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니발]침(針)

11화 네타 약간 있습니다.

 

 

 

성희롱도 아니고 성적 의도도 희박한 성적 접촉을 그리고 싶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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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니발]동묘역 미국도사

"액이 아닙니다."

"네?"

동묘에 용한 무당이 있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온 김 모 씨(36세, 회사원)는 방에 어설픈 자세로 앉아있는 젊은 외국인에 한 번 놀라고-왜요, 외국인 처음 봐요? 하고 백인 무당은 까칠한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외국인이 너무나도 까칠한 얼굴이라 두 번 놀라고, 마지막으로 액이 아니라는 말에 크게 놀랐다.

"액이 아니라니까요. 이건 범죄예요."

"네에?"

"그 남자친구, 당신 돈 먹고 나르려고 작정한 겁니다."

"하 참 기가 막혀서. 용하다고 그래서 믿고 왔는데 뜬금없이 뭔 소리예요?"

어이없는 표정으로 화를 내도 백인 무당은 눈썹만 조금 찡그리고 태연한 얼굴로 말했다.

"돈 빌려줬죠? 당신 이름으로 마이너스 통장 개설했잖아요."

"아, 그건 그렇지만...우리 결혼할 거거든요? 도사님 외국인이라 잘 모르시나본데 우리 나라에선 결혼 준비하는 데 돈 많이 들거든요?" 

무당은 가엾은 뭔가를 보는 표정으로 손님을 쳐다보았다.

"살림 차리려고 얻는 빚이 아닙니다."

"네?"

"빚이 있거든요. 음, 아마 한 2억하고도 몇 천 될겁니다. 자세한 건 잘 모르겠네요. 사채네요. 아까 보여준 아이패드 케이스에 명함 들어있었는데 못 봤어요? 골드문 금융이라...... 조만간 인생이 끝장나게 될 거 같으니까 당신 앞으로 빚 다 떠넘겨놓고 자기는 다른 여자랑 외국으로 도망갈 예정이에요. 보니까 다른 여자가 있네요. 염색한 단발에 코는 성형인가요? 오 이런, 가슴도 했군요. 쌍꺼풀이 짝짝이인 걸 보니 수술이 좀 잘못됐나 ...누군지 알겠죠? 빚은 그 여자 때문입니..."

"뭐예요? 박은영 이 썅년이!"

36세 회사원 김 모 씨는 옆에 고이 놓아둔 가방을 움켜쥐고 분기탱천한 얼굴로 방을 뛰쳐나갔다. 동묘역 미국도사 윌 그레이엄은 등 뒤로 한 마디를 덧붙였다.

"이게 제 디자인입니다."

 

단일민족 따위가 개소리가 된지도 몇 년, 한국에 거주하는 외국인이 십만이 넘은지도 몇 년. 그러므로 외국인 무당이 있어도 어색할 것 없다, 가 윌 그레이엄과 그의 신아버지인 잭 크로포드의 지론이었다. 당당하게 동묘역 미국도사라고 이름을 걸어놓은 것도 그것 때문이다. 미국도사는 좀 웃기지 않느냐고 윌이 항의했으나 잭 크로포드는 들어주지 않았다. 후보로 총각도사, 기인도사, 총각보살 등등이 있었다는 건 비밀이다.

어쨌건 윌의 영업은 성공적이었다. 무당집이므로 사회적인 관계에 크게 신경쓰지 않아도 좋다. 한국인들은 무당이 괴이한 행동과 말투를 구사할 수록 좋아한다는 정보를 입수했고 그것은 사실이었다. 용하다고 소문이 나자 고정적으로 찾아오는 사람들도 생겼다. 게다가 예로부터 무당의 주고객은, 여자다. 잘생긴 얼굴이 영업에 도움이 되면 됐지 방해가 되지는 않는다. 물론 윌 그레이엄은 마지막 부분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가 하는 일은 보통 무당들과 달랐다.

한국에서 무당이 하는 일은 사실상 심리상담과 같다. 남편 때문에 썩는 속 이야기도 들어주고, 살이니 액이니 원인도 여러가지로 찾아 주고, 남편 욕도 해 준다. 하지만 윌 그레이엄의 특기는 실종된 사람 찾기, 빚 받기, 살인사건 범인 찾기이다. 뉴스에 나오지 않은 사건도 몇 건, 뉴스에 나온 사건도 몇 건. 자기가 죽이기라도 한 듯 살인자의 인상착의와 살인동기를 줄줄 읊는 윌을 보고 네가 범인이냐고 멱살을 잡은 사람도 몇 있었다. 역시 한국인은 다혈질이라고 윌은 재미있어 했지만 분노한 잭은 사건을 맡지 않겠노라 화를 내기도 했다. 하지만 신아버지가 화를 내도 한국 정부가 윌 그레이엄을 마음에 들어한 이상 일은 끝난 거다.

 

그러던 어느 날.

"이거 좀 드셔보시겠습니까."

북유럽계로 보이는 신사 하나가 윌 그레이엄의 점집에 찾아왔다.

"누구..."

"아, 잭이 소개 안 하던가요. 정신과상담의 한니발 렉터입니다."

외국 억양이었지만 깔끔하고 딱 떨어지는 영어였다.

"사람과 처음 만나서 먹는 음식은 중요하죠. 몸에 들어가는 것은 그게 무엇이건 다 의미가 있습니다. 그래서 좀 가져와 봤습니다만...소시지 좋아하십니까? 한국에서 구할 수 있는 가공육은 대개는 질이 낮지요."

한니발은 굿당의 앉은뱅이 책상 위에 회색 손수건으로 싼 도시락을 내려놓았다. 예기치 못한 상황에 윌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드세요. 만든 제가 할 말은 아니지만, 육질이 부드럽습니다."

그리고 그 말 그대로, 참 맛있어 보이는 소시지였다. 선홍색을 띤 소시지의 표면에는 묘한 광택이 흘렀고 제대로 훈제를 한 듯 짙은 향이 났다. 먹는 것에 초연한 윌이라고 해도, 소시지라고 이름붙인 허드렛고기 덩어리 내지는 고기의 ㄱ도 찾아보기 어려워 보이는 밀가루 혼합물에 진력이 날 때도 되기야 했다. 윌은 한니발이 내민 포크를 집었다.

"네 뭐...한니발 렉터 박사님, 이라고요?"

"그냥 렉터 박사라고 부르세요, 윌이라고 부르겠습니다."

수제 소시지와 커피를 가지고 온 북유럽계 미국인은, 아무도 그렇게 하지 않은 방식으로 윌의 굿당에 들어왔다.

 

"많은 사건을 해결하셨다죠."

"과찬이십니다."

"저는 종교적인 부분은 잘 모릅니다만, 제가 아는 언어로 이야기하자면 공감능력이 극대화된 것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오늘 이야기하려는 부분은 그게 아니에요."

소시지를 먹던 한니발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윌은 얼굴이 저절로 굳는 것을 느꼈다. 원래 굳어있기는 했지만- 도대체 무슨 일로? 자신에게 일을 부탁할 것이라면 어째서 이렇게 비공식적인 방식으로? 윌의 표정에 아랑곳하지 않고 한니발은 여전히 사려깊은 말투와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말을 했다.

"제가 맡은 아이입니다. 애비게일 홉스라고 하죠. 애비게일?"

그제서야 눈치챘다. 굿당 입구에, 멀찍이 떨어져 방에 들어가기도 싫다는 듯 찡그린 얼굴로 이쪽을 보는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여자아이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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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직장이라 여기서 끊음. 신세계와는 아무 상관 없습니다.(2012.07.22)

그리고 새로 올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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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모종의 프로젝트 홈에 올리던 건데 그냥 여기 옮깁니다.

한국 신화 베이스에 만주나 중국, 일본 등 이웃나라 여신들 이야기를 끼얹어가면서 쓸 거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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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예전에 어느 1년짜리 글쓰기 프로젝트하는 홈에 올린 겁니다. 올해 1월이었나 2월이었나 탈해 카드 나오고 세이메이X탈해 커플링 나올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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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세계]여수밤바다

예전에 써 뒀던 건데 이제 백업하네요. 어딘가에 올렸던 글이라 가져오기 좀 그랬는데 뭐 그쪽 페이지 보는 사람이 얼마 없는 거 같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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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라이트]선생들의 대화

업데가 너무 없어서 조각글을 올립니다. 에리님이 리퀘해주신, 제자들을 놓고 대담하는 베른하드와 프리드리히이긴 한데 뭔가 대담의 주제가 요상하게 풀렸지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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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닥터이도]뿌리 깊은 타디스 1

<뿌리깊은 나무>의 이도와 <닥터후>의 닥터입니다. 데이빗 테넌트 닥터 기준입니다.

 

 

"흠경각 앞에 웬 목함이 떨어졌사온데 크기가 크고 모양이 기괴하옵니다!"
인시(寅時)도 어느덧 지나 묘시(卯時)에 이를 시간이었다. 상참이 끝나 조정신료들이 모두 물러가려는 찰나, 늙은 겸사복이 달려왔다.
"목함?"

왕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높이가 일곱 자이옵고 너비가 석 자이옵니다. 색은 파랗고 문이 있사옵니다."
"뭐라. 어디서 떨어졌느냐."
"하늘이옵니다."

신료들이 웅성대기 시작했다. 궐 안에 수상한 물건이 떨어지다니 이것은 나라의 안위와 직결된 문제 아니오, 허나 그렇게 큰 목함이 어디서 떨어진다는 말인가, 근보 자네 이상한 생각 말게, 인수 자네는 내가 뭘 어쩐다고. 왕이 목소리를 내자 신하들이 입을 다물었다.
"흠경각에 떨어졌으면 다치거나 상한 자가 있느냐. 목함이 깨졌으니 파편이 튀었을 터. 건물이나 구조물이 상했으면 고하라."
"그것이, 목함이 멀쩡합니다. 이상한 소리를 내며 나타났는데 깨진 곳 하나 없습니다."
일순 정적이 흘렀다. 겸사복은 당황한 얼굴로 고개를 조아리고 벌벌 떨고 있었다.
"무슨 소리냐."

늙은 겸사복의 주름진 얼굴에 땀이 맺혔다.

"다친 자도, 깨진 것도 하나도 없사옵니다."

"뭐라?"

"그리고 목함 안에서, 그것이, 전하, 차마 소인은 고하기 어렵사옵니다."

겸사복은 이제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왕이 얼굴을 찌푸리고 겸사복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때 포교가 달려왔다.
"황공하옵니다! 궐 안에 수상한 자가 침입했사옵니다!"
왕의 얼굴이 굳었다. 당시 수찬 벼슬을 하던 근보 성삼문은 생각했다. 이거 엄청나게 재미있는 일이 터지겠구나, 하고. 히죽히죽 웃기라도 했는지 갑자기 옆구리가 아팠다. 옆을 보니 인수 박팽년이 자신을 근엄한 얼굴로 노려보고 있었다. 뭐 어때, 재미있어 보이는데. 고개를 으쓱하자 재차 옆구리에 주먹이 박혔다. 먼 곳에서 조 대감이 자신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삼문은 생긋 웃었다. 에이 뭐 이런 걸 갖고. 전하께서 더 재미있어 하실 것입니다.

 

내금위장은 파란 옷을 입은 이상한 자를 노려보았다. 짧은 갈색머리에 아무 것도 쓰지 않았고 바지는 통이 좁았으며 웃옷은 깊이 파였고, 목에 파란 띠를 묶고 있었다. 코가 높고 눈이 우묵히 들어갔으며 눈색이 파랬다. 궁에는 색목인을 처음 보는 사람들도 많아 궁녀들이 문 뒤에서 놀라 얼어붙어 있었다. 더구나 목함을 열고 사람이 나왔다. 그자는 무기를 든 사람들을 보고도 태연하게 두 손을 머리위에 올리고 버티고 서 있었다. 담력이 보통이 아니다.
"닥터, 그래요, 여기 말로 박사입니다."

"무슨 박사냐. 왜 여기에 있는 것이냐."

"그냥 박사고 여기에는 왔으니까요."

"무례하다!"

내금위장의 일갈에도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그자는 그냥 주위를 둘러보며 신기한 표정만 짓고 있었다.
"수상하다. 의관도 갖춰입지 않고, 머리도 맨머리이니 상것들도 그렇게 다니지는 않는데, 어찌 궐 안에 이리 무례한 자가 들어오는가. 호패도 없는 자가 어찌 박사라 하는가. 궁에 색목인 박사가 없는데 누구냐?"

재차 닥달해 보았으나 그자는 웃기만 했다. 표정이 굉장히 풍부한 것이 아주 경박해 보였다.
"방금 봤잖아요. 아, 모자. 그렇지. 동아시아에는 맨머리를 드러내지 않는 풍습이 있었지. 미안해요. 타디스 안에 가면 많아요."
"타디스?"
"저기 저거요."
"목함의 이름이 괴이하다. 오랑캐냐?"
"아니, 그냥 내가 타고 다닌단 말입니다."
내금위장 무휼은 머리를 감싸쥐었다. 갑자기 흠경각 앞에 떨어진 목함만 해도 기괴한데, 그 안에서 나온 인간은 상식을 아득히 뛰어넘는 괴이한 존재였다. 그냥 정신이 나간 자라고 해도 궁 안에 그런 것을 들일 수는 없는 일이었다. 대체 어디로 어떻게 들어온 것인가. 다른 곳이라고 해도 큰일날 판이다. 하지만 여기는 흠경각이다. 침전 안쪽에 있는 은밀한 곳이다. 게다가, 무휼이 세상에서 제일로 섬기는 전하께서 중히 여기시는 곳이다. 앙부일구며 간의가 있는 곳이다. 또, 전하께서 은밀히 함원전에 집현전 학사 몇 명을 들이는 곳이기도 하다. 여기에 침입자가 들어왔다는 것은, 그 계획에 차질이 생겼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 자를 끌고 가 입을 열게 해야 할 것인가. 무휼은 언성을 높였다.
"여기가 어디인지 아느냐! 조선의 궁궐이다. 전하께서 계신 곳이니라!"
"저 분요?"
내금위장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그 자가 가리킨 곳에 왕이 서 있었다.
"저 자가 목함 속에서 나온 자이냐. 우리 말을 잘 하는구나."
"국왕이십니까?"
색목인은 허리를 굽혔다. 예를 표하는 것 같았으나 절을 하거나 무릎을 꿇지 않았다. 시립한 내관과 궁녀들이 모두 황망해 하였고 무휼도 어이가 없어 그저 그 자를 노려보았으나 왕은 개의치 않았다.
"그래. 과인이 조선의 왕이다. 너는 누구냐?"
"나, 아니지. 저는 박사입니다. 이름은 없사옵고 그저 박사라 칭합니다."
"저 무엄한 놈!"
무휼이 언성을 높였으나 왕은 그저 그 자를 올려보고 있었다. 키가 육척을 넘길 듯, 꽤 컸다. 체구는 여위었으나 만만히 볼 자는 아닌성 싶었다. 사선을 넘나들며 살았던 무휼은 그 자에게서 위협감을 느꼈다. 그런 느낌을 받지 못했을 리 없는데, 왕은 태연히 그 자에게 물었다.
"남들이 그리 부르느냐?"
"아니오. 제가 저를 박사라 칭하옵기에 남들도 그런 줄 알고 박사,박사 합니다. 그런데 여기는 언제인지요?"
여기는 언제? 말이 어딘가 이상했다. 왕도 그 말에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나 그 자의 얼굴을 보더니 한숨을 쉬며 그냥 답해주었다.
"정통 13년이다."
갑자기 그 자가 환호하며 방정맞게 빙글빙글 돌며 혼자 빠른 속도로 말했다.
"그래, 그래, 여기는 조선이었어! 저이가 세종 이도군. 장헌대왕이야! 아니아니아니 아니지, 여기서 이 말을 하면 안 되지. 저건 저 자의 미래의 이름이니 안 돼. 여기서는 그냥 왕으로 불리겠지. 법률 전문가이며 법의학 전문가, 인쇄에도 고명한 왕이자 조선 최고의 학자이지. 당대 아시아에서 당할 자 없는 언어학자, 아 그래! 그거야! 왕의 최대 업적이지! 그걸 만들었어! 생각났다. 생각났어! 그래, 그거야! 정통 13년! 바로 코 앞이군! 몇 년 뒤면 그게 온 나라에 퍼지겠지!"
그때까지 태연하던 왕의 얼굴이 갑자기 일그러졌다. 무휼은 어의를 짐작했다. 그것이다. 저 자는 그것을 알고 있다.
"무엄한 놈! 그 입을 찢어버리기 전에 입을 다물어라. 지존이시니라. 어찌 너 따위가 감히!"
무휼이 칼을 뽑아들었다. 창백한 얼굴로 그 자의 망령된 언동을 쳐다보던 왕이 손을 들어 무휼을 막았다.
"전하!"
"이자를 만춘전으로 데려오라! 내 이 자와 논할 것이 있느니."
"하오나 전하, 수상한 자이옵니다."
"색목인이 수상한가. 원에는 색목인이 많았다. 고려에도 사신으로 왔지."

왕은 의외로 태연했다. 자신의 계획을 아는 색목인이라는 점이 마음에 걸려 보였지만, 그자에게 듣고 싶은 것이 많은 듯했다. 하지만 무휼이 보기에는 그냥 수상한 자에다, 위험한 자이기까지했다.
"그 뿐이 아니옵니다. 전하, 이 자는 알고 있사옵니다."
"내금위장, 직접 지키라. 그러면 되겠는가?"
"송구하옵니다."
왕은 먼저 걸음을 옮겼고, 그 뒤를 따라 성큼성큼 걸어가려는 그 자를 무휼이 불러세웠다.
"손을 묶겠다. 허튼 생각을 하면 목을 벨 것이다."
"오. 목을 벤다는 말도 오랜만이군. 좋아요. 자, 묶어요."
그자는 손을 내밀고 생글생글 웃었다. 손을 묶는 동안 그 자의 웃옷 틈에서 금속으로 된 봉 같은 것을 본 것 같았다. 무기는 아닌 듯 싶어 그냥 두었다.

 

 

흠경각에 목함이 있었다. 목함의 주인이 박사였는데 주상께서 박사를 벌하지 않고 만춘전에 불러 하문하셨다. 오랜 시간 이야기를 나누었다.
-조선왕조실록, 세종 24년 3월 23일(144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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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 레베카

4월 13일 류정한/옥주현/김보경/최민철 캐스팅으로 봤습니다.

 

막공이 가진 에너지도 있었고, 배우들이 극에 몰입하는 것도 있어서 이 기획사 공연을 본 중 가장 만족스럽게 봤습니다. 그보다 저한테 이 공연의 의의는 이 극작가가 점차 대중적인 작품에 가까워지고 있다는 점에 있습니다. 애초에 전 특정 배우 팬이나 공연의 팬이라기보다 극작가의 팬에 가깝습니다. 제 어미오리거든요. 제 이상에 가까운 작품을 쓰는 사람이기도 하고요. 그러니까 이건, 제 존잘님이 발전하고 계신다는 기쁨을 말로 정리해 보고 싶어서 쓰는 감상입니다.

 

미하엘 쿤체는 솔직히 말해서 대중적인 극을 쓰는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이 사람이 쓰는 극은 인물을 알기 위해 여러 장치를 해독해야 하고 작품의 역사적 배경에 대해서도 알아야 하며(자국민들은 거기에서 자유로울 거 같지만, 아닙니다. 한국인이 한국사 잘 아나요. 아니잖아요.)골아픈 가사의 의미를 해석해야 합니다. 모차르트!나 엘리자베트는 사실 접근성이 좋지는 않죠. 그 전에, 먹물에 찌든 인간의 취향이란 게 일반인과 같지 않습니다. 여기서 일반인은 좋은 의미로 일반인입니다. 먹물들은 자기 취향이 대중적일 거라고 착각하지만 절대로 대중적이지 않죠. 아무한테도 안 먹힐 개그와 아무한테도 안 먹힐 주장을 하면서 자기들이 쉬운 소리를 한다고 착각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본인은 그런 점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던 게 아닌가 해요. 대중적인 공연을 쓰고 싶다는 이야기를 했다고 들었습니다. 게다가 작품 속의 쉬카네더 같은 캐릭터에서 그런 면이 언뜻 보이기도 했고요. 물론 그렇게 하기 위해서 쉬운 단어를 골라 쓰고, 선명한 연출을 한 점은 인정합니다. 하지만 솔직히 엘리자베트 초연을 봅시다. 하리 쿠퍼의 연출이 그게 뮤지컬 연출입니까 실험 오페라 연출이죠. 그 양반 니벨룽의 반지 연출도 그렇게 했더만요 뭐-_-; 여담인데 한국의 엘리자베트 공연에서 쿤체가 좋아했던 것은 공연의 키치스러움이 아니었을까 진지하게 생각합니다. 전 그렇게 남대문 시장에서 장사하는 간지로 키치 부르는 루케니 처음 봤습니다. 그 점에서 한국 캐스트가 대단했지요.

 

아무튼 전반적으로, 나치 청산 문제니 예술가와 인간의 삶 문제니 하는 걸 집요하게 추적한다는 점도 그렇고 굉장히 먹물내가 풍기는 물건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번 레베카에서 놀랐던 점은, 아무도 공연내용이 어렵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물론 한국 공연 기획사가 이거 연출을 제일 멀쩡하게 해서 그렇겠지요. 전 그 기획사에서 공연한 모차르트!와 엘리자베트를 봤기 때문에 거기 연출에 대해 별 호의가 없습니다. 그런데 또 보는 제가 호구지요. 압니다. 하지만 역으로 이 기획사가 연출을 멀쩡하게 했다는 점이야말로 이 작품이 이해하기 쉽다는 반증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이 기획사는 앞의 두 극을 가족극과 로맨스로 연출하려고 엄청나게 애를 썼던 곳이거든요. 그런 기획사에서 힘들이지 않고 로맨스 코드를 얼마든지 강조할 수 있다는 겁니다. 물론 쿤체가 하는 일이니 이 작품도 원작에서 어린 소녀의 성장 코드를 중요하게 다룬 부분이 있습니다. 하지만 로맨스와 개그코드를 중요한 요소로 넣어버리니, 그 부분에 힘을 싣기 참 좋아지지요.

저는 극에서 그거 남발하는 거 싫어합니다. 그놈의 로코인지 뭔지가 문화의 다양성을 저해한다고요. 아 농담 아닙니다. 제가 사는 동네는 정극 공연을 거의 볼 수가 없어요. 소극장 연극들이 죄다 로맨스 코미디거든요. 사람들이 로맨스 코미디가 연극의 전부인 줄 알고 그런 것만 찾는 거 보면 화를 내는 더러운 먹물입니다 제가. 그렇다고 아는 것도 없으면서 쓸데없이 겉멋만 든 게 문젠데...그런 제가 볼 수 있는 로맨스 코미디의 한계점 정도? 사실 엘리자베트는 일종의 덕후 대상 상품인 셈이죠. 무척 마니악한 부분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이 쓴 극이라고  생각하기 어려운 부분이 분명히 있었어요. 그런데 제법 로맨스물 다운 것이 나왔습니다. 원작이 가진 힘도 있고, 한국 번안의 힘도 있지만 원작 자체가 로맨스와 코미디를 소화하기 위해 애쓴 부분이 많다고 생각합니다.

전 그러기 위해서 쿤체 씨가 굉장히 많이 공부하고 노력했다고 봐요. 이건 취향이나 습관 같은 문제라서 한 번 엘리자베트 같은 걸 쓰게 되면 그게 일종의 틀이 되는 경우가 많아요. 하지만 쿤체 씨는 많은 사람들이 좋아할 만한 극을 쓰고 싶어 하셨고, 그러기 위해 이것저것 많이 찾아보고 패턴도 분석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극작가로서 어느 정도 정점을 맛본 인간이 다른 패턴을 쓰기 위해 노력하는 게 보통 일이 아니라는 걸 알아요. 게다가 먹물이 먹물 안 든 작품 쓰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 압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한테 이 작품은 먹물이 자기 한계를 극복한 작품으로 의의가 있는 거예요. 학습과 노력을 통해서 일반인과 덕후들의 취향의 중간을 찾아냈다는 게 무언가를 만드는 사람에게는 중요한 포인트지요. 레베카를 좋아하지는 않지만 레베카를 썼다는 사실 자체를 좋아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연출이 다 마음에 드냐면 그건 아니고 로맨스 코드가 강조가 되어서 원작의 어딘가 묘하게 굳어있는 느낌은 덜 났다는 게 아쉽긴 했습니다. 그렇게 말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일반인 감성을 공부한 덕후라고요. 이런 요소 저런 요소를 넣으면 좋다는 건 다 실험을 해 본 느낌이 들었습니다. 이게 한국 연출의 문제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제가 독일어를 잘 몰라서요. 그렇지만 하지만 이전에 본 정보보다 굉장히 로맨스 코드가 강했습니다. 일단 막심이 무릎을 꿇고 청혼한다는 게 굉장히 낯설었습니다. 뒤 모리에의 원작에서 내가 무릎 꿇고 청혼하지 않아서 실망했나 본데 결혼이 로맨틱한 줄 아느냐는 식으로 말하는 막심에게 굉장히 감명받은 게 있어서요. 대중적인 극에 성공했다면서 지나친 로맨스 코드를 지적하는 게 모순 같이 보이시겠지만, 음 대중=로맨스 팬은 아니지 않습니까. 뮤지컬이 한국에서 아무리 2, 30대 여성들이 주로 관람하는 장르라고 해도 그 나이때 여성들의 관심사가 모두 로맨스는 아니지 않나요. 그리고 저는 사람들이 뮤지컬/연극 했을 때 로맨스나 코미디만 떠올리는 풍조 죽도록 싫습니다. 로맨스 없으면 시나리오가 안 나옵니까?

게다가 여기의 막심은 너무 젊고 혈기왕성하고, 딱 외국인이 보는 영국신사 같지도 않다는 점도요. 류정한 배우 무척 좋아하고 이번 공연도 마음에 들었지만 깐깐한 40대 영국 귀족이라고 보기에는 어려운 점이 많았습니다. 아무래도 로맨스 코드 때문에, 그런 요소도 많이 사라지지 않았을까 싶네요. 특히 류정한 배우가 제일 영국신사 답지 않았던 건 아닌가 싶기는 합니다. 특정 대사에서 류 배우님 욕이 제일 찰졌어요(...) 빡침을 표현하기엔 효과적이었겠지만 전형적인 영국신사가 말하기에는 뭔가...게다가 번역 누구죠. 막심이 왜 한결같이 반말을 쓰는 거죠. 물론 나이차이 표현하는 데 그게 좋다는 점은 인정합니다. 하지만 그 반말이 막심을 더 어린 남자로 만들어버린 거 같아서요.

그리고 여기에서도 죽어라고 그림자가 가사에 등장하는 걸 듣고 결국 웃었습니다. 쿤체 씨는 그림자(Die Schatten) 없으면 극을 못 쓰시는 증상이 있다는 말이 괜한 게 아니었어요.  

 

뭐...화는 그만 내고, 류정한의 레베카 빙의 연기에 입이 벌어졌다고만 마무리합시다. 옥주현 씨는 본 중 제일 나았지만 저는 초혼송에서 레베카 소환 못 하면 일단 이야기를 하지 않는 더러운 원칙주의자입니다. 반 호퍼 부인이 극 중에 잘 녹아들어갔고 베아트리체와 가일스, 프랭크도 안정적인 연기를 보여주셨습니다. 무엇보다 최민철의 잭 파벨이...전 언젠가 이 분이 연기하는 헤롯을 한 번 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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