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사제]견진성사

준호는 학교로 돌아갔다. 기도와 공부와 묵상이 이어지는 나날이었고 공백 같은 건 없었던 것처럼 준호는 다시 학교에 녹아들었다. 요새 최준호 아가토 형제가 성실해졌다고 원감신부가 칭찬했으나 그냥 웃어넘겼다. 성실으로 위장한 고행의 나날이었다. 그날 한강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자신이 어떻게 살아 돌아왔는지 누구에게도 말할 생각이 없었다. 그 후로 무수히 많은 악몽을 꾸었음에도-다행히도 개가 나오는 악몽은 수가 줄어들었다. 그것이 유일한 위안이었다. 이전보다 진실된 기도를 올리고 그리스도를 더 찬미하게 되었음에도 준호는 괴로운 마음을 어쩌지를 못했다. 거룩한 길임에도 불구하고 괴롭다니 어불성설이었다.  마음 속에 자그마한 죄의식이 싹터 준호를 괴롭혔으나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했다. 심지어 고해를 할 때에도 말을 못 했다. 이밖에 알아내지 못한 죄도 용서해 주시옵소서, 하고 읊조릴 때 가슴 한켠이 따끔거렸다.

그러나 그날, 같이 모든 것을 보고 들었으며 자기 가장 약한 부분을 알고 있는 사람한테라면 어쩌면 무언가를 이야기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그 무뚝뚝하고 깡패 같은 신부와 친하냐고 누가 물으면 준호는 그냥 일로 만나서 알게 된 신부님이라고 말할 생각이었고 아마 그도 그렇게 말할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준호는 습관처럼 프란치스코 수도회로 편지를 보냈다. 답장이 자주 오지는 않았고, 준호도 자주 편지를 보내지는 않았다. 구마가 끝나고 수도회로 다시 돌아간 범신은 여기저기 불려다니고 이것저것 수습하느라 정신없는 나날을 보내고 있노라고 학장신부가 얼핏 말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었다. 준호가 범신과 편지왕래를 한다는 것을 들은 학장신부는 주님이 하시는 일을 내가 어찌 알겠냐며 고개만 절레절레 저었다. 학장 신부의 묵인 아래 준호는 범신과 실낱같은 교류를 이어갔다. 다만 그 후로 다시 구마를 하는 일은 없었다. 그런 일이 그렇게 자주 벌어지지도 않았거니와, 정식으로 구마 사제가 되려거든 일단 서품이나 받으라고 범신이 호통을 쳐대서, 일단은 준호도 그 문제에 대해서는 말을 하지 않고 있던 참이었다. 이제 와서 날 인정 안 하시려나 하며 툴툴대던 준호에게, 김 베드로 신부가 학교 방문을 하며 널 보자고 하더라며 말을 전한 것은 학장신부였다. 언제 오시느냐는 질문에는 모르겠다고 답해서 준호를 한 번 더 열받게 했다. 지금 뭐 훈련시키나.

범신이 정신부의 유품 정리 겸 대신학교에 들른 것은 영신의 구마가 끝나고 2개월 반 정도가 지난 후였다.  어느새 가을이 되었고 학교를 돌아다니는 신학생들의 옷도 조금 더 두꺼운 것으로 바뀌어 있었다. 범신은 학장신부를 만나 준호의 안부를 묻고는 인상을 쓴 다음 몇 가지를 이야기했다. 떨떠름한 얼굴의 학장신부에게 고개만 끄덕여보이고 학장실을 나온 범신은 수덕관 앞에서 담배를 한 가치 빼물었다가 다시 집어넣었다. 요즘은 학교에서 금연이던가. 휘적휘적 걸어가던 범신은 수단을 입고 걸어가는 신학생을 붙들고 말을 걸었다. 다행히 7학년생이었다. 기숙사 가는 길이거든 최준호 아가토를 불러오라는 말에 학생은 얼른 뛰어갔다.
"최아가토, 웬 신부님이 찾으셔."
"신부님?"
"응, 낯선 분인데."
저녁 식사 후 대침묵 시간 직전의 짬을 이용해서 참고문헌을 뒤적거리고 있던-연구과 수료논문의 주제는 악의 존재가 신앙에 미치는 영향이었다- 준호는 무섭게 생긴 신부님이 찾는다는 말에 급하게 책을 덮고 기숙사 밖으로 나갔다.
"너 좀 말랐다."
"펑크난 학업 때우느라 좀 바빠서요. 잘 지내셨습니까."
"뭐 주님 덕분에 그럭저럭 산다. 바쁘냐?"
"네. 바쁩니다."
괜히 퉁명스럽게 대꾸하는 준호를 보며 범신은 혀를 찼다.
"잠깐 나하고 이야기 좀 하자."
"곧 대침묵 시간인데요."
"사제의 말에 순종하지 않는 부제도 있냐. 일단 좀 앉자."
평소엔 순종하건 말건 관심도 없으면서 이럴 때는 사제의 권위를 내세운다. 가만보면 아주 치밀하고 무서운 양반이라니까. 투덜대던 준호는 안경 너머에서 번쩍이는 범신의 시선을 느끼고 얌전히 뒤를 따라갔다. 
사람이 잘 지나가지 않는 으슥한 자리를 찾은 것을 보고 범신이 뭔가 중요한 이야기라도 꺼내나 싶었으나, 범신은 그냥 영신이가 학교에 잘 돌아갔고, 유급은 했지만 한 살 어린 반 애들하고도 잘 지낸다는 이야기며 조카가 귀엽다는 이야기며, 졸업논문을 쓰려거든 이러이러한 책을 찾아보고 이런 논문을 읽으라는 별 시덥잖은 이야기만 꺼냈다.  논문 주제가 참으로 고식적인 것이 너답다는 비아냥에 발끈한 준호가 몇 마디를 던졌고 범신은 재밌다는 듯 웃으며 준호의 속을 긁었다. 못된 양반, 사람 입에서 말을 이런 식으로 끌어내게 하다니. 결국 준호는 울며 겨자 먹는 기분으로 범신에게 이야기를 꺼냈다. 그냥 툭 던지듯 다시는 한강에는 들어가고 싶지 않다고 한 말을 범신이 놓치지 않았던 탓이다. 유황불에 타들어가는 환각과, 억지로 묵주를 쥐고 다친 다리를 끌고 다리 위를 걸어가던 순간과, 돼지를 끌어안고 물에 뛰어들던 순간까지 이야기하자 범신은 신음하며 성호를 그었다.
그때, 라고 말하고는, 둘 다 잠시 말이 없었다. 준호의 눈 아래 그늘진 부분과, 셔츠 사이로 보이는 그때보다 마른 팔을 쳐다보던 범신이 혀를 차고는 말했다.
"새로 태어났으면 그냥 주님 종이야. 나 죽었소 하고 버텨야지."
"알고 있습니다."
"머리로만 아는 거하고 실제는 다르지. 고해성사는 언제 했어?"
"지난 주에 했습니다." 
"주님께 솔직히 말씀드려라 힘들다고."
"고해신부님께는 그런 이야기 못 드리는 거 아시잖습니까."
고집스럽게 말하는 준호를 보며 범신은 이마를 짚었다. 아직 핏덩이라 버티는 법을 모른다. 그냥 꼿꼿한 척 하는 게 능사가 아닌데. 아직 어린 놈이 멀쩡한 척을 하고 있는 걸 보니 머리가 다 아팠다.
"물로 새로 태어났으면, 그 다음은 뭐냐. 기름부음이지?"
세례성사 다음에 견진성사를 받을 때에는 이마에 기름으로 십자를 그린다. 인상을 쓰며 자신을 쳐다보는 아직 젊다 못해 어린 신부를 보며 범신이 말했다.
"교리 모르냐."
"아는데요. 기름부음으로 인장을 찍어 세례를 완성시키는 견진성사. 하느님께서는 또한 우리에게 인장을 찍으시고, 우리 마음 안에 성령을 보증으로 주셨습니다, 코린토 2서 1장 21-22절. "
"알기는, 내가 오늘 너 확실하게 가르쳐줘야겠다. 가자, 기름부음 받으러."
"네? 묵주기도 바칠 시간인데요? 그리고 대침묵인데요?"
"잔말 말고 따라 와."

어영부영 범신의 손에 끌려간 곳은 대학로 구석에 있는 고깃집이었다. 젊은이들이 왁자지껄 떠들고 있었고 연기가 자욱한데다 공기의 일부분이 알코올에 푹 절어 있었다.
"왜, 와 본 적 없어?"
"네, 이쪽은 그다지...그것보다 신부님, 뭐 하시게요?"
"기름칠. 아, 여기 일단 삼겹살 3인분 하고요, 소주 한 병요."
어이없는 광경에 준호의 입이 벌어졌다.
"기름부으신다더니 세상에 이게 뭡니까?"
"맞잖아 기름."
준호가 미간에 주름을 잡았다.
"거룩한 성사를 이렇게 막 갖다붙이셔도 됩니까. 죄 받으십니다"
"주님께서는 다 아신다."
범신은 준호의 손에 집게와 삼겹살 접시를 쥐어주었다.
"제가 굽습니까?"
"당연하지, 오늘은 네가 봉사해야 되는 거야. 너 임마 돼지 덕에 사람 된 줄 알아. 얼마나 고맙니? 그러니까 돼지를, 최대한 맛있게 구워서 소명을 다 하게 하는 거다, 실시."
"주님, 거룩한 성사를 망령되이 일컫는 이 사제를 구원하소서."
궁시렁거리며 고기를 굽고 있었지만 준호의 표정은 유순했다. 범신이 왜 자신을 여기에 데려와서 하필 돼지고기를 먹고 있는지 알 것도 같았다. 몸과 마음에 성유를 붓고 정화를 시키고, 성령이 임하여 세례의 의미를 굳건히 다지는 것이다. 한 번 뒤집은 고기가 치익 소리를 내자 가위로 자른 준호가 손으로 범신을 가리켰다. 젓가락을 든 범신이 엄숙하게 선언했다.
"Accipe signaculum Doni Spiritus Sancti.(성령 특은의 인호를 받으시오.)"
"Amen."
준호는 웃으며 성호를 그었다. 쌈을 싸서 입에 넣자마자 범신이 준호의 잔에 소주를 따라주었다.
"저 술 안 마십니다."
"나보고 그걸 믿으라고?"
졌다.  범신에게 잔을 받아 고개를 돌리고 단숨에 들이킨 준호가 문득 생각난듯 말했다.
"그 돼지 이름이나 지어줄 걸 그랬죠."
"얼씨구, 그랬다간 진짜 꿈에 나와 임마. 악몽에 돼지까지 추가되면 좋냐?"
"돼지꿈은 길몽이랍니다."
어이없는 얼굴로 웃는 범신이 준호를 한 번 더 쳐다보았다. 괜찮은 척을 잘 하는 놈이라 분명히 속은 꺼멓게 타들어갔을 것이다. 자신이 그랬던 것처럼. 하지만 오늘은 악몽에 시달리지 않고 잘 잘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준호도, 범신도.
"평화가 당신과 함께."
"또한 사제와 함께."

견진성사를 맺는 인사를 입에 올리자 준호가 바로 받아쳤다. 성호를 그은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
2015.11.30 백업


'쓰고 만든 것 > 그 외' 카테고리의 다른 글

[검사제]성녀  (0) 2016.04.24
[검사제] 술마시는 김최  (0) 2016.04.24
[검사제]목욕탕에 간 김최  (0) 2016.04.24
[또봇]회장님과 나  (2) 2014.09.28
[또/봇]시를 읽는 오후  (0) 2014.07.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