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신화 베이스에 만주나 중국, 일본 등 이웃나라 여신들 이야기를 끼얹어가면서 쓸 거 같아요.
"언니, 나 배고파."
"그럼 너네 집에 가던가."
"에이, 언니 그러지 말고 국수 한 그릇만 말아먹어요."
"무거워! 저리 가 좀."
자청비가 바닥에 누워있는 바리데기의 어깨에 머리를 부비며 애교를 떨어대자 바리데기는 홱 하고 벽을 향해 돌아누웠다. 바닥에 머리를 찧은 자청비가 볼멘 소리로 대꾸했다.
"언니 이러기야?"
"그러니까 집에 들어가라고. 내 밥 해먹기도 귀찮은데 너까지 밥 해먹이리?"
"아 싫어. 집 나온 건데 내가 거길 왜 들어가?"
"뭐 이런 게 다 있어? 결혼시켜달라고 삼계를 다 뒤집은 년이 이제 와서 집을 나와?"
쳐다보지도 않고 돌아누워있는 바리데기를 향해 자청비가 입을 삐죽거렸다.
"언니가 내 맘을 어떻게 알아? 언니는 그 흔한 시월드도 없으면서."
"아 이년이 진짜..."
바리데기가 벌떡 일어나 자청비를 노려보았다.
"그~러니까 언니이~ 국수우, 응?"
"너 어디서 개념없단 소리 안 듣고 사냐, 어? 이러니까 허구헌날 남편하고 싸우지."
자청비는 도끼눈을 뜨고 바리데기를 쳐다봤다.
"언니 지금 남편이 왜 나와요? 나 배고프다고!"
"이러니까 여신이란 게 욕이나 먹고!"
"언니는 내가 그나마 이 정도나 되니까 그런 개념 쌈싸먹은 시월드에 남편이랑 살지!"
뒷목을 잡는 바리데기를 향해 도끼눈을 뜬 자청비의 푸념이 이어졌다.
그 남자의 아버지는 나를 보자마자 얼굴을 찌푸렸고, 그 남자의 어머니는 나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손님이라고 문간방에 앉혀놓고 식어가는 밥과 구색만 맞춘 밥상을 내 주었다. 안채에서 인사를 하는 것이 며느리를 받는 법도일텐데, 행랑채 너머로는 가 볼 수도 없었다. 호청이 날강날강한 헌 이불을 주며 덮고 자라고 했다. 이불 사이로 찬 바람이 들어와 쉽게 잠을 이루지 못했다.
“네 짝은 서수왕따님애기라고 이미 정해졌거늘 웬 계집아이냐.”
멀리서 고함소리가 들렸다. 그 남자가 뭐라고 대답하는 소리가 들렸다. 남자의 부모가 한 마디씩 말을 하는 소리도 들렸다.
“어린 아이가 배운 데가 없어 야합을 하였더냐.”
“참 배운 데 없는 계집아이다. 처신을 어떻게 해서 저런 것에게 홀린 게야.”
“이 아둔한 것을 공부하라고 밖으로 보냈더니 교활한 계집에게 홀렸소. 자식을 어찌 가르쳐 이 모양이오.”
“잘 가르친들 부모 슬하를 떠나 벌어진 일까지 제가 다스리리까?”
드문드문 이어지는 목소리에 가뜩이나 이루기 어려운 잠이 더 멀리 달아났다. 우물가에서 물 얻어마신 처자도 못 알아보고 3년간 한 방에서 자면서도 저를 남자인 줄만 알았으니 그 남자가 아둔한 것은 사실이오마는 홀린 적은 없고 교활하게 군 적도 없습니다. 철없는 문도령 따위, 제 어미 치맛폭에 묻혀 살건 색시 치맛폭에 묻혀 살건 알 바 아닙니다.
결국 늦게야 잠들어 뒤숭숭한 꿈을 꾸고 일어났더니 그 남자의 부모들이 행랑채 마당에서 나를 보자고 했다.
“어찌 부모도 통하지 않고 통혼하려 하는고?”
제 부모가 저를 쫓아냈습니다. 사내종이 겁탈하려 들길래 죽였더니 일 잘 하는 하인놈 죽였다고 성화요, 그래 서천 꽃밭에서 꽃을 구해 살려놓았더니 요망하게 사람을 죽였다 살렸다 한다고 성화입디다. 그날로 쫓겨나 헤매다 여기까지 이르렀습니다.
“법도에 어긋나는 혼인은 할 수 없다.”
먼저 혼인한 걸로 치면 제가 먼저입니다.
“우리가 너를 어찌 믿겠느냐? 부모를 속이고 야합하였는데 지아비를 속이지 말라는 법이 있느냐?”
속일 남자를 기다리며 비단에 이름을 새기고 머나먼 하늘나라까지 오겠습니까. 괄시받고 눈칫밥 먹으며 여기서 이러고 있겠습니까.
“계집아이 말하는 본새를 보니 부모가 어찌 키웠는지 짐작이 간다. 그러니 멋대로 부모 몰래 집을 나왔겠지.”
제 말은 안 듣고 계시는군요.
내가 하는 말은 듣지도 않고 내 입장은 하나도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역시 시험을 좀 해 봐야겠다. 그 아이 말도 일리가 없지는 않고.”
그 남자의 아버지가 비단필을 던지다시피 내밀었다.
“내일 입궐해야 하니 조복 좀 지어다오.”
밤새 천을 마르고 단을 공그르고 솔기를 박았다. 졸며 바느질을 하다 보니 손가락에 성한 데가 없었다. 흉배에 수를 놓다 내 손가락에도 자수를 놓을 뻔 했다. 그렇게 하룻저녁에 옷을 다 지어 바쳤더니 소매가 짧다느니 품이 너무 크다느니 했다. 입어보지도 않고 소매가 짧은지 품이 큰지 어떻게 아는지 모르게겠다고 했다. 그랬더니 천이 곱지 못하다고 했으나 그 천은 남자의 아버지가 준 것이었다. 혀를 차고는 옷을 구기다시피 들고 방으로 들어가는 그 남자의 아버지의 표정이 관복보다 더 구겨져 있었다.
그 남자의 어머니가 나섰다. 너비도 깊이도 서른 자는 될 것 같은 구덩이를 파서 불붙은 숯을 가득 채우고 그 위에 칼날로 다리를 만들었다. 다리 너머가 까마득했다. 건너갈 때 입으라고 내준 소복이 꼭 상복 같아 섬뜩했다. 누구를 위한? 그건 나도 모르겠다.
“이것도 건너지 않고 우리 집에 들어오려고 했더냐.”
그 댁에 들어가려는 것이 아니오라 제 짝과 살고 싶어 그랬습니다.
“네 말은 듣고 싶지 않다. 어서 건너거라.”
칼날 다리를 밟자 발이 아팠다. 뜨거운 숯 때문에 달아오른 칼날에 닿은 발에서 연기가 올라왔다. 이대로 발을 다 지져서 발이 없어지면 아프지 않겠지. 그 남자의 가족들이 눈을 부릅뜨고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이대로 구덩이 속에 떨어져 숯이 되면 저들이 좋아하겠지. 알 게 뭐냐. 한 발 한 발 밟을 때마다 대놓고 표정이 구겨지는 것이 볼만하여, 그 재미로 억지로 버티며 칼날 다리를 건넜다. 건너편에 도착하자 그 남자의 어머니가 내 손을 붙잡았다.
“치맛단에 피가 묻었으니 불경하다.”
찢어진 발뒤꿈치에서 피가 나 치맛단이 벌겋게 물들어 있었다.
“칠칠맞게 이 피가 다 뭐냐. 못난 것.”
이렇게 살려고 이 고생을 했나 싶어 맥이 탁 풀렸다. 당신도 여자면서 어떻게 이렇게까지 모질 수 있는 건지. 옆에서 구경하던 시녀들이 떠들어대며 웃는 것도 보였다.
여자 따위, 죄다 똑같은 것들이다. 너희는 평생 이 고생을 모를 거 같으냐. 나는 이를 갈았다. 여신 자청비가 맨 처음 행한 일이었다.
----------------------
“뭘 잘 했다고 그 폼을 잡고 이야기하냐?”
바리데기는 칼국수에 김치에 술까지 차려진 상을 내려놓았다. 반색하며 상을 받던 자청비가 눈을 흘겼다.
“내가 맨 처음 행한 권능인데 그 정도 폼 좀 잡으면 어때서.”
“어이구, 너 사람들이 얼마나 네 욕을 하는지 알긴 알고?”
“내가 뭐 어쨌다고! 농사 잘 되게 해 주는 게 어딘데?”
자청비는 버럭 화를 냈다. 버럭거리는 그놈의 성격 때문에 틈만 나면 문도령과 싸우고 바리데기에게 와서 하소연하기가 일쑤라, 이젠 뭐 화를 내도 놀랍지도 않았다.
“그렇다고 월경을 그렇게 심하게 겪으라는 건 심하지 않아?”
“언니는 내 맘 몰라요. 그때 얼마나 분했는데!”
생각하면 분한지 주먹을 꼭 쥐고 부들부들 떠는 통에 국수가 퉁퉁 불 지경이다. 먹고 싶다고 떼 쓸때는 언제고. 바리데기는 한숨을 쉬었다.
“그래서 욱해서 사고치지 말란 거야."
"아 뭐 어때서. 그때 상황을 언니가 봐야 그런 소릴 안 해요."
"누가 걔들 이야기 해? 느이 시어머니 말이다.”
“그 집 이야긴 꺼내지도 말라니까? 언니 나 그러고 결혼해서 얼마나 고생했는데?”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저 철 없고 개념 없는 것 같으니라고. 하여간 이래서 오냐오냐 키운 것들은 문제다. 바리데기는 머리를 짚고 잠시 심호흡을 한 다음, 조근조근하게 설명을 시작했다.
"여자들 보통 월경 몇 살 때까지 하니?"
"잘 몰라. 내가 그걸 왜 알아야 되는데....알았어요 언니. 좀 노려보지 말아요. 음 한 쉰 좀 넘어서?"
"그치? 그래서 너네 시어머니 나이가?"
"......어?"
그러니까 시어머니한테 빡친 걸 왜 딴 데서 난리냐고. 바리데기는 확인사살까지 잊지 않았다.
“시어머니는 이미 월경 끊길 연배겠네."
"......"
"결국 고생하는 건 너 아니니?”
“아차.”
자청비의 얼굴이 미묘하게 일그러졌다.
“하여간 그놈의 다혈질.”
바리데기는 차 대신 따라놓은 소주를 한 모금 마셨다. 잘 된 술이라 그런가 입에 짝 붙긴 하는데 어쩐지 썼다.
Recent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