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만에 좋은 영화를 봤는데 트위터에서 떠들면 네타가 될까봐. 조용히 여기서 감상을 쓰기로 결심했습니다. 스포일러가 될 부분이 엄청나게 많으니 영화를 보지 않으신 분들은 클릭하시면 안 됩니다.
1. 이 영화는 찰스가 프로패서로 완성되는 이야기이자 울버린이 안식을 얻고 정착하는 내용이며 미스틱이 두 남자한테서 독립하는 이야기이며, 동시에 세상이 구원받는 이야기기도 합니다. 이 모든 것에 대해 쓰려면 굉장히 많은 이야기를 해야 할 것 같아요.
중요한 건 저 많은 이야기를 하나도 놓치지 않고 해냈다는 거라고 생각하긴 합니다. 뮤턴트를 탄압하고 차별하자 그게 뮤턴트가 아닌 사람들에게도 족쇄가 되더라는 부분은 의미심장했어요. 소수자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는 영화라면 당연한 결과겠지만요. 우리나라에서 제일 필요한 부분이겠죠 저게.
2. 찰스가 걷는 짤이 돌아다녔을 때 처음에는 뭐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리고 사실 영화 보기 전에 걷기 위해 약을 맞았고 약물 중독 상태이며, 그 부작용으로 능력을 쓸 수 없다는 네타를 들었습니다. 대체 뭘 얼마나 잃었길래 저 지경으로 망가진 건지, 시리즈 전반에서 프로페서 X는 굉장히 강하고 포용력 있어 보였는데 뭐가 인간을 저렇게 만든 건지가 궁금했단 말이죠.
결과부터 말하자면 저는 저 연출 좋았습니다. 너무 많은 사람의 목소리가 머릿속에 울려 도저히 들을 수가 없다고 말하지만, 생전 처음으로 뭔가를 잃어본 인간이 보이는 반응이라고 생각해요. 에릭한테 네가 날 버리고 레이븐도 데려가고 모든 걸 잃게 만들었다고 했을 때 갑자기 <온>이라고 유시진 만화가 있는데요, 그거 생각이 나더라고요. 거기서 사미르가 그런 말을 했거든요. 자신이 아주 깊이 뿌리내리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그 뿌리는 그냥 한 점에 집중된 굵은 뿌리 하나일 뿐이라서 그게 잘리고 나니 자기는 아무 것도 아니었다고요. 보면서 그 생각이 들더라고요. 자기 것이라고 생각한 건 아무 것도 잃어본 적이 없었을 거예요. 에릭에게 한 말도, 굳이 에릭과 미스틱, 그리고 다리만 두고 한 말이 아닐 겁니다. 그 많던 뮤턴트들이 하나씩 죽어가고 심지어 엔젤은 찢어진 날개만 남았는데, 그렇게 죽게 된 데 에릭 책임이 없다고 말 못 하죠. 하지만 본인의 책임이 아니었다고 자신 있게 말하지도 못할 겁니다. 가장 중요한 걸 잃어버리고 나니 말 그대로 아무 것도 안 남은 거죠. 심지어 찰스는 프로페서 X거든요. 정체성이 교수란 말이지요. 그런데 자기 제자들도 지인들도 아무도 지키지 못했던 겁니다. 선생 소리를 들어본 인간은 눈 앞에서 자기 제자 죽어나가는 꼴 못 봐요. 그런데 자기가 가르친 하보크가 월남전에 징집되고, 그 전쟁에서 얼마나 많은 뮤턴트가 죽었냐고요. 자기 책임이라고 생각할 겁니다.
그걸 터뜨릴 수 있는 대상이, 같은 입장일 에릭이겠죠. 브라더후드라고 하잖아요. 자기 형제 자매를 잃은 거예요 에릭은. 아우슈비츠에서 가족을 잃은 에릭이 또 가족을 잃은 겁니다. 같은 입장이기 때문에 찰스는 에릭한테는 속 편하게 화내고 소리지를 수 있는 거라고 생각해요. 굳이 브로맨스가 아니라도.
하필 월남전이라는 부분이 많이 와닿더군요. 미국이 전쟁의 당위성에 대해 크게 고민했던 전쟁이죠. 수많은 반전 구호를 낳았고. 그게 뮤턴트의 역사랑 연결되니 느낌이 또 다르던데요. 존엄성에 대해 고민해 볼 수 있는 전쟁이지요. 그런 끔찍한 꼴을 50년간 본 찰스와 지금 고통받는 찰스가 만나 서로 이름을 부르는 장면이 아주 마음에 들었습니다. 찰스의 고민을 해결해 줄 수 있는 건 찰스 뿐이라는 거지요. 결국 답은 자기 안에 있다는 거죠. 깨달음을 얻었기 때문에 에릭을 놓아주고 미스틱이 제 갈 길을 가도록 놔둔 거라고 생각합니다. 코드네임 그대로인 거예요. 뮤턴트들의 스승이 되는 첫 걸음인 셈이죠.
엑퍼클이 에릭이 매그니토가 되는 과정이었다면 엑데퓨는 찰스가 프로페서 X가 되는 과정이 맞습니다. 한 번 부서진 다음에 다시 자신을 재구성하는 과정이라고 생각해요.
3. 전 엑스맨 1, 2를 봐서 울버린이 얼마나 비딱하게 굴고 다녔는지를 기억하고 있습니다. 대체 프로페서는 그간 울버린을 어떻게 사람을 만들어놓은 거죠. 교직 50년차가 참 대단하긴 대단합니다. 얼마나 오래 인간을 가르치면 저 오래 묵은 오소리도 감화시킨 거죠. 게다가 저 오소리가 역사를 가르치다뇨.
스트라이커 떡밥이 어떻게 회수될지 좀 걱정하면서 봤는데 마지막에 미스틱이 울버린을...울버린 자신에게도 바꾼 과거는 구원이 될 수 있는 게 아닌가 생각했어요. 50년 후에 프로페서와 만나 대화하는 장면에서 이제야 저 둘이 서로를 이해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4. 70년대 여성운동이랑 비슷하다는 생각을 얼핏 했는데, 리린 님 트위터에서 글로리아 스타이넘에 비유하신 걸 보고 아, 그거구나 했어요. 여자가 아니고 한 인간이 되기 위한 여성운동의 지난한 과정이 영화 속에 반영된 느낌이라고 해야 할지.
미스틱이 혼자 전쟁하고, 테러하고, 사람을 구하고, 열심히 돌아다니는 과정에서 여자의 액션이 지금까지 한 번도 안 나온 건 아닌데, 그게 여자의 액션이라는 느낌이 아니라 한 히어로의 액션이라는 느낌이 들었어요.
오빠를 좋아하지만 오빠의 교육방침에 이의를 제기할 수 있고, 에릭, 어 어쨌건 뮤턴트인 걸 자랑스럽게 여기라고 해 준 에릭이 멘토는 멘토인 셈인데요 가족의 부름도, 멘토의 사상주의도 아닌 제 3의 길을 알아서 잘 가는 점이 70년대 여성주의라고 생각합니다. 노라가 집을 나가서 잘 사는 거 좋잖아요.
그런데 미스틱 진짜 예쁘던데요. 엑퍼클 때만 해도 아직 어린 티가 났는데 몇 년간 얼마나 예쁘게 컸는지. 언니 아이 메이크업 뭐로 하셨어요. 저 힌트 좀.
5. 사실 엑스맨 3 안 봤습니다. 하지만 얼마나 엑스맨 3을 부정하고 싶어하는지는 잘 알 것 같습니다. 진과 사이클롭스가 같이 등장하는 거 보고 얼마나 반갑던지. 과거를 바꾸지 않으면 아무 것도 해결될 수 없다는 거지요.
6 퀵실버가 70년대 감성을 무척 잘 보여줬다고 생각해요. 핑크 플로이드라니 얼마만에 들어보는 이름인지 모르겠네요. 옛날 영화에서 빗속을 뛰어다니는 사람 연출할 때 본 뭔가를 다시 만난 기분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좀 미안한 이야기지만 퀵실버 보면서 왕년에 바*스 크로이스랑 자젤 하던 모 성우(코야스라고 말하지 않겠습니다) 생각이 나서 좀 뿜으면서 본 탓에 말입니다 으음...
7. 이안 매그니토가 망토 휘날리면서 적을 막으러 가는 장면만 봐도 배가 부른 영화기는 합니다. 영감님은 어쩌면 나이가 들수록 간지가 넘치시는지. 사실 악수 청하는 장면도 찡했어요. 그...한때 유행한 와까리아우 기억나십니까. 세츠나랑 마리나도 이해하는데 몇십년이 걸렸죠. 저 잘 삐지고 경쟁하기 좋아하는 수컷 둘이 저 정도에서 화해했으면 나름 대단하잖아요.
하지만 패그니토(...)가 그놈의 헬멧 쓰고 돌아올 땐 정말 한 대 쥐어박고 싶었습니다. 너는 네 미모를 헬멧으로 봉인하지 않으면 큰일을 하지 못하는 거냐.
여담 : 케네디 뮤턴트 설에서 혼자 뿜었습니다. 그 양반 능력은 과연 뭐였을까요.
여담 2 : 늙은 비스트가 훈훈했습니다. 그런데 왜 이 배우는 나날이 빅뱅이론의 셸던을 닮아가는 거죠 왜죠.
여담 3 : 비스트는 트레키였습니다. 공돌이의 로망이 집대성된 드라마죠 이해합니다 네. 교수님도 분명 스타트렉 좋아하셨을 겁니다. 뮤턴트랑 맞닿은 부분이 분명히 있으니까요. 하지만 대놓고 스타트렉이라니. 물론 60년대의 중요한 지점이라는 거 인정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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