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푼젤, 라푼젤!

2012년 8월 12일에 썼던 글입니다. 예전 블로그에서 백업했습니다.

마녀는 매우 화가 났다. 외출하러 나가다 집에 새로 만든 시약을 놔두고 온 게 생각나서 다시 와 보니 공들여 키운 양상추밭에서 누가 양상추를 뽑다 마녀와 눈이 마주쳤다. 물론, 뽑아가도 좋다고 한 적이 없고 뽑아가라고 말한 적도 없다. 도둑임이 틀림없다. 마녀는 당장 도둑을 잡아다 꽁꽁 묶었다. 뒤집어쓴 스타킹을 벗기고 보니 양상추밭을 털러 온 도둑은 몇 번 마주친 적이 있는 이웃집 남자였다. 이사오던 첫날부터 들으라는 듯 여자 혼자 사나보다, 불쌍하다고 아내와 수군대던 것이 기억났다. 그 후로도 혼자 장을 보러 갈 때나 밭일을 할 때, 무거운 냄비를 들고 갈 때 담장 밖에서 이쪽을 보며 자기는 내가 집안일을 도와주니 다행인줄 알라 운운하는 소리를 하곤 했다. 지난 악감정이 동시에 몰려오는 것을 느끼며 마녀는 심호흡을 했다.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지. 자 일단 진정하고 공정하게 대하자.
도둑을 묶어놓고 밭을 살펴보니 완전히 엉망이 되어 있었다. 훔쳐가려면 곱게나 훔쳐갈 일이지 아직 싹이 나지 않은 양상추를 밟아서 뭉개놓질 않나, 양상추밭에 들어온다고 밭둑에 심어놓은 콩을 죄다 밟아놓질 않나. 게다가 뽑아든 건 고작 세 포기밖에 안 되는데 온 밭을 다 헤집어놓아서 나머지도 먹지 못하게 되었다. 몇 개는 뽑다 말아서 뿌리가 다 드러나있었고, 몇 개는 잎이 다 찢어져 있었다.
마녀는 날카로운 눈으로 도둑을 노려보았다. 좀 주눅이 든 표정으로, 그렇지만 은근히 뻔뻔해 보이는 얼굴로 이쪽 눈치를 보는 남자에게 마녀는 물었다.
"달라고 하실 일이지, 왜 훔치고 그러세요?"
"마누라가 임신해서 입덧이 심한데 양상추만 먹으면 괜찮다고 해서..."
남자는 겸연쩍지만 당당한 말투로 대답했고, 마녀는 어이가 없어 언성을 높였다.
"그으러니까아, 그걸 왜 훔치냐고요. 임산부가 입맛이 없다는 데 그 정도야 당연히 나눠주죠."
남자가 뻔뻔한 얼굴로 대답했다.
"아니 저도 그러려고 했는데, 생각해보니까 말이죠, 임신도 안 해 보시고 결혼도 안 해 보신 분이 임산부한테 채소를 나눠달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 잘 모르실 거 같아서요. 결혼을 해 보셨으면 당연히 부탁했겠지만, 아니잖아요."
마녀는 잠시 할 말을 잃고 남자를 쳐다보았다. 마녀의 표정을 긍정으로 해석했는지 남자는 신이 나 목소리를 높이고 떠들어댔다.
"사실 결혼도 안 해서 책임질 게 아무 것도 없는 마녀님 같은 분들이야 임신도 결혼도 모르니까, 뭐 이런 걸 가지고 도둑질을 하냐고 생각하시겠지만 이게 보통 일이 아니거든요. 입덧이 얼마나 무서운 건지 안 보셨죠? 그리고 임신한 여자는 예쁜 걸 먹어야 된대요. 그래야 예쁜 애가 나온다고 하더라고요. 근데 아무거나 막 따서 주시면 안 되잖아요. 그래서 골라가려고요. 절 닮았으니 당연히 예쁘겠지만, 어 왜 그런 눈으로 보세요. 제 애니까 당연히 절 닮죠. 그럼 누굴 닮아요? 아무튼 제 새끼 먹이는 건데 뭐 어때요. 그리고 마누라 도와주려고 한 거니까 괜찮죠? 마녀라도 그 정도는 이해할 수 있죠?"
마녀는 조용히, 더 먹을 수 없게 뭉개진 양상추 하나를 집어들어 남자의 입에 처박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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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3일 트위터에 올렸음. 토끼 님과 대화하던 중 떠오른 아이디어. 토끼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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