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로바스]대부

이 연성으로 말씀드릴 것 같으면 작년 8월 젬의 100번 달성표 보상 연성으로 쓴 것으로 올리는 걸 까먹었다가 이제 다시 올리는 것입니다 쩜쩜쩜



소소소의 무덤에서

그래도 할로윈인데 시귀 이하를 한 편도 번역하지 못한 게 맘에 걸려서 오늘은 <소소소묘>를 준비했습니다. 한자 독음도 달았어요! 제가 이런 형식의 시의 운율은 잘 모르는데(거기까지 배우지 못한 무식한 자) 읽어보시면 또 나름의 맛이 있어요. 운율을 살려 읽으면 더 좋습니다.


蘇小小墓 소소소의 무덤에서

李賀(이하)

 

幽蘭露 (유란로)

如啼眼 (여제안)

無物結同心 (무물결동심)

煙花不堪剪 (연화불감전)

草如茵 (초여인)

松如蓋 (송여개)

風爲裳 (풍위상)

水為佩 (수위패)

油壁車 (유벽거)

夕相待 (석상대)

冷翠燭 (냉취촉)

勞光彩 (로광채)

西陵下 (서릉하)

風吹雨 (풍취우)

 

난초 잎에 맺힌 그윽한 이슬은

눈물 머금은 눈동자 같구나

마음 맺을 것도 없는데

연기 같은 꽃은 꺾을 수 없다

풀을 돗자리 삼고

소나무를 덮개 삼고

바람을 치마 삼고

물소리로 패옥 삼네.

수레를 타고서

저녁 내 기다려도

차가운 도깨비불은 비취빛으로

헛되이 빛나고

서릉 무덤 가에

바람이 비를 부르는구나


소소소는 남북조 시대의 명기였다고 합니다. 글을 잘 지었는데 어쩌다 명문가의 도련님이랑 눈이 맞았대요. 그때 지은 시가 나는 유벽거를 타고 당신은 말을 타고, 마음을 어떻게 맺을까요, 뭐 이런 내용이었대요. 그래서 소소소에 대해 시를 쓸 때에는 저 단어를 꼭 넣어주는 게 규칙이었답니다. 왜냐면 소소소는 결국 도련님이랑 잘 되지 못하고 일찍 죽거든요. 젊은 나이에 죽은 시인을 애도하는 시를 지은 시인은 많았답니다. 이하도 그 중 한 명이었고요.

그런데 문제는 누가 시귀 아니랄까봐 그놈의 도깨비불이랑 귀신이랑 빠지지를 않는다는 거죠. 죽은 여인의 무덤에서, 죽은 사람이 아직도 수레를 타고 무덤가를 떠도는 것처럼 묘사한 게 참 훌륭하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오늘 이걸로 또봇 전력 60분 하려고 했는데 번역하는 데 시간이 너무 많이 걸렸어요. 도운이 죽은 리모의 무덤에 인사하러 왔는데 리모가 저기 나타난 걸로 쓰려고 좀 쓰기도 했는데....지웠습니다. 뱀파이어 리모의 미모를 묘사할 수가 없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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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봇]회장님과 나

요새 이런다고 바빴어요.

부릉모터스는 사원복지가 잘 될 거 같습니다. 악당이니까 오히려 더 잘 할 거 같은 느낌...안젤라가 속았다고 화낸 거 보면 가능성 있잖아요.

 

부릉 모터스의 새 회장은 면담을 요청하는 노조위원장의 공문에 흔쾌히 답을 했다. 회장실 비서가 전화해서 그날 시간을 비워놓았으니 와 주시라고 했다. 몇 번은 튕기거나 자신을 노골적으로 피하는 회장들에 익숙해져 있었던 노조위원장은 조금 당황했다. 금속노조 산하 부릉 모터스의 노조는 그 중에서도 강성으로 소문이 났다. 빨간 띠 부르고 여덟자 구호를 목 터져라 외치면서 시위를 해 대는 이미지로 워낙 유명하다보니 싫어하는 것도 이해는 갔다. 하지만 근무조건 최악이라고 소문난 부릉모터스였다. 모 대기업도 요새는 노조가 있는데 무슨 노조라면 흰 눈을 뜨고 보는지. 처음에는 대화로 해결하려고 했던 게 잘 되지 않았던 것 뿐이었다. 인사부장과 치고 받고 싸웠으며 전임회장 사무실을 점거해 보기도 했고 시위도 뻑적지근하게 해 봤다. 그런데 회장도 참 끈질긴 인사였다. 임원진들과 똘똘 뭉쳐서 노조라면 흰 눈으로 보는 게 아닌가. 임금인상이고 사원복지고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처우 개선이고 뭐 하나 제대로 되는 게 없었다. 이번에는 비정규직을 정규직으로 바꾸는 데 꼭 성공하고 말 것이다. 노조위원장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금속노조가 대한민국 최대의 강성노조가 된 데는 다 이유가 있다. 열악한 노동환경을 개선하기 위한 선배들의 피와 땀이 그나마 월급이라도 남들만큼 받고, 제 목소리를 내게 만들어 준 것이다. 발악하지 않으면 아무 것도 얻지 못한다는 것을 공장에서 기계만도 못한 취급을 받으며 배웠던 옛날 7, 80년대 노조의 정신을 이어받으려고 노조위원장은 노력했다. 21세기에 들어 운동권이라는 것이 옛말이 되고 시대착오가 되었을 때 마지막으로 노동운동에 뛰어들었던 위원장이 이제 50대가 되었다.

30대 초반 젊은 회장이라고 했는데 세상 물정을 모르는 부잣집 아들이 무슨 회장이라고. 한국에서 부가 세습되는 과정은 좀 문제가 있다. 젊고 어린 남자애가 회장 자리를 꿰어찼는데, 회사에서는 다들 낙하산이라고 떠들어대고 있다.

그냥 사회를 책으로만 배워서 어줍잖은 동정심으로 노조를 이해하려고 드는 놈이면 박살을 내서 머리를 한 번 깨 주면 말이 통할 것이고, 순진하고 철없는 부잣집 도련님이면 쉽게 요리하기 좋을 것이다. 동지들의 밥줄이 나에게 달려있다! 심호흡을 하고 회의실 문을 열자, 백발이 제일 먼저 눈에 띄었다. 평범한 남색 줄무늬 정장 차림에 앳된 얼굴의 젊은 남자가 하얀 머리를 하고 서 있었다.

뭐야 저거. 젊은 남자는 손에 커피잔을 들고 있었다. 회장이랑 둘이만 보기로 했는데 저 어린 남자애는 뭐지. 회장실 비서가 남자였는데 혹시 그 비서인가. 엉거주춤한 자세로 문을 잡고 서 있던 노조 위원장은 회의실 안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어린 남자애와 자신 둘 뿐이었다. 설마 저 어린 게 회장일 리가.

“아, 저.”

“노조위원장이십니까.”

백발 남자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네, 그, 신임 회장님은...”

“제가 권리모입니다. 앉으세요.”

20대로 보이는 앳된 남자는 손에 들고 있던 커피잔을 내밀었다. 엉겁결에 커피를 받아든 노조 위원장은 그냥 자리에 앉았다. 뭐 저렇게 어린 게 회장이야.

 

앉자마자 준비해 온 제안서를 읽던 젊은 회장은 인상을 찌푸렸다.

“무슨 비정규직이 이렇게 많아요?”

“네?”

비정규직이 얼마나 많은지에 대해 열변을 토하려던 노조위원장은 잠시 멈칫했다. 내가 할 말을 왜 회장 니가 하십니까? 라는 말을 참은 것이 대단했다. 회장이 서류에 형광펜으로 줄을 그었다.

“월급 적게 주고 부려먹는 게 제일 나쁘지. 안 그래요? 제대로 월급받아 가면서 일해도 야근하다 보면 죽을 맛이잖아요. 생산라인에 계시는 분이 제일 잘 아시겠지만. 일은 똑같이 하는데 월급을 적게 주려고 비정규직 하는 거잖아요.”

노조위원장은 왜 내가 할 말을 회장이, 그것도 열을 올려가면서 성토하듯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회장은 정말 진심으로 분노하고 있었다.

“아니 뭐, 그건 그런데요.”

“게다가 야근수당을 이거밖에 지급 안 했다고요? 해도해도 너무하네.”

야근 수당만 제대로 받았으면 내가 도운네 아이들한테 분유를 한 통 더 사다먹이고 장난감을 하나 더 사 줬다, 하는 투덜거림이 들렸다.

“분유가 뭐라고요?”

“네?”

“아뇨, 방금 누구 애들한테 분유 어쩌고 하셔서 그럽니다.”

꼭 드라마에서 갓 빠져나온 것처럼 멀끔하게 앉아있던 젊은이의 등이 갑자기 무너졌다. 자세는 여전히 꼿꼿했지만, 뭔가가 빠져나간 것 같았다. 퀭한 두 눈이 크게 벌어졌다. 말을 잃고 망연자실해 있는 사람을 보고 노조위원장은 불안한 기분이 들었다.

“회장님?”

“아, 제가 혼잣말을....”

간신히 대답을 한 젊은 회장은 침울한 얼굴로 먼 곳을 쳐다보았다. 저 사람 갑자기 왜 저러나 싶어 노조위원장은 가만히 회장의 앳된 얼굴을 쳐다보았다. 갑자기 왜 시무룩해져서 저러지. 아까 한 말은 또 뭐고? 불안하게 흔들리던 눈동자가 자기 등 뒤의 먼 데를 쳐다보았다. 잠시 후 회장의 눈빛이 다시 아까와 같은 것이 되었다.

“다시 하던 이야기 하죠.”

뭔가 기괴한 위화감이 들었으나 노조위원장은 거기에 대해 입을 열지 않았다.

 

한참 이야기를 하던 리모가 제안을 했다.

“일단 적어오신 건 잘 알겠습니다. 지금 저희가 이걸 다 할 수 있는 형편은 아니에요. 탁아소는 사무실 늘린 다음에 짓겠습니다. 비정규직 고용은 차차 해야 하고요. 그렇지만 일단, 야근 수당에 대해서는 확실하게 하겠습니다.”

“너무 많이 깎으시는 거 아닙니까. 일단 야근수당이랑 사원복지, 그리고 비정규직이 우리 노조에서 제일 중요하게 여기는 부분입니다. 그 외의 부분은 양보한다 쳐도 저건 좀 어려운데요.”

“위원장님도 제가 깎을 거 아시고 100 적을 거 150 적어오신 거 아닙니까. 우리 타협해서 60-70까지만 갑시다. 저도 취임한지 얼마 안 돼서 아는 것도 없고.”

“설마 이쪽이 을이라고 생각하고 막 나오시는 건 아니겠죠?”

“설마요. 제가 연구직 출신이라 직원 복지에는 관심이 많은 편입니다. 그 부분은 믿어주셔도 좋아요.”

“뭐, 좋습니다. 하반기에 또 만나서 진행할 땐 깎으시면 곤란하고요, 우리 노조는 언제건 불의에 항의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점만 명심하십쇼.”

눈에 힘을 주며 대답하자 젊은 회장은 히죽 웃었다.

“앞으로 자주 뵙겠네요. 잘 부탁드립니다.”

노조위원장은 어딘가 이상한 새 회장이 조금 마음에 들었다. 사람이 좀 이상하긴 했지만, 일단 말이 통할 것 같았다. 위선이면 어떻고 젊어서 물정을 모르면 어떻냐. 일단 말이 통한다는데.

 

새 회장이 등장하고 회사 탕비실이 풍족해졌다.

밥심 모카 골드, 통칭 밥모골이라 불리는 노란 커피믹스와 헬식스밖에 없던 탕비실에 야근 근무자들을 위한 간식 명목으로 녹차며 루이보스, 허브차 티백과 식빵, 컵라면과 토스터기가 추가되었다. 은근슬쩍 과일이 추가되는 날도 있었고-그 계절에 제일 싼 과일들이나마 과일이 있다는 건 좋은 일이었다- 어디 양계장이랑 계약을 했다면서 회사식당에서 계란을 잔뜩 삶아놓기도 했다. 사원들은 공돌이 출신 회장이라더니 월화수목금금금 저거 먹고 일하라는 뜻인가 하고 수군거렸다. 그러나 야근수당이 제대로 나온 월급명세서를 보고 다들 경악했다. 죽도록 야근을 하라는 뜻이냐고 야유를 보내던 노조위원장은 돈으로 야근을 시키다니 애초에 야근을 많이 해야 하는 풍조가 정상이 아니라며 투덜거렸으나 야근수당 자체에 대해서는 노조 전체를 대변하여 환영하는 입장을 밝혔다. 돈이 제대로 나오는데 불평하는 사람은 없다. 헬식스 먹고 호랑이 기운을 내서 야근을 하겠노라 입을 모았다. 다들 새 회장이 돈이 어디서 나서 저러냐고 뒷말들이 많았으나 그 며칠 후 발표된 신기술을 보고 납득했다. 회사의 주가가 신나게 오르고 있었다. 돈 벌어서 직원 복지에 쬐끔 투자한다는데 임원진이 불만을 가질 리도 없었고 해서, 브룽모터스의 탕비실은 나날이 아늑해지고 있었다. 게다가, 회사 총무부에서 탕비실에 투자하는 가장 큰 이유는 따로 있었다.

"우리 탕비실 이렇게 운영해도 회장님 화 안 내세요?"

신입 연구원이 순진한 얼굴로 묻자 주임은 뭘 모르는 놈, 하는 표정으로 신입을 쳐다보았다.

"몰랐냐? 회장님 우리 회사에서 제일 야근 많이 하잖아. 그래서 밤에 탕비실 가면 자주 봐. 너도 좀 있으면 만날 걸?"

"회장이 왜요?"

"우리 신기술 다 그 사람 작품이잖아. 특허만 몇 갠데."

주임은 눈쌀을 찌푸리고는 뭔가를 떠올리듯 먼 산을 보았다.

"그러고보니 학교 다닐 때 꼭 회장님이랑 닮은 후배가 있었는데...설마. 걔는 멀쩡했어. 호피 같은 거 안 입고. 어, 안젤라 선임, 우리 학교 다닐 때 회장님 닮았던 걔 이름이 뭐였지?"

"...몰라요."

어쩐지 퉁명스러운 말투로 대답한 선임연구원은 손에 커피를 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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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색어를 보다 웃겨서 써 본다

제가 덕질하느라 블로그를 버려두고 있는데(정말임. 나중에 나중에 제가 뭐 하고 살았는지 보여드릴게요) 가끔 들어와서 걸리는 검색어 보다가 막 빵 터져요. 아 이런 거 나 혼자 터져가지고 될 일이 아닌 거 같은 거예요.

아울러 이런 거 검색해서 들어오신 분들께 심심한 위로의 말씀 전합니다.


[동/묘/역/점/집] [동/묘/역/보/살]

저 점 보실 일이 있나본데 그런 거 여기서 찾으시면 안 돼요. 왜 이걸 클릭해서 들어오셨어요. 정말로 동/묘/역에 점/집이...많겠군요. 생각해보니 관/운/장 모시던 데죠 저기가. 참 나도 쓸데 없는 걸 고증을 해서.


[테/닥/로/즈/신/음]

네 ㅌㅔㄷㅏㄱ이 매운 거 먹고 괴로워하는 거 나옵니다. 다음 손님.


[긴/토/키/직/모]

보고 싶으신 마음 십분 이해하고 남습니다만...거 저걸로 만족하세요?


[긴/토/키/고/문]

죄송합니다. 이래서 조/사가 중요해요. 긴/토/키를 고/문하는 게 아니라 긴/토/키가 고/문을 합니다.


[직/모]

아니 저 미용 정보를 왜 여기서 찾으세요. 제가 미용의 ㅁ이라도 꺼내는 거 보셨어요. 미식의 ㅁ이라면 또 몰라.


[정/청/중/구]

저 신세계로 뭐 판지 좀 됐어요.


[쿠/로/바/스/썰]

아 제가 농구 손 놓은지 몇 년인데요...


[***드/림]

제가 남의 드/림 써 주는 취미가 있긴 한데...원하시는 건 여기 없어요. 1인 맞춤형이라...


[한/니/발/심/장]

아 죄송합니다. 뭐라 할 말이 없네요.


사실 제일 많이 나온 건

[미/야/자/와/겐/지]랑 [눈/으/로/말/하/다]입니다.

저 일어 못해요. 못 한다고! 그러니까 여기 와서 그거 찾지 말란 말이야. 확 비공개 돌려버릴까 싶습니다.


이 외에도 빵빵 터지는 게 많았는데 이제 기억이 안 나요. 암튼 그러니까 제발 좀 멀쩡한 걸 검색하시고, 여긴 오지 마세요. 덕후가 혼자 노는 블로그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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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봇]시를 읽는 오후

전에 트위터에서 썰 풀었던 

"권리모가 세모 문제집 보다가 학교 다닐 때 제일 싫어했던 시 영역 읽던 중 박목월의 아버지인가 하는 시 보고 이제 시가 이해가 간다고 좋아했으면 좋겠다. 그리고 시를 읽은지 2n년 만에 처음으로 울었으면 좋겠다.
왜 그 시 있잖아 내 신발은 십구문 반
시는 나이들어야 이해가 가는 법,학교 다닐 때 억지로 읽은 시가 가슴 속에서 부풀어 오르는 걸 느낀 마흔 줄 공돌이가 싱숭생숭해서 잠못들고 옆집 홀아비 불러 술이나 마셨으면." 

그걸로 쓴 건데요
....문제는 짧은 썰이 요 아래 나올 글보다 재미없다는 겁니다. 왜 이런 걸 5800자나 썼을까...




공돌이에게는 인문학적 소양이 없다는 말은 맞는 동시에 틀린 말이다. 적어도 권리모는 그렇게 생각했다. 물리학과 수학은 철학의 적자(嫡子)이다. 이 세계가 어떻게 이루어져 있나를 탐구한다는 점에서는 적어도 과학이 철학과 동등하다고 생각한다. 정치철학이나 인간존재에 대한 탐구와는 또 다르지만 철학이 그것만 다루는 것은 아니니까. 애초에 세상이 어떻게 존재하는지에 대한 탐구에서 시작했으니 말이다. 게다가 현대의 사변적인 철학과 이론물리학, 수학은 분명히 맞닿아 있었다. 철학자가 수학 공식을 가지고 저서를 만든 예도 봤었지. 수학의 증명과 철학의 논증도 굉장히 닮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공계 학생이 그런 책을 즐겨 읽을 거라고 보통은 생각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공학도에 대한 숱한 편견이란. 리모는 기계를 다루는 사람들은 매우 단순한 사람들이라 말도 논리적으로 하지 못하고, 논리적으로 사고를 전개할 수 없다는 편견을 생각하며 쓴웃음을 지었다. 공학자도 사람이다. 매체에서 묘사되는 미친 과학자처럼 아무 생각 없이 오로지 자신의 연구를 위해서만 움직이지도 않는다. 과학도 사회적 관계망 사이에 놓인 학문이고 그 사회가 우선시하는 가치에 의해 좌우되는 부분이 있었다. 근대의 과학과 지금의 과학이 추구하는 바는 같을지라도, 그것이 사회에서 어떻게 작용하는가는 또 다른 문제니까. 그러므로, 공학도도 인문학적인 사고는 가능하다는 것이 권리모의 믿음이었다. 아니, 그런 사고를 굳이 인문학이라고 번역해서 이공계에 종사하는 사람들과 은연중에 분리하는 자세 자체를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시를 읽고 소설을 이해하는 일은 어려운 일이었다. 고등학교 때 제일 싫었던 과목이 한문이고 그 다음이 국어였다. 문법은 재미있고 논술도 할 만 했지만 문학만 보면 책에서 손을 놓고 싶었다. 대체 사람은 왜 시를 쓰는 것일까. 하다 못해 가정 수업에서는 요리하는 법이라도 배우거늘 국어 시간에 배우는 시는, 도대체가 그 쓸모를 짐작하기가 어려웠다. 도운과 함께 들었던 고등학교 시절의 문학 수업을 떠올렸다. 지금 자기 나이쯤 되었을까, 키가 작고 표정이 부족하던 국어 선생은 시 같은 거 왜 배우냐고 울부짖는 과학도들에게 항상 그렇게 말했다. 시는 나이가 들어서 보면 또 읽는 맛이 다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걸 언제 읽어야 되느냐, 10대에 읽어야 된다는 거죠. 알다시피 뇌는 어릴 때 제일 잘 돌아가요. 이건 여러분이 나보다 더 잘 알 거 아냐. 그러니, 지금 머릿 속에 부지런히 넣어 놓으세요. 언젠가, 나중에 나이 들어서 인생이 뭔지 좀 알게 되면, 그때 시를 읽는 겁니다. 읽으려고 해도 아예 모르면 못 읽으니 지금 배워 놓는 거예요.
그때 자신은 아이들과 함께 선생님의 말에 힘껏 야유했고, 너희도 시간이 지난 뒤에는 뒤에는 내 말을 이해하게 될 거라는 교과서적인 답변만 들었을 뿐이다. 그때 도운은 뭐라고 했더라? 제법 진지하게 그 말을 듣고 있었던 것 같다. 국어 성적은 자기보다 좋지도 않았으면서 수업은 정말 열심히 들었었지. 리모는 교복을 입고 웃고 떠들던 시절을 떠올렸다. 확실히 뭐든 배우고 싶고 해 보고 싶어 안달이 나 있었다. 세상 모든 것이 재미있어 보이는 동시에 따분해 보이던 신비로운 시절이었다.

도운에게 로봇을 같이 만들어보자고 한 것도 벌써 20년도 훨씬 전의 일이었다. 확실히 시간은 착실하게 흘렀다. 자신도 시간의 영향을 받았다. 늙었다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더 이상 젊다고만 말하기는 어려웠다. 그때처럼 뭐든 쉽게 이해가 되지는 않았다. 쉽게 배우거나 생각을 바꾸기도 점점 어려워졌다. 나이가 들면 계산도, 식을 이해하는 것도 한창 때처럼은 되지 않는다고 했다. 그런 점에서 아마 앞으로 점점 더 덜 젊게 생각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때보다 덜 무모하고, 덜 서투르다는 점은 좋았다. 배움에는 때가 있고, 배운 것을 깨닫는 것에도 때가 있는 법. 어려서 싫어했던 과목들은 모두 그런 메시지를 자신에게 주는 과목이었다. 확실히 소설도, 어쩌다 가끔, 일 년에 한두 권 읽을까 말까 하기는 하지만 나이 들어 다시 보니 어려서 읽을 때와는 느낌이 다르기는 했다. 상처받고 배우면서 어른이 되어간다는 게 이런 거겠지. 리모는 옆집에 사는 자신의 친구를 떠올려 보았다. 어릴 때부터 어른스러웠지만, 요즘은 더 뭐랄까, 어른스럽다고 해야 할지, 아버지다운 모습이라고 해야 할지, 아무튼 어릴 때와 다른 모습을 보이곤 했다. 자신보다 오랜 시간 동안 아버지의 삶을 경험해 왔기 때문이겠지. 뭔가 단호하고, 심지 굳은 인간이 된 것 같았다.
언젠가는, 자신도 저 아이의 아버지로서 떳떳하고 당당할 수 있을까.

세모는 시험이 끝났다고 하나두리에 오공이까지 같이 놀러나갔다. 노래방에 갈지 당구장에 갈지 고민하는 눈치였지만 아마 2:2로 게임을 하러 갈 것 같다. 오공이가 양학 수준으로 게임을 잘 한다던가. 애들 노는 게 자신이 10대 때와 큰 차이가 없다는 게 신기한 일이었다. 중간고사가 끝나고 아이들이 집을 비운 늦은 오후, 저녁 찬거리를 준비하지 않아도 좋고 하루 정도는 연구실에서 나와도 좋은 날이었다. 그 황금 같은 오후에 리모가 선택한 것은, 집안 청소였다. 로봇 청소기를 매일 돌리기야 하지만 청소는 기본적으로 사람 손이 가야 하는 일이다. 세모 시험 기간 동안 수학 공부를 봐준다 간식을 해 준다-만들다 실패해서 주방을 엉망으로 만들었다는 게 진실이지만- 하다 보니 청소를 며칠 못 했다. 먼지도 좀 털고 정리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평소에는 세모가 집안일을 하지만, 시험기간 사흘 정도는 집안일을 안 해도 된다고 말해뒀다. 무척 걱정스러운 얼굴이었지만, 이럴 때라도 좀 아이답게 자기 눈 앞의 문제만 신경쓰는 걸 보고 싶었다.
주방 렌지 아래까지 세제를 묻혀서 닦고, 거실 소파 아래까지 청소한 다음 세모 방으로 들어갔다. 연구실은 일단 집 청소를 한 다음 나중에 청소할 생각이었다. 솔직히 리모는 조금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문을 열었다. 방을 좀 어지럽혔을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이 없지 않았다. 하지만 세모의 방은 이 집에서 가장 깨끗했다. 세모가 펴둔 국어문제집이 그대로 놓여 있는 게 다였다. 뭐든 열심히 하는 아이였고, 무슨 과목이건 잘 하려고 열심이었다. 학교 선생님들은 세모가 참 어른스럽고 반듯하다고 칭찬하곤 했다. 애가 너무 반듯하고 어른스러워도 안 되는데. 리모는 아직도 이 아이가 자신을 아버지라기보다 양아버지로 인식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걱정스러웠다. 어려서 본 소설 속의 착한 여자아이는 친어머니에게는 엄마라고 부르면서 살갑게 굴었지만, 나중에 들어온 착하고 예쁘고 고운 새어머니에게는 절대로 엄마라고 부르지 못했었다. 정말 좋아하는데도 엄마보다는 어머니 소리가 먼저 나오더라는 소설 속의 묘사가 생각이 났다. 세모가 칭찬 받을 때마다 뿌듯한 것도 사실이었지만 한편으로 걱정되는 것도 사실이었다.
이게 아버지의 마음이라는 건가. 솔직히 아직도 낯선 기분이었다. 하지만 매일매일이 새롭고 즐거웠다. 자전축이 비틀리고 우주가 재구축되는 경험이기도 했다. 도운에게 언젠가, 애가 생기니 패러다임이 바뀌는 기분이라고 했더니 도운이 아인슈타인 전의 물리학과 아인슈타인 후의 물리학과 같은 기분이라고 대꾸했다. 우린 안 될 거라고 한참을 웃었던 기억이 났다. 아마 남들이 들으면 무슨 비유가 그렇냐고 하겠지만, 그들의 세계에서는 그 이상 가는 비유가 없었다. 아버지가 되기가 참 어찌나 어려운지. 아이가 자기에게 오고 벌써 몇 년이 지났고, 그간 죽을 고생도 하고 서로 의지하면서 살았지만, 아직도 자신이 아이의 아버지가 맞는지는 가끔 알 수 없었다. 자신에게는 이 아이가 하나뿐인 아들이고 가족이었지만, 그 아이도 그렇게 생각해 줄까. 중학생이 된 지금도 아이는 다정하고 상냥해서, 사춘기라고 속을 썩여대는 다른 집 아이들의 이야기가 먼 나라 이야기 같았다. 하지만, 그건 친부모자식간이라 가능한 일이겠지. 리모는, 자신이 아직 아버지로서 부족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다정하기만 해도 안 되고, 엄하기만 해도 안 되고, 마음을 있는 대로 표현하되 절제할 줄 알아야 하고, 아이가 원하는 것을 해 주되 지나치지 않아야 하고...의식을 하기 시작하면 머리가 아파온다. 숨 쉬듯 자연스럽게 아버지로 존재하는 옆집 사는 친구를 생각하며 리모는 자신이 아직도 부족해서 세모가 저렇게 반듯하고 어른스러운가 하고 생각했다.
리모는 무심결에 세모의 책상 위에 있는 문제집에 손을 댔다. 어릴 때 부모님은, 자신이 책상 위에 펴 놓고 간 공책이며 책을 꼭 읽어 보고, 숨 넘어가게 웃거나 야단을 치거나 했다. 글씨가 왜 그러니, 수업 시간에 뭐 한 거니. 세상에 이 글 좀 봐. 리모가 이런 생각도 다 하네. 자신은 한 번도 아이가 공부하는 책을 그렇게 본 적이 없었다. 수학 문제라면 같이 풀어봤고 과학 공부라면 함께 해 봤지만, 그 이상을 해 본 적은 없는 것 같다. 부모님이라면 아마, 아이를 야단치는 것도 칭찬하는 것도 좀 더 쉬웠을지도 모른다. 세모가 연필을 꽂아놓은 페이지를 편 리모는, 아주 오래 전 학교에서 선생님이 하셨던 말씀이 머릿속에서 터지듯 굴러나오는 기분이 들었다. 시는 나이 먹어서 읽어야 진짜로 이해를 할 수 있는 거야.

    가정
                  박목월


 지상에는
 아홉 켤레의 신발.
 아니 현관에는 아니 들깐에는
 아니 어느 시인의 가정에는
 알전등이 켜질 무렵을
 문수(文數)가 다른 아홉 켤레의 신발을.
 
 내 신발은
 십 구문 반(十九文半).
 눈과 얼음의 길을 걸어,
 그들 옆에 벗으면
 육문 삼(六文三)의 코가 납짝한
 귀염둥아 귀염둥아
 우리 막내둥아.
 
 미소하는
 내 얼굴을 보아라.
 얼음과 눈으로 벽(壁)을 짜올린
 여기는
 지상.
 연민한 삶의 길이여.
 내 신발은 십 구문 반(十九文半).
 
 아랫목에 모인
 아홉 마리의 강아지야
 강아지 같은 것들아.
 굴욕과 굶주림의 추운 길을 걸어
 내가 왔다.
 아버지가 왔다.
 아니 십 구문 반(十九文半)의 신발이 왔다.
 아니 지상에는
 아버지라는 어설픈 것이
 존재한다.
 미소하는
 내 얼굴을 보아라


아, 이래서 나이를 먹어야 시를 이해할 수 있다고 말한 거구나. 리모는 20년도 훨씬 전의 국어 수업이 이제야 제대로 끝난 기분이 들었다. 

그렇구나, 아버지가 된다는 것은. 오래 전 이 시를 보았을 때는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보이는 기분이었다. 이제 좀 있으면 세모는 분명 자신보다 키가 클 것이고, 신도 더 큰 것을 신을 것이다. 벌써 의수나 의족도 처음에 만든 것에 비해 얼마나 커졌는지 모른다. 그래도, 맨 처음에 이 아이를 데려 왔을 때 만들었던 작은 손발은, 아직도 자기 것처럼 기억하고 있다. 자기 손을 꼭 잡고 걷던, 차가운 손도. 자신의 손과 차갑고 작던 아이의 손의 대비며, 출소한 자신을 붙들고 울먹이던 아이며, 자기 때문에 힘들었을 때 울음을 참던 아이의 얼굴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때마다 아이를 지키기 못했던 것을 자책하던 자신의 모습도 떠올랐다. 얼음과 눈으로 벽을 짜올린 지상과 연민한 삶의 길을 지나서 온 집이라. 어쩐지 울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문제집을 놓고 세모의 방을 청소할 때까지도 괜찮았건만, 코를 훌쩍거리면서 청소기를 돌리던 리모는, 손으로 눈을 문지르다 결국 연구실에서 정비하던 제트와 제로를 수면모드로 전환해 놓고 혼자 소리 죽여 울었다. 20여년 전에 이해 못했던 것을 긴 시간이 흐른 뒤에 이해하게 되었으니 20년 분만큼 울 일도 많을 것이라고 혼자 생각했다.

아이들이 저녁을 밖에서 먹고 들어온 다음, 도운이 하나와 두리를 붙잡고 늦었다고 잔소리를 한참 하고 저녁 부실하게 먹었다고 또 한참 잔소리를 하고 대충 정리를 한 다음, 애들이랑 드라마라도 같이 볼까 하던 찰나에 전화가 왔다. 아이들은 리모컨을 잡고 서로 채널을 돌리겠다고 신경전을 벌이고 있었다. 그만 하고 서로 양보하라고 한 마디 한 다음 켠 전화에는 리모의 얼굴이 떠 있었다.
-도운, 뭐 하냐.
“잘 준비 하지.”
늦은 시간에 전화하는 일이 잘 없는 친구가 갑자기 전화를 해서 조금 놀랐다. 혹시나 무슨 일이 있는 것은 아닌가 생각하며 도운은 최대한 상식적인 답을 했다.
-그럼 자는 거 아니네?
“뭐 그렇지.”
-그럼 나랑 술 한 잔 하자.
“나야 좋지만, 애들은?”
-애들은……뭐 알아서 자야지. 이제 중학생이잖아.
“뭐 할 말이라도 있어?”
어쩐지 리모의 목소리가 좀 가라앉아 있다고 생각했다. 정작 리모는 엉뚱한 대답을 했다.
-우리 고등학교 때 문학 선생님 기억 나냐?
“응? 갑자기 무슨 소리야.”
-아니야. 아무튼 그럼 내가 너네 집으로 갈게.
“응? 우리 집엔 아무 것도 없는데?”
-내가 가져 간다. 안주는 됐고 물이나 준비해. 내일 숙취로 죽기 싫거든.
뭘 얼마나 퍼마시려고 이러나. 제법 비장하게 말하고 끊는 리모의 목소리를 들으며 도운은 잠시 멍하게 있다, 하나와 두리에게 얼른 올라가서 자라고 말했다. 아빠와 아저씨는 지금부터 좀 진지하게 긴 이야기를 해야 할 것 같다고.
어쩐지 독한 게 마시고 싶어서, 세모 모르게 연구실에 숨겨둔 비장의 중국술을 꺼내 들고 가면서, 리모는 언젠가 세모를 데리고 서점에 가서, 같이 책을 골라서 읽어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내가 좋아하는 책을 알려주고, 언젠가 너도 내가 이해하는 것을 이해하게 될 것이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그 날이 그렇게 멀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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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니발]백정 살인 사건

토끼님과 연성 교환 커미션을 하기로 했습니다. 저는 개화기 배경으로 한니발을, 토끼님은 중세 유럽 전쟁터를 배경으로 스팁버키를 쓰기로 하셨지요. 그 결과물입니다. 게재 허락 감사합니다. 





한성 시내에서 ‘반인’이 살해당했다.

-뭡니까, 그 ‘반인’이란 건?

-소를 도축하고 파는 것을 허락받은 대학의 노예입니다. 성균관, 이라고 하나요?

소 도축장에서 소를 잡던 자는 성균관 앞 반촌(泮村)에 살던 반인(泮人)이었다. 성균관에 소속된 노비 집단으로, 성균관 앞에서 살며 고기를 잡아 제사에 쓸 쇠고기를 대며 성균관의 살림을 돕는 집단이었다. 아주 오래 전 개경에서 왔고, 더 오래 전에는 재가승처럼 먼 북쪽에서 온 사람들이라는 말이 있었다. 윌 그레이엄은 종로를 지나 성균관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백정은 살해당했고, 허벅지와 등의 일부가 없어진 사체가 발견되었다. 포도청에서 입단속을 시켰지만 소문은 반촌을 중심으로 빠르게 퍼졌다. 유생들 사이에서, 궁인들 사이에서, 온 도성의 백성들 사이에서. 

사건 자체도 큰 것이었지만 소문의 내용도 흉흉했다. 양인들이 들어오고 세상이 흉흉해 졌다는 소문이 퍼져갔고, 강상의 도리도 모르는 야만적인 양인들이 조선에 들어와 세상의 법도가 뿌리부터 무너진다는 구체적인 소문이 무척 큰 힘을 가지고 퍼져갔다. 그래서 정부요인 호위차 조선에 와 있던 경찰국장 잭 크로포드가, 수사관 윌 그레이엄을 파견한 것이다. 윌 그레이엄은 물웅덩이가 조그맣게 고인 진흙길을 터벅터벅 걸어가고 있었다. 흰옷 입은 조선사람들이 그를 피해 걸어갔다. 윌 그레이엄이 한성 주재 미국 외교관의 일원이 된 것은 우연이라기보다는, 어쩌다 벌어진 실수 같은 일이었다. 그저 본국에서, 적응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그에게 새로운 환경이라도 접해보라며 윗선이 배려를 해 주었다. 하지만 이 나라는 자신이 알던 세상과 달라도 너무나 달랐다. 

-이곳에 노예가 있습니까?

-아, 흑인 노예와는 좀 다릅니다. 미스터 그레이엄. 인권에 관심이 있으신가요?

그리고 잭 크로포드는 윌 그레이엄을 위해, 다른 사람을 한 명 더 보내주었다. 포장이 되지 않은데다 좁고 꼬불꼬불한 조선의 흙길을 걸어가면서 구두에 흙탕물 한 방울 튀기지 않고 우아하게 걸어가는 사람이었다. 단정하고 우아한 것이 굉장히 위화감이 드는 인물이었다. 비단 조선의 거리가 아니더라도 위화감이 들 것이다. 이 사람은 대체 누구지. 윌 그레이엄은 조금 전에 받은 명함에 적힌 이름을 떠올렸다.

-한니발 렉터 박사라고 했습니까. 하지만 조선에는 의료 업무차 오셨다고 들었는데요.

-인류학에 관심이 있습니다. 조선의 민속을 조사하고 있지요.

마흔을 넘겼을까, 단정하게 정장을 하고 중절모를 쓰고 지팡이를 짚은 채, 여기가 뉴욕 맨해탄이기라도 한 것처럼 태연하게 걸어가는 키가 큰 남자는 무척 정중하게 말을 했다. 

-하지만 오늘은 사건의 수사를 위해 여기에 파견되었습니다. 사실은 아침까지는 개성에 있었지요. 개성에서 여기까지 자동차를 보냈더군요. 조금만 멀리 있었어도 큰일날 뻔 했습니다. 

자동차가 움직이는 것을 구경하느라 몰려든 조선 사람들을 헤치고 사람을 찾느라 애를 많이 먹었습니다. 윌 그레이엄은 속으로 잠깐 불평을 늘어놓았다. 눈 앞에 있는 사람은 무척 친절하고 정중하며 유능해 보였지만, 위화감은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뭔가 친숙한 느낌도 든다는 점을 부정할 수가 없었다. 그것이 무엇인지 윌 그레이엄으로서는 알 길이 없었다. 화제를 돌려보았다. 

-법의학자이십니까?

-법의학을 알고 계시는군요. 어느 정도는 맞습니다. 하지만 제가 여기에 온 이유는 다른 것이지요. 혹시 정신분석학이라고 들어 보신 적 있는지요.

-신문에서 봤습니다. 프로이트라는 자가 황당한 이야기를 한다고들 하더군요.

인간의 정신에 이성의 지배를 받지 않는 부분이 무척 많다는 그 이야기를 하는 자 말인가. 그런 것을 믿는 의사는 처음 본다고 윌 그레이엄은 생각했다. 그는 무척 단호하고 정중한 태도로 말을 하면서, 무언가를 관찰하듯 윌 그레이엄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 인간은, 정신에 주의를 기울일 때가 되었습니다. 사람은 육체와 정신으로 이루어져 있지요. 하지만 지금까지 인간은 육체의 병만 보고 있었습니다. 

-의사면서 그런 것을 믿습니까? 

-신기한 일이지요. 정신을 육체보다 우위에 두는 문화가 발달했으면서 정작 아픈 정신은 돌아보지 않았던 것이 말입니다. 

윌 그레이엄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잭 크로포드 국장의 판단은 과연 옳았다. 이 자는 사건을 수사하는 데보다 윌 그레이엄 자신을 통제하는 데 더 큰 도움이 될 것이다. 그래서 파견한 거다. 

 

懸房, 이라는 기호는 글자일까 그림일까. 커다란 현판이 매달린 건물 앞에는 화려한 옷을 입은 별감들과 포졸들이 가득했다. 미리 설명을 들은 것일까, 못마땅한 얼굴로 두 사람이 지나갈 길을 터 주는 군관들이 보였다. 태도는 고분고분했지만 윌 그레이엄은 분명히 들었다. 양귀신들이 피 냄새라도 맡고 왔나, 하는 명백한 비웃음을. 조선어는 아직 잘 모르지만 내용은 분명했다. 그곳에는 불온한 공기가 떠돌고 있었다. 이 작은 나라는 러시아와 일본과 중국 사이에서 끊임없이 고통받고 있었고 자신의 모국도 이 나라가 받는 고통에 얼마간 가담하고 있다는 것은 윌 그레이엄 자신도 잘 알고 있었다. 거기다가 자신들의 외모는 이 나라에서는 너무나 이질적이었다. 새로운 것은 종종 공포스러운 것이거나 혐오스러운 것이거나, 혹은 둘 다이다. 아마 자신은 이 나라에서는 둘 다겠지. 

-저 간판은 뭐지요?

-글자입니다. 이곳의 말로 매다는 방, 그러니까 고기가 매달려 있는 푸줏간이라는 말이지요.

도축장 안은 피 냄새로 가득했다. 소피 냄새는 아니었다. 바닥에는 토막난 시체가 누워있었다. 여기 사람들은 빨리 시체를 치우기를 원했지만, 윌 그레이엄이 현장을 둘러보고 난 다음에 장례를 치르도록 양해를 구했다. 게다가 부검도 필요했다. 시체를 조사한다니 이 사람들에게는 무척 충격적인 일이리라. 아마 이런 부분도 조선 눈에는 무척 야만적으로 보이겠지. 자신을 향해 쏟아지는 따가운 시선에 윌 그레이엄은 눈살을 찌푸렸다. 

-사람들을 물려 주십시오.

영어와 조선어로 사람들이 뭐라고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사람들이 먼발치에서 현장을 들여다보려고 까치발을 하고 웅성대는 풍경이 눈에 선했다. 넌더리를 내며 문을 닫는 조선인 경찰도 있었다. 여기서는 경찰이라고 부르지 않던가, 뭐 상관없다. 아무래도 뭘 해도 여기에선 미움받을 수밖에 없으려나보다. 원래 시체가 걸려있었던 갈고리며 바닥에 튄 피를 한참이나 바라보던 윌 그레이엄은, 조금 난처한 표정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닫힌 문 안에는 한니발 렉터 박사가 남아있었다. 자신들을 향해 언성을 높이던 사람들이 보이지 않자, 아주 미세하게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다.

-좀 특수한 방법으로 수사합니다. 들으셨겠지만.

-괜찮습니다.

박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호기심 어린 표정이었다. 윌 그레이엄은 조금 당황했다. 정말로 다 들었다면 저렇게 나올 리 없다고 생각했다. 왜 나가지 않았느냐는 뜻이 분명히 전달되었을텐데도 박사는 반응하지 않았다.

-정말 들으신 겁니까.

-물론이지요. 잭 크로포드가 하는 일입니다.  

-악마의 소행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으십니까.

세일럼에 마녀가 나타났다는 소동이 벌어진 이후 고작 백 년도 지나지 않았다. 아직도 사람들은 자신들이 알지 못하는 것을 두려워했고, 윌은 그런 점에서 공포를 불러일으키곤 했다. 그 자신이 그 점을 가장 잘 알고 있었다.

-저는 과학을 믿는 사람입니다.

박사는 미소지었다.

-그리고 다 들었기 때문에 여기에 온 것입니다.

역시 뭔가 알고 있는 것은 틀림없다. 하지만, 과연 어떨지. 윌 그레이엄은 시체가 걸려있는 벽을 노려보았다. 그리고 눈을 감았다. 

현장에 있었던 모든 정보들이 물처럼 밀려들어왔다.


윌 그레이엄은 놀란 듯 흠칫하며 감았던 눈을 떴다. 세상이 핏물에 잠긴 듯 모든 것이 검붉어 보여 어지러웠다. 정신을 차리는데 시간이 좀 걸리려나 보다. 그때 웬 사슴머리가 달린 괴물이 입을 열었다.

-뭐 좀 알아내셨습니까.

헛것을 보는 건가. 흠칫 놀라 앞을 보니, 한니발 렉터였다. 벽에 걸린 소뼈들이 꼭 사슴뿔처럼 보였던 것 같다. 사람을 짐승으로 보다니. 박사는 윌 그레이엄의 얼굴을 살피고 있었다. 윌 그레이엄은 자신의 감정을 감추기 위해 고개를 숙였다. 

-어떻게 죽였는지는 확실히 알겠습니다. 굉장히 힘이 센 사람이었군요. 시체는 푸줏간 앞에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습니다. 맞지요?

-그랬다고 들었습니다.

-게다가 베어간 부위 말입니다. 그거 베어진 흔적이 좀, 특이해요. 소고기랑 비슷한 데가 있습니다. 

윌 그레이엄은 고개를 찡그렸다. 살인도구는 도살장에 있던 날카롭고 큰 칼이었다. 덩치가 상당했던 백정을, 무슨 수를 썼는지 제압해서 큰 칼로 찌른 다음, 거꾸로 매달아 피를 빼고 고기를 썰어갔다. 사람을 푸줏간에서 고기처럼 죽인 것이다. 그야말로 인간 취급을 하지 않겠다는 의지마저 느껴졌다. 윌의 설명을 들은 한니발 렉터 박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현장에서 본 것을 적고, 사진사가 와서 현장 사진을 찍어가는 동안 박사가 지나가는 말처럼 물었다.

-그런데 왜 이곳 사람들의 방식을 안다, 고 말하는 겁니까.

-범인이 이 나라 사람이 아니라고 확신하니까요.

-그런 것도 읽어낼 수 있습니까.

-제가 찾아내는 것은 어쩌면 범행동기일지도 모릅니다.

윌은 몸을 돌렸다. 

-잭 크로포드에게 가십니까?

-보고는 내일 하도록 하겠습니다.

분명하게 말하고 돌아서는 윌 그레이엄을 보는 한니발 렉터의 눈에 일종의 이채 같은 것이 어렸다. 그 눈빛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늦은 저녁, 북촌에 있는 한니발 렉터의 집에 윌 그레이엄이 찾아왔다.

-연락도 없이 찾아와서 놀라신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괜찮습니다. 당신의 방문이라면 언제든 좋아요.

과장된 환영인사라고 생각한 윌 그레이엄은 미간을 조금 찌푸리고 화제를 돌렸다.

-좋은 곳에 사시는군요.

-이 나라에 사는 다른 외국인들을 따라해 보았습니다.

신발을 벗고 들어가는 것이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을 위해 실내에는 슬리퍼가 놓여 있었다. 윌 그레이엄은 댓돌을 밟고 올라가 슬리퍼를 갈아신고, 방에 들어갔다. 콩기름을 먹인 장판에 보료며 족자가 걸려있는 와중에 책상용 의자가 몇 개 놓여있었다. 조선식 방에 소파는 좀 놓기 어려웠던 모양이다. 의자에 앉자 잠시 후 박사가 차를 내 왔다.

-저녁 식사 시간인데 식사를 하시지 않고요.

-괜찮습니다.

-쇠고기찜을 좀 해 봤습니다만, 드시겠습니까.

-고기를 사셨나요?

윌 그레이엄의 목소리가 날카로워졌다. 

-물론입니다. 조선에서 의외로 좋은 고기를 파는 푸줏간이 많더라고요. 윌. 아, 윌이라고 불러도 되겠습니까?

-좋으실 대로요, 박사님. 

박사는 미소지으며 찻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윌은 눈을 빛내며 박사를 쳐다보고 있었다.

-오신 용건에 대해 물어도 될까요?

-잭에게 가기 전에, 당신한테 확인해 보고 싶은 게 있어서 왔습니다.

-어떤 부분에 대해서요?

박사는 윌의 얼굴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백정이란 사람들은 이 나라에서 어떤 위치인 거죠?

-아, 천민이지요. 여기 사람들과는 혈통이 좀 다르다고 해야 할까요. 그거 아십니까. 그 사회에 속하지 않은 이방인들이 사회에 편입될 때는 가장 낮은 계급으로 편입되지요.

박사가 말했다.

-그렇습니까?

박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이들도 모두 천민으로 이곳 사회에 편입되었습니다. 조선의 북쪽에 중국인 부락이 있는 것을 알고 있습니까? 이들 말로 여진족이라고 불리는 부족 사람들이 사는 마을인데 거기 사는 사람들은 조선인과 통혼도 할 수 없고 조선인들이 하기 꺼려하는 천한 일을 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윌이 박사의 눈을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군요. 그게 궁금했습니다.

-어째서요?

-일단 박사님, 오늘 사건 현장에 대한 제 의견을 좀 들어 주십시오.

-그건 좋습니다만, 왜 저에게 먼저 오셨죠?

-그래야 한다고 판단해서입니다. 

-좋아요, 윌. 당신의 의견이 궁금하던 참입니다.

렉터 박사가 말하자 잠시 침묵이 이어졌다. 입을 다물고 있던 윌이 잠시 후 입을 열었다.

-백여년 전부터 이곳의 백정들은 한성 내의 도축 및 고기 판매를 독점해 왔습니다. 그들은 꾸준히 천천히 부를 쌓아갔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불만이 많았습니다. 돈은 있지만 신분은 얻지 못했으니까요.

박사가 동의의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정확합니다, 윌. 이곳 사람들에 대해 많이 조사했군요.

-그런데 이상한 일이 일어난 겁니다. 자신들 같은, 신분제 외부에 있는 사람이 등장했는데 그들은 조선 사회에서 아무런 차별을 받지 않았어요. 물론 사람들은 그들을 좋아하지 않았지만, 뭐라고 해야 할까, 그래요. 일종의 특권을 가지게 된 겁니다. 참으로 이상하게 보이지 않았겠습니까. 사실 이들이 우리를 보는 눈빛이, 아까 그 백정들을 보는 눈빛과 다르지 않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동의하시나요?

박사는 평소 자신을 보던 조선인들의 무례하기 짝이 없는 표정과 말을 떠올렸다. 코쟁이라는 둥 외국 괴물이라는 둥 밑도 끝도 없는 천박한 말을 내뱉던 사람들이었다.

-우리들 외국인은 이들에게는 또 다른 천민이지요, 마음속으로는.

-조선의 예의도 모르고, 조선말도 모르는 기괴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이 나라 관리며 왕족들과 대등하게 이야기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천한 품성을 지닌 노랑머리 외국인들이 말입니다. 이들은 그게 싫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푸줏간의 백정 김씨는, 그래서 그 누구인지 모를 외국인에게 무례하게 굴었으리라. 검은 머리의 사람들이 모여살던, 견고한 상하질서로 이루어진 조선이라는 나라에, 잘못 들어온 외국인들.

왜 저들은 다른가, 하는 사소한 물음이었으리라. 천민들 가운데 개화 문물에 관심을 가진 이는 의외로 많았다. 양반들은 가지지 못한 베깡도 있었고, 고기를 팔며 모은 재산도 있었다. 그러나 아직 다른 세상은 오지 않았고, 양반님들 위에 다른 양반님들이 온다고 했다. 평범한 백정 김씨는 아마 그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았으리라. 

그리고 그는 무례한 죄로 살해당했다. 

-이게 제 디자인입니다.

긴 이야기가 끝나고, 평소답지 않게 말을 많이 한 탓에 목이 말랐는지 테이블 위에 있던 차로 목을 축였다. 반은 감탄, 반은 놀란 표정으로 박사가 말했다.

-그렇군요. 굉장한 비약입니다만 잭이 말했습니다. 당신은 범인의 심리를 범인과 같이 이해하고 그의 눈으로 사건 현장을 본다고요.

-그 비슷합니다.

-하지만, 이 조선 땅에는 의외로 많은 외국인이 있습니다. 그들 중 누구라고 생각하는 거죠?

-그렇게 볼 때, 범인은 박사님, 당신입니다.

윌 그레이엄은 무덤덤한 얼굴로 말했다.

한니발 렉터가 매우 신기한 것을 보듯 윌 그레이엄을 쳐다보았다.

-왜 나죠?

윌이 인상을 찌푸리고 박사를 쳐다보았다.

-제가 현장에서 읽어낸 겁니다. 범인은 피해자를 음식물처럼 다루었어요. 무례한 것을 매우 싫어하는 사람이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당신의 저녁 메뉴가 쇠고기더군요. 그 푸줏간에 들렀던 외국인이 당신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지나친 비약입니까? 

박사는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너무나 담담한 표정에, 윌은 하고 싶지 않았던 말까지 내뱉고 말았다.

-혹시 오늘 식탁의 쇠고기가, 범인의 살일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아닌가요? 먹을 수 있을만큼 잘라간 것 아니었습니까.

모욕적인 발언이었다. 그러므로 화를 내며 강하게 부정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박사는, 한니발 렉터는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박사의 미소를 본 윌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제 추측이 맞지 않기를 바랐습니다. 

-아니오, 알아봐 주어서 상당히 기쁩니다.

-진심입니까?

-물론입니다. 이렇게 기뻤던 적이 없었어요. 내 살인을 한 눈에 알아보다니, 무척 마음에 듭니다. 

-우리는 친구가 될 수 있겠지요

윌은 얼굴을 찌푸렸다.

-거절합니다. 당신은 수배자입니다. 본국으로 돌아갈 수 없으며, 

-어지럽죠?

말을 끊은 박사가 미소짓고 있었다. 차, 그걸 마시는 게 아니었는데.


정신을 차려보니 자신의 손이 묶여 있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난 걸까. 윌은 시간을 가늠해보려고 했지만 머리만 깨질 듯 아프고 아무 것도 짚이는 것이 없었다. 그때 눈 앞에 박사가 나타났다.

-깼군요.

평소와 다름없이 수트를 입고 있었다. 여행가방을 하나 들고 있다는 점만 평소와 달랐다.

-어디로 가려는 겁니까

대답하지 않고, 박사는 다른 말을 꺼냈다.

-윌, 왜 나한테 먼저 온 겁니까.

-뭐라고요?

-잭한테 먼저 가는 게 나았을 겁니다. 당신은 범인이 나라는 걸 알고 있었어요. 아닙니까?

윌은 고개를 숙였다.

-결국 당신은 날 잡을 마음이 없었던 건지도 몰라요. 당신은 살인마의 집에 오면서, 아무 대책도 세우지 않고 누구에게도 연락을 하지 않았더군요. 내가 당신을 죽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하지 않은 겁니까.

-……비약이 심하군요.

-그렇게 말할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당신이 사건을 읽는다면, 저는 당신의 심리를 읽지요. 윌, 당신은 나를 잡을 마음이 없었어요.

-왜 그렇게 생각하죠?

-당신은 나와 동류니까요.

윌은 기분나쁜 표정으로 박사를 노려보았다.

-살인마의 마음을 완전히 이해하면서, 당신이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주장하면 곤란하지 않습니까.

박사는 아이를 타이르듯 부드럽게 말했다.

-당신을 죽여서 먹는 것은 어렵지 않아요. 아니, 오히려 즐거울지도 모르죠. 무례한 인간보다 훨씬 나은 식사가 될 겁니다. 하지만 그러지 않겠습니다.

허리를 굽힌-바닥에 앉아있는 윌의 눈높이에 맞춰-박사는 윌의 뺨을 쓰다듬고, 어깨를 톡톡 쳤다.

-이건, 그렇죠. 친구에 대한 우정의 표시입니다. 내가 나가는 것 정도는 마음 편하게 보세요. 물론 당신이 날 잡지는 못할 걸 압니다.

-난 당신 같은 사람이 아닙니다.

-그건 윌, 당신 주장일 뿐이고요.

그 말을 끝으로, 의식이 끊겼다. 단단한 몽둥이로 뒤통수를 맞은 모양이라고, 나중에 등장한 잭 크로포드가 말했다.


정작 윌이 그 집을 빠져나간 것은 이틀 뒤였다. 집안 살림을 도우려고 고용한 조선인 행랑아범이-라고는 해도 자기 집에 살면서 정해진 날짜에 와서 장작을 대 주고 일을 해 주는 것 뿐이다. 그는 한니발이 집에 어떤 고기와 살인도구를 갖춰 두었는지 알지도 못했다- 집에 들렀다 윌을 풀어준 것이다. 집의 부엌에는 기기묘묘한 조리도구와 함께, 땅속에 짚에 싸고 소금에 절여 보관해 둔 각종 고기가 나타났다. 그게 뭔지 누구도 알고 싶어 하지 않았다. 그리고 다시 세상은 조용해졌다. 조선인 살해 혐의로 수배된 닥터 한니발 렉터가 실종된지 몇 달이 지나고, 먼 동유럽에서 그를 보았다는 제보가 들렸으나 윌 그레이엄은 그것을 믿지 않았다. 그는 분명히 자신을 지켜보고 있으리라. 어디에서인지는 몰라도.



엑스맨 : 데이 오브 퓨쳐 패스트

엑데퓨 감상을 쓰기 위해 로그인 했습니다. 얼마만인지. 

간만에 좋은 영화를 봤는데 트위터에서 떠들면 네타가 될까봐. 조용히 여기서 감상을 쓰기로 결심했습니다. 스포일러가 될 부분이 엄청나게 많으니 영화를 보지 않으신 분들은 클릭하시면 안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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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키*꿈]kiss kiss kiss

4월  27일에 트위터에서 #첫번째로_멘션온_캐릭터와_두번째_캐를_키스시킨다 태그를 해 봤지요.

그랬더니 로키와 샌드맨이라고 달아주셔서 둘이 붙여봤습니다. 로키도 사람 멀쩡하게 사귈 스타일은 아닌데 우리 꿈이 그쪽 방면으로 너무....소질은 없는데 외로움은 많이 타서...

세 번째는 토니 스타크였으므로, 잘 하면 꿈이 아이언맨한테 순정을 바치고 우는 이야기가 될 뻔 했지 말이에요. 썼던 글에 조금 살을 붙여 올립니다.



로키는 눈 앞에 있는 창백하고 시커먼 사람을 찬찬히 쳐다보았다. 자신과 닮은 얼굴로 보였다. 기분 탓인 것인가. 마르고 창백한 남자는 길고 검은 옷자락을 끌며 천천히 걸어왔다. 

"아스가르드의 신이자 서리거인이 아닌가. 환영하노라." 

꿈은 무미건조한 말투로 말했다. 

"여기에서 무엇을 찾는 것인가." 

과연 뭐든 알고 있다더니. 로키는 긴장으로 가라앉은 목소리를 다듬었다.

"오래된 존재에게 인사드립니다."

자신이 허리를 굽힐 수 있는 몇 안 되는 존재이다. 이들을 거슬러서 좋을 게 하나 없다고 들었다. 영원의 일족은 일곱 남매인데 그들 중 하나라도 허투루 봤다가는 큰일 날 것이라고 했다.

"예의바른 인사 치고는 상당히 무례한 눈빛이군. 뭔가."

"오래된 존재를 보는 것은 처음라 그러니 이해해 주었으면 합니다." 

"보통은 그렇다. 그러니 새삼스러워할 것 없다." 

오딘보다 오래된 지혜를 가지고 있는 존재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찾으려면 꿈을 찾으라고, 오래된 마법사들이 말했다. 로키는 창백한 얼굴에 자리잡은 시커멓고 끝을 모를 눈을 쳐다보았다. 저 허공 속에 지혜가 있다고? 마른 우물같기도 하고 우주 같기도 한 눈이 눈 앞에 펼쳐져 있었다. 정말로 여기에서 뭔가를 얻어 갈 수 있을까. 로키는 마음을 다잡았다.

"지혜를 청하러 왔다는 것 또한 알고 있겠군요." 

"꿈에게 지혜를 찾다니 영문 모를 자가 아닌가." 

"나는 힘을 원합니다. 하지만 가장 큰 힘은, 지혜를 갖는 것이지요."

"지배하고 싶다면 욕망에게 가 봐라. 그는 네가 원하는 것을 줄 수 있을 게다."

꿈의 메마른 목소리에 어이가 없다는 듯한 감정이 실렸다. 로키의 눈에 이채가 돌았다. 이 자는 내가 생각하던 크고 무서운 존재와는 조금 다른 것 같다. 

"그보다 더 큰 것을 원합니다."

"뭐 좋다. 여기에 머무르면서 찾아보아...뭘 보는 겐가." 

로키가 꿈의 코 앞에 얼굴을 들이댔다. 예전부터 힘이 있고 강한 존재를 좋아했었다. 이자는, 자신이 알고 있는 존재 중 가장 강하지만 그만큼, 무해하기도 하다. 아마 자신에게는 무해할 것이다. 악몽같은 인생이었는데, 새로운 꿈 하나쯤 더해진다고 이상할 게 뭐 있겠는가.

"꿈이 죽음보다 잔인하고 냉혹하다고 들었소." 

"그렇다." 

로키는 꿈의 무서움에 대해 자신에게 경고하던 오래된 종족들의 말을 떠올렸다. 하지만 그런 건 이제 아무래도 좋다.

 "무서우면 무서울수록 좋소."

"무슨 뜻인가?"

"공포는 나를 고양시켜주거든"

 로키는 천천히, 얼굴을 울여 꿈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갖다댔다. 꿈이 얼빠진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은, 아마도 얼굴을 너무 가까이 겹쳐 시야가 흐려진 탓이리라. 호흡이 섞이는 데는 의외로 시간이 많이 걸렸다. 꿈의 혀놀림은 서툴렀고 심지어는 어떻게숨을 쉬어야 하는지도 모르는 것 같았다. 입술을 뗐을 때, 이 우주에서 가장 오래된 존재라는 꿈은, 놀랍게도 숨을 헐떡이며 입술을 문지르고 있었다. 아까 그 표정은 착각이 아니었나. 조금 놀란 로키에게 꿈이 말했다

"이것은 진지하게 교제해 보자는 신호인가." 

이 자는 안 될 것이다. 로키는 지혜라는 것이 사실은 존재하지 않는 개념은 아닌가 고민해 보았다. 

"지고한 존재여, 농담이 지나친 거 아니오." 

"너, 나를 가지고 놀았나?"

"그런 게 아니지 않소!"

"뭐...남성과 교제해 본 적은 없지만 이번 기회에 내 취향의 폭을 넓혀 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진지한 거요? 정말? 진심이오?"

꿈이 울상을 지었다. 아, 제발 좀. 공포로 고양되기 전에 우울한 얼굴에 질식되겠네. 로키는 한숨을 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