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급도서관-1

없어진 책, 오래된 책, 이름만 전해지는 책들이 있는 도서관이 있다고 한다. 누구도 본 적이 없는 희한한 책들이. 무라사키 시키부가 직접 필사한 겐지모노가타리의 가장 오래된 판본이나, 봉산학자전이 실려있는 방경각외전이나, 한 번도 발간된 적 없는 생 폴 루의 시집이나, 윤동주의 미발표 유고 같은 것들 말이다. 

그러나 책을 봤다는 사람도, 도서관에 갔다는 사람도 아무도 없다. 그저 소문만 무성하다.



도서관은 무척 고풍스러웠다. 오래된 집을 개조했다고 하더니 정말인가보다. 솟을대문 안으로 들어가니 행랑채가 있고, 거기에 접수/반납/대출이라고 적힌 현판이 보였다. 이 집안에 몇 백년 내려오던 책을, 희귀본도 가리지 않고 읽게 해 준다고 한다. 그냥 그런 이야기만 들었다. 더 이상한 책이 있다는 이야기도 얼핏 들었지만, 더 자세한 건 묻지 못했다. 말하는 사람이 꺼려하는 분위기라. 소문들은 대개 헛소리고 험담이지만, 찌든 얼굴로 뭔가를 이야기하는 사람들 사이에는 가끔 꽤 건질 만한 것도 있다. 그들은 절실하기 때문에 소문에도 매달리기 마련이라서. 그리고 정말로, 오래된 기와집들 사이에 도서관이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는 춤이라도 추고 싶었다. 아마 예전 같으면 청지기가 사는 행랑채였을 방의 들창을 두드렸다. 간유리가 끼워진 창이 열리고 반백의 머리를 곱게 쪽진 여자의 얼굴이 보였다. 흰머리 치고는 굉장히 젊어보이는 얼굴이었다.  보통 잘 입지 않는 명주저고리에 요즘은 하지 않는, 머리카락 하나 흐트러지지 않게 쪽진 머리에 플라스틱인지 옥인지, 하얀 비녀가 주름 하나 없는 창백한 얼굴과 부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아마도 사서인 것 같은 여자는 무슨 일이냐는 듯 이쪽을 쳐다보았다.

"저, 책 볼 수 있어요?"

"잘 안 들리는데. 창문 좀 더 열어봐요. 그리고 어떤 책 찾아요? 우린 폐가식이우."

나는 들창을 좀 더 밀어서 열고, 목소리를 높였다.

"<정상적인 수면의 꿈속에서 시간과 공간의 착각에 대한 연구와 논쟁> 1907년판이 있..."

패기있게 책 제목을 말하려던 나는 말끝을 흐리고 말았다. 사람이 너무 놀라면 비명도 나오지 않는다더니. 들창을 너무 세게 열었는지 방 안이 잘 보였고 나를 쳐다보고 있는 사서의 얼굴 뒤로 사람 머리가 보였다. 머리 밑에는 몸이 없었고, 머리는 시퍼랬다.

"그래서, 읽고 가시게, 아니면 대출하시게?" 

내가 마루에 주저앉아 입을 뻐끔거리거나 말거나 사서는 평온하게 물었다. 

"...머, 머, 머.....머!" 

"한국말 몰라? 머리? 에이 뭐 새삼스럽게. 오늘 처음 오셨나보네. 참 우린 대출할 때 각서 쓴다오. 확인해 보구려."

구식 말투를 쓰는 사서는 얇은 종이 하나를 내밀었다. 거기에는 신명조 9포인트로 인쇄된 약관이 빼곡하게 적혀있었고 나는 정신없이 한 단어를 찾았다. 대출 기한은 한 달로 하며 연체시 사서의 처분이 따를 수 있다...희귀본의 경우 파손 및 두 달 이상 연체시 수급으로 보상을 대신함. 

세상에.

내가 놀라거나 말거나 사서는 별 일 아니라는 표정이었다.

"놀라긴. 세상엔 의외로 많다우. 수급을 걸고서라도 책을 못 봐서 난리인 희한한 족속들이. 그래서, 읽고 가시나?" 

"아, 아니요. 다음, 네, 다음에 올게요." 

나는 횡설수설하며 마루에서 내려갔다. 등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거기 책 목록 있으니 가져가서 보고 다음에 또 오슈." 

다음이 있겠냐. 나는 중얼거리면서 무심코 마루에 놓인 두툼한 도서목록을 들고 지하철역을 향해 꼬불꼬불한 골목을 따라갔다. 긴 골목을 어떻게 빠져나갔는지도 기억나지 않고, 정신을 차려보니 나는 지하철 안에서 도서목록을읽고 있었고, 그리고 발견했다. <球陽拾遺>...실전된 줄 알았던 책이 버젓이 존재하는데 수급 정도는 걸어봐도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 순간 아찔했다. 이러다 죽지. 역시 책 따위 보지 않는 게 정신건강에 좋다고, 자신을 세뇌하며 지하철에서 내렸다.

하지만 나는 이틀 후, 다시 도서관으로 발길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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