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약을 좀 얻어마셨습니다. 에리 님 리퀘로 쓴 베른TS에바입니다. 레지먼트 쪽이 정리가 잘 돼서 군견조와 스승들이 모두 어느 숲 속 작은 집에서 산다는 설정입니다.
“교과……베른하드, 다녀왔습니다.”
여자치고 낮은 목소리라고 늘 생각하던 목소리이지만, 예상치 못한 상황에서 들으면 누구라도 조금쯤은 놀라기 마련이다. 베른하드는 서류 더미에서 눈을 뗐다.
“일찍 왔구나.”
“아뇨, 커피콩을 갈아주는 데가 없어서 조금 시간이 걸렸습니다. 밀가루랑 버터는 여기 있고요. 아무래도 송아지라도 한 마리 사는 게 좋겠습니다. 우유 값이 너무 올라서 큰일입니다. 그리고 낫 갈아 온 거 여기 있습니다. 대장간에서 험하게 썼다고 나무라더군요.”
보고하듯 설명하며 장 봐온 것을 하나하나 꺼내놓았다. 프리드리히와 아이자크가 밭을 더 개간해야 한다고 숲으로 갔고, 베른하드 자신은 세금 계산을 하느라 서류더미와 씨름을 하고 있어서 에바리스트밖에 장을 봐 올 사람이 없었다. 여자 혼자 낫까지 들고 먼 길 가는 거 아니라고 했지만 에바리스트는 괜찮다고 했다. 여자 혼자 돌아다니는데 누가 자신을 전 레지먼트라고 생각하겠느냐며 웃었다. 계산이 철저한 건지 무모한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아니 아마 둘 다겠지. 에바리스트는 예전부터 은근히 무모한 구석이 있었다. 베른하드가 남은 계산을 살펴보는 동안 에바리스트는 장봐온 것들을 정리하고 있었다. 이제 끝났으니 같이 저녁을 준비하자고 말하려고 고개를 든 베른하드의 눈에, 머리를 묶고 냄비를 들고 있는 에바리스트가 보였다.
“준비는 같이 하지.”
“괜찮습니다. 조금 쉬세요.”
“먼 길 다녀왔잖냐.”
“나이도 있으신 분이 무리하시면 안 됩니다.”
이녀석들은 내가 전에 교관이었다고 사람을 무슨 은퇴한 노인쯤으로 아는 못된 버릇이 있다. 특히 에바리스트는 자신에게 더 깍듯한 만큼 이럴 땐 더 웃겼다.
“어른한테 못 하는 소리가 없다. 일단 앉아.”
“하지만 교관님.”
“또 교관이란다. 앉아.”
베른하드는 에바리스트를 식탁 겸 탁자 앞에 앉히고, 불 위에 주전자를 올리고 커피콩과 주전자, 드리퍼를 찾았다.
“커피는 방금 갈았을 때가 제일 맛있다. 수고했으니 한 잔 마시고 일해.”
“감사합니다.”
물이 끓자 깔대기에 융을 깔고 커피콩을 채워 뜨거운 물을 부었다. 바닥에 갈색 액체가 한 방울씩 떨어지다 점차 가느다란 물줄기가 되었다. 에바리스트가 커피 냄새를 맡고 눈을 가늘게 떴다.
“내려주시는 커피를 마시게 될 줄 몰랐습니다.”
“나도 너희에게 커피를 내려줄 날이 있을 줄 몰랐다.”
그때는 어떻게든 하루하루 살아남느라 벅찼지. 의외로 레지먼트가 사라지고 도망쳐서 살아가는 세월은 생각보다 안온했다. 고통스럽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지만, 아이들과 형제와 밭을 일구며 사는 것이 즐거웠다. 프리드리히는 심지어 애 키우는 기분이라며 키들키들 웃다 자기 말에 자기가 상처를 입었다며 우는 시늉을 하기도 했다. 꿈같은 기분이 들었지만 의외로 이게 꿈이 아니라는 점이 또 무섭기도 했다.
“다 됐다. 마시고, 밥 짓자. 콩 아직 남아있지?”
“네, 교……아니 베른하드.”
둘은 희미하게 웃고 거의 동시에 잔을 들었다. 그때 문이 벌컥 열렸다.
“교관님 치사하십니다!”
아이자크였다. 그 뒤를 프리드리히가 키득거리며 따라오고 있었다. 에바리스트와 달리 아이자크는 아주 빨리 자신과 쌍둥이를 베른하드, 프리드리히라고 부르는 데 적응했다. 하지만 가끔 자신을 교관님이라고 부를 때가 있었다. 에바리스트 일이겠지. 눈빛이 제법 살벌했다.
“치사하긴 뭐가. 씻고 와서 저녁 먹을 준비 해라. 아, 에바리스트는 커피 마저 마시고.”
자기 자신도, 아이에게 이렇게 심술을 부리는 여유가 자신에게 생길 줄 생각도 못 했다. 아이자크는 눈을 빛낸 다음 에바리스트의 손에 있던 잔을 낚아채 단숨에 들이마시고, 뜨겁다며 잠시 바닥을 구르더니 혀라도 데였는지 어눌한 발음으로 잔 비었다, 에바! 가자! 하고는 에바리스트의 손목을 잡고 저녁찬거리를 가지러 다락으로 가는 사다리를 올랐다. 어쩐지 우스워서 견딜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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