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레베카

4월 13일 류정한/옥주현/김보경/최민철 캐스팅으로 봤습니다.

 

막공이 가진 에너지도 있었고, 배우들이 극에 몰입하는 것도 있어서 이 기획사 공연을 본 중 가장 만족스럽게 봤습니다. 그보다 저한테 이 공연의 의의는 이 극작가가 점차 대중적인 작품에 가까워지고 있다는 점에 있습니다. 애초에 전 특정 배우 팬이나 공연의 팬이라기보다 극작가의 팬에 가깝습니다. 제 어미오리거든요. 제 이상에 가까운 작품을 쓰는 사람이기도 하고요. 그러니까 이건, 제 존잘님이 발전하고 계신다는 기쁨을 말로 정리해 보고 싶어서 쓰는 감상입니다.

 

미하엘 쿤체는 솔직히 말해서 대중적인 극을 쓰는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이 사람이 쓰는 극은 인물을 알기 위해 여러 장치를 해독해야 하고 작품의 역사적 배경에 대해서도 알아야 하며(자국민들은 거기에서 자유로울 거 같지만, 아닙니다. 한국인이 한국사 잘 아나요. 아니잖아요.)골아픈 가사의 의미를 해석해야 합니다. 모차르트!나 엘리자베트는 사실 접근성이 좋지는 않죠. 그 전에, 먹물에 찌든 인간의 취향이란 게 일반인과 같지 않습니다. 여기서 일반인은 좋은 의미로 일반인입니다. 먹물들은 자기 취향이 대중적일 거라고 착각하지만 절대로 대중적이지 않죠. 아무한테도 안 먹힐 개그와 아무한테도 안 먹힐 주장을 하면서 자기들이 쉬운 소리를 한다고 착각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본인은 그런 점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던 게 아닌가 해요. 대중적인 공연을 쓰고 싶다는 이야기를 했다고 들었습니다. 게다가 작품 속의 쉬카네더 같은 캐릭터에서 그런 면이 언뜻 보이기도 했고요. 물론 그렇게 하기 위해서 쉬운 단어를 골라 쓰고, 선명한 연출을 한 점은 인정합니다. 하지만 솔직히 엘리자베트 초연을 봅시다. 하리 쿠퍼의 연출이 그게 뮤지컬 연출입니까 실험 오페라 연출이죠. 그 양반 니벨룽의 반지 연출도 그렇게 했더만요 뭐-_-; 여담인데 한국의 엘리자베트 공연에서 쿤체가 좋아했던 것은 공연의 키치스러움이 아니었을까 진지하게 생각합니다. 전 그렇게 남대문 시장에서 장사하는 간지로 키치 부르는 루케니 처음 봤습니다. 그 점에서 한국 캐스트가 대단했지요.

 

아무튼 전반적으로, 나치 청산 문제니 예술가와 인간의 삶 문제니 하는 걸 집요하게 추적한다는 점도 그렇고 굉장히 먹물내가 풍기는 물건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번 레베카에서 놀랐던 점은, 아무도 공연내용이 어렵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물론 한국 공연 기획사가 이거 연출을 제일 멀쩡하게 해서 그렇겠지요. 전 그 기획사에서 공연한 모차르트!와 엘리자베트를 봤기 때문에 거기 연출에 대해 별 호의가 없습니다. 그런데 또 보는 제가 호구지요. 압니다. 하지만 역으로 이 기획사가 연출을 멀쩡하게 했다는 점이야말로 이 작품이 이해하기 쉽다는 반증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이 기획사는 앞의 두 극을 가족극과 로맨스로 연출하려고 엄청나게 애를 썼던 곳이거든요. 그런 기획사에서 힘들이지 않고 로맨스 코드를 얼마든지 강조할 수 있다는 겁니다. 물론 쿤체가 하는 일이니 이 작품도 원작에서 어린 소녀의 성장 코드를 중요하게 다룬 부분이 있습니다. 하지만 로맨스와 개그코드를 중요한 요소로 넣어버리니, 그 부분에 힘을 싣기 참 좋아지지요.

저는 극에서 그거 남발하는 거 싫어합니다. 그놈의 로코인지 뭔지가 문화의 다양성을 저해한다고요. 아 농담 아닙니다. 제가 사는 동네는 정극 공연을 거의 볼 수가 없어요. 소극장 연극들이 죄다 로맨스 코미디거든요. 사람들이 로맨스 코미디가 연극의 전부인 줄 알고 그런 것만 찾는 거 보면 화를 내는 더러운 먹물입니다 제가. 그렇다고 아는 것도 없으면서 쓸데없이 겉멋만 든 게 문젠데...그런 제가 볼 수 있는 로맨스 코미디의 한계점 정도? 사실 엘리자베트는 일종의 덕후 대상 상품인 셈이죠. 무척 마니악한 부분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이 쓴 극이라고  생각하기 어려운 부분이 분명히 있었어요. 그런데 제법 로맨스물 다운 것이 나왔습니다. 원작이 가진 힘도 있고, 한국 번안의 힘도 있지만 원작 자체가 로맨스와 코미디를 소화하기 위해 애쓴 부분이 많다고 생각합니다.

전 그러기 위해서 쿤체 씨가 굉장히 많이 공부하고 노력했다고 봐요. 이건 취향이나 습관 같은 문제라서 한 번 엘리자베트 같은 걸 쓰게 되면 그게 일종의 틀이 되는 경우가 많아요. 하지만 쿤체 씨는 많은 사람들이 좋아할 만한 극을 쓰고 싶어 하셨고, 그러기 위해 이것저것 많이 찾아보고 패턴도 분석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극작가로서 어느 정도 정점을 맛본 인간이 다른 패턴을 쓰기 위해 노력하는 게 보통 일이 아니라는 걸 알아요. 게다가 먹물이 먹물 안 든 작품 쓰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 압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한테 이 작품은 먹물이 자기 한계를 극복한 작품으로 의의가 있는 거예요. 학습과 노력을 통해서 일반인과 덕후들의 취향의 중간을 찾아냈다는 게 무언가를 만드는 사람에게는 중요한 포인트지요. 레베카를 좋아하지는 않지만 레베카를 썼다는 사실 자체를 좋아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연출이 다 마음에 드냐면 그건 아니고 로맨스 코드가 강조가 되어서 원작의 어딘가 묘하게 굳어있는 느낌은 덜 났다는 게 아쉽긴 했습니다. 그렇게 말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일반인 감성을 공부한 덕후라고요. 이런 요소 저런 요소를 넣으면 좋다는 건 다 실험을 해 본 느낌이 들었습니다. 이게 한국 연출의 문제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제가 독일어를 잘 몰라서요. 그렇지만 하지만 이전에 본 정보보다 굉장히 로맨스 코드가 강했습니다. 일단 막심이 무릎을 꿇고 청혼한다는 게 굉장히 낯설었습니다. 뒤 모리에의 원작에서 내가 무릎 꿇고 청혼하지 않아서 실망했나 본데 결혼이 로맨틱한 줄 아느냐는 식으로 말하는 막심에게 굉장히 감명받은 게 있어서요. 대중적인 극에 성공했다면서 지나친 로맨스 코드를 지적하는 게 모순 같이 보이시겠지만, 음 대중=로맨스 팬은 아니지 않습니까. 뮤지컬이 한국에서 아무리 2, 30대 여성들이 주로 관람하는 장르라고 해도 그 나이때 여성들의 관심사가 모두 로맨스는 아니지 않나요. 그리고 저는 사람들이 뮤지컬/연극 했을 때 로맨스나 코미디만 떠올리는 풍조 죽도록 싫습니다. 로맨스 없으면 시나리오가 안 나옵니까?

게다가 여기의 막심은 너무 젊고 혈기왕성하고, 딱 외국인이 보는 영국신사 같지도 않다는 점도요. 류정한 배우 무척 좋아하고 이번 공연도 마음에 들었지만 깐깐한 40대 영국 귀족이라고 보기에는 어려운 점이 많았습니다. 아무래도 로맨스 코드 때문에, 그런 요소도 많이 사라지지 않았을까 싶네요. 특히 류정한 배우가 제일 영국신사 답지 않았던 건 아닌가 싶기는 합니다. 특정 대사에서 류 배우님 욕이 제일 찰졌어요(...) 빡침을 표현하기엔 효과적이었겠지만 전형적인 영국신사가 말하기에는 뭔가...게다가 번역 누구죠. 막심이 왜 한결같이 반말을 쓰는 거죠. 물론 나이차이 표현하는 데 그게 좋다는 점은 인정합니다. 하지만 그 반말이 막심을 더 어린 남자로 만들어버린 거 같아서요.

그리고 여기에서도 죽어라고 그림자가 가사에 등장하는 걸 듣고 결국 웃었습니다. 쿤체 씨는 그림자(Die Schatten) 없으면 극을 못 쓰시는 증상이 있다는 말이 괜한 게 아니었어요.  

 

뭐...화는 그만 내고, 류정한의 레베카 빙의 연기에 입이 벌어졌다고만 마무리합시다. 옥주현 씨는 본 중 제일 나았지만 저는 초혼송에서 레베카 소환 못 하면 일단 이야기를 하지 않는 더러운 원칙주의자입니다. 반 호퍼 부인이 극 중에 잘 녹아들어갔고 베아트리체와 가일스, 프랭크도 안정적인 연기를 보여주셨습니다. 무엇보다 최민철의 잭 파벨이...전 언젠가 이 분이 연기하는 헤롯을 한 번 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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