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니발]동묘역 미국도사
- 쓰고 만든 것/그 외
- 2013. 7. 25. 14:37
"액이 아닙니다."
"네?"
동묘에 용한 무당이 있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온 김 모 씨(36세, 회사원)는 방에 어설픈 자세로 앉아있는 젊은 외국인에 한 번 놀라고-왜요, 외국인 처음 봐요? 하고 백인 무당은 까칠한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외국인이 너무나도 까칠한 얼굴이라 두 번 놀라고, 마지막으로 액이 아니라는 말에 크게 놀랐다.
"액이 아니라니까요. 이건 범죄예요."
"네에?"
"그 남자친구, 당신 돈 먹고 나르려고 작정한 겁니다."
"하 참 기가 막혀서. 용하다고 그래서 믿고 왔는데 뜬금없이 뭔 소리예요?"
어이없는 표정으로 화를 내도 백인 무당은 눈썹만 조금 찡그리고 태연한 얼굴로 말했다.
"돈 빌려줬죠? 당신 이름으로 마이너스 통장 개설했잖아요."
"아, 그건 그렇지만...우리 결혼할 거거든요? 도사님 외국인이라 잘 모르시나본데 우리 나라에선 결혼 준비하는 데 돈 많이 들거든요?"
무당은 가엾은 뭔가를 보는 표정으로 손님을 쳐다보았다.
"살림 차리려고 얻는 빚이 아닙니다."
"네?"
"빚이 있거든요. 음, 아마 한 2억하고도 몇 천 될겁니다. 자세한 건 잘 모르겠네요. 사채네요. 아까 보여준 아이패드 케이스에 명함 들어있었는데 못 봤어요? 골드문 금융이라...... 조만간 인생이 끝장나게 될 거 같으니까 당신 앞으로 빚 다 떠넘겨놓고 자기는 다른 여자랑 외국으로 도망갈 예정이에요. 보니까 다른 여자가 있네요. 염색한 단발에 코는 성형인가요? 오 이런, 가슴도 했군요. 쌍꺼풀이 짝짝이인 걸 보니 수술이 좀 잘못됐나 ...누군지 알겠죠? 빚은 그 여자 때문입니..."
"뭐예요? 박은영 이 썅년이!"
36세 회사원 김 모 씨는 옆에 고이 놓아둔 가방을 움켜쥐고 분기탱천한 얼굴로 방을 뛰쳐나갔다. 동묘역 미국도사 윌 그레이엄은 등 뒤로 한 마디를 덧붙였다.
"이게 제 디자인입니다."
단일민족 따위가 개소리가 된지도 몇 년, 한국에 거주하는 외국인이 십만이 넘은지도 몇 년. 그러므로 외국인 무당이 있어도 어색할 것 없다, 가 윌 그레이엄과 그의 신아버지인 잭 크로포드의 지론이었다. 당당하게 동묘역 미국도사라고 이름을 걸어놓은 것도 그것 때문이다. 미국도사는 좀 웃기지 않느냐고 윌이 항의했으나 잭 크로포드는 들어주지 않았다. 후보로 총각도사, 기인도사, 총각보살 등등이 있었다는 건 비밀이다.
어쨌건 윌의 영업은 성공적이었다. 무당집이므로 사회적인 관계에 크게 신경쓰지 않아도 좋다. 한국인들은 무당이 괴이한 행동과 말투를 구사할 수록 좋아한다는 정보를 입수했고 그것은 사실이었다. 용하다고 소문이 나자 고정적으로 찾아오는 사람들도 생겼다. 게다가 예로부터 무당의 주고객은, 여자다. 잘생긴 얼굴이 영업에 도움이 되면 됐지 방해가 되지는 않는다. 물론 윌 그레이엄은 마지막 부분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가 하는 일은 보통 무당들과 달랐다.
한국에서 무당이 하는 일은 사실상 심리상담과 같다. 남편 때문에 썩는 속 이야기도 들어주고, 살이니 액이니 원인도 여러가지로 찾아 주고, 남편 욕도 해 준다. 하지만 윌 그레이엄의 특기는 실종된 사람 찾기, 빚 받기, 살인사건 범인 찾기이다. 뉴스에 나오지 않은 사건도 몇 건, 뉴스에 나온 사건도 몇 건. 자기가 죽이기라도 한 듯 살인자의 인상착의와 살인동기를 줄줄 읊는 윌을 보고 네가 범인이냐고 멱살을 잡은 사람도 몇 있었다. 역시 한국인은 다혈질이라고 윌은 재미있어 했지만 분노한 잭은 사건을 맡지 않겠노라 화를 내기도 했다. 하지만 신아버지가 화를 내도 한국 정부가 윌 그레이엄을 마음에 들어한 이상 일은 끝난 거다.
그러던 어느 날.
"이거 좀 드셔보시겠습니까."
북유럽계로 보이는 신사 하나가 윌 그레이엄의 점집에 찾아왔다.
"누구..."
"아, 잭이 소개 안 하던가요. 정신과상담의 한니발 렉터입니다."
외국 억양이었지만 깔끔하고 딱 떨어지는 영어였다.
"사람과 처음 만나서 먹는 음식은 중요하죠. 몸에 들어가는 것은 그게 무엇이건 다 의미가 있습니다. 그래서 좀 가져와 봤습니다만...소시지 좋아하십니까? 한국에서 구할 수 있는 가공육은 대개는 질이 낮지요."
한니발은 굿당의 앉은뱅이 책상 위에 회색 손수건으로 싼 도시락을 내려놓았다. 예기치 못한 상황에 윌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드세요. 만든 제가 할 말은 아니지만, 육질이 부드럽습니다."
그리고 그 말 그대로, 참 맛있어 보이는 소시지였다. 선홍색을 띤 소시지의 표면에는 묘한 광택이 흘렀고 제대로 훈제를 한 듯 짙은 향이 났다. 먹는 것에 초연한 윌이라고 해도, 소시지라고 이름붙인 허드렛고기 덩어리 내지는 고기의 ㄱ도 찾아보기 어려워 보이는 밀가루 혼합물에 진력이 날 때도 되기야 했다. 윌은 한니발이 내민 포크를 집었다.
"네 뭐...한니발 렉터 박사님, 이라고요?"
"그냥 렉터 박사라고 부르세요, 윌이라고 부르겠습니다."
수제 소시지와 커피를 가지고 온 북유럽계 미국인은, 아무도 그렇게 하지 않은 방식으로 윌의 굿당에 들어왔다.
"많은 사건을 해결하셨다죠."
"과찬이십니다."
"저는 종교적인 부분은 잘 모릅니다만, 제가 아는 언어로 이야기하자면 공감능력이 극대화된 것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오늘 이야기하려는 부분은 그게 아니에요."
소시지를 먹던 한니발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윌은 얼굴이 저절로 굳는 것을 느꼈다. 원래 굳어있기는 했지만- 도대체 무슨 일로? 자신에게 일을 부탁할 것이라면 어째서 이렇게 비공식적인 방식으로? 윌의 표정에 아랑곳하지 않고 한니발은 여전히 사려깊은 말투와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말을 했다.
"제가 맡은 아이입니다. 애비게일 홉스라고 하죠. 애비게일?"
그제서야 눈치챘다. 굿당 입구에, 멀찍이 떨어져 방에 들어가기도 싫다는 듯 찡그린 얼굴로 이쪽을 보는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여자아이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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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직장이라 여기서 끊음. 신세계와는 아무 상관 없습니다.(2012.07.22)
그리고 새로 올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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