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닥터이도]뿌리 깊은 타디스 1

<뿌리깊은 나무>의 이도와 <닥터후>의 닥터입니다. 데이빗 테넌트 닥터 기준입니다.

 

 

"흠경각 앞에 웬 목함이 떨어졌사온데 크기가 크고 모양이 기괴하옵니다!"
인시(寅時)도 어느덧 지나 묘시(卯時)에 이를 시간이었다. 상참이 끝나 조정신료들이 모두 물러가려는 찰나, 늙은 겸사복이 달려왔다.
"목함?"

왕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높이가 일곱 자이옵고 너비가 석 자이옵니다. 색은 파랗고 문이 있사옵니다."
"뭐라. 어디서 떨어졌느냐."
"하늘이옵니다."

신료들이 웅성대기 시작했다. 궐 안에 수상한 물건이 떨어지다니 이것은 나라의 안위와 직결된 문제 아니오, 허나 그렇게 큰 목함이 어디서 떨어진다는 말인가, 근보 자네 이상한 생각 말게, 인수 자네는 내가 뭘 어쩐다고. 왕이 목소리를 내자 신하들이 입을 다물었다.
"흠경각에 떨어졌으면 다치거나 상한 자가 있느냐. 목함이 깨졌으니 파편이 튀었을 터. 건물이나 구조물이 상했으면 고하라."
"그것이, 목함이 멀쩡합니다. 이상한 소리를 내며 나타났는데 깨진 곳 하나 없습니다."
일순 정적이 흘렀다. 겸사복은 당황한 얼굴로 고개를 조아리고 벌벌 떨고 있었다.
"무슨 소리냐."

늙은 겸사복의 주름진 얼굴에 땀이 맺혔다.

"다친 자도, 깨진 것도 하나도 없사옵니다."

"뭐라?"

"그리고 목함 안에서, 그것이, 전하, 차마 소인은 고하기 어렵사옵니다."

겸사복은 이제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왕이 얼굴을 찌푸리고 겸사복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때 포교가 달려왔다.
"황공하옵니다! 궐 안에 수상한 자가 침입했사옵니다!"
왕의 얼굴이 굳었다. 당시 수찬 벼슬을 하던 근보 성삼문은 생각했다. 이거 엄청나게 재미있는 일이 터지겠구나, 하고. 히죽히죽 웃기라도 했는지 갑자기 옆구리가 아팠다. 옆을 보니 인수 박팽년이 자신을 근엄한 얼굴로 노려보고 있었다. 뭐 어때, 재미있어 보이는데. 고개를 으쓱하자 재차 옆구리에 주먹이 박혔다. 먼 곳에서 조 대감이 자신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삼문은 생긋 웃었다. 에이 뭐 이런 걸 갖고. 전하께서 더 재미있어 하실 것입니다.

 

내금위장은 파란 옷을 입은 이상한 자를 노려보았다. 짧은 갈색머리에 아무 것도 쓰지 않았고 바지는 통이 좁았으며 웃옷은 깊이 파였고, 목에 파란 띠를 묶고 있었다. 코가 높고 눈이 우묵히 들어갔으며 눈색이 파랬다. 궁에는 색목인을 처음 보는 사람들도 많아 궁녀들이 문 뒤에서 놀라 얼어붙어 있었다. 더구나 목함을 열고 사람이 나왔다. 그자는 무기를 든 사람들을 보고도 태연하게 두 손을 머리위에 올리고 버티고 서 있었다. 담력이 보통이 아니다.
"닥터, 그래요, 여기 말로 박사입니다."

"무슨 박사냐. 왜 여기에 있는 것이냐."

"그냥 박사고 여기에는 왔으니까요."

"무례하다!"

내금위장의 일갈에도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그자는 그냥 주위를 둘러보며 신기한 표정만 짓고 있었다.
"수상하다. 의관도 갖춰입지 않고, 머리도 맨머리이니 상것들도 그렇게 다니지는 않는데, 어찌 궐 안에 이리 무례한 자가 들어오는가. 호패도 없는 자가 어찌 박사라 하는가. 궁에 색목인 박사가 없는데 누구냐?"

재차 닥달해 보았으나 그자는 웃기만 했다. 표정이 굉장히 풍부한 것이 아주 경박해 보였다.
"방금 봤잖아요. 아, 모자. 그렇지. 동아시아에는 맨머리를 드러내지 않는 풍습이 있었지. 미안해요. 타디스 안에 가면 많아요."
"타디스?"
"저기 저거요."
"목함의 이름이 괴이하다. 오랑캐냐?"
"아니, 그냥 내가 타고 다닌단 말입니다."
내금위장 무휼은 머리를 감싸쥐었다. 갑자기 흠경각 앞에 떨어진 목함만 해도 기괴한데, 그 안에서 나온 인간은 상식을 아득히 뛰어넘는 괴이한 존재였다. 그냥 정신이 나간 자라고 해도 궁 안에 그런 것을 들일 수는 없는 일이었다. 대체 어디로 어떻게 들어온 것인가. 다른 곳이라고 해도 큰일날 판이다. 하지만 여기는 흠경각이다. 침전 안쪽에 있는 은밀한 곳이다. 게다가, 무휼이 세상에서 제일로 섬기는 전하께서 중히 여기시는 곳이다. 앙부일구며 간의가 있는 곳이다. 또, 전하께서 은밀히 함원전에 집현전 학사 몇 명을 들이는 곳이기도 하다. 여기에 침입자가 들어왔다는 것은, 그 계획에 차질이 생겼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 자를 끌고 가 입을 열게 해야 할 것인가. 무휼은 언성을 높였다.
"여기가 어디인지 아느냐! 조선의 궁궐이다. 전하께서 계신 곳이니라!"
"저 분요?"
내금위장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그 자가 가리킨 곳에 왕이 서 있었다.
"저 자가 목함 속에서 나온 자이냐. 우리 말을 잘 하는구나."
"국왕이십니까?"
색목인은 허리를 굽혔다. 예를 표하는 것 같았으나 절을 하거나 무릎을 꿇지 않았다. 시립한 내관과 궁녀들이 모두 황망해 하였고 무휼도 어이가 없어 그저 그 자를 노려보았으나 왕은 개의치 않았다.
"그래. 과인이 조선의 왕이다. 너는 누구냐?"
"나, 아니지. 저는 박사입니다. 이름은 없사옵고 그저 박사라 칭합니다."
"저 무엄한 놈!"
무휼이 언성을 높였으나 왕은 그저 그 자를 올려보고 있었다. 키가 육척을 넘길 듯, 꽤 컸다. 체구는 여위었으나 만만히 볼 자는 아닌성 싶었다. 사선을 넘나들며 살았던 무휼은 그 자에게서 위협감을 느꼈다. 그런 느낌을 받지 못했을 리 없는데, 왕은 태연히 그 자에게 물었다.
"남들이 그리 부르느냐?"
"아니오. 제가 저를 박사라 칭하옵기에 남들도 그런 줄 알고 박사,박사 합니다. 그런데 여기는 언제인지요?"
여기는 언제? 말이 어딘가 이상했다. 왕도 그 말에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나 그 자의 얼굴을 보더니 한숨을 쉬며 그냥 답해주었다.
"정통 13년이다."
갑자기 그 자가 환호하며 방정맞게 빙글빙글 돌며 혼자 빠른 속도로 말했다.
"그래, 그래, 여기는 조선이었어! 저이가 세종 이도군. 장헌대왕이야! 아니아니아니 아니지, 여기서 이 말을 하면 안 되지. 저건 저 자의 미래의 이름이니 안 돼. 여기서는 그냥 왕으로 불리겠지. 법률 전문가이며 법의학 전문가, 인쇄에도 고명한 왕이자 조선 최고의 학자이지. 당대 아시아에서 당할 자 없는 언어학자, 아 그래! 그거야! 왕의 최대 업적이지! 그걸 만들었어! 생각났다. 생각났어! 그래, 그거야! 정통 13년! 바로 코 앞이군! 몇 년 뒤면 그게 온 나라에 퍼지겠지!"
그때까지 태연하던 왕의 얼굴이 갑자기 일그러졌다. 무휼은 어의를 짐작했다. 그것이다. 저 자는 그것을 알고 있다.
"무엄한 놈! 그 입을 찢어버리기 전에 입을 다물어라. 지존이시니라. 어찌 너 따위가 감히!"
무휼이 칼을 뽑아들었다. 창백한 얼굴로 그 자의 망령된 언동을 쳐다보던 왕이 손을 들어 무휼을 막았다.
"전하!"
"이자를 만춘전으로 데려오라! 내 이 자와 논할 것이 있느니."
"하오나 전하, 수상한 자이옵니다."
"색목인이 수상한가. 원에는 색목인이 많았다. 고려에도 사신으로 왔지."

왕은 의외로 태연했다. 자신의 계획을 아는 색목인이라는 점이 마음에 걸려 보였지만, 그자에게 듣고 싶은 것이 많은 듯했다. 하지만 무휼이 보기에는 그냥 수상한 자에다, 위험한 자이기까지했다.
"그 뿐이 아니옵니다. 전하, 이 자는 알고 있사옵니다."
"내금위장, 직접 지키라. 그러면 되겠는가?"
"송구하옵니다."
왕은 먼저 걸음을 옮겼고, 그 뒤를 따라 성큼성큼 걸어가려는 그 자를 무휼이 불러세웠다.
"손을 묶겠다. 허튼 생각을 하면 목을 벨 것이다."
"오. 목을 벤다는 말도 오랜만이군. 좋아요. 자, 묶어요."
그자는 손을 내밀고 생글생글 웃었다. 손을 묶는 동안 그 자의 웃옷 틈에서 금속으로 된 봉 같은 것을 본 것 같았다. 무기는 아닌 듯 싶어 그냥 두었다.

 

 

흠경각에 목함이 있었다. 목함의 주인이 박사였는데 주상께서 박사를 벌하지 않고 만춘전에 불러 하문하셨다. 오랜 시간 이야기를 나누었다.
-조선왕조실록, 세종 24년 3월 23일(144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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