 됐다. 안에 빵도 없다. 다 떨어져가 오후 돼서 이따 배달 오면 그때 장사하신다 카더라.”
“선배 어떡해요.”
“내야 뭐 아까 아침 먹었는데 니가 문제지.”
별로 면식도 없는 후배를 챙겨주는 좋은 선배다. 괜히 마음이 설레어 혼자 어쩔 줄 모르고 주먹을 쥐었다가 손가락을 꼬았다가 하고 있는 그녀를 향해 이마요시가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말을 던졌다.
“니 내랑 라면 먹을래?”
혀를 깨물 뻔했다.
방에 인스턴트 라면이 하나 있는데 그걸로는 양이 안 찰 거 같아서 그랬다는 설명을 듣고서도 뛰는 심장은 멈추지 않았다. 기숙사에는 간단한 조리를 할 수 있는 공간이 있다. 라면을 끓이거나 전자렌지, 토스터를 이용한 간단한 요리는 가능하다. 이마요시가 방에서 인스턴트 라면을 가져 왔고, 거기에 그녀가 냉장고에 구르던 냉동만두며 계란이며 스팸을 가져 왔다.
물을 끓이고 스프를 먼저 넣은 다음 평소에 하지 않던 사치도 해 본다. 약간 스프를 남긴 다음 면을 따로 끓을 때 스프를 넣는다. 기숙사가 비어 사람이 없으니 가능한 일이다. 이마요시가 흥미진진한 얼굴로 구경하고 있었다. 면을 헹굴 동안 냉동만두를 미리 넣고 국물을 끓인다. 이마요시는 옆에서 스팸을 가지런히 썰어 냄비에 넣고 있었다. 면을 헹궈온 그녀가 이마요시와 교대해서 면을 냄비에 넣었다. 잠시 끓어오르던 국물이 조용히 가라앉았고, 끓느라 둥글게 부풀었던 만두가 다시 완만하게 가라앉았다. 그러나 금방 거품이 하나둘 떠오르며 면이 기세좋게 끓어올랐다. 그녀가 냄비의 면을 젓는 동안 이마요시가 냄비 안을 들여다보았다.
“야 보글보글 잘 끓네. 여기다 계란을 깨 넣는다고?”
“네, 한국은 그래요.”
그녀는 냄비에 계란을 깨넣고 얼른 젓가락으로 저었다. 붉은 국물 위로 흰자가 먼저 퍼지다 가는 실처럼 덩어리졌다. 노른자를 피해 흰자만 젓는 것을 보던 이마요시가 흥미로운 표정을 지었다.
“국물이 걸쭉한데 그건 그거 나름대로 괘안네.”
“계란 들어가서 고소하고 맛잇어요.”
“삶는 거랑은 또 다르겠네.”
불을 끄고 냄비에 있던 라면을 그릇에 덜었다. 이마요시의 그릇에 반숙이 된 노른자를 국자로 떠서 올리고, 스팸도 몇 젓가락 더 덜었다. 이마요시가 그릇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노른자는 와 안 깼노.”
“선배 드시라고요.”
“내만 먹기 미안한데 그냥 같이 먹자.”
“아, 아니에요! 괜찮아요! 다이어트 중이라서 노른자 안 먹어요!”
“다이어트 하면 라면을 먹으면 안 되지 않나……내가 먹자 캐서 괜히 라면 먹는 거 아니가?”
“아니에요! 저 라면 좋아해요!”
“그럼 다행이고. 먹자.”
이마요시가 면을 집어 후루룩 먹는 것을 보고 그녀도 숟가락을 들었다. 국물을 한 입 삼키자 따뜻한 기운이 온 몸에 퍼졌다. 맵지는 않지만 닭고기맛 국물이 제법 고소하고 가늘게 퍼진 계란이 부드러웠다. 면을 한 젓가락 집었더니 짭짤한 국물 맛이 입 안에 감돌았다. 스팸을 넣어서 간이 짠 듯 간간하니 좋았다. 삶아서 건진 면을 후루룩 빨아올리자 쫄깃하고 탄력이 있는 촉감이 입술에 남았다. 맛있었다. 배가 고파서 그런 것도 있지만. 하지만 예쁘게 먹기 참 어렵다. 그녀는 이마요시 앞에서 게걸스럽게 면을 먹지 않으려고 무척 애를 쓰느라 그가 숟가락을 들어 자기 그릇에 뭔가 놓은 것을 뒤늦게 발견했다.
“팍팍 먹어라. 그래갖고 배고파서 우째 견디노.”
고개를 들어보니 그릇에 노른자 한 조각이 얹혀 있었다. 잘린 면에서 금빛 노른자가 흘러나와 면을 적시고 있었다.
“저 주시는 거예요?”
“이 계란 니가 갖고 왔잖아.”
“그치만 면은 선배 건데…….”
“신경 쓰지 말고 그냥 많이 먹어라.”
국물과 함께 노른자를 입에 넣었다. 덜 익은 노른자가 입 안에서 국물과 섞여 적당히 짭짤하니 감칠맛이 나고, 익은 노른자가 폭신하니 씹혔지만 그런 게 중요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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