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니발]죽은 순교자를 위한 제의

발렌타인데이 합작입니다. 주최하느라 고생하신 주최님과 합작에 참여해주신 분들, 그리고 읽어주신 분들께 한 번 더 감사인사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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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렌타인 데이의 순교자는 로마의 젊은이들을 위해 죽었다고 한다. 물론 정말 그랬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다산의 신을 위한 로마의 축제를 못마땅하게 여긴 기독교인들이 그 축제의 날을 순교한 성인을 위한 날로 만든 거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애초에 당일에 순교한 성 발렌티노가 누구인지도 모른다. 고작 몇 백년 전 어느 사제의 설교에서 시작된, 기이하다면 기이한 날이다. 더구나 혼인하기 위해 죽음을 무릅쓰다니, 그것부터가 말이 되지 않는다. 로마의 군인들이 그렇게 낭만적인 혼인에 목을 매는 사람들이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로마 군대에 사실혼 관계였던 군인이 얼마였다던가. 그것도 기독교 사제가 집행하는 결혼식을 위해서. 전설이 생긴 지도 천년하고도 수백 년이 더 지났고, 사랑을 고백한다는 낭만적인 포장을 뒤집어쓴지도 몇백 년이 지났다. 이제 와서 본래의 전설이 어떤 것이었는지, 왜 그런 전설이 생긴 것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아무튼 발렌타인 데이는, 축제였으리라는 점이 중요하다. 카니발에는 언제나 폭식의 향연이 따르기 마련이다. 기나긴 금욕의 뒤에 펼쳐지는 향연이라면 그럴 만한 가치가 있게 치러져야 한다. 금욕적인 순교가 폭식과 상관이 없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 순교 또한 제 살을 깎아 남을 먹이는 행위가 아닌가. 살을 씹고 피를 마신다는 점은 같다. 그러므로 자신의 식탁에서 벌어질 탐식이라면 환영이다. 단 식탁에 앉을 자가 식료품이 아닌, 동족일 경우에 한해서. 
그 동족과의 식사에서 가장 방해가 되는 것은 동족 자신이다. 윌 그레이엄은 먹는 행위에 관심이 없다. 무엇을 내줘도 맛있다고 하지 않는다. 무엇이든 그냥 먹는다. 이렇다할 느낌 없이 그저 씹어 삼키기만 하는 것을 먹는다고 불러도 좋을지 모르겠다. 그에게 먹는 행위는 연료를 공급하거나 불안한 마음을 어느 정도 가시게 하거나 어색함을 없애주는 행위에 불과한 것 같다. 그렇게 추측해 본다. 하지만 카니발에 참가하는 것도 동족으로서 할 일이다. 본인은 모르겠지만. 왜 축제의 핵심에는 외부인을 끼워 넣지 않겠는가. 같은 무리 안에서 은밀하게 행해지는 축제라는 것도 분명히 존재한다.

카니발이므로, 고기이다. 나머지야 어쨌건 메인은 육식이다. 살을 찢고 육즙을 삼키는 것이 본질이다. 그리고 시류에 편승하기로 한다. 버터를 녹이고 크림을 약간 부은 다음 육수를 넣고, 크렘 드 카카오를 조금 붓는다. 초콜릿이 들어가지 않았는데도 초콜릿 향이 살짝 돈다는 점이 흥미롭다. 지금까지도 이런 자들은 많았지만, 진심으로 동족으로 여길만한 자는 많지 않았다. 하다못해 동료로 느낄 만한 자도. 밑준비가 끝난 다음에야 비로소 카카오 함량이 높은 요리용 초콜릿을 녹인다. 잠시 저어주자 버터가 들어간 초콜릿소스의 표면에서 매끄러운 윤기가 돌았다. 다른 재료는 넣지 않는 게 낫다. 스테이크 감으로 소금과 허브에 절여둔 고기는 마침 알맞게 굽기 좋은 상태다. 프라이팬을 데웠다. 올리브유를 발라놓은 고기가 팬에 올라가자마자 좋은 소리를 내며 익었다. 겉만 살짝 익힌 레어가 적당하다. 진한 소스 때문에 윌 그레이엄도 껄끄러워하지 않을 것이다.
고기가 익을 동안 몇 가지 준비만 더 하면 식사준비가 끝난다. 고기에 어울리는 좋은 와인을 준비했고, 가니쉬도 예쁘게 썰어놓았다. 윌 그레이엄의 눈에야 먹을 것으로 부리는 사치 정도로 보이겠지만 사치를 부린 음식은 맛있어 보인다. 특히 몸이 아플 때에는 아주 사소한 것이 감동적인 법이다. 지금 그는 열에 신음하며 누워있다. 예의 그 병이다. 열에 들떠 환각을 보다 여기까지 온 것이다. 
어째서 여기까지 왔을까. 참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리고 한편으로 사람이 사람을 믿게 하는 것은 의외로 간단한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자신에 대해 조금만 생각해 보면 수상한 점이 많았을 것이다. 홉스가 죽기 전의 정황도 그렇고 애비게일도 그렇다. 윌 그레이엄이 거기에서 자신이 범인임을 아직도 알아내지 못한 것이, 가끔은 의아하기도 하다. 아마 어쩌면, 자신을 조금은 수상하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윌은 자신을 믿었다. 믿는다기보다는, 본능적으로 여기에 와야 한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는 것이 아니고 그러므로 믿는 것이다. 그는 아마도 여기에 정답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 정도도 해내지 못해서야 동족이라고 할 수 없다. 
그래서, 조금 더 몰아붙이면서 당근과 채찍을 동시에 써 보기로 했다. 간단한 처방으로 열은 조금 내릴 수 있었다. 하지만 굳이 그렇게 하지 않고 그대로 둔 것은 가장 약해지고 궁지에 몰렸을 때, 가장 잡기 좋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약해지지 않으면 먹이조차 줄 수 없는 최상의 사냥감이다. 그리고 오늘은 우선 먹는 것부터다. 아주 작은 양으로, 조금 맛을 보고 나면 새로운 맛과 향을 가진 음식이 나오도록. 단 것을 먹고 나면 짭짤한 것을, 바삭한 것을 내 온 다음에는 입에서 녹는 거품 같은 식감을, 그리고 순한 것을 먹은 다음에는 자극적인 것을. 계속 먹을 수 있는 비결은 거기에 있다. 먹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도 예의상 먹을 수 있을 정도의 양과 다양한 맛으로. 그리고 꼭, 축제답게 먹는 것을 즐길 수 있도록. 차갑게 식힌 성게 무스의 상태를 점검해 본 다음에야 식사준비가 끝났다. 팬에서 고기를 덜어내 접시에 담고, 초콜릿 소스를 부어 장식했다. 접시의 테두리에 소스를 살며시 덜어내 장식해 레이스처럼 무늬를 만들어내는 동안 늘어붙은 초콜릿이 가는 실처럼 접시 가에 떨어진 것을, 손으로 훑었다. 평소답지 않은 일이었다. 손 끝에 묻은 초콜릿은 씁쓸하고, 끈적거리고 약간 달았다.
접시를 식탁에 올리도록 윌 그레이엄은 일어나지 않는다. 몸을 뒤척이며 앓는 소리를 낸다. 당신에게 필요한 것은 먹는 행위 그 자체이지. 소파에 누워있는 그의 귓가에 나직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윌, 일어나요."
열에 들뜬 몸으로도 재빠른 동작으로 일어난 윌 그레이엄이 경계하는 표정으로 자신을 보는 것이 즐거웠다.
"박사님."
적을 보는 표정으로 자신을 노려보았다는 것을 본인이 인식하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 눈이다. 그렇게 자신을 보는 것이 좋다.
"약을 먹기 전에 좀 제대로 먹는 게 좋겠습니다."
환자를 걱정하는 담당의의 표정이라면 아주 잘 만들어낼 수 있다. 아니 실제로 걱정하고 있으니 만드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저는……."
물론 사양할 줄 알았다.
"한 번도 내 집에서 제대로 식사한 적이 없지요."
"박사님, 그건 지금 중요하지 않아요."
"아니요, 먹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이야기했습니다. 환자에게 의사로서 말하는 겁니다, 윌."
"그런 거야 이해하지만 지금 시간이 없잖습니까."
"그게 제일 문제죠. 지금 제대로 먹고 낫지 않으면 수사를 할 수 없을 겁니다."
단호하게 거절하려던 윌 그레이엄이 뭔가 어물어물하더니 입을 다물었다. 저런 점이 좋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동시에 실망스럽기도 했다. 먹는 것이 자신의 일부이거늘 어떻게 저렇게 먹는 것에 소홀할 수가. 이 식탁이 어떤 비의를 담고 있는지 그는 모른다. 그 비밀을 아는 자만이 사실은 이 식탁을 참으로 즐길 수 있는 것이다. 
"별 거 아닙니다. 부담스럽지 않을 정도의 양으로만 준비했어요."
평소보다 식탁 위의 장식을 줄이고 접시를 작은 것을 준비한 것만으로도 윌 그레이엄의 얼굴에는 안심한 기색이 떠올랐다. 예를 들어 이 수프의 육수에 얼마나 많은 채소와 고기가 들어갔는지를 안다면, 이 접시가 어떤 물건인지 안다면 저런 표정은 짓지 못하겠지. 블루 칼라로 태어나서 자란 윌은 자신 주변의 생활 수준 이상의 무언가를 접했을 때 윌의 반응은 불쾌함에 가까웠다. 자신과 다른 이질적인 것에의 거부감이다. 이 초콜릿 소스를 만들기 위해 들어간 초콜릿이 어떤 것인지, 그리고 이 고기는 자신이 얼마나 공들여서 사냥하고 다듬은 것인지. 식재료가 무엇인지 말해주고 싶다는 충동이 들었다. 이래도 이 모든 것이 이질적일까. 사람을 죽이는 자에게 공감하고 사람을 먹는 자의 심정을 알면서.
"박사님?"
잠시 손을 멈칫한 것을 알아챈 윌 그레이엄이 이상한 눈으로 자신을 본다.
"아, 아닙니다. 윌, 그럼 맛있게 먹어요."
정찬 코스의 순서를 지키지 않은 것은, 우선 이것을 먹여야 한다는 신념에서였다. 방금 구워낸 따뜻한 스테이크가 핏덩어리처럼 식탁에 올라가 있었다. 윌 그레이엄도 그렇게 느낀 것일까. 잠시 주저하던 그가 포크와 나이프를 잡았다.
"박사님도요, 즐거운 식사를."
그가 스테이크를 썰어 입에 넣는다.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미소를 지었다. 발렌타인이 축제라면, 축제의 끝은 육식이어야 한다. 힘을 주어 입 속에 든 인육을 씹자 살이 찢겼다.
즐거운 식사를. 당신에게도 즐거운 축제(cannibal)이기를.


[한니발]만찬

한니발 추수감사절 합작에 냈던 글입니다.

그리고 한니발로 글 쓰면서 먹방만 하는 거 같아서 엄청 찔리지 말입니다.




‘독은 들어있지 않습니다. 음식에 그런 짓을 하지는 않아요.’

만찬

언젠가 저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한니발은 기억 속에서 동일한 문장을 끄집어 내었다. 어떤 치즈를 쓸지 고민하다 떠오른 문장이었다. 동시에 이름 두 개가 떠올랐다. 토바이어스라는 이름이었다. 자신이 동류임을 알아보고 관심을 끌기 위해 도발적인 짓을 했던 자였다. 동시에 자신의 환자였던 프랭클린을 기억해 냈다. 프랭클린은 자신과 비슷한 사람에게 관심이 많았다. 아마도 그 둘이 친구가 된 것은 프랭클린이 더 많은 에너지를 썼기 때문이겠지. 프랭클린이 토바이어스를 자신에게 소개한 것도, 연결고리를 하나 더 만들고 싶었기 때문이었으리라. 가엾은 프랭클린. 먹지도 못할 상태로 죽게 된 것은 자신이 원한 바는 아니었다. 하지만 스스로 자초한 죽음이니 딱히 애석할 것도 없지. 한니발은 실처럼 풀려나오는 기억을 끊었다. 요리할 때 잡념은 좋지 않다. 치즈는 꽁떼와 고다, 고르곤졸라를 내기로 하고, 한니발은 고기를 썰 때 쓰는 칼을 꺼냈다.
오븐에서 넓은 세라믹 그릇을 꺼내 뚜껑을 열자 기름에 푹 잠긴 고기가 제 색을 내고 있었다. 콩피는 기름에 음식을 삶는다는 저항감만 없으면 참 좋은 요리다. 고기의 제 맛을 살리는 데 좋다. 삼겹살이나 오리고기도 쓰지만, 지방질이 없는 부위도 나쁘지 않다. 아마 오늘은 지방이 적은 고기라, 오히려 맛이 잘 들었을 것이다. 오래 삶은 고기가 붉은 기 없이 푹 익어 있었다. 고기를 살며시 들어 도마에 놓자 고기젤리처럼 살짝 흔들리는 것을 보니 조리가 잘 된 모양이다. 한니발은 칼날을 들어 고기 위에 얹었다. 칼이 살 속에 박히는 느낌은 언제나 친숙하면서도 새로웠다. 죽은 것 속에 칼을 찔러넣을 때와 산 것 속에 칼을 찔러넣는 느낌은 분명히 다르다. 뜨겁게 익힌 고기에서 전해지는 미묘한 저항감이 칼날을 타고 손끝으로 올라왔다. 죽은 자의 살로 요리하는 것 자체는 좋아하지만, 고기를 썰다 가끔 죽은 자에 대한 생각이 나는 것은, 불쾌할 때가 있었다. 이 고기를 썰며 프랭클린과 토바이어스를 떠올렸다. 가엾은 프랭클린. 그는 아마 토바이어스를 질투했으리라. 프랭클린은 자신과 친해지려 했고 자신과 닮고 싶어 했다. 하지만 서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안다고 다 친구가 되는 것은 아니지. 둘 다 자신의 친구는 될 수 없었다. 동시에 음식도 될 수 없었다. 프랭클린도 토바이어스도 먹지 않았다. 프랭클린은 음식이 될 수 있었지만 먹지도 못하게 죽었고, 토바이어스는 음식이 아니었지만 결국은 음식과 다를 바 없는 짓을 했다.
한니발은 그들이 음식이 되었다면 어땠을까 생각해보았다. 아마 맛있는 음식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을 요리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사람은 사람을 먹지 않고, 자신은 자신과 동류라 고백해온 이를 먹지 않았을 것이다. 프랭클린은? 동류는 아니지만, 그의 무례함은 기이한 데가 있었다. 자신과 같아지기를 열망하다니. 될 수 없는 것을 바라는 것은 탐욕이다. 자신과 같아지려는 시도 자체도 동족이 아니면 의미가 없다. 그 이상을 바라는 것은 탐욕이고, 탐욕스러운 자를 먹고 싶지는 않았다. 한니발은 섬세하고 까다로운 사람이었고, 그런만큼 분명한 기호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만큼은 예외이다. 무례함은 댓가를 치러야 한다.
오늘의 식탁은 탐욕을 주제로 꾸며 보았다. 고기를 다 썰어 접시에 얹고 막 냄비에서 다 끓은 토마토 소스를 한 숟가락 떠냈다. 벽 너머에 있는, 식탁 앞에 앉아 음식을 기다리고 있을 사람을 생각하며 고기 위에 붉은 소스를 얹었다. 손질 잘 된 붉은 머리는 염색이었으리라. 이 토마토 소스에는 인공색소는 전혀 들어가지 않았지만.
그나마 채식주의자라 아마 고기에 잡맛이 들지는 않았을 것이다. 무척 자신만만하고 뻔뻔한 인간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남의 것 중 조금이라도 맛이 있겠다 싶은 부분은 그게 뭐든 상관하지 않고 긁어가 팔아먹는 삼류 신문 기자가, 타인의 피와 내장으로 제 몸을 덥히는 인간 주제에 채식주의자라니. 인생에는 종종 이런 아이러니가 등장하고, 이럴 때 자신은 그저 웃으며 요리나 할 뿐이다. 이만큼 웃게 만들었으니 좀 더 아름답게 만들어서 접시에 올려주도록 할까. 한니발은 접시 가장자리에 소스를 동그란 무늬가 생기도록 뿌렸다.
방금 썬 허벅지살 콩피를 마지막으로, 만찬이 완성되었다. 한니발은 메뉴를 한 번 더 살펴보았다. 비계가 적긴 해도 여성이라 어느 정도 지방은 남아있었다. 그래서 어뮤즈 부쉬부터 메인요리까지, 많은 것을 할 수 있었다. 지방이 많은 배 부분으로 만든 테린에 캐러멜화한 양파를 올린 어뮤즈 부쉬를 와인과 함께 낸 다음에 염소젖치즈를 올린 샐러드가 나갈 것이다. 샐러드에 공을 많이 들였다. 식탁에 올라간 자가 생전에 좋아하던 음식이라 그랬던 것 같다. 붉은 색을 내는데 토마토와 비트가 유용했다. 평소보다 강한 맛의 샐러드는 생전 그녀의 삶을 떠올리게 할 것이다. 단 맛도, 짠 맛도, 신 맛도, 지방질도 넘쳐나도록 많은 것이 그녀에게 잘 어울렸다. 수프는 육수로 콩소메를 만들었다. 간에 푸아그라를 섞어 퓌레를 만들어 버터로 구운 닭고기 소테 위에 끼얹었고, 허벅지살로 만든 콩피가 애초에 준비하려던 등살 스테이크보다 역시 나았던 것 같다. 치즈는 향과 맛이 강한 것이 올라갈 것이고, 식후의 디저트는 바끌라바로 정했다. 베어물면 머리가 지끈거릴 만큼 단 것으로 준비했다. 지나치게 강하고 지나치게 탐욕스러운 식탁이었다. 이 식탁에 절제 같은 미덕은 없다. 당연한 일이다. 탐욕은 대죄이다. 남의 영역을 탐내고, 남의 것을 탐냈다. 물론 그래서 유용하기도 했지만, 선을 넘어오려고 하는 가증스러운 짐승에게 그 이상을 허락할 수는 없지 않은가. 토바이어스도 그렇고, 그어놓은 선을 태연히 무시하는 자는 딱 질색이었다.
한니발은 붉은 색으로 장식된 허영과 탐욕으로 가득한 접시를 잠깐 쳐다보았다. 무례한 행동에 대한 댓가치고는 분에 넘치는 호사가 아닌가 싶었지만, 이 만찬은 꼭 이 정도로 풍성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제 이 만찬은 이것을 받아 마땅한 사람에게 돌아갈 것이다. 그리고 이 만찬을 대접받을 이도 접시를 보며 이 만찬을 즐길 수 있기를 바랐다.
접시를 받쳐 들고 식탁으로 걸어가자, 경계의 눈빛으로 쳐다보는 갈색 고수머리 남자가 있었다. 어딘가 불안한 표정으로, 하지만 수틀리면 이쪽을 치고 나올 기세로 노려보는 남자의 표정이 한니발은 내심 흐뭇하다. 당신은 여기에 올 수 있는 사람이고, 내 친구이니까. 이 정도로 나에게 무례해도 상관없다. 무엇보다 당신이 여기까지 왔다는 게 중요하다. 날 공격하건, 나와 동류가 되건, 일단은 당신이 스스로 내 세계로 들어온 거고 모든 것은 거기서부터 시작한다, 윌 그레이엄. 한니발은 문득 눈앞에 앉아있는 최상의 먹이에게 칼을 꽂아보고 싶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동시에 친구의 손을 잡고, 가장 훌륭한 음식을 먹이며 살육에 대해 이야기해보고 싶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 말을 입에 올리지 않는다. 대신 다른 말을 꺼낸다.
“독을 넣지는 않았습니다. 음식에 그런 짓을 하지는 않아요.”
윌의 표정이 흐려진다. 이 음식이 무엇인지, 누구인지 윌이 알까? 알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 음식을 음식으로 즐길 수 있다면, 자신과 윌은 친구 이상으로 가까운 무언가가 될 것이다. 그게 무엇인지는 한니발 본인도 잘 모른다. 모르는 것에 대한 기대감과 긴장으로 가득찬 한니발은 입꼬리를 살짝 올려 희미하게 웃는 얼굴을 만들었다.
“내 만찬에 참석해 줘서 고맙군요, 윌. 환영합니다.”


[닥터후]도래하는 폭풍, 마지막 남은 타임로드, 그리고 하나 더

에클닥이라고 리퀘 받아 썼지만 쓰고 보니 테닥에 가까운 거 같기도 합니다. 몇 달 전에 써놨던 걸 찾아서 좀 정리해서 올려요.

요새 합작이다 뭐다 바빠서 뭘 쓰지를 못 해서 말이죠...



"거기 코쟁이 양반."

항상 서구쪽으로 여행을 다니는 이유가 다 있다. 동양권에 오면 도무지 저 호칭에 적응이 안 된단 말이다. 조선시대에 갔다가 이 오랑캐 어쩌고 하는 수난을 너무 많이 겪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게다가, 이게 문제다.  닥터는 난감한 표정으로 냄비 안을 쳐다보았다. 얼핏 맡기에도 끔찍하게 매운 냄새가 나는 국물 안에 둥둥 떠 있는 빨판 붙은 촉수가 아직도 꿈틀거리고 있었다.

"아 거 코쟁이 양반, 해물탕 어떻냐니까?"

"네?"

"오늘 낙지가 물이 좋았지. 잡은 김에 먹자고. 그러고 바다만 보고 있지 말고 좀 드슈. 맛이 기막혀."

"네? 네...잘 먹겠습니다, 잘."

하필 고깃배를 얻어타 본 게 화근이었다. 뻘에 처음 와 본 로즈가 뭍에서 아줌마들이랑 게 잡고 조개 잡으면서 즐거워하는 동안 남자는 뱃일을 하는 거라고 그래서 고깃배를 타 봤다. 뭐 힘닿는 대로 그물도 당겨 보고 걸린 고기도 큰 상자에 잘 챙겨담아놨다. 나름 일을 도와주고 멍한 기분으로 바다를 보며 지구의 해양생물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 부지런한 어부들이 배 가운데서 이렇게 본격적으로 뭘 조리해 먹을 줄 알았나. 그렇다고 먹지 않을 수도 없었다. 악마의 국물이 버너 위에서 끓고 있었고, 자신의 앞에도 그 국물이 한 그릇 놓였다. 

"아까 그물 당길 때 보니까 영 힘을 못 쓰더만. 키만 멀대같이 크면 뭐 하나. 잘 먹어야 힘을 쓰지. 거 양놈들은 노상 빵 같은 거나 먹고 사니까 그런 거 아냐. 그거 먹고 힘을 쓰나? 사람은 밥심이지."

아뇨, 음식문화는 각 문화권에 따라 특수하게 발달하는 법이...지만 이 단순하고 우락부락한 뱃사람들 앞에서 그런 말은 별로 좋은 선택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입을 다물었다. 그릇 안에는 촉수, 아니 낙지가 들어 있었고 조개며 매운 국물이 가득했다. 어디서 챙겨놨는지 깻잎이며 파도 들어 있었다. 깻잎 특유의 매운 향기가 훅 끼치는 순간, 닥터는 콱 배에서 내려 바다를 건너가 버릴까 하는 생각도 했다. 하지만 여행자는 다른 문화에 관대해야 하는 법. 전에는 말머리 성운에서 끓는 자갈이 들어간 국도 먹어 봤고 단추만 넣고 끓인 수프도 먹어봤지. 닥터는 숟가락을 들어 빨판과 파와 국물을 한 숟가락 떴다.  입 안에 들어온 순간, 코로 뜨거운 불을 뿜는 용의 메커니즘을 온 몸으로 배운 기분이 들었다.

"이 양반 이거이거, 양놈 답잖게 참 잘 자시네! 상남자네! 거 더 드슈. 사양하지 말고 많이 먹어요. 아 이거 낙지도 좀 드시고."

뱃사람들은 호탕하게 웃으며 그를 칭찬했다. 문화적 편견이 겹겹이 깔린 칭찬의 어느 포인트에 기뻐해야 할지 모르겠다. 닥터는 애매하게 웃으며 촉수를 입에 넣고 씹었다. 어찌나 질긴지 씹히지도 않았다. 정말 촉수 같네...아니, 거 먹어보면 먹을 만 한 걸 누가 몰라요. 하지만 난 이렇게 생긴 놈을 수백 수천 명을 안다고. 걔네랑 싸웠다니까? 댁들 같으면 이런 걸 먹고 싶겠냐고. 마음 속으로만 비명을 지르고 있는 동안 뱃사람들은 뭘 하는지 시커멓고 콧물 같은 것을 썰어서 자신의 앞에 내밀고 있었다.

"이거 뭡니까?"

"어이쿠 그거 해삼이구먼, 몸에 좋아. 남자한테 참 좋은데 거, 흐흐흐, 설명할 길이 없네. 일단 좀 잡숴 보지?"

손님, 그것도 코쟁이 손님(!)을 대접하느라 자기들이 먹지 않고 참는다는 티를 팍팍 내고 있었다. 눈에서 먹고 싶다는 욕망이 흘러나오는데 안 먹고 사양했다간 산 채로 바다에 던져지겠다. 닥터 인생에서 이런 재생성은 좀 부끄럽지. 숟가락 위에 놓인 시커먼 덩어리를 한참 쳐다보던 닥터는 태연한 얼굴로 해삼을 입 안에 넣었다. 입 안에 물컹하고 비린 덩어리가 가득찼다.

도래하는 폭풍, 달렉의 학살자, 마지막 남은 타임로드, 지금까지 자신의 앞에 붙었던 그 숱하고 화려한 수식어들 위에 닥터는 한 줄을 더 기록했다. 해삼을 태연하게 먹어치운 자다, 달렉이건 사이버맨이건 덤벼 보라지. 아 로즈 엄마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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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니발]살인마와 수사관

발단은 이 시입니다.


1

301호에 사는 여자. 그녀는 요리사다. 아침마다 그녀의 주방은 슈퍼마켓에서 배달된 과일과 채소 또는 육류와 생선으로 가득 찬다. 그녀는 그것들을 굽거나 삶는다. 그녀는 외롭고, 포만한 위장만이 그녀의 외로움을 잠시 잠시 잊게 해준다. 하므로 그녀는 쉬지 않고 요리를 하거나 쉴 새 없이 먹어대는데, 보통은 그 두 가지를 한꺼번에 한다. 오늘은 무슨 요리를 해먹을까? 그녀의 책장은 각종 요리사전으로 가득하고, 외로움은 늘 새로운 요리를 탐닉하게 한다. 언제나 그녀의 주방은 뭉실뭉실 연기를 내뿜고, 그녀는 방금 자신이 실험한 요리에다 멋진 이름을 지어 붙인다. 그리고 그것을 쟁반에 덜어 302호의 여자에게 끊임없이 갖다 준다.


2

302호에 사는 여자. 그녀는 단식가다. 그녀는 방금 301호가 건네준 음식을 비닐봉지에 싸서 버리거나 냉장고 속에서 딱딱하게 굳도록 버려둔다. 그녀는 조금이라도 먹지 않기 위해 노력한다. 그녀는 외롭고, 숨이 끊어질 듯한 허기만이 그녀의 외로움을 약간 상쇄시켜주는 것 같다. 어떡하면 한 모금의 물마저 단식할 수 있을까? 그녀의 서가는 단식에 대한 연구서와 체험기로 가득하고, 그녀는 방바닥에 탈진한 채 드러누워 자신의 외로움에 대하여 쓰기를 즐긴다. 흔히 그녀는 단식과 저술을 한꺼번에 하며, 한 번도 채택되지 않을 원고들을 끊임없이 문예지와 신문에 투고한다.


3

어느 날, 세상 요리를 모두 맛본 301호의 외로움은 인육에게까지 미친다. 그래서 바싹 마른 302호를 잡아 스플레를 해먹는다. 물론 외로움에 지친 302호는 쾌히 301호의 재료가 된다. 그래서 두 사람의 외로움이 모두 끝난 것일까? 아직도 301호는 외롭다. 그러므로 301호의 피와 살이 된 302호도 여전히 외롭다.


장정일, '요리사와 단식가', "길안에서의 택시잡기"에 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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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요즘 한니발을 파니 식인이야말로 참 좋은 소재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한니발]동묘앞 미국도사2

 

일단은 여기까지. 아래는 추석에 트위터에 슥슥 날려쓴 외전입니다.

그래요 솔직히 말해서 이거 쓸 때까지는 이야기 전개가 이렇게 될 줄 생각도 못 했지...

 

 

 

[한니발]심장의 행방

윌은 식탁을 보고 경악했다. 붉은 심장이 접시 가에 얹혀있었다. 붉은 액체가 접시에 퍼지고 있었다.심장을 식탁에 올리기도 하나? 닥터 한니발 렉터의 식탁은 독특한 격조가 있다고 정평이 나 있다. 하지만 이게 왜. 크기와 모양이 사람의 그것과 유사했다. 윌은 놀란 눈으로 식탁 너머에, 접시를 들고 서 있는 집주인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늦었군요."
태연하게 음식이 담긴 접시를 내려놓은 렉터 박사가 인사를 건넸다.
"뭐죠?"
"아, 심장 모양 과자 말이군요. 식탁 장식을 하려고 만들었습니다."
"만들었다고요?"
"비스켓입니다. 피는 라즈베리와 딸기를 기본으로 했죠."
이게 무슨 악취미야.
"오늘은 심장, 이 일종의 키워드죠. 소의 심장과 혀로 만든 요리에 앞서, 심장을 재현해 봤습니다."
윌의 앞에 도톰하게 썬 무화과 위에 블루치즈와 푸아그라를 얹고 꿀과 루꼴라를 얹은 카나페 접시가 놓였다. 배는 고팠지만 심장 옆에 있는 둥근 무화과를 보고 있자니 식욕이 없어졌다.
"왜 하필 심장이죠?"

"다음부터는 늦기 전에 미리 말을 해 주세요. 요리 준비에 차질이 생깁니다."

"아, 미안합니다."
박사는 윌의 질문에 답하기 전에 시간에 늦은 무례를 먼저 지적했고 윌은 사과했다. 다시 물어보려고 했지만 말 없이 포크로 무화과를 찍고 있었다. 윌은 한숨을 쉬고 나이프를 댔다. 밤꿀인지 색이 짙은 꿀 사이에서 무화과의 붉은 속이 핏빛으로 보였다.

식사는 무미건조했다. 음식은 맛있었지만 박사와 윌 사이에 살가운 대화는 별로 오고 가지 않았다. 윌이 할 수 있는 이야기는 일 이야기 뿐이었지만 오늘 본 시체에 대해 밥을 먹으며 이야기하는 것은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애비게일의 안부에 대한 의례적인 이야기, 알라나 블룸에 대한 이야기, 키우는 개에 대한 이야기를 단편적으로 늘어놓은 것이 전부였다. 한니발은 접시를 나르고 식사준비를 하느라 자주 일어서곤 했고 윌에게는 오히려 그게 다행이었다.

그날의 메인디시는 소의 심장을 썰어 구워 허브와 레몬으로 맛을 낸 소스를 얹은 것이었다. 육즙이 빠져나가지 않게 살짝 구운 소 심장은 겉으로 봤을 때는 일반적인 고기와 별 차이가 없었다.

"그냥 고기 같네요."
"심장이라고 해서 다들 오해하지만, 내장도 고기입니다. 게다가 심장은 지방질이 없는 근육이라 맛이 특별하지요."
"그런데 음식이, 음 꼭 무슨 주제가 있는 것 같아요."
"요리란 원래 영감이 있어야 하는 거니까요. 오늘은, 그렇군요. 내담자에게 들은 이야기입니다. 아, 허락을 구했다는 건 아시겠지요. 어렸을 때 염통 모양 과자라는 글귀를 책에서 봤답니다. 외국 동화책을 그 나라 말로 번역한 것이었는데, 도무지 무슨 말인지 알 수 없었다는군요. 자라서 미국에 온 다음, 그 책을 다시 봤더니 하트 모양 쿠키였다는군요."
윌은 어느 타이밍에서 웃어야 할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박사를 쳐다보았다.
"말하자면 이건 heart군요."
"그렇죠."
"보통 하트라면 구애의 의미라고 하는데. 박사님이, 어, 아마 그럴 리는 없죠."

윌은 당황한 표정이었다. 얼마 전에 알라나와 키스했다는 말을 할 때에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박사는 냉담한 얼굴로 윌을 쳐다보았다.
"그렇습니다. 저도 절대로 그런 뜻으로 이 자리를 준비한 것은 아닙니다."
안심한 듯한 윌이 나이프로 심장을 한 조각 잘라 입에 넣었다. 그것을 확인한 박사는 음식을 마저 먹기 시작했다. 심장은 의외로 맛있었다. 적당히 부드러웠고 비린 맛이 많이 나지도 않았다. 하지만 뭔가 독특한 풍미가 있었고, 설명하기 어려운 기묘한 맛이 났다. 식사가 다 끝나갈 무렵까지 식탁은 조용했고 윌은 심장에 집중했다. 이윽고 접시를 다 비워갈 때 박사가 입을 열었다.

"하트에는 알다시피, 핵심이나 본질이라는 뜻이 있지요."
지나가듯 한 말에 윌이 멈칫했다. 그러나 박사는 포크와 나이프를 내려놓은 다음 냅킨으로 입을 닦고 주방으로 갔다.
"와인과 치즈를 내 오지요."
식사가 다 끝나도록 심장으로 점철된 그 식탁을 이해할 길이 없었다. 아마 박사의 말 가운데 힌트가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식사는 평온했으므로 윌은 그냥 마음 편하게 생각하기로 했다. 박사는 원래 이런 사람이니까. 오늘 본 시신에는 심장이 없었다는 것은 나중에 생각이 났지만 그 점과 오늘 식사를 연결시키기에는 윌은 너무나 선량한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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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동화책은 옛날에 번역된 말괄량이 삐삐라고 합니다. 염통 모양 과자라니 대단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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뿌리 깊은 타디스 2


만춘전은 시립하고 선 궁녀들과 문을 지키고 선 내관들과 별감들로 가득했다. 전에 없이 시위가 늘어난 것을 보고 신료들 몇이 궁금한 표정을 짓기도 하였으나 얼마 안 가 전각 안에는 왕과 내금위장, 그리고 색목인 셋만이 남았다. 궁녀들도 내관들도 긴장한 기색이었으나 그것을 입밖에 내지는 않았다. 지밀상궁은 오늘 본 것에 대해 아랫것들에게 입단속을 단단히 시켜야겠다고 결심하는 한편, 무슨 일이 있으면 달려가기 위한 차비를 마쳤다. 무휼이 검을 뽑을 듯 움켜쥐고 서서 흉흉한 눈빛을 뿌리는 동안 왕은 흥미로운 표정을 짓고 옥좌에 앉아 박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박사라.”
“그렇습니다.”
색목인 박사는 전각에 들어오자마자 복도며 기둥을 보며 예쁜 것을 보는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지엄한 곳에 들어왔다고 생각하여 행동을 조심하는 것이 아니라 매우 진귀한 것을 보는 표정이었다. 경박하기로 이름난 이들도 궁에서는 달라지거늘 어찌. 무휼은 혀를 찼다. 그러나 색목인은 눈을 이리저리 굴리며 호기심에 찬 눈길을 주고 있었다.
“지엄하신 분의 얼굴을 함부로 올려다보지 말라는 법도도 모르나?”
“아하.”
색목인은 아차 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왕은 태연한 얼굴이었다.
“그냥 두어라. 모르는 것이 죄는 아니지 않느냐.”
“하오나 전하. 이자의 경망스러움이 도를 넘었습니다. 이는 전하를 능멸하는 것이라 여기옵니다.”
“과인이 능멸당했다 느꼈으면 알아서 이자를 벌하라 네게 명했을 것이다.”
무휼은 이를 갈았다. 하지만 주상의 말이 맞다. 판단은 주상이 하고 자신은 주상의 명을 받드는 신하일 뿐이다. 고개를 숙이고 한 발 물러가기를 기다려, 왕이 박사에게 질문했다.
“내 너와 같은 박사를 내 궁에 들인 적도 없고 너에게 박사라 한 적도 없거늘 어찌 박사라 하는가?”
“이 넓고 긴 천하에 저를 박사라 처음 칭한 이가 어찌 주상 뿐이오리까.”
“그러면 너는 누구의 백성이냐? 어디에 사느냐?”
“저는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는 몸이옵고, 누구의 백성도 아니옵니다.”
박사는 정중하지만 단호하게 자신의 신상에 대해 말했다. 왕은 폭소했다.
“그놈 참, 기백이 대단하구나. 좋다. 그럼 몇 가지 물어보자.”
“하문하시지요.”
“너는 내년에 무엇이 일어날지를 아느냐?”
“미래를 아는 자는 없습니다.”
박사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그러면 어찌 정통 13년이라 하는가?”
“제가 본 것을 말씀드린 것 뿐이옵니다. 저는 여행자입니다.”
“어디를 여행하였나?”
“수많은 곳과 수많은 시간을 여행하였습니다.”
왕이 눈을 빛냈다.
“시간을 여행하였다?”
“그렇습니다.”
“어허, 이놈이 정녕 미친 게로구나!”
“무휼, 자네 가만히 있어보게. 어디 이야기를 해 보라.”
“전하!”
“어명이다.”
왕의 얼굴에 미소가 걷혔다. 무휼은 저 표정을 알고 있었다. 아주 오래 전에 마방진을 풀 때 꼭 저런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오랫동안 왕으로 있으며 저런 표정을 지은 적이 없었다. 무휼은 색목인의 뒤에 시립하고 섰다. 여차할 경우 놈을 베고 왕을 지키기 위해서. 왕은 보지 못했지만 그는 보았다. 색목인이 품 안에 넣어 둔 봉에서 푸른 빛이 났다. 옷 안에 손을 넣어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흥미가 있으십니까?”
“당연하지 않겠느냐.”
박사는 미묘한 표정으로 왕을 쳐다보았다.
“저는 왜 이리로 부르셨어요?”
“네가 본 것을 말해보라고 불렀다, 이렇게 말하면 어찌하겠느냐?”
“음, 제가 아는 건 지금 하고 있는 일 말이에요, 그거. 그거 아주 멋져요. 대단하다고요. 그것밖에 말하지 못하겠네요.”
“그래도 말하라 하면?”
“말을 했다 앞일이 바뀔 가능성을 생각해 보십시오.”
왕은 침묵했다.
“네가 미쳤거나 거짓말을 하고 있을 가능성은?”
이번에는 박사가 침묵했다. 그는 용상 옆의 기둥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허, 미쳤거나 거짓말을 할 가능성이라고 했잖느냐.”
“전하, 저 기둥에 혹시 요즘 무슨 일 없어요?”
왕이 한 번 더 침묵했다. 말투가 미묘하게 들뜬 박사가 한 번 더 왕에게 물었다.
“이상한 소리가 들린다거나 말이에요.”
“그걸 어떻게 아느냐?”
“역시. 제가 여기 온 게 이거 때문이었나보네요……좋은 걸 보여드리죠.”
무휼이 칼을 조금 뽑았다. 어전이었지만 이상한 것을 든 자가 있었다. 하지만 왕은 태연하게 그자가 하는 양을 보고 있었다.
“자, 보세요.”
품 안에 있던 것은 금속을 끼워맞추고 긴 구슬을 끼워넣은 것처럼 생겼다. 박사가 무언가를 누르자 파란 빛이 났다. 푸른 빛을 기둥에 휘두르자 깩 하는 비명소리가 들렸다. 섬돌 밑에서 무언가가 기어나왔다. 보통보다 큰 두꺼비였다. 그것은 박사를 보더니 깩깩거리며 무서운 속도로 뛰어갔다. 그러나 박사가 조금 더 빨랐다. 기둥 뒤에서 깩깩거리는 소리와 함께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어디서 두꺼비인 척이야. 지구 생물도 아니면서.”
“너 규정 위반이야.”
“아, 아 이게 물어? 너 해 보자는 거냐!”


박사의 손에는 두꺼비였던 것으로 보이는 뭔가가 들려있었다. 색은 훨씬 꺼멓고 크기는 훨씬 작았다.
“먼 곳에 사는 동물인데 해롭습니다. 아마 여기서 뭔가 먹으려고 했겠죠. 여기서 그러니까, 그걸 만드신 거죠?”
“그렇다.”
“거기서 나오는 아이디어를 먹는 겁니다.”
“지금 헛소리로 주상전하를 희롱하는 게냐!”
무휼이 화를 내자 왕은 손을 들었다. 더 나서지 말라는 뜻이다. 왕이 목소리를 낮추었다.
“삿된 사술이라 생각할 수 있지 않느냐.”
“그건 그렇지요.”
“내가 너를 이 자리에서 죽일 수도 있다.”
“그것도 그렇네요.”
박사는 애매한 웃음을 지었다.
“역시 믿지 못하시는 듯 하군요.”
그가 다시 옷 속에 봉을 넣었다. 그때 왕이 히죽 웃었다.
“어딜 가려나 본데, 마음대로 들어왔다 마음대로 나가는 데가 아니네.”
무휼이 앞을 가로막았다. 조금 낭패한 얼굴로 앞을 보는 박사를 향해 왕이 웃어보였다.
“게 누구 없느냐.”
나이지긋한 내시가 들어와 절을 했다.
“집현전에 숙직하는 학사들 방이 있지. 이자를 거기서 재워라.”
“전하, 이자의 언행이 괴이하옵니다. 궁에 두기엔 과하옵니다.”
“내가 봐도 괴이하기는 하니 거참, 괴이하기는 괴이한가보구나.”
왕이 웃으며 말하는 동안 박사는 낭패한 얼굴로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거 그럼 잠시 좀 머무르거라. 과인이 바쁘니 좀 도와주어야겠다.”
“싫다면 어쩌시겠습니까.”
“조선의 궁에 머무를 기회다. 흔한 기회가 아니지. 어떠냐, 할 마음이 나냐?”
박사의 눈에서 뭔가가 번쩍였다.
“당연하죠!”
기인괴인이 하나 더 늘어났다. 감정표현을 거의 하지 않는 궁인들이 한숨을 쉬었다.

 

주상이 박사를 집현전에 거하게 하여 의견을 물었다.
-조선왕조실록, 세종 24년 3월 24일(144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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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국열차 감상

스포일러가 들어있습니다. 영화 안 보신 분들은 읽지 마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