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쿠로바스]여수밤바다
- 쓰고 만든 것/남의 드림
- 2012. 8. 7. 22:29
- Posted by 유안.
드림입니다.
키요시 선배X젬코(린)이라는 설정입니다. 제 지인 젬의 최애 키요시 선배와 그녀를 위한 드림입니다. 2015년 여름이 배경으로, 선배가 학교를 졸업하고 세이린 농구부 감독이 됐다는 동인설정이 함께합니다.
“키요시 선배!”
하네다-부산행 비행기가 도착하고 한참 후, 트렁크를 끈 장신의 남자가 공항 입구로 들어왔다. 너는 목소리를 높여 남자의 이름을 부른다. 목소리가 너무 작아서 안 들리지는 않을까, 잠시 걱정한다. 하지만 남자는 웃으며 마주 손을 흔들고 네 이름을 부른다.
“우와, 린!”
린, 은 일본인 친구들만 부르는 이름이다. 일본인 친구들은 네 이름을 부르기 어려워하며 이름 첫 글자를 딴 애칭을 지어부르곤 했다. 맨 처음에 부르기 시작한 것이 누구인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남자가 너를 린이라고 부르기 시작한 것이 네가 고등학교 1학년이 된 해의 봄이라는 것은 분명히 기억한다. 그 후로 너는 평범하고 평범해서 별 것도 아니라고 생각하던 자신의 이름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게 들리는 경험을, 남자가 이름을 부를 때마다 하게 된다. 성큼성큼 걸어오는 남자의 모습이 점점 커지고, 너는 배경의 모든 사물들이 소실되고 남자의 모습만 확대된 듯 또렷하게 보이는 신비한 경험을 한다. 2008년 겨울, 병원에서 그 남자를 만난 이래 늘 있어온 일이지만 8년이 지나도 익숙해지지 않는 광경이다. 너는 잠시 어지러움을 느낀다. 심장이 빨리 뛴다기 보다, 간신히 뛴다는 느낌이다. 아마 이대로 가만히 있으면, 심장이 몸 밖으로 빠져나와 버릴 거야. 너는 머릿속을 돌아다니는 엄청나게 많은 말 중 가장 평범하고 눈에 띄지 않을 말을 고른다.
“첫 방학 축하해요.”
“응, 무슨 소리야. 소학교부터 지금까지 내내 방학은 있었는데.”
“에이, 그거 아닌 거 알면서.”
“하하, 농담이지.”
아무렇지도 않게 웃는 남자를 보며 너는 가슴을 쓸어내린다. 아무래도 모국어가 아닌 언어는, 1주일만 쓰지 않아도 금방 녹이 슨다. 방학이 되고 2주, 번역 아르바이트를 한다고 해도 일본에서처럼 일본어를 쓰지는 못한다. 특히 말하는 데서. 남자의 말을 못 알아들었으면 어떡하나, 웃자고 하는 말에 정색을 하고 대답해서 마음을 상하게 하지는 않았을까. 마음 졸인 만큼, 남자의 웃는 얼굴을 보며 몰래 한숨 쉰다. 매사 어설퍼도 이 사람한테는 그러고 싶지 않다고 생각한다. 이 사람이라면 자신이 실수해도 웃어 넘겨줄 거라는 것도 알지만, 너는 그런 만큼 더 마음을 졸이게 된다.
“선배 숙소는요?”
“어, 요 앞에 토요코인 있지. 아무래도 일본어가 익숙한 데가 좋아서.”
“저희 집에 하루 와도 괜찮아요. 외할머니도 괜찮다고 하셨고.”
“너도 친척 집이잖아. 괜찮아. 그리고 집에 함부로 남자 들이는 거 아니다. 너희 외할머니께도 실례야.”
“에이, 그거야 선배니까.”
“뭐냐. 린 좀 너무하는 거 아냐? 나도 남자로 좀 봐 줘라.”
“선배야 선배죠.”
지금까지 오랫동안 너와 남자는 종종 저런 대화를 주고 받았다. 남자로 안 보인다는 말은 절대로 하지 않는다. 그렇게 말하면 거짓말이 되고, 너는 남자에게만은 거짓말을 하고 싶지 않다. 그 말에 마음 설레던 날도 있다는 것을 너는 인정한다. 하지만 남자는, 키요시 텟페이는 그저 너를 걱정해서 그러는 것 뿐이라는 것을 안다. 친절하고, 예의바르고, 품행방정하고, 가끔은 너무 단정해서 구식 남자라는 소리마저 듣는 남자니까, 너를 걱정하는 거라고, 그러니까 착각하면 나중에 너만 더 힘들어진다고 생각한다.
너는 대학 4학년 여름방학을 한국에서 보내고 있었다. 초등학교 3학년, 그러니까 아홉 살, 아니 한국 나이로 열 살때부터니까 13년을 일본에서 살았지만, 농구부 합숙을 돕던 고등학교 때를 제외하고는 매년 여름과 겨울은 한국 외할머니 댁이나 이모 댁에서 지내곤 했다. 돌아가면 취업활동을 시작하겠지. 아마 한국에서 보내는 마지막 방학이 될 것이다.
그리고 일주일 전에 연락이 왔다. 여보세요, 린? 오랜만이다. 응, 우리도 방학 했어. 그래서 말인데 나 한국 놀러갈 거야. 응, 바닷가 아는 데 있어? 나랑 좀 놀아주라. 가이드의 세 끼 식사를 책임질 테니까.
네 고향은 바다와는 먼 내륙 도시. 너는 고향에서 가장 가깝고 외국인에게도 편한 바다를 찾아본다. 포항이나 영덕보다는 부산이나 거제도. 너는 남자에게 몇 군데 해수욕장에 대한 정보를 메일로 보내줬다. 남자는 거제도 몽돌 해수욕장에 관심을 보인다. 우와 바닷간데 전부 돌이야, 게다가 동글동글해, 예쁘다! 그쵸, 예쁘죠. 선배 마음에 들면 거기 갈래요? 부산에선 한참 가야 하지만. 응, 린도 좋다면 나도 좋아. 너는 잠시 아르바이트로 하던 번역일에 매달린다. 남자가 한국에 온다는데 그까짓 아르바이트가 문제랴 싶지만, 자신이 아르바이트를 놓고 남자를 만나러 간 것을 알면 남자는 분명히 난처한 표정을 짓고, 다음에는 화를 낼 것이다. 남자는 격노하는 일이 적고, 특히 너에게 화를 내는 일은 더 적다. 하지만 그런 만큼 더 화내게 만들고 싶지 않았고, 무엇보다 남자에게 일을 소중하게 여기지 않는 사람으로 보이고 싶지 않았다. 너는 너 자신을 포장해 본 적이 없다. 포장은 내용물에도 가치가 있을 때 하는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남자에게만은, 정말로 좋은 사람, 괜찮은 사람으로 보이고 싶다고 생각한다.
공항 근처에서 이른 점심을 먹고 체크인을 마친 남자는 너와 함께 거제도행 버스를 타러 이동한다. 남자는 돼지국밥을 보며 무척 재미있는 음식이라고 말한다. 식탁에 놓인 밑반찬의 이름을 하나하나 물어보고, 어눌한 한국어 발음으로 발음해 보고, 옆자리 할아버지들과 아주 살갑게 인사를 나누고, 시내버스 창 밖으로 보이는 부산 풍경을 재미있어하고, 시외버스 정류장 풍경을 하나하나 살펴본다. 거제도까지 가는 길에 펼쳐지는 논과 밭을 보며 일본과 같다고 즐거워한다. 남자가 공항에 일찍 도착한 덕분에 당일치기로 거제도 여행을 할 수 있다. 남자는 절대로 1박 2일은 안 된다고 단호하게 말했고, 너는 당연히 남자라면 그러리라고 생각하면서도 약간 아쉬워하는 자신을 발견하고 조금 어이가 없었다. 그래도 버스 옆자리에서, 너는 창가에, 남자는 통로 쪽에 앉아서 이야기 하며 가는 것은 즐겁다. 옆에 앉아서 에어컨 바람을 조절해 주고, 안전벨트를 매 주는 남자가 그저 고맙다. 손이 어깨 위로 올라올 때, 심장이 뛰어 그만 고개를 숙인다. 아무 생각 없이 하는 행동 하나하나가 기쁘고, 기쁜 것이 부끄럽다.
“조금만 더 가면 도착해요. 선배 앉아있기 힘들지 않아요?”
“응, 괜찮아. 무릎도 많이 좋아졌고.”
“학교는요? 합숙훈련 끝나고 오는 길이라면서요. 어땠어요?”
“응, 여전하지. 이젠 그게 전통 같아서 재밌어. 심지어 올해도 슈토쿠 애들이랑 마주쳤다니까.”
남자는 올해 4월,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너와 남자의 모교의 체육교사가 되었다. 무릎을 다쳐 더 이상 현역 농구선수로 뛸 수없게 된 남자는 체육대학으로 진학했다. 고 2때, 윈터컵이 끝나고 난 후 모두의 앞에서 약속했다. 세이린의 농구부 감독이 되겠다고, 너희들이 만든 농구부를 계속 지키고 키우겠다고. 그때 쿠로코 군이, 휴가 선배가, 아이다 선배가 그 말에 어떤 대답을 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그 말이 끝나자마자 제일 먼저 운 것이 너이기 때문이다. 선배는 네 등을 토닥이고, 눈물을 닦아줄 손수건도 소매도 없어서 자신이 유니폼 위에 걸쳤던 티셔츠를 내밀었다 다시 집어넣으며 난처해 했다. 결국 다들 울었던 것 같기는 하다. 대학을 졸업하던 날, 졸업식장에 찾아온 2009년 세이린 농구부원들은 남자를 들어 헹가레치며 세이린 농구부 감독 만세를 외쳤다. 키가 191cm인 남자를 공중으로 던지는 장면은 꽤 장관이라 졸업식장에 모였던 사람들이 모두 둘러서서 구경했던 기억이 난다.
“아하하, 올해 농구부는 어때요?”
“너희 때랑 똑같지 뭐. 참, 꼭 카가미 같은 녀석이 하나 들어와서 아주 귀엽다고 이야기 했냐? 되게 재밌어. 의욕 넘치고.”
남자는 웃는다. 너는 문득, 이 남자가 정말로 어른이 다 되었다고 생각한다. 처음 만났을 때도 한 살 많았던 남자는 무척 어른 같았다. 키와 손이 커서만은 아니었다. 할아버지 같이 토라야키니 흑사탕이니 하는 것들을 좋아하고, 할아버지 같은 말투를 가끔 써서 그런 것도 아니었다. 세이린 고교 농구부를 만든 키요시 텟페이라고 불릴 때부터 이미 어른이었다고 너는 생각한다. 너는 언제까지고 이 사람을 따라잡을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한다. 남자는 언제나 네 앞에서 등을 보이고 있다. 그런 점을 좋아하지만, 너는 이 사람한테 어울리는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하면 약간 우울해진다.
몽돌 해수욕장은, 몽돌이 있기 때문에 그렇게 불린다. 파도에 깎이고 깎여 동글동글해진 돌을 몽돌이라고 부르는 모양이다. 500원짜리 동전 만한 돌이 바닷가를 가득 채우고 있고, 소란스러운 사이로 돌이 달그락대는 소리가 들린다. 너는 남자와 돌을 밟으며 바닷가에 가서, 파도가 잘 보이는 자리에 앉았다. 너와 남자는 잠시 입을 다물고 귀를 기울인다. 이곳에 오면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이, 소리를 듣는 것이다. 돌 사이로 빠져나가는 파도 소리가 들린다. 밀려온 파도가 빠지는 소리가, 거품이 꺼지듯 가라앉았다, 다시 차오른다. 차르륵 차르륵 하는 소리를 듣고 있자니 마음 한 켠이 간지럽다. 한참 말 없이 앉아있었다. 네 옆에서 남자가 파도에 귀를 기울이는 기척이 느껴진다. 아무 말 없이 그냥 한참 앉아서 몇 번이고 몇 번이고 파도 소리를 듣는다. 소리가 차오르고 꺼지는 동안 네 표정을 보는 남자의 시선이 느껴진다. 남자가 바다를 보고 있을 때 너는 몰래 남자의 얼굴을 훔쳐본다. 고요하게 가라앉은 얼굴이 아름답다고 생각하고, 남자가 보는 자신의 얼굴도 그렇게 고요하게 가라앉아 있기를 소망하지만 자신이 없다. 잠시 표정 관리를 못 하는 자신을 보며 남자가 웃는다. 왜웃는지 모르지만 따라 웃어본다. 바닷가를 걸어본다. 굽 낮은 샌들 밑으로 돌멩이의 감촉이 느껴진다. 걷기 힘들어서 잠시 비틀대면 남자가 부축해주기도 한다. 손이 커서 안정감이 있다. 서로 아는 다른 사람 없이, 딱 둘이서, 옆에 있는 사람들과는 다른 말로 소통하는 공간이 있다는 것 자체가 즐겁고, 특별한 곳에 남자를 데리고 온 게 기쁘다. 너는 하루 종일 아무 말도 없이 남자만 보고 있어도 질리지 않겠지만, 남자는 그게 아닐 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수영하고 싶냐고 물어도 남자는 말이 없다. 하긴 수영이 문제면 일본에도 수영장은 많지. 너는 문득 남자가 굳이 혼자 한국을 방문한 이유가 궁금해진다. 그것도 2박 3일 일정으로. 오늘은 몽돌 해수욕장을 보고 내일은 부산 시내를 본다고 하지만, 굳이 혼자 한국까지 와서 볼 만한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그때 남자가 불쑥 입을 열어 너는 생각을 멈춘다.
“한국에서 뭐 하고 있었어?”
“그냥요. 한국 음식 먹고 싶던 거 먹고, 한국말로 수다 떨고, 어릴 때 친구들 만나고……한국어 책 보고요. 선배는요?”
“학기말 마무리 하고 합숙 가고 뭐, 조금 바빴지.”
“수업은 힘들지 않아요?”
“뭐 초짜가 다 그렇지. 그래도 난 체육이라 나가서 수업하는 일이 많지만……가끔 교실 수업할 때 말이야, 학교 다닐 때 수업 시간에 잤던 건 좀 반성되더라. 교단에 서니까 진짜 다 보이더라고.”
“영어 선생님도 그러셨어요. 고1 때 카가미 군이 수업 시간에 잘 때마다 앞에선 다 보이니는데 조는 거 모르는 척 해주시는 거라고.”
“아, 그 선생님, 요즘도 종종 수업 시간에 자던 애들 교무실로 불려와서 혼난다.”
“카가미 군 같은 애들 많나봐요.”
“애들은 다 같으니까.”
남자는 웃는다.
“돌아가면 취직활동 하겠네.”
“네. 그런데 좀 걱정돼요.”
난 선배처럼 그렇게 자신 있게는 못 할 거 같아요. 차마 그 말을 입에 올리지 못하고 너는 머뭇거린다. 남자는 네 머뭇거리는 기미를 눈치챘는지 조금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는다. 언제나 그렇듯 너는 자신없어 하고, 남자는 네가 자신 없어할 때마다 엄한 말을 하고, 기운을 북돋아 주고, 현실적인 말을 해 준다. 네게 필요한 것을 다는 아니라도, 조금씩은 내어 준다. 너는 은근히, 남자가 이번에도 기댈 자리를 만들어주지 않을까 생각한다. 하지만 이번에 남자가 고른 선택지는 현실적인 대안인 것 같다.
“음, 역시 외국인이라서. 일본이 외국인이 살기 좋은 나라는 아니니까.”
“그렇죠. 13년을 살았는데 살면 살수록 어려워요.”
남자의 표정이 약간 불안해졌다. 8년을 만난 만큼, 표정을 읽는 것은 자신이 있다. 하지만 너는, 남자가 너에게 조언이건 위로건 뭔가 말을 할 때 그런 표정을 짓는 것을 본 적이 없다.
“그럼, 졸업하면 한국에서 사는 거야?”
“음, 모르겠어요. 그치만 한국에서 취직할 가능성도 높아요. 일본어 번역 일 하고 싶기도 하고……. 하지만 워낙 잘 하는 사람이 많으니까.”
“린은 어떤데?”
“뭐가요?”
“한국에서 살고 싶은 거야?”
“네, 뭐 그거야. 모국이잖아요. 여기가 편한 부분이 분명히 있죠.”
남자의 얼굴이 흐려진다. 왜 그러냐고 묻고 싶었지만 다음 순간, 남자가 네 손을 잡아끈다.
“아, 놀러왔으니까 바닷물에 발 정도는 담가보고 싶어! 자갈과 파도라니 이런 흔하지 않은 기회를 놓치면 후회할 거 같지 않아?”
너와 남자는 맨발로 바닷물에 발을 담가 본다. 파도가 밀려와서 바지자락을 적셨지만 옷이 소금물을 먹어 하얗게 얼룩이 지건 말건 지금은 그런 것은 생각나지 않는다. 거품처럼 사그락거리는 파도는, 모래사장에서 밟던 파도와는 또 달라서 발바닥 아래에서 묘한 느낌을 남긴다. 계속 걷고 뛰고, 자갈밭 위에 앉아 햇살을 쬐는 동안 너는 아까의 불안한 기분을 잊는다.
해가 제법 많이 넘어갔다. 바다 위에 노을이 졌다. 너는 남자와 함께 바다 위에 노을이 내리는 것을 본다. 남쪽 바다는 투명하고 청량감이 있어서 그 위에 떨어지는 노을도 함께 맑아진다. 노을은 파도가 달그락대는 소리와 함께 점점 진해진다. 그리고 사람들도 점점 적어진다. 이제 일어나야 할 시간이다. 남자는 부산으로 가고, 너는, 부산에 있는 친구 집에서 하루 자고 내일 부산 가이드를 하러 간다. 옷을 털며 움직일 준비를 하던 너는, 남자가 어쩐지 머뭇거리는 것을 눈치챈다. 하지만 지금 이동하지 않으면 부산에 도착하면 시간이 늦어요. 버스정류장까지 시간이 많이 걸리는데. 남자는 바닷가에 서서, 무언가 결심한 듯 주먹을 쥐고 먼 곳을 보고 있다.
“선배, 뭐 해요?”
“있지, 준비한 게 하나 있는데.”
“뭔데요?”
“음, 그게…….”
너는 남자가 말을 다 잇지 못하는 것을 처음 보았다. 그리고 남자의 얼굴에서 네가 읽지 못하는 표정을 처음 보았다. 낯선 남자가 바닷가에 서 있었다. 너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다. 어쩌면 여기에 오기 전부터 너는 이런 일을 예상했을지도 모르고, 어쩌면 이 모든 게 너무 놀라워 지금 아무 것도 안 들리고 안 보이는 것일지도 모른다. 아니다. 네 눈엔 불안한 표정으로 너를 주시하는 남자가 보인다. 너는 어쩌면 지금 두 사람은 같은 것을 보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들어줬으면 좋겠어.”
남자는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네가 대학에 들어갔을 때 한국에서 유행했던 노래다. 너는 신입생 시절 내내 이 노래를 입에 달고 살았고, 교육학부와 문학부로 나뉘어 자주 보기 힘들었던 선배는 가끔 만날 때마다 네가 듣는 노래에 관심을 보였다. 가사 뜻을 알고 싶다고 해서 번역해 준 적도 있다. 여수가 어떤 도시냐고 물어서 지금 엑스포 열리는 도시라는 것 외에는 그 도시에 대해 아는 게 없던 너는 당황해서, 여수 밤바다에 얽힌 사연을 인터넷으로 검색해 보기도 했었다. 4년이 지났는데, 그 노래를 기억하고 있었구나. 아니, 일부러 4년 전 그 때, 네가 좋아하는 노래를 물어서 배운 거라는 것을 너는 어렴풋이나마 알고 있다. 얼마나 연습했을까, 한국어 발음까지 거의 정확하다.
그리고 너는 그제서야 이 노래의 후렴구를 기억해낸다. 너와 함께 걷고 싶다, 이 바다를 너와 함께 걷고 싶어, 이 거리를 너와 함께 걷고 싶다, 이 바다를 너와 함께, 너와 함께.
너와 함께.
남자는 전에 없이 진지한 표정으로 너를 보고 있다. 너는 그제서야, 노래는 이미 끝났고, 눈 앞에 남자의 진지한 두 눈이 있고, 네가 남자를 올려다보고 있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남자는 자갈밭에 무릎을 꿇고 너를 바라보고 있었다.
“뭐 하는 거예요?”
너는 당황해서 목소리가 떨린다.
“하지만 이럴 땐 무릎을 꿇어야 한다고 하던 걸.”
“이럴 때가 뭔데요?”
“어, 나도 뭐라고 해야할지 잘 모르겠지만.”
너는 남자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는 것을 처음 보았다. 그때서야 너는 남자의 목소리가 떨린다는 것을 눈치챘다. 오늘 하루 종일 느꼈던 위화감은 그것이었나보다. 너는 그제서야, 남자가 굳이 너에게 가이드를 부탁한 이유를 눈치챈다. 남자는 힘겹게 입을 연다. 목소리가, 어깨가 떨리고 있다. 어떤 시합에서도 한 번도 떤 적이 없는 태산 같던 등이, 드디어 이쪽을 보고 있다.
“전부터, 생각했던 건데. 계속 말해도 되지?”
“…….”
너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다. 남자는 몹시 힘겹게 말을 잇는다.
“내가, 한 사람 몫을 하는 어른이 되면, 꼭, 그땐 너한테, 말하겠다고. 그, 내 인생을 줄테니, 대신, 내 옆에 있어달라고.”
“…….”
“아, 뭐라고 말하면 좋을지 모르겠네. 어, 그러니까, 어, 한국말로, 어. 사랑합니다. 이거 맞나.”
너는 한 번도 떠는 목소리로 더듬거리는 남자가 이렇게 박력 있을 거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다. 입을 열면 눈물이 나올 것 같아서 아무 말도 못 하고 있자, 남자는 불안하고 초조한 눈으로 너를 쳐다본다. 무릎을 꿇고, 멋대로 어깨를 치고 손을 잡아끌던 손조차 어디 둘지를 모르는 어정쩡한 자세로. 남자가 굳이 노을지는 해변을 고른 이유는 붉어진 얼굴을 감추기 위한 전략일지도 모른다고 너는 생각한다. 아마 둘 다 얼굴이 달아올라 제법 볼만하겠지. 하지만 네 입에선 멋대로 말이 튀어나온다.
“선배, 왜 그런 말을 해요.”
“……응?”
남자는 한층 더 불안한 얼굴로 너를 쳐다본다. 너는, 울먹거리는 목소리로 대답한다.
“선배는 그런 거 안 돼도 충분히 멋지고, 어른이고, 대단한데……. 난 그런 거 없어도 된다고요. 그런 거 약속 안 해도 되는데, 무릎은 왜 꿇어요. 그런 말 들을 정도로 내가 대단하지도 않은데 누가 맘대로 무릎 꿇으래요. 선배…….”
너는 결국 울음을 터뜨린다. 일어나요, 일어나란 말이에요. 남자는 네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네가 아는 한 가장 환한 표정으로 웃으며 네 머리를 끌어안는다. 네 머리가 남자의 팔 안에 파묻힌다.
“대답 못 들을 줄 알았는데.”
남자가 중얼거리는 소리가 맞닿은 가슴 안에서 울리듯 들린다. 너는 왈칵 눈물을 쏟으며 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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