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니발 렉터 박사는 예의범절에 무척 민감하고 본인 또한 완벽하게 예의를 실천하기로 정평이 나 있다. 본인이 잘 하는 만큼 남에게도 무척 높은 기준을 적용하고 있다. 하지만 그 높은 기준도 윌 그레이엄에게는 예외인지라, 인사도 없이 대뜸 누구와 키스했다는 난감한 이야기로 말문을 열며 집에 들어오거나, 아침식사 전에 집에 오거나 하는 일도 있었지만 한니발이 그에게 화를 낸 적이 없었다. 언제나 무표정한 얼굴로 단정하게 식기를 내어주고 이야기를 들어주고 상담을 해 주었다. 상담의가 해야 하는 일도 아니고, 할 수 있는 일도 아니다. 하지만 언제나 무표정한 얼굴로 한니발은 윌의 무례를 지적하기는 커녕 오히려 그런 침입을 기꺼워하는 듯 윌을 맞아주었다. 한니발을 아는 어떤 사람에게 말해도 믿기 어렵다고 할 만한 광경이었다. 물론 한니발의 설명은 달랐다. 윌은 무척 특이한 증상을 가진 환자이고 내담자이기 때문에, 혹은 친구여서라고 답하곤 했다. 어느 쪽이어도 믿기 어려운 풍경이기는 했다.
윌은 땀에 젖은 앞머리에 단추를 하나 덜 채운 셔츠 차림에, 눈을 이리저리 굴리고 입매를 일그러뜨린 얼굴로 나타났다. "꿈을 꿨어요." 막 아침을 차리려던 한니발이, 셔츠 위에 급히 카디건을 걸치고 문을 열어주자 윌은 신에 묻은 흙을 제대로 털지도 않고 현관으로 들어오며 불분명한 발음으로 말했다. "일단 앉아요. 커피에 브랜디를 약간 탈 테니 마시고 이야기할까요? 아침도 먹고요." 윌의 손은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한니발은 자신의 식탁에 윌을 앉혔다. 윤기가 도는 노른자가 터지지 않고 동그랗게 맺힌 계란 프라이며 썰어서 살짝 구운 수제햄이며 버섯과 양파, 양배추에 올리브오일과 식초를 넉넉하게 넣은 샐러드가 제각각 향을 내고 있었지만 윌은 식탁에는 눈길도 제대로 주지 못하고 자신의 손끝만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보기 드물게 기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아침식탁에 무척 드문 진미가 올라오다니. 한니발은 즐거운 마음으로 간 커피콩 위에 물을 부었다.
"...벽을 타고 물이 쏟아지는 겁니다. 흘러내린 시계가 물 위로 번져가고 그 옆으로 시체들이 둥둥 떠 다니는 거예요. 그리고 그 사이에 사슴뿔이 있지요." "늘 이야기하던 그 사슴이군요." "아마도요." 한니발은 수첩을 펴서 전에 윌이 그렸던 시계를 확인했다. 시계판과 시침과 분침과 숫자가 모두 따로 떨어져있는, 꼭 달리의 그림 같던 시계를. 윌의 정신은 녹은 치즈처럼 아래로 떨어져 고이고 있었다. 뇌염의 결과일 것이다. 아직도 윌의 손은 떨리고 있었지만 이제 눈을 불안하게 굴리거나 자신의 손끝만 쳐다보는 일은 없었다. 커피에 탄 브랜디가 제대로 효과를 발휘한 모양이었다. "아직도 세상이 녹고 있나요?" "아뇨. 이제 적어도 물은 없군요." 한니발의 표정에 만족감이라 할 만한 무언가가 스쳐갔다. 윌은 한숨을 쉬며 양손으로 얼굴을 신경질적으로 문질렀다. "분명 병원에서는 아무 이상이 없다고 했어요. 정신질환이에요 이건." "동의합니다." 한니발은 덤덤하게 말했다. "내가 무너지고, 세상이 무너지는 거예요. 모든 것이 녹아서 뒤섞이는 거죠. 액체는 불안정하고, 어떻게 변해가는지도 눈에 보이지요. 저는 점점 미쳐가고 있어요." "윌, 진정해요." 한니발은 윌의 눈을 쳐다보며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이따 잭 크로포드가 사건현장으로 나오라고 했어요. 기디언 박사 건이에요." 윌이 초조한 듯 말했다. "하지만 윌, 정신질환이라면 그렇게 단기간에 효과를 얻지는 못해요." "알아요. 하지만 당신은 제 상담의니까요." 한니발은 미미한 미소를 띠고 윌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덫에 걸린 짐승이란 언제나 참으로 보기에 흡족한 법이다. 하지만 아직은 완전히 걸려든 것이 아니었다. 요리로 치면 재료를 손질도 끝내지 못한 것. 주머니에서 손바닥보다 작은, 천으로 된 지갑같은 것을 꺼내며 한니발은 선언했다. "대체의학의 힘을 빌려봅시다."
"이런 게 효과가 있다고요?" "동아시아에서는 오랫동안 효과가 있었던 치료법이에요. 주로 내과수술에 해당하는 분야에 쓰이지만, 골절이나 정신적인 문제에도 쓰였다고 하지요." 한니발은 바늘만한 침을 꺼내 소독하고 있었다. 윌은 무척 불안한 얼굴로 침을 보고 있었다. "아프지 않을 겁니다. 걱정되나요?" "아니에요. 그런 거 아닙니다. 그냥..." "우리 서양인들에게 동양의 대체의학은 신비의 대상이기 마련이죠. 하지만 윌, 신비는 없다는 걸 당신이 제일 잘 알잖아요." 한니발은 소독액에 잠시 침을 담가놓고, 주머니에서 펜을 꺼내 윌의 얼굴에 갖다댔다. "내 전공이 아니라, 위치를 정확하게 표시하지 않으면 어려워요." 미간과 눈 아래, 콧날과 인중, 턱과 입술에 펜으로 점을 여러번 찍었다. 펜이 다가가자 윌이 어깨를 살짝 움츠리며 눈을 감았다. 펜을 타고 윌의 호흡과 긴장이 손으로 전해졌다. 눈 아래를 찌를 땐 눈을 깜박였고 인중을 찌를 땐 숨을 잠시 멈추었다 펜이 떨어질 때 다시 내쉬었다. 마치 칼로 배나 머리를 가를 때 느끼는 감각과 같아 한니발은 한숨을 쉬었다. 이 얼마나 맛있는 사람인지. "박사님?" "아, 자신이 없는 분야라 조금 긴장했어요. 괜찮습니다." "박사님도 긴장을 다 하나요." "당연하죠. 저도 사람이니까요. 마음에 드는 사람 앞에서는 긴장도 하고, 처음 해 보는 것은 두렵지요." 윌이 조금 긴장이 풀린 얼굴로 미소를 지었다. 한니발은 침을 꺼내 표시해둔 위치에 조심스럽게 갖다댔다. 미간에 침을 찔러넣자 윌이 인상을 찌푸렸다. "신경을 자극하는 건가요?" "쉿. 말하면 안 됩니다. 안면근육을 쓰면 안 돼요." 윌은 눈을 감고, 무표정한 얼굴로 한니발에게 몸을 맡기고 있었다. 뒷머리를 잡고 얼굴을 가까이 가져가도 가만히 있었다. 야생동물이 습격하는데 가만히 서 있는 사슴은, 무척 진귀한 볼거리이자, 야생동물의 입장에서도 희한한 기분일 것이다. 목을 물어뜯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고 코에 침을 꽂은 다음, 굳이 필요가 없는 입술에 침을 가져다댄 것은 분명 식욕에서 기인한 것이었다. 포식자로서의 본성. 그러나 손가락으로 턱을 쥐고 입술을 쓸어내리는 동작은, 굳이 말하자면 키스, 여러 가지 의미를 가진 성적 접촉과 유사할 것이다. 침 사이로 전해지는 따스한 호흡과, 손가락 아래로 전해지는 입술의 온기까지. 한니발은 손 아래 눌린 보드라운 입술과 이의 촉감에서 일종의 환희, 혹은 고양감을 느꼈다.
시선이 따가워 고개를 드니 기묘한 표정을 한 윌과 눈이 마주쳤다. 한니발은 약간 차갑기까지 한 정중한 어조로 설명했다.
"이 부위는 침을 놓기 어렵죠. 아프지는 않나요? 눈을 깜박여서 대답하면 됩니다. Yes는 한 번, No는 두 번." 윌은 무척 분명하게 한 번 눈을 깜박이고는 인상을 찌푸렸다. 한니발은 신사답게 손을 떼고 침을 마저 놓았다.
"마치 제가 사슴이 된 기분인데요."
"농담을 할 여유가 생긴 걸 보니 좋군요."
머리 양쪽에 철로 된 가느다란 뿔을 단 사슴이 한니발을 보고 애매하게 웃고 있었다.
"웃는 얼굴 같아요."
"그래요?"
"자, 더 말하면 침이 빠질 거고...다 됐습니다. 이따 침을 뽑죠. 그동안 음악이라도 들으시겠습니까."
한니발은 제 취향대로 성형해 놓은 사슴이 아무 것도 하지 못하고 제 식탁에 앉아있는 것을 보고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훌륭한 진수성찬이 될 예감이 들었다.
덧 : 윌은 한참 후에 정신이 조금 맑아진 느낌이라면서 잭의 호출을 따라 현장으로 갔다. 그리고 사건이 벌어진다. 윌은 기디언을 쏘고 말았다. 열로 어지러운 머리로. 사실은 기디언을 알아보지 못한 것은, 한니발의 유도이기도 하다. 갑자기 왜 고열이 발생했는지 누구도 알 수 없으리라. 하지만 윌이 무엇을 할지 무엇을 데리고 올지까지 예상하지는 못했으리라. 모든 것은 그렇게 시작한다. 그들은 아무것도 몰랐지만, 이 침으로 둘의 사이에 아주 희미한 균열이 생겨났다. 균열에서 새로운 것이 싹트기도 하는 법이고, 아주 무너져 없어지기도 하는 법이지만 두 사람 다 거기까지는 생각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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