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벤저스]잘 자, 형
- 쓰고 만든 것/아메코믹
- 2012. 8. 28. 23:51
- Posted by 유안.
마사 노먼 원작의 잘자요, 엄마('Night, Mother)를 바탕으로 하는 희곡입니다. 그러고보니 은혼에서도 한 번 했었죠 이거.
이야기를 듣고 같이 이 설정으로 글을 쓰기로 해 주신 라일라 님께 감사인사 드립니다. 덕분에 다시 이걸 보고 새로 쓰게 됐어요.
토르와 로키가 나옵니다. 그리고 이 희곡은 제가 아는 중 가장 비극으로 꼽는 희곡입니다.
잘 자, 형. (‘NIGHT, Brother)
지구, 아마 스타크 재단의 일부로 추정되는 방. 뒤편에 출입구로 쓰이는 금속제 문이 보인다. 제법 푹신해 보이는 양탄자가 깔려있고 탁자에는 커피잔, 커피포트, 과자 몇 종류가 든 소쿠리가 있고 탁자 양 옆으로 소파가 두 개씩 놓여있다. 침대에는 누운 흔적이 있지만 시트며 이불은 새 것이다. 전체적으로 깨끗하고 물건도 제법 고급품으로 보이지만 생활감이 적고. 언뜻 봐서 토르가 여기서 살고 있는 것 같지만 잘 보면 생활감이 전혀 나지 않는, 하루 저녁 묵어가는 여관 같은 느낌이 나게 만들어야 한다. 여기는 완벽하게 현대적인 공간이고 토르는 이 공간과 완벽히 어울리지 않아야 한다.
출입구는 무대에서 정면으로 해서 열리게 되어 있는데 이것이 무대장치의 포인트이다. 그것은 평범해 보이지만 완벽한 無로 통하는 것 같은 분위기를 내야 한다. 이 문이 모든 움직임의 초점이다.
막이 열리고 조명이 탁자 쪽만 비춘다. 조명이 켜지면 토르가 보인다. 그는 관객석 기준으로 오른쪽 소파에 호쾌한 포즈로 앉아있다. 복장은 갑주차림이 적당하고, 발밑에는 묠니르가 놓여 있다. 소쿠리에서 손바닥만한 쿠키를 꺼내 두 입만에 먹어치우고 커피를 원샷한다.
토르 : (호쾌하게) 하나 더! …어라, 맞다. 여기선 마시고 컵을 깨지 않지.
토르는 얌전히 던지려던 컵을 놓고 커피 포트에서 커피를 한 잔 더 따른다.
토르 : 미드가르드인들은 검소하고 소박하다는 것을 이럴 때 느끼지. 마신 컵을 다시 쓴다....멋져. 참 건실한 덕목이야. 게다가 커피는 맛있고. 쿠키도 맛있고. (커피를 한 모금 벌컥 소리를 내며 마신다) 캬아. 다만 술이 부족해서 조금 슬프군. 미드가르드의 술은 너무 싱거워. 게다가 여기 동의해 주는 사람도 별로 없지. 아아, 아스가르드의 꿀술이 그립군. 색은 벌꿀과 같고 맛은 진하며 달콤하기까지 하지. 미드가르드에도 그 미덕을 아는 자가 있으면 좋으련만.
토르가 커피를 마시며 혼자 한탄하는 동안 로키가 출입구를 조용히 연다. 역시 갑주 차림이지만 투구는 쓰고 있지 않다. 처음에는 관객의 눈에 잘 띄지 않아야 한다. 평소보다 조금 더 활기차 보이는 모습이다. 사실 로키가 요 최근 몇 년간 이렇게 컨디션이 좋았던 적은 별로 없다는 것을 인지해야 한다. 토르는 잠시 인기척을 못 느끼고 있다 자기 앞에 서 있는 로키를 보고 활짝 웃으며 커피잔을 내려놓는다.
토르 : (기쁜 목소리로) 아우야!
로키 : 누가 아우야.
토르 : 너는 내 아우고! 나는 네 형이지!
로키 : (소파에 앉으며)학습능력이 없는 건가. 같은 소리 반복하는 것 좀 그만해.
토르 : 그렇지만 넌 내 동생인걸.
로키 : (얼굴을 찌푸리며)아, 좀. 됐다고.
토르는 시무룩한 표정을 짓고 로키는 토르 맞은편 소파에 앉는다.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토르 : 그런데 어쩐 일이야?
로키 : (피식 웃으며) 왜.
토르 : 어, 그. 재갈도 없이 돌아다니는 거 말이야. 넌 어쨌건 여기선 범죄를 저질렀고...
로키 : 그래서, 여기 오면 안 된다?
토르 : 아니, 물론 형제의 방문은 언제나 환영이지만.
토르가 쿠키를 내밀고, 잔을 찾아서 내밀지만 로키는 커피에 입도 대지 않는다. 토르도 마찬가지다. 토르는 잔을 들고, 로키는 그냥 손을 모으고 앉아있다. 어딘가 평소와 분위기가 다르다는 것을 토르도 어렴풋이 알고 있다. 둘은 아무 말도 없이 3-5초간 서로 쳐다보고 있다. 잠시 후 분위기를 바꿔보고 싶다는 티를 내며 토르가 어색하게 입을 연다.
토르 : 음, 로키. 이제 내일이면 아스가르드로 가야 하는데.
로키 : 이봐, 잠시만 그 이야기는 하지 않으면 안 되나?
토르 : 으음, 하긴 싫겠구나. 미안하다.
로키 : 뭘 답잖게 사과야.
토르 : 그렇지만 이렇게 잡아두는 건 고의가 아니었어. 너도 우리 뜻을 이해하지?
로키 : (비웃으며) 퍽이나.
토르 : 하지만 로키.
로키 : 그만 하라고. 변명 아니면 할 말이 없나?
토르, 아무 말도 못 하고 로키는 기분 나쁜 얼굴로 팔짱을 끼고 있다. 그래도 평소 같은 분위기가 되어간다고 토르가 마음속으로 조금 안심하는 순간, 로키가 아주 평온한 목소리로 입을 연다.
로키 : 아참. 사실 할 말이 있어서 왔어.
토르 : (기쁘게)뭐지?
로키 : 나 자살할 건데.
잠시 정적이 흐르고, 토르는 얼굴을 찌푸리고 머리를 긁다 먼 산을 보다 한참 뒤에 입을 연다.
토르 : 로키, 농담은 그렇게 하는 게 아냐.
로키 : (눈썹을 치켜올리며)농담으로 보이나?
토르 : 갑자기 말이 안 되잖아. 네가 그럴 이유가 어딨어.
로키 : (웃으며)자살은 이유가 있어서 하는 게 아니야. 없어서 하는 거라면 모를까.
토르 : 이해가 안 되는데.
로키 : 굳이 이해받고 싶지도 않았어.
토르 : (벌떡 일어나며) 무슨 소리냐! 그러면 왜 나한테 이야기 하는 거냐. 게다가 아스가르드의 왕자가 자살이라니! 말이 되는 소리냐.
바닥에 있던 묠니르가 토르의 손에 끌려올라온다. 토르가 묠니르를 세게 붙잡는다. 망치를 잡는다기보다 망치에 의지하는 것 같다. 아이들이 불안할 때 담요를 끌어안는 것처럼 잡고 있다. 로키는 토르의 표정을 한참 쳐다보다 한숨을 쉰다.
로키 : (한숨 쉬며) 좀 진정해, 이야기 좀 하자.
그제야 토르가 로키를 쳐다본다. 이야기 좀 하자는 말이 로키의 입에서 나온지 셀 수 없을 만큼 오래되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놀란 것 같다.
토르 : (못 믿겠다는 얼굴로) 이야기?
로키 : 그래, 이야기. 그러니까 일단 좀 진정해.
로키가 손으로 앉으라는 신호를 보내고 토르는 홀린듯 로키가 손짓하는 대로 앉는다.
토르 : (태연하려고 애쓰며)그러니까 지금 네 손으로 목숨을 끊겠다고.
로키 : (정말로 태연하게)그런데?
토르 : 로키, 그런 말 하면 못 쓴다.
로키 : 못 쓴다고, 훈계하는 것처럼 말하지 마.
토르 : 형이 동생을 훈계하는 게 왜 나쁘지?
로키 : 아직도 형 흉낸가. 좀 지겹네 이제.
토르 : (상처받은 표정으로) 지금 그게 문제야?
로키 : 문제지 그럼. 난 토르 오딘손이 내 형인게 싫다고.
토르 : (주먹을 움켜쥐며) 로키 오딘손!
토르의 주먹이 앞으로 나간다. 그러나 로키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다.
로키 : (비난하듯) 이야기 하자고 그랬잖아. 주먹으로 이야기해?
토르, 억지로 그러듯 주먹을 거둔다. 로키가 한숨을 쉰다.
로키 : 이야기라고, 이야기. 기껏 말해주러 왔더니 대접이 고작 이거야? 좀 기분 나빠.
토르 : 나라고 동생이 죽겠다는 이야기를 듣는 건 좋은 줄 아느냐?
로키 : (눈썹을 치켜올리며) 하하, 그러니까 내가 말 안 하는 게 낫다 이거? 닉 퓨린가 하는 애꾸한테 내가 죽었단 소릴 전해 듣고 싶은 거야?
토르 : 그런 게 아니잖아.
토르는 어디론가 무슨 신호를 보내려는 것처럼 손을 꼼지락거린다. 로키는 그것이 무슨 뜻인지 알아본다.
로키 : (낮은 목소리로) 하지 마.
토르 : 올파더께서 아셔야 해.
로키 : 하지 말라니까!
토르 : 내 힘으로 못 말린다면 아버지라도 말리셔야지!
로키가 벌떡 일어나 탁자를 넘어서 토르의 멱살을 잡는다.
로키 : 부르는 순간 바로 죽어버릴 테다. 올파더라도 여기서 내가 죽는 걸 말릴 만큼 빠르지 못 할 걸? 절대 하지 마.
토르 : 하지만 로키.
로키 : (단호하게) 싫다고 그랬다.
토르 : 고집부리지 마.
토르 : 아버지 때문에 그래? 그래서 이러는 거야?
로키 : 웃기고 있네. 이건 내 문제야. 아스가르드 같은 거랑 아무 상관이 없어.
토르는 로키가 진심임을 안다. 연락을 포기하고 자리에 앉는다. 대신 화제를 돌려보려고 애를 쓴다.
토르 : 갑자기 왜 그러냐. 무슨 일이야.
로키 : 일은 무슨.
토르 : 아무 일도 없는데 그런 생각을 해?
로키 : 기분은 평온해. 지난 천 년간 이랬던 적이 없을 만큼.
로키는 말갛게 웃는다. 표정은 어둡지만 굉장히 평온하다는 느낌이 나야 한다. 오히려 토르가 좀 더 불안정해 보일 지경이다. 한참을 허둥대던 토르는 간신히 할 말을 찾는다.
토르 : 사람이 아무 일도 없는데 죽지는 않아!
로키 : 왜 못 해? 그리고 난 이미 죽었는데.
토르 : 네가 왜 죽어, 넌 내 동생이고 아스가르드의 왕자인데.
로키 : (그 말을 부정하듯 웃으며) 이봐, 사람들이 착각하는 게 있는데 말이야. 잘 들어봐. 일단 자살은, 문제가 있다고 하는 게 아냐. 문제가 없다고 판단했을 때 죽는 거야. 그리고 다음, 난 네 동생도 아니고, 아스가르드의 왕자도 아니야. 오딘의 아들은 더 아니지. 그리고, 로키 오딘손은 이미 죽은 거 같아.
토르 :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는 얼굴로)잘 모르겠어. 문제가 없는데 왜 죽으려고 하는 거야. 그리고 넌 내 동생이잖아. 서리거인이라도 내 동생이야. 내 동생이 뻔히 눈뜨고 있는데 무슨 소리냐.
로키 : (말없이 쳐다본다)
토르 : (눈빛에 눌려서)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해.
로키 : (비아냥거리듯)그러시던가.
토르 ; (할 말을 찾지 못하다가) 저, 아버지가 문제라면 내가 도와줄게.
로키 : 내가 고작 그걸로 죽으려고 한다고?
토르 : 그럼 아냐?
로키 : 그냥 별로 더 살고 싶은 마음이 안 나는 것 뿐이야.
토르 : (한숨 쉰다) 살고 싶은 마음이 안 나다니. 그런 게 어딨어. 뭣 때문에 그러는데. 져서 싫은 거야? 그런 건 아무도 신경쓰지 않아. 네가 음모를 꾸며서? 그게 뭐 어떤데?
로키 : (비웃듯) 단순하기는.
토르 : 아버지도 널 용서하실 거야.
로키 : 퍽이나 그러겠네. 잘 생각해봐. 난 말이지, 올파더의 원대한 계획 중의 일부라고. 너를 아스가르드의 군주로 만들기 위한. 뭐 내 자리도 거기 하나쯤 있긴 했겠지. 하지만 이미 난 거기 앉을 수 없어. 왜인지는 잘 알잖아.
토르는 왜 그러냐고 묻는 대신 고개를 돌린다. 로키도 더 이상 말 하지 않는다. 서로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잘 알고 있다. 토르는 필사적으로 말을 돌린다.
토르 : 너, 사실 음모 더 꾸미고 있었지 않아? 다른 빌런들은 어쩌고.
로키 : 몰라. 멍청한 악당들 따위 알 게 뭐야. 내가 없다고 그놈들이 미드가르드를 탐내지 않을 리도 없고. 어떻게 되겠지. 알 게 뭐야. 애초에 미드가르드 같은 거, 상관없어. 딱히 탐내서 여기 온 것도 아닌데.
토르 : 상관 없다고?
로키 : (쿡쿡 웃는다)
토르 : (화를 가라앉히면서) 그런데 왜 그런 거냐, 로키. 필요도 없다면서 왜 그렇게 무리하게 미드가르드에 군림하려고 한 거고, 왜 그렇게 무리해서 어설픈 악당을 연기한 거냐.
로키 : (더 큰 소리로 웃는다.) 무리?
토르 : 내가 아는 너는 그렇게 단순한 악당이 아냐.
로키가 눈을 가늘게 뜨고 토르를 노려본다.
로키 : 글쎄, 아는 게 다는 아니지 않아?
토르 : 난 널 믿는다.
로키 : (웃으며) 순진하기는. 아직도 그렇게 몰라?
토르 : (약간은 필사적으로)나와 싸우고 싶은 거라면 그냥 싸우자.
로키 : (어이없어하며)그걸 지금 말이라고 해?
토르 : 난 너를 전사로 인정하는 거야.
로키 : 이러니까 내가 화가 나는 거라고. 강자의 관용이라...이건 기만이야. 집어쳐.
토르, 가만히 로키를 쳐다본다.
로키 : 왜.
토르 : 역시 너 어딘가 편치 않은 거지.
로키 : 말짱합니다. 그놈의 녹색 괴물한테 얻어터진 거 정도야 뭐.
토르 : 아니, 넌 분명히 지금 어디가 아픈 거야. 마음이 아픈 거지. 우리가 잘못한 게 있으면 사과하마.
토르는 필사적이다. 로키도 그것을 안다.
로키 : 과거 때문에 죽진 않아. (사이) 그럴 수 있다면 이럴 필요가 없지.
토르 : (희망을 가지고)그래, 로키. 죽을 필요가 없어!
로키 : 아니, 그래서 죽는 건데.
토르의 얼굴이 일그러진다.
로키 : 문제는 현재라고.
토르 : 그래, 역시 우리가 잘못한 거야. 내가, 아버지가.
로키 : 내 말 듣고 있어? 문제는 현재라고!
토르 : (듣지 않고) 처음부터 내가 형으로서 처신을 잘 해야 했어.
로키 : (짜증내며) 시끄러. 그만 좀 하라니까.
토르 : 뭐가 그렇게 싫은 거냐?
로키 : 전부 다.
토르 : 뭐라고?
로키 : 말 그대로야. 전부 다 싫었는데, 이젠 싫어하는 것마저 싫어.
토르 : 내가 뭘 하면 마음을 돌리겠어?
로키 : (웃긴다는 투로)하긴 뭘 해.
토르 : (희망을 가지고)세상이 마음에 안 든다면 내가 대신 부숴줄 수도 있어. 새로 만들 수도 있고. 아스가르드도 그래.
로키 : 그래?
토르 : (밝아진 얼굴로)네가 원한다면!
로키가 웃는다.
로키 : 토르 오딘손. 너는 절대 못 그래.
토르 : 내가 왜 못 해?
로키 : 넌 아스가르드의 적자고 미드가르드를 수호하는 자잖아. 퍽이나. 네 세계의 기반을 네 손으로? 웃기지 마.
토르 : ......
로키 : 그런 말이 날 더 화나게 만드는 거야. 아직도 모르겠어?
토르가 조용히 로키를 쳐다본다.
로키 : 토르, 지옥을 본 적이 있어?
토르 : 아니. 지옥이라면 모른다.
로키가 의외라는 듯 웃는다.
토르 : 왜 웃지?
로키 : 아니, 아니야. 설마 네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올 줄.....아니, 너니까 가능한 거겠지.
토르 : 무슨 소리야?
로키 : 됐어. 지옥에 대해 말해줄게. 평생 다시는 보고 싶지 않은 꼴이었지. (웃는다) 너는 지옥을 못 봤다지만, 난 그게 뭔지 알아. 어찌나 끔찍한지 당장이라도 그 지옥을 떠나고 싶을 거야. 하지만 넌 못 떠나지. 왜냐하면 넌 거기가 지옥이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거든. 게다가 너는 그 지옥을 천국으로 바꿀 수 있지. 하지만 나는 달라. (웃는다) 내가 있는 곳은 지옥이고 그것은 영원히 바뀌지 않아. 그래서 생각을 좀 바꿔봤지. 그랬더니 내 마음이 내키면 언제고 지옥을 부술 수도 있고 지옥을 떠날 수도 있어. 괜찮지 않나? 그거면 됐어, 난.
토르 : 그렇게 생각하면 안 돼.
로키 : 글쎄, 어쨌건 너는 세상에 정 붙일 데라도 많지 않나.
토르 : 정 붙일 데?
로키 : 미드가르드인 친구라거나. 어벤저스 같은 웃기는 놀이. 다들 너를 좋아하잖아?
토르 : 친구가 필요한 거야?
로키 : (분노한 목소리로)사람 우습게 만들 거야?
토르 : (아차 하는 얼굴로)아, 그게 아니고....
로키 : 됐어.
로키는 목이 마르다. 토르가 눈치를 채고 커피를 따라준다. 둘은 커피잔을 하나씩 놓고 얌전하게 커피를 마신다. 언뜻 보면 화기애애해 보이기도 한다.
토르 : (미간을 찌푸리며)맛이 없군.
로키 : (찻잔을 놓으며) 그러게. 쓰기만 하네.
토르 : 아스가르드 술이 맛있지. 먹고 싶지 않아?
로키 : 아니, 됐어.
토르는 어색하게 커피를 조금 더 따라 마신다.
토르 : 난 아직도 네가 뭘 하겠다는 건지 모르겠다.
로키 : 그러게. (키득키득 웃는다.) 난 아직도 날 말릴 수 있다고 착각하는 네가 놀라워.
토르 : 농담이라고 하면 안 되는 건가.
로키 : 나도 농담하고 장난 칠 때와 장소는 알아.
토르 : 그리고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지.
로키 : 그렇지. 그러니까 죽겠다고.
토르 : 그 죽겠다는 말 좀 그만할 수 없냐.
로키가 토르를 노려본다.
로키 : 아직도 내가 장난을 치고 있다고 생각해? 어리광이라고 생각해? 죽겠다고 했잖아. 기껏 알리러 왔더니 한다는 소리가 고작 그거?
토르 : 그럼 왜 나에게 죽겠다고 알리려는 거야?
로키 : .......
로키가 처음으로 대답을 하지 못한다. 토르, 기세를 몰아서 말을 잇는다.
토르 : 나를 믿는다는 뜻 아냐? 나에게 말려달라는 뜻 아니냐고.
로키 : 그런 거 아니야.
토르 : (듣지 않고)형제한테 그런 말을 하다니 정말 너무하잖아. 그게 아니라고? 아니면 왜 내게 왔지? 악당 노릇을 할 거면 제대로 하라고! 아니면 나를 쳐! 아버지가 널 인정하지 않을거라니, 그건 네 생각일 뿐이잖아. 안 그래, 분명히 답은 있을 거다. 너는 내 동생이야. 아스가르드가 알아주는 마법사라고. 네가 할 일이 없고 설 땅이 없어서 악당이라니. 아스가르드의 반역자라니. 말이 되지 않아! 여기 녀석들도 사실 널 좋아할 거야.
점점 목소리가 커지고, 토르 본인도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 잘 모르는 듯하다. 로키는 가라앉은 표정으로 토르를 쳐다보다 경멸하는 표정을 짓는다.
로키 : (냉소적으로)웃기지 말고.
토르 : 많은 사람들이 널 좋아해.
로키 : 그래서?
토르 : 네가 할 수 있는 일도 많아.
로키 : 그래서 어쩌라고.
토르 : 이런 식으로 극단적으로 나오지 마.
로키 : 착각하지 마. 나한테 주어진 건 없어.
토르 : 차라리 물어뜯어.
로키 : 뭐?
토르 : 그래서 마음이 풀린다면 얼마든지 물고 뜯고 싸워. 세상을 향해 싸움이라도 걸면 좋잖아. 넌 트릭스터잖아. 그게 네 일일지도 몰라. 그래, 지구를 혼란하게 하고 아스가르드를 혼란하게 하는 거. 그래서 마음이 풀린다면 괜찮아. 그렇게라도 해. 응?
로키 : 그래서, 자신이 있으시다 이거군
토르 : 무슨 자신?
로키 : 내가 무슨 사고를 쳐도 너와 오딘이 해결할 거라는.
토르 : 그런 뜻이 아냐!
로키 : 아니기는 무슨.
로키가 아무 말 없이 음산하게 웃는다.
토르 : 난 네가 악당 노릇 하는 것도 좋아.
로키 : (비꼬듯)그러세요?
토르 : 그러지 마.
로키 : 뭘.
토르 : 비꼬지 마.
로키 : (입꼬리를 올리며)왜, 마음 아파? 대단한 형이네. 이 마당에 자기 마음 아픈 게 중요한가?
토르 : ......
토르는 완전히 상처받은 표정이다.
로키 : 됐어. 뭐 마음 아파할 거 없잖아. 내가 동생도 아닌데.
토르 : 아니야. 넌 네 동생이야.
로키 : (웃으며)입양한 동생이라며?
토르 : 하지만 그것까지 포함해서 동생이잖아.
로키 : 그래?
토르 : 그래! 그간 아무 일 없이 잘 지내왔잖아.
로키 : (자기 자신을 가리키며)아무 일이 없다?
토르는 로키의 얼굴을 아무 말도 하지 못한다.
토르 : 하지만 로키, 이제라도 회복할 수 있어. 다들 널 믿어줄 거야.
로키 : 누가 믿어줄 건데?
토르 : .......
로키 : (한숨쉰다)됐네. 이제 와서 헛소리 말고, 넌 잘난 너대로 네 갈길을 가. 난 그냥 트릭스터 로키로 놔두라고. 반역자로라도 놔둬줘.
토르 : 어떻게 내가 그렇게 하겠어?
로키 : 넌 이미 그랬어.
토르와 로키, 마주본다. 토르는 로키가 하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안다. 그리고 로키가 자신을 증오하는 것도 안다. 동시에 자신을 원망하지 않는 것도 안다. 로키는 토르가 이 모든 것을 다 아는 것을 안다.
로키 : (한숨을 푹 쉬고)됐어. 상처받을 것도 없고, 우울해할 것도 없고, 화낼 것도 없어. 이건 내 개인적인 문제야. 너와는 상관이 없어.
토르 : (격해진 듯) 네가 하는 일이면 뭐든 나랑 상관이 있지. 로키. 넌 내가 미운 거잖아. 차라리 나를 죽여!
로키 : 그러면 죽어줄 거야?
토르 : .......원한다면.
로키는 한숨을 쉰다.
로키 : 바보도 저런 바보가 없지. 됐어. 난 내가 해야 할 일을 잘 알아. 그러니 그걸 하지. 여기서 널 죽이는 건 내가 할 일이 아니야.
토르 : 로키!
로키 : 날 더 비참하게 만들지 말았으면 좋겠어.
토르 : 내가 죽으면 넌 승자가 될 수 있지 않아?
로키 : ...머리를 좀 써. 제발.
토르 : .......역시 너에게 좀 더 신경을 썼어야 했어. 아버지도 그렇고, 다들 너를 좀 더 이해했어야 했는데.
로키 : (덤덤하게)과거는 상관없댔지. 네가 뭘 한들 내 마음이 바뀌진 않아.
토르 : 다시 생각해줘.
로키 : (타이르듯)네가 구해주길 바란 게 아니야. 그저 알려주고 싶을 뿐이지.
그때 토르가 벌떡 일어나 로키의 옆으로 가 어깨를 끌아안는다. 로키가 움찔한다.
토르 : 로키, 날, 이 형을 버리지 마라.
로키 : 저리 꺼져!
토르 : 농담이 아니다. 세상을 버리지 말고, 나를 버리지 마라.
로키 : 꺼지라고!
토르 : (더 힘을 주며)내가 너 없이 어떻게 살아. 동생 하나 지키지 못하는 자가 무슨 군주냐.
로키 : 넌 나 없이도 괜찮아. 아니 내가 없는 게 낫지.
토르 : ......
둘 다 로키가 본인도 믿지 못할 말을 한다는 것을 안다. 로키가 한참 애를 써서 토르의 팔을 푼다. 이제 둘은 가까이서 마주보고 있다. 한참 서로 쳐다보고 있다 로키가 말을 꺼낸다.
로키 : 가끔 이상한 생각이 들었지. 뭐 그렇게까지 이상할 거 없을지도 모르지만. 아무튼 그 날 이후, 마음을 굳힌 다음 가끔 생각한 게 있어. 날 여기 붙들어 놓고 있는게 과연 뭘까. 머무를 가치도 없는데 뭘 위해 여기 있을까. 그리고 형이나 아버지는 그게 뭔지 알까 하고. 내가 마음 붙일 데가 있었으면 어땠을까. 차라리 좀 더 바보라서 아무 것도 몰랐으면 좋지 않았을까 하고.
토르 : (힘없이)아냐. 세상은 아름다워. 고생하고 먹는 슈와마도 맛있고.
로키 : 그래? 잘 됐네. 너한테라도 살 만하다니 좀 기쁘군.
토르 : (놀라며) 그게 아니잖나.
로키 : 뭐, 너라면 그렇게 말할 줄 알았어. 넌 세상이 아름답다고 믿으니까.
토르 : 그렇지도 않아.
로키 : 아냐. 너에게 세상은 아름답지. 그래서 자기 목을 노리는 피 안 섞인 동생도 아름다워 보이는 거고. 네 눈에 비치는 세상은 조화로워서 나 같은 녀석이 있을 자리도 있거든. 그런데 난 아냐. 게다가 네가 보는 세상이 나는 싫어. 넌 내가 그 말을 듣고 마음을 돌리길 바랐나? 너무 무르군.
토르 : 로키.
로키 : (웃으며)됐어. 그게 잘 어울리지 너에겐. 아, 이제 갈 시간이네.
토르 : (허둥대며)토, 토니 스타크에게 술이라도 얻어올게!
로키 : 됐어. 지금이 딱 죽기 좋은 시간인데 뭐.
토르 : 로키, 아직 밤은 길어. 그렇지...텔레비전이라도 보지 않을래?
로키 : 괜한 짓 하지 말랬지.
토르는 필사적으로 할 말을 찾는다. 로키는 천천히 일어나 출입구 쪽으로 걸어간다. 토르는 로키의 등을 본다.
토르 : 그, 그래. 아버지에게 뭐라고 하면 좋아?
로키 : 아하, 오딘? (멈춰서서 낄낄 소리내며웃다 몸을 돌려 토르를 보고 다정하게 웃으며) 뭐 오딘만이 아니네. 분명히 어느 놈이고 내가 뭐라고 했냐고 물어보는 놈이 있겠지. 그냥 모른다고 해. 우린 서로를 증오하는 형제였고, 그날도 평소처럼 물어뜯다가 내가 갑자기 잘 자, 토르, 이러고 나가버렸다고. 그러더니 죽었고.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다고.
토르 : 그걸 누가 믿어? 나라도 못 믿을 말을.
로키 : 믿지. 로키는 변덕스럽고 알 수 없잖아? (웃는다.)
토르 : 하지만 어머니께라도 이야기하고 싶어. 어머니는 널 사랑했잖아.
로키 : (고통스러운 표정을 짓는다)안 돼.
토르 : 어머니 가슴에 못질을 할 테냐.
로키 : (이를 물고)개인적인 문제야 이건. 오늘밤은 너와 나만의 거지. 다른 놈이 끼어드는 꼴은 안 보고 싶어.
로키의 진지한 표정을 본 토르는 자신이 아무 것도 하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토르 : (기계적으로) 알겠네.
로키 : 음, 내가 죽고 나거든 아버지한테 연락해. 오딘이 화내겠지. 그거 좋군. 내 시체는 수습해 줄 수 있어?
토르 : 그러고 싶지 않아.
로키 : 아니, 하기 싫어도 할 수 있어. 내 마지막 부탁인데 그걸 못 들어줘?
토르 : (긍정하듯 고개를 숙인다.)
로키 : 아마 내가 죽은 걸 보면 닉 퓨리 놈이 펄쩍 뛰겠네. 호크아인가, 그 녀석이 복수하겠다고 설치겠는데. 하하, 못 봐서 아쉽군.
토르 : …….
토르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서 그냥 가만히 있는다. 로키는 다정하게 웃으며 문 쪽으로 걸어간다. 로키가 문 앞까지 걸어간 순간 토르는 로키를 잡으려고 일어난다.
토르 : 로키!
토르가 로키 쪽으로 다가오는 순간, 로키가 토르의 머리를 두 손으로 잡는다. 놀라 토르가 굳은 동안 이마에 키스한다. 토르가 멍하니 앞을 보고 있는데 로키가 손을 떼고 토르의 머리를 놓는다. 환하게 웃으며 말한다.
로키 : 잘 자, 형.
토르가 막으려고 하지만 로키는 매우 빠른 동작으로 문을 열고 나간다. 마치 뱀이 빠져나가는 것 같다. 토르가 문을 잡고 열려고 하는 순간 기괴한 비명 같은 것이 들린다. 꼭 웃음소리 같다. 토르는 바닥에 무너지듯 쓰러진다. 천장을 보며 한참동안 숨을 제대로 쉬려고 노력한다. 자세를 추슬러서 바르게 앉는데 한참 시간이 걸린다. 간신히 목소리를 쥐어짜 한 마디 한다.
토르 : 왜 하필 마지막에 형이라고 불러주는 거냐, 이 나쁜 놈.
더 이상 말이 나오지 않는 듯, 손으로 눈을 가리고 한참 앉아있다 손을 내린다. 얼굴에 눈물 흔적은 없다. 마음을 정한 듯 눈을 감고 공중을 향해 말을 건다.
토르 : 아버지. 저예요.
'쓰고 만든 것 > 아메코믹' 카테고리의 다른 글
[어벤저스]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 (0) | 2013.03.19 |
---|---|
[어벤저스]천둥과 장난신 신화 (0) | 2012.10.04 |
[어벤저스]친교를 위한 한국식 만찬 -1 (4) | 2012.08.21 |
[엑퍼클]수업이 없는 토요일 저녁 (2) | 2012.08.20 |
[샌드맨]동화와 꿈 1 (4) | 2012.07.24 |
Recent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