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시 예전에 어느 1년짜리 글쓰기 프로젝트하는 홈에 올린 겁니다. 올해 1월이었나 2월이었나 탈해 카드 나오고 세이메이X탈해 커플링 나올 때...
어려서 집에 무척 고운 비단이 몇 필 들어온 적이 있었다. 처음 보는 희고 부드러운 빛에 감탄해서 손도 못 대고 멍하게 구경만 하고 있었다. 시녀들이 신이 나서 떠들어대는 이야기로는 음양두인 아버지에게 후지와라 좌대신이 준 물건이라 했다. 날을 잘 잡고 기도를 잘 해서 여러 후궁 중에서 좌대신의 둘째딸이 제일 먼저 아들을 낳았기 때문이라고 했지만 그런 거야 아무래도 좋았다. 코마라고 했나, 바다 건너 나라에서 온 고운 비단이라고 했다. 중국 비단도 곱지만 그 나라 비단이 섬세한 맛이 있다고, 과연 황실 비단보다 곱고 부드럽고 무늬도 남다르다며 시녀들이 법석을 떨었다. 아버지의 아내와 그 아이들이 고운 비단으로 뭘 해입을까 뭘 만들까 법석을 떠는 동안 먼 복도에서 방 안을 들여다보았다. 조명이 어두워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등잔불에 비친 빛이 남다르게 고와서 그 하얀 빛만 바라보면서 바다 건너에서 온 비단은 어떤 느낌일지 열심히 생각해 보았다. 코마라는 이름은 참 아름다운 이름이라고 생각했다.
단정한 서양식 정장 차림을 한 청년은 어깨에 앉은 새를 쓰다듬으며 세이메이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고 대답했다.
“고려를 코마라고 부르는군, 왜에서는.”
“왜가 아니고 일본입니다.”
색이 붉은 차를 마시던 세이메이는 한 번도 본 적 없고 기억에만 있는 고국에 대한 호칭에 항의했다. 그러나 자신보다 오래 전에 살았고, 무려 한 나라의 두 번째 왕이었던 청년은 자신의 반응에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귀공도 코마라 하니 피장파장 아니오.”
세이메이는 대답 대신 들으라는 듯 혀를 찼다. 자신과 같은 것을 마시고 있던 청년, 탈해는 웃으며 찻잔을 내려놓았다.
“아, 뭐 싫으면 됐소. 우리가 정치적 입장을 내세울 처지도 아니니. 그나저나 묘하구려. 재물에 흥미가 없었다고 들었는데 비단 같은 것에 관심이 있고. 여인네들이나 좋아하는 거 아니오.”
색동이가 비단천 모아서 주머니니 뭐니 만드는 데 관심이 있다지, 하며 탈해는 마당에서 엘과 함께 눈밭에서 뛰고 있는 소녀를 보고 웃었다. 허리춤에서 오색 비단으로 만든 복주머니가 달랑거렸다.
“어차피 저는 그 세이메이가 아닙니다.”
“짐도 그 석탈해가 아니오.”
방 안의 공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유전인자를 복제해 만든 기사들은 전생-이라기보다는 이전 몸이 가지고 있던 기억을 가지고 있었다. 그 전의 몸에 가까울수록 더 그랬다. 이 땅에서 나고 자란 인물이 원형인 기사들보다는 먼 곳에서 온 기사들일수록 기억이 많았다. 두 사람은 처음 이곳에 왔을 때 낯설었던 풍경과 너무도 낯설었던 왕 후보라는 청년들, 여러 아서들을 만났던 당혹감을 떠올렸다. 자신은 이미 자신이 아니고, 자기자신이자 동시에 아닌 몸으로 살며 기사라는 이름으로 전투를 하는 기분은 굉장히 이상했다. 아직 적응하기에 힘들었다. 우울한 마음에 한숨을 쉬던 세이메이는, 숟가락으로 찻잔만 젓고 있는 탈해를 발견했다. 이 사람도 아마 힘들었나보다. 그래서 아마 탈해는 색동과 함께 폭주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세이메이는 거기까지 생각하고 탈해에게 미안한 기분이 들었다.
“눈이 무척 곱게 빛나서, 그래서 그랬습니다.”
“눈?”
“그 하얀 비단이 눈과 같았지요. 우리 나라에서는 눈오는 날이면 시를 읊습니다. 아, 늘 읊기는 하지만. 눈과 함께 매화를 노래하는 시는 각별하지요. 겨울밤은 무료하지 않습니까.”
세이메이는 바깥에 하얗게 쌓인 눈을 가리켰다. 탈해도 창 밖의 눈을 보았다.
“우리는 눈이 오는 밤이면 옛이야기를 하고, 술을 마시고, 노래를 읊었지. 좋은 나날이었소.”
“참으로 아름다운 밤들이었습니다.”
어느새 색동도 엘도 없고, 조용히 눈이 내리는 풍경만 남았다. 탈해와 세이메이는 눈을 보며 잠시 생각에 잠겨 있었다. 먼저 세이메이가 입을 열었다.
“공연히 쓸데없는 이야기를 하여 탈해 공의 마음을 상하게 하였습니다.”
탈해는 웃었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소. 풍류를 아는 귀공이 있어 바다 건너 타국에서도 무료하지 않소.”
사실 그 비단을 보고 먼 나라를 생각하다 잠든 세이메이는 바다를 건너는 꿈을 꾸었다. 파랗고 움직이는 풀밭 같은 것을 한참 뛰어갔더니 부드러운 빛이 나는 하얀 빛 지붕을 인 집에 사는 사람들이 웃으며 자신을 맞아주었다. 거기에선 여우의 자식이라 서럽지도 않고 사람들이 냉대하여 슬프지도 않았다. 자신을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나라에서 새로 살아보고 싶다는 소망은, 기괴한 방식으로 이루어졌지만 세이메이는 그 또한 좋은 일이라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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