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시야, 지금? 갑자기 통신회선에 불이 깜박였다. 나는 패널에 찍힌 시간을 읽어주었다. -18시 23분. -아아 딱 좋은 시간인데 아깝다. 지구에 있었으면 지금쯤 노을이 제대로일텐데. -그리니치 표준시 기준으로 18시다. 너네 고향 거기 아니잖아. 통신기 너머에서 못마땅한 듯 뭐라고 중얼대는 들렸다. 아마 그쪽 고향말로 뭐라고 욕을 한 것이리라. -야 그런 건 걍 좀 넘어가라 쯧. 애가 낭만이 없어요.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갑자기 굳이 회선낭비를 해 가며 말을 거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패널을 보니 그쪽이 탄 우주선은 제대로 궤도에 접근 중이었다. 아직은 자동조종 시스템에 의지해야 하기 때문에 나나, 그쪽이나 별로 할 일은 없었다. 본격적인 궤도에 진입하면 아마 잡생각을 할 여유가 없겠지. 나는 무뚝뚝하게 대꾸했다. -우리 고향에선 사내새끼가 낭만 운운하면 기집애 같다고 까인다. 됐냐? -...새끼 뒤끝 쩌네. 회선 건너편에서 웃음소리가 들렸다. -야 좀 사근사근하게 대답해주면 덧나냐. -...... 딱히 뭐라고 말을 못 하겠다. 그보다 이 패널은 잡담용이 아니라 위급시 상황전달을 위한 패널인데 회선을 막 낭비해도 괜찮은 건가 싶어서 짜증났다. 아까도 얼마나 놀랐는지. 혹시 일어날 지 모르는 사고가 생기면 한 쪽이 한 쪽에게 상황을 전달하고 피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패널이고, 그래서 우주선은 2기인 건데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 -징그럽다 임마. 잡담할 마음이 나냐? -잡담이라니! 저쪽의 목소리가 갑자기 커졌다. -마 그렇게 풍류를 몰라서야 쓰겠냐. 난 시간이 마침 딱인 거 같아서! 이럴 땐 노을을 즐기던 우리 지구의 아름다운 풍습을! 공유하겠다는데 말이야! 귀가 따가웠다. 왜 목소리가 커졌는지는 알고 있다. 시간이라면 네 우주선의 패널에도 잘 표시되어 있었겠지. 굳이 마음을 써 준 것이다. 잘 안다. 하지만 여기까지 와서 뭘 어쩌라고. -...어차피 여기서 노을이 보이기는 하냐. 한참 아무 목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잠시 패널을 다시 살펴보았다. 이제 좀 있으면 궤도를 벗어난다. 까딱하면 가장 가까이 있는 행성이나 위성의 중력에 이끌려 추락할 수도 있고, 그 외에도 뭐가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우리, 건너편 우주선에 있는 놈과 나 말고 시도해 본 사람은 없으니까. -그렇지만 둘 중 하나잖아. 한참 복잡하던 차에 조금 가라앉은 목소리가 들렸다. 목소리가 계속 들렸다. -여기서 지구로 추락해서 죽거나, 영영 우주로 가서 죽거나. -......재수없는 소리 하지 마라. 내 목소리가 굉장히 가라앉아 있어서 놀랐다. 패널 너머에서 웃음소리가 들렸다. -심각하기는. 야 괜찮아. 이제- 그리고 목소리가 끊어졌다. 별 일은 아닐 거다. 통신기를 켜 놓고 대답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며, 아까 놈이 말한 지구의 노을을 떠올려 보았다. 마지막으로 생각해 보는 지상의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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