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뿌리 깊은 타디스 2
- 쓰고 만든 것/그 외
- 2013. 9. 8. 22:45
만춘전은 시립하고 선 궁녀들과 문을 지키고 선 내관들과 별감들로 가득했다. 전에 없이 시위가 늘어난 것을 보고 신료들 몇이 궁금한 표정을 짓기도 하였으나 얼마 안 가 전각 안에는 왕과 내금위장, 그리고 색목인 셋만이 남았다. 궁녀들도 내관들도 긴장한 기색이었으나 그것을 입밖에 내지는 않았다. 지밀상궁은 오늘 본 것에 대해 아랫것들에게 입단속을 단단히 시켜야겠다고 결심하는 한편, 무슨 일이 있으면 달려가기 위한 차비를 마쳤다. 무휼이 검을 뽑을 듯 움켜쥐고 서서 흉흉한 눈빛을 뿌리는 동안 왕은 흥미로운 표정을 짓고 옥좌에 앉아 박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박사라.”
“그렇습니다.”
색목인 박사는 전각에 들어오자마자 복도며 기둥을 보며 예쁜 것을 보는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지엄한 곳에 들어왔다고 생각하여 행동을 조심하는 것이 아니라 매우 진귀한 것을 보는 표정이었다. 경박하기로 이름난 이들도 궁에서는 달라지거늘 어찌. 무휼은 혀를 찼다. 그러나 색목인은 눈을 이리저리 굴리며 호기심에 찬 눈길을 주고 있었다.
“지엄하신 분의 얼굴을 함부로 올려다보지 말라는 법도도 모르나?”
“아하.”
색목인은 아차 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왕은 태연한 얼굴이었다.
“그냥 두어라. 모르는 것이 죄는 아니지 않느냐.”
“하오나 전하. 이자의 경망스러움이 도를 넘었습니다. 이는 전하를 능멸하는 것이라 여기옵니다.”
“과인이 능멸당했다 느꼈으면 알아서 이자를 벌하라 네게 명했을 것이다.”
무휼은 이를 갈았다. 하지만 주상의 말이 맞다. 판단은 주상이 하고 자신은 주상의 명을 받드는 신하일 뿐이다. 고개를 숙이고 한 발 물러가기를 기다려, 왕이 박사에게 질문했다.
“내 너와 같은 박사를 내 궁에 들인 적도 없고 너에게 박사라 한 적도 없거늘 어찌 박사라 하는가?”
“이 넓고 긴 천하에 저를 박사라 처음 칭한 이가 어찌 주상 뿐이오리까.”
“그러면 너는 누구의 백성이냐? 어디에 사느냐?”
“저는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는 몸이옵고, 누구의 백성도 아니옵니다.”
박사는 정중하지만 단호하게 자신의 신상에 대해 말했다. 왕은 폭소했다.
“그놈 참, 기백이 대단하구나. 좋다. 그럼 몇 가지 물어보자.”
“하문하시지요.”
“너는 내년에 무엇이 일어날지를 아느냐?”
“미래를 아는 자는 없습니다.”
박사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그러면 어찌 정통 13년이라 하는가?”
“제가 본 것을 말씀드린 것 뿐이옵니다. 저는 여행자입니다.”
“어디를 여행하였나?”
“수많은 곳과 수많은 시간을 여행하였습니다.”
왕이 눈을 빛냈다.
“시간을 여행하였다?”
“그렇습니다.”
“어허, 이놈이 정녕 미친 게로구나!”
“무휼, 자네 가만히 있어보게. 어디 이야기를 해 보라.”
“전하!”
“어명이다.”
왕의 얼굴에 미소가 걷혔다. 무휼은 저 표정을 알고 있었다. 아주 오래 전에 마방진을 풀 때 꼭 저런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오랫동안 왕으로 있으며 저런 표정을 지은 적이 없었다. 무휼은 색목인의 뒤에 시립하고 섰다. 여차할 경우 놈을 베고 왕을 지키기 위해서. 왕은 보지 못했지만 그는 보았다. 색목인이 품 안에 넣어 둔 봉에서 푸른 빛이 났다. 옷 안에 손을 넣어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흥미가 있으십니까?”
“당연하지 않겠느냐.”
박사는 미묘한 표정으로 왕을 쳐다보았다.
“저는 왜 이리로 부르셨어요?”
“네가 본 것을 말해보라고 불렀다, 이렇게 말하면 어찌하겠느냐?”
“음, 제가 아는 건 지금 하고 있는 일 말이에요, 그거. 그거 아주 멋져요. 대단하다고요. 그것밖에 말하지 못하겠네요.”
“그래도 말하라 하면?”
“말을 했다 앞일이 바뀔 가능성을 생각해 보십시오.”
왕은 침묵했다.
“네가 미쳤거나 거짓말을 하고 있을 가능성은?”
이번에는 박사가 침묵했다. 그는 용상 옆의 기둥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허, 미쳤거나 거짓말을 할 가능성이라고 했잖느냐.”
“전하, 저 기둥에 혹시 요즘 무슨 일 없어요?”
왕이 한 번 더 침묵했다. 말투가 미묘하게 들뜬 박사가 한 번 더 왕에게 물었다.
“이상한 소리가 들린다거나 말이에요.”
“그걸 어떻게 아느냐?”
“역시. 제가 여기 온 게 이거 때문이었나보네요……좋은 걸 보여드리죠.”
무휼이 칼을 조금 뽑았다. 어전이었지만 이상한 것을 든 자가 있었다. 하지만 왕은 태연하게 그자가 하는 양을 보고 있었다.
“자, 보세요.”
품 안에 있던 것은 금속을 끼워맞추고 긴 구슬을 끼워넣은 것처럼 생겼다. 박사가 무언가를 누르자 파란 빛이 났다. 푸른 빛을 기둥에 휘두르자 깩 하는 비명소리가 들렸다. 섬돌 밑에서 무언가가 기어나왔다. 보통보다 큰 두꺼비였다. 그것은 박사를 보더니 깩깩거리며 무서운 속도로 뛰어갔다. 그러나 박사가 조금 더 빨랐다. 기둥 뒤에서 깩깩거리는 소리와 함께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어디서 두꺼비인 척이야. 지구 생물도 아니면서.”
“너 규정 위반이야.”
“아, 아 이게 물어? 너 해 보자는 거냐!”
박사의 손에는 두꺼비였던 것으로 보이는 뭔가가 들려있었다. 색은 훨씬 꺼멓고 크기는 훨씬 작았다.
“먼 곳에 사는 동물인데 해롭습니다. 아마 여기서 뭔가 먹으려고 했겠죠. 여기서 그러니까, 그걸 만드신 거죠?”
“그렇다.”
“거기서 나오는 아이디어를 먹는 겁니다.”
“지금 헛소리로 주상전하를 희롱하는 게냐!”
무휼이 화를 내자 왕은 손을 들었다. 더 나서지 말라는 뜻이다. 왕이 목소리를 낮추었다.
“삿된 사술이라 생각할 수 있지 않느냐.”
“그건 그렇지요.”
“내가 너를 이 자리에서 죽일 수도 있다.”
“그것도 그렇네요.”
박사는 애매한 웃음을 지었다.
“역시 믿지 못하시는 듯 하군요.”
그가 다시 옷 속에 봉을 넣었다. 그때 왕이 히죽 웃었다.
“어딜 가려나 본데, 마음대로 들어왔다 마음대로 나가는 데가 아니네.”
무휼이 앞을 가로막았다. 조금 낭패한 얼굴로 앞을 보는 박사를 향해 왕이 웃어보였다.
“게 누구 없느냐.”
나이지긋한 내시가 들어와 절을 했다.
“집현전에 숙직하는 학사들 방이 있지. 이자를 거기서 재워라.”
“전하, 이자의 언행이 괴이하옵니다. 궁에 두기엔 과하옵니다.”
“내가 봐도 괴이하기는 하니 거참, 괴이하기는 괴이한가보구나.”
왕이 웃으며 말하는 동안 박사는 낭패한 얼굴로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거 그럼 잠시 좀 머무르거라. 과인이 바쁘니 좀 도와주어야겠다.”
“싫다면 어쩌시겠습니까.”
“조선의 궁에 머무를 기회다. 흔한 기회가 아니지. 어떠냐, 할 마음이 나냐?”
박사의 눈에서 뭔가가 번쩍였다.
“당연하죠!”
기인괴인이 하나 더 늘어났다. 감정표현을 거의 하지 않는 궁인들이 한숨을 쉬었다.
주상이 박사를 집현전에 거하게 하여 의견을 물었다.
-조선왕조실록, 세종 24년 3월 24일(144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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