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니발]죽은 순교자를 위한 제의
- 쓰고 만든 것/그 외
- 2014. 3. 9. 1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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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쓰고 만든 것/그 외
- 2014. 2. 14. 23:56
한니발 추수감사절 합작에 냈던 글입니다.
그리고 한니발로 글 쓰면서 먹방만 하는 거 같아서 엄청 찔리지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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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쓰고 만든 것/그 외
- 2013. 11. 17. 20:59
에클닥이라고 리퀘 받아 썼지만 쓰고 보니 테닥에 가까운 거 같기도 합니다. 몇 달 전에 써놨던 걸 찾아서 좀 정리해서 올려요.
요새 합작이다 뭐다 바빠서 뭘 쓰지를 못 해서 말이죠...
"거기 코쟁이 양반."
항상 서구쪽으로 여행을 다니는 이유가 다 있다. 동양권에 오면 도무지 저 호칭에 적응이 안 된단 말이다. 조선시대에 갔다가 이 오랑캐 어쩌고 하는 수난을 너무 많이 겪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게다가, 이게 문제다. 닥터는 난감한 표정으로 냄비 안을 쳐다보았다. 얼핏 맡기에도 끔찍하게 매운 냄새가 나는 국물 안에 둥둥 떠 있는 빨판 붙은 촉수가 아직도 꿈틀거리고 있었다.
"아 거 코쟁이 양반, 해물탕 어떻냐니까?"
"네?"
"오늘 낙지가 물이 좋았지. 잡은 김에 먹자고. 그러고 바다만 보고 있지 말고 좀 드슈. 맛이 기막혀."
"네? 네...잘 먹겠습니다, 잘."
하필 고깃배를 얻어타 본 게 화근이었다. 뻘에 처음 와 본 로즈가 뭍에서 아줌마들이랑 게 잡고 조개 잡으면서 즐거워하는 동안 남자는 뱃일을 하는 거라고 그래서 고깃배를 타 봤다. 뭐 힘닿는 대로 그물도 당겨 보고 걸린 고기도 큰 상자에 잘 챙겨담아놨다. 나름 일을 도와주고 멍한 기분으로 바다를 보며 지구의 해양생물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 부지런한 어부들이 배 가운데서 이렇게 본격적으로 뭘 조리해 먹을 줄 알았나. 그렇다고 먹지 않을 수도 없었다. 악마의 국물이 버너 위에서 끓고 있었고, 자신의 앞에도 그 국물이 한 그릇 놓였다.
"아까 그물 당길 때 보니까 영 힘을 못 쓰더만. 키만 멀대같이 크면 뭐 하나. 잘 먹어야 힘을 쓰지. 거 양놈들은 노상 빵 같은 거나 먹고 사니까 그런 거 아냐. 그거 먹고 힘을 쓰나? 사람은 밥심이지."
아뇨, 음식문화는 각 문화권에 따라 특수하게 발달하는 법이...지만 이 단순하고 우락부락한 뱃사람들 앞에서 그런 말은 별로 좋은 선택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입을 다물었다. 그릇 안에는 촉수, 아니 낙지가 들어 있었고 조개며 매운 국물이 가득했다. 어디서 챙겨놨는지 깻잎이며 파도 들어 있었다. 깻잎 특유의 매운 향기가 훅 끼치는 순간, 닥터는 콱 배에서 내려 바다를 건너가 버릴까 하는 생각도 했다. 하지만 여행자는 다른 문화에 관대해야 하는 법. 전에는 말머리 성운에서 끓는 자갈이 들어간 국도 먹어 봤고 단추만 넣고 끓인 수프도 먹어봤지. 닥터는 숟가락을 들어 빨판과 파와 국물을 한 숟가락 떴다. 입 안에 들어온 순간, 코로 뜨거운 불을 뿜는 용의 메커니즘을 온 몸으로 배운 기분이 들었다.
"이 양반 이거이거, 양놈 답잖게 참 잘 자시네! 상남자네! 거 더 드슈. 사양하지 말고 많이 먹어요. 아 이거 낙지도 좀 드시고."
뱃사람들은 호탕하게 웃으며 그를 칭찬했다. 문화적 편견이 겹겹이 깔린 칭찬의 어느 포인트에 기뻐해야 할지 모르겠다. 닥터는 애매하게 웃으며 촉수를 입에 넣고 씹었다. 어찌나 질긴지 씹히지도 않았다. 정말 촉수 같네...아니, 거 먹어보면 먹을 만 한 걸 누가 몰라요. 하지만 난 이렇게 생긴 놈을 수백 수천 명을 안다고. 걔네랑 싸웠다니까? 댁들 같으면 이런 걸 먹고 싶겠냐고. 마음 속으로만 비명을 지르고 있는 동안 뱃사람들은 뭘 하는지 시커멓고 콧물 같은 것을 썰어서 자신의 앞에 내밀고 있었다.
"이거 뭡니까?"
"어이쿠 그거 해삼이구먼, 몸에 좋아. 남자한테 참 좋은데 거, 흐흐흐, 설명할 길이 없네. 일단 좀 잡숴 보지?"
손님, 그것도 코쟁이 손님(!)을 대접하느라 자기들이 먹지 않고 참는다는 티를 팍팍 내고 있었다. 눈에서 먹고 싶다는 욕망이 흘러나오는데 안 먹고 사양했다간 산 채로 바다에 던져지겠다. 닥터 인생에서 이런 재생성은 좀 부끄럽지. 숟가락 위에 놓인 시커먼 덩어리를 한참 쳐다보던 닥터는 태연한 얼굴로 해삼을 입 안에 넣었다. 입 안에 물컹하고 비린 덩어리가 가득찼다.
도래하는 폭풍, 달렉의 학살자, 마지막 남은 타임로드, 지금까지 자신의 앞에 붙었던 그 숱하고 화려한 수식어들 위에 닥터는 한 줄을 더 기록했다. 해삼을 태연하게 먹어치운 자다, 달렉이건 사이버맨이건 덤벼 보라지. 아 로즈 엄마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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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니발]살인마와 수사관
- 쓰고 만든 것/그 외
- 2013. 9. 29. 01:55
발단은 이 시입니다.
1
301호에 사는 여자. 그녀는 요리사다. 아침마다 그녀의 주방은 슈퍼마켓에서 배달된 과일과 채소 또는 육류와 생선으로 가득 찬다. 그녀는 그것들을 굽거나 삶는다. 그녀는 외롭고, 포만한 위장만이 그녀의 외로움을 잠시 잠시 잊게 해준다. 하므로 그녀는 쉬지 않고 요리를 하거나 쉴 새 없이 먹어대는데, 보통은 그 두 가지를 한꺼번에 한다. 오늘은 무슨 요리를 해먹을까? 그녀의 책장은 각종 요리사전으로 가득하고, 외로움은 늘 새로운 요리를 탐닉하게 한다. 언제나 그녀의 주방은 뭉실뭉실 연기를 내뿜고, 그녀는 방금 자신이 실험한 요리에다 멋진 이름을 지어 붙인다. 그리고 그것을 쟁반에 덜어 302호의 여자에게 끊임없이 갖다 준다.
2
302호에 사는 여자. 그녀는 단식가다. 그녀는 방금 301호가 건네준 음식을 비닐봉지에 싸서 버리거나 냉장고 속에서 딱딱하게 굳도록 버려둔다. 그녀는 조금이라도 먹지 않기 위해 노력한다. 그녀는 외롭고, 숨이 끊어질 듯한 허기만이 그녀의 외로움을 약간 상쇄시켜주는 것 같다. 어떡하면 한 모금의 물마저 단식할 수 있을까? 그녀의 서가는 단식에 대한 연구서와 체험기로 가득하고, 그녀는 방바닥에 탈진한 채 드러누워 자신의 외로움에 대하여 쓰기를 즐긴다. 흔히 그녀는 단식과 저술을 한꺼번에 하며, 한 번도 채택되지 않을 원고들을 끊임없이 문예지와 신문에 투고한다.
3
어느 날, 세상 요리를 모두 맛본 301호의 외로움은 인육에게까지 미친다. 그래서 바싹 마른 302호를 잡아 스플레를 해먹는다. 물론 외로움에 지친 302호는 쾌히 301호의 재료가 된다. 그래서 두 사람의 외로움이 모두 끝난 것일까? 아직도 301호는 외롭다. 그러므로 301호의 피와 살이 된 302호도 여전히 외롭다.
장정일, '요리사와 단식가', "길안에서의 택시잡기"에 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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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요즘 한니발을 파니 식인이야말로 참 좋은 소재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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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니발]동묘앞 미국도사2
- 쓰고 만든 것/그 외
- 2013. 9. 20. 11:09
일단은 여기까지. 아래는 추석에 트위터에 슥슥 날려쓴 외전입니다.
그래요 솔직히 말해서 이거 쓸 때까지는 이야기 전개가 이렇게 될 줄 생각도 못 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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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니발]심장의 행방
- 쓰고 만든 것/그 외
- 2013. 9. 8. 22:57
윌은 식탁을 보고 경악했다. 붉은 심장이 접시 가에 얹혀있었다. 붉은 액체가 접시에 퍼지고 있었다.심장을 식탁에 올리기도 하나? 닥터 한니발 렉터의 식탁은 독특한 격조가 있다고 정평이 나 있다. 하지만 이게 왜. 크기와 모양이 사람의 그것과 유사했다. 윌은 놀란 눈으로 식탁 너머에, 접시를 들고 서 있는 집주인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늦었군요."
태연하게 음식이 담긴 접시를 내려놓은 렉터 박사가 인사를 건넸다.
"뭐죠?"
"아, 심장 모양 과자 말이군요. 식탁 장식을 하려고 만들었습니다."
"만들었다고요?"
"비스켓입니다. 피는 라즈베리와 딸기를 기본으로 했죠."
이게 무슨 악취미야.
"오늘은 심장, 이 일종의 키워드죠. 소의 심장과 혀로 만든 요리에 앞서, 심장을 재현해 봤습니다."
윌의 앞에 도톰하게 썬 무화과 위에 블루치즈와 푸아그라를 얹고 꿀과 루꼴라를 얹은 카나페 접시가 놓였다. 배는 고팠지만 심장 옆에 있는 둥근 무화과를 보고 있자니 식욕이 없어졌다.
"왜 하필 심장이죠?"
"다음부터는 늦기 전에 미리 말을 해 주세요. 요리 준비에 차질이 생깁니다."
"아, 미안합니다."
박사는 윌의 질문에 답하기 전에 시간에 늦은 무례를 먼저 지적했고 윌은 사과했다. 다시 물어보려고 했지만 말 없이 포크로 무화과를 찍고 있었다. 윌은 한숨을 쉬고 나이프를 댔다. 밤꿀인지 색이 짙은 꿀 사이에서 무화과의 붉은 속이 핏빛으로 보였다.
식사는 무미건조했다. 음식은 맛있었지만 박사와 윌 사이에 살가운 대화는 별로 오고 가지 않았다. 윌이 할 수 있는 이야기는 일 이야기 뿐이었지만 오늘 본 시체에 대해 밥을 먹으며 이야기하는 것은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애비게일의 안부에 대한 의례적인 이야기, 알라나 블룸에 대한 이야기, 키우는 개에 대한 이야기를 단편적으로 늘어놓은 것이 전부였다. 한니발은 접시를 나르고 식사준비를 하느라 자주 일어서곤 했고 윌에게는 오히려 그게 다행이었다.
그날의 메인디시는 소의 심장을 썰어 구워 허브와 레몬으로 맛을 낸 소스를 얹은 것이었다. 육즙이 빠져나가지 않게 살짝 구운 소 심장은 겉으로 봤을 때는 일반적인 고기와 별 차이가 없었다.
"그냥 고기 같네요."
"심장이라고 해서 다들 오해하지만, 내장도 고기입니다. 게다가 심장은 지방질이 없는 근육이라 맛이 특별하지요."
"그런데 음식이, 음 꼭 무슨 주제가 있는 것 같아요."
"요리란 원래 영감이 있어야 하는 거니까요. 오늘은, 그렇군요. 내담자에게 들은 이야기입니다. 아, 허락을 구했다는 건 아시겠지요. 어렸을 때 염통 모양 과자라는 글귀를 책에서 봤답니다. 외국 동화책을 그 나라 말로 번역한 것이었는데, 도무지 무슨 말인지 알 수 없었다는군요. 자라서 미국에 온 다음, 그 책을 다시 봤더니 하트 모양 쿠키였다는군요."
윌은 어느 타이밍에서 웃어야 할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박사를 쳐다보았다.
"말하자면 이건 heart군요."
"그렇죠."
"보통 하트라면 구애의 의미라고 하는데. 박사님이, 어, 아마 그럴 리는 없죠."
윌은 당황한 표정이었다. 얼마 전에 알라나와 키스했다는 말을 할 때에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박사는 냉담한 얼굴로 윌을 쳐다보았다.
"그렇습니다. 저도 절대로 그런 뜻으로 이 자리를 준비한 것은 아닙니다."
안심한 듯한 윌이 나이프로 심장을 한 조각 잘라 입에 넣었다. 그것을 확인한 박사는 음식을 마저 먹기 시작했다. 심장은 의외로 맛있었다. 적당히 부드러웠고 비린 맛이 많이 나지도 않았다. 하지만 뭔가 독특한 풍미가 있었고, 설명하기 어려운 기묘한 맛이 났다. 식사가 다 끝나갈 무렵까지 식탁은 조용했고 윌은 심장에 집중했다. 이윽고 접시를 다 비워갈 때 박사가 입을 열었다.
"하트에는 알다시피, 핵심이나 본질이라는 뜻이 있지요."
지나가듯 한 말에 윌이 멈칫했다. 그러나 박사는 포크와 나이프를 내려놓은 다음 냅킨으로 입을 닦고 주방으로 갔다.
"와인과 치즈를 내 오지요."
식사가 다 끝나도록 심장으로 점철된 그 식탁을 이해할 길이 없었다. 아마 박사의 말 가운데 힌트가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식사는 평온했으므로 윌은 그냥 마음 편하게 생각하기로 했다. 박사는 원래 이런 사람이니까. 오늘 본 시신에는 심장이 없었다는 것은 나중에 생각이 났지만 그 점과 오늘 식사를 연결시키기에는 윌은 너무나 선량한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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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동화책은 옛날에 번역된 말괄량이 삐삐라고 합니다. 염통 모양 과자라니 대단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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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쓰고 만든 것/그 외
- 2013. 9. 8. 22:45
만춘전은 시립하고 선 궁녀들과 문을 지키고 선 내관들과 별감들로 가득했다. 전에 없이 시위가 늘어난 것을 보고 신료들 몇이 궁금한 표정을 짓기도 하였으나 얼마 안 가 전각 안에는 왕과 내금위장, 그리고 색목인 셋만이 남았다. 궁녀들도 내관들도 긴장한 기색이었으나 그것을 입밖에 내지는 않았다. 지밀상궁은 오늘 본 것에 대해 아랫것들에게 입단속을 단단히 시켜야겠다고 결심하는 한편, 무슨 일이 있으면 달려가기 위한 차비를 마쳤다. 무휼이 검을 뽑을 듯 움켜쥐고 서서 흉흉한 눈빛을 뿌리는 동안 왕은 흥미로운 표정을 짓고 옥좌에 앉아 박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박사라.”
“그렇습니다.”
색목인 박사는 전각에 들어오자마자 복도며 기둥을 보며 예쁜 것을 보는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지엄한 곳에 들어왔다고 생각하여 행동을 조심하는 것이 아니라 매우 진귀한 것을 보는 표정이었다. 경박하기로 이름난 이들도 궁에서는 달라지거늘 어찌. 무휼은 혀를 찼다. 그러나 색목인은 눈을 이리저리 굴리며 호기심에 찬 눈길을 주고 있었다.
“지엄하신 분의 얼굴을 함부로 올려다보지 말라는 법도도 모르나?”
“아하.”
색목인은 아차 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왕은 태연한 얼굴이었다.
“그냥 두어라. 모르는 것이 죄는 아니지 않느냐.”
“하오나 전하. 이자의 경망스러움이 도를 넘었습니다. 이는 전하를 능멸하는 것이라 여기옵니다.”
“과인이 능멸당했다 느꼈으면 알아서 이자를 벌하라 네게 명했을 것이다.”
무휼은 이를 갈았다. 하지만 주상의 말이 맞다. 판단은 주상이 하고 자신은 주상의 명을 받드는 신하일 뿐이다. 고개를 숙이고 한 발 물러가기를 기다려, 왕이 박사에게 질문했다.
“내 너와 같은 박사를 내 궁에 들인 적도 없고 너에게 박사라 한 적도 없거늘 어찌 박사라 하는가?”
“이 넓고 긴 천하에 저를 박사라 처음 칭한 이가 어찌 주상 뿐이오리까.”
“그러면 너는 누구의 백성이냐? 어디에 사느냐?”
“저는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는 몸이옵고, 누구의 백성도 아니옵니다.”
박사는 정중하지만 단호하게 자신의 신상에 대해 말했다. 왕은 폭소했다.
“그놈 참, 기백이 대단하구나. 좋다. 그럼 몇 가지 물어보자.”
“하문하시지요.”
“너는 내년에 무엇이 일어날지를 아느냐?”
“미래를 아는 자는 없습니다.”
박사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그러면 어찌 정통 13년이라 하는가?”
“제가 본 것을 말씀드린 것 뿐이옵니다. 저는 여행자입니다.”
“어디를 여행하였나?”
“수많은 곳과 수많은 시간을 여행하였습니다.”
왕이 눈을 빛냈다.
“시간을 여행하였다?”
“그렇습니다.”
“어허, 이놈이 정녕 미친 게로구나!”
“무휼, 자네 가만히 있어보게. 어디 이야기를 해 보라.”
“전하!”
“어명이다.”
왕의 얼굴에 미소가 걷혔다. 무휼은 저 표정을 알고 있었다. 아주 오래 전에 마방진을 풀 때 꼭 저런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오랫동안 왕으로 있으며 저런 표정을 지은 적이 없었다. 무휼은 색목인의 뒤에 시립하고 섰다. 여차할 경우 놈을 베고 왕을 지키기 위해서. 왕은 보지 못했지만 그는 보았다. 색목인이 품 안에 넣어 둔 봉에서 푸른 빛이 났다. 옷 안에 손을 넣어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흥미가 있으십니까?”
“당연하지 않겠느냐.”
박사는 미묘한 표정으로 왕을 쳐다보았다.
“저는 왜 이리로 부르셨어요?”
“네가 본 것을 말해보라고 불렀다, 이렇게 말하면 어찌하겠느냐?”
“음, 제가 아는 건 지금 하고 있는 일 말이에요, 그거. 그거 아주 멋져요. 대단하다고요. 그것밖에 말하지 못하겠네요.”
“그래도 말하라 하면?”
“말을 했다 앞일이 바뀔 가능성을 생각해 보십시오.”
왕은 침묵했다.
“네가 미쳤거나 거짓말을 하고 있을 가능성은?”
이번에는 박사가 침묵했다. 그는 용상 옆의 기둥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허, 미쳤거나 거짓말을 할 가능성이라고 했잖느냐.”
“전하, 저 기둥에 혹시 요즘 무슨 일 없어요?”
왕이 한 번 더 침묵했다. 말투가 미묘하게 들뜬 박사가 한 번 더 왕에게 물었다.
“이상한 소리가 들린다거나 말이에요.”
“그걸 어떻게 아느냐?”
“역시. 제가 여기 온 게 이거 때문이었나보네요……좋은 걸 보여드리죠.”
무휼이 칼을 조금 뽑았다. 어전이었지만 이상한 것을 든 자가 있었다. 하지만 왕은 태연하게 그자가 하는 양을 보고 있었다.
“자, 보세요.”
품 안에 있던 것은 금속을 끼워맞추고 긴 구슬을 끼워넣은 것처럼 생겼다. 박사가 무언가를 누르자 파란 빛이 났다. 푸른 빛을 기둥에 휘두르자 깩 하는 비명소리가 들렸다. 섬돌 밑에서 무언가가 기어나왔다. 보통보다 큰 두꺼비였다. 그것은 박사를 보더니 깩깩거리며 무서운 속도로 뛰어갔다. 그러나 박사가 조금 더 빨랐다. 기둥 뒤에서 깩깩거리는 소리와 함께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어디서 두꺼비인 척이야. 지구 생물도 아니면서.”
“너 규정 위반이야.”
“아, 아 이게 물어? 너 해 보자는 거냐!”
박사의 손에는 두꺼비였던 것으로 보이는 뭔가가 들려있었다. 색은 훨씬 꺼멓고 크기는 훨씬 작았다.
“먼 곳에 사는 동물인데 해롭습니다. 아마 여기서 뭔가 먹으려고 했겠죠. 여기서 그러니까, 그걸 만드신 거죠?”
“그렇다.”
“거기서 나오는 아이디어를 먹는 겁니다.”
“지금 헛소리로 주상전하를 희롱하는 게냐!”
무휼이 화를 내자 왕은 손을 들었다. 더 나서지 말라는 뜻이다. 왕이 목소리를 낮추었다.
“삿된 사술이라 생각할 수 있지 않느냐.”
“그건 그렇지요.”
“내가 너를 이 자리에서 죽일 수도 있다.”
“그것도 그렇네요.”
박사는 애매한 웃음을 지었다.
“역시 믿지 못하시는 듯 하군요.”
그가 다시 옷 속에 봉을 넣었다. 그때 왕이 히죽 웃었다.
“어딜 가려나 본데, 마음대로 들어왔다 마음대로 나가는 데가 아니네.”
무휼이 앞을 가로막았다. 조금 낭패한 얼굴로 앞을 보는 박사를 향해 왕이 웃어보였다.
“게 누구 없느냐.”
나이지긋한 내시가 들어와 절을 했다.
“집현전에 숙직하는 학사들 방이 있지. 이자를 거기서 재워라.”
“전하, 이자의 언행이 괴이하옵니다. 궁에 두기엔 과하옵니다.”
“내가 봐도 괴이하기는 하니 거참, 괴이하기는 괴이한가보구나.”
왕이 웃으며 말하는 동안 박사는 낭패한 얼굴로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거 그럼 잠시 좀 머무르거라. 과인이 바쁘니 좀 도와주어야겠다.”
“싫다면 어쩌시겠습니까.”
“조선의 궁에 머무를 기회다. 흔한 기회가 아니지. 어떠냐, 할 마음이 나냐?”
박사의 눈에서 뭔가가 번쩍였다.
“당연하죠!”
기인괴인이 하나 더 늘어났다. 감정표현을 거의 하지 않는 궁인들이 한숨을 쉬었다.
주상이 박사를 집현전에 거하게 하여 의견을 물었다.
-조선왕조실록, 세종 24년 3월 24일(144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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