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봇]시를 읽는 오후

전에 트위터에서 썰 풀었던 

"권리모가 세모 문제집 보다가 학교 다닐 때 제일 싫어했던 시 영역 읽던 중 박목월의 아버지인가 하는 시 보고 이제 시가 이해가 간다고 좋아했으면 좋겠다. 그리고 시를 읽은지 2n년 만에 처음으로 울었으면 좋겠다.
왜 그 시 있잖아 내 신발은 십구문 반
시는 나이들어야 이해가 가는 법,학교 다닐 때 억지로 읽은 시가 가슴 속에서 부풀어 오르는 걸 느낀 마흔 줄 공돌이가 싱숭생숭해서 잠못들고 옆집 홀아비 불러 술이나 마셨으면." 

그걸로 쓴 건데요
....문제는 짧은 썰이 요 아래 나올 글보다 재미없다는 겁니다. 왜 이런 걸 5800자나 썼을까...




공돌이에게는 인문학적 소양이 없다는 말은 맞는 동시에 틀린 말이다. 적어도 권리모는 그렇게 생각했다. 물리학과 수학은 철학의 적자(嫡子)이다. 이 세계가 어떻게 이루어져 있나를 탐구한다는 점에서는 적어도 과학이 철학과 동등하다고 생각한다. 정치철학이나 인간존재에 대한 탐구와는 또 다르지만 철학이 그것만 다루는 것은 아니니까. 애초에 세상이 어떻게 존재하는지에 대한 탐구에서 시작했으니 말이다. 게다가 현대의 사변적인 철학과 이론물리학, 수학은 분명히 맞닿아 있었다. 철학자가 수학 공식을 가지고 저서를 만든 예도 봤었지. 수학의 증명과 철학의 논증도 굉장히 닮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공계 학생이 그런 책을 즐겨 읽을 거라고 보통은 생각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공학도에 대한 숱한 편견이란. 리모는 기계를 다루는 사람들은 매우 단순한 사람들이라 말도 논리적으로 하지 못하고, 논리적으로 사고를 전개할 수 없다는 편견을 생각하며 쓴웃음을 지었다. 공학자도 사람이다. 매체에서 묘사되는 미친 과학자처럼 아무 생각 없이 오로지 자신의 연구를 위해서만 움직이지도 않는다. 과학도 사회적 관계망 사이에 놓인 학문이고 그 사회가 우선시하는 가치에 의해 좌우되는 부분이 있었다. 근대의 과학과 지금의 과학이 추구하는 바는 같을지라도, 그것이 사회에서 어떻게 작용하는가는 또 다른 문제니까. 그러므로, 공학도도 인문학적인 사고는 가능하다는 것이 권리모의 믿음이었다. 아니, 그런 사고를 굳이 인문학이라고 번역해서 이공계에 종사하는 사람들과 은연중에 분리하는 자세 자체를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시를 읽고 소설을 이해하는 일은 어려운 일이었다. 고등학교 때 제일 싫었던 과목이 한문이고 그 다음이 국어였다. 문법은 재미있고 논술도 할 만 했지만 문학만 보면 책에서 손을 놓고 싶었다. 대체 사람은 왜 시를 쓰는 것일까. 하다 못해 가정 수업에서는 요리하는 법이라도 배우거늘 국어 시간에 배우는 시는, 도대체가 그 쓸모를 짐작하기가 어려웠다. 도운과 함께 들었던 고등학교 시절의 문학 수업을 떠올렸다. 지금 자기 나이쯤 되었을까, 키가 작고 표정이 부족하던 국어 선생은 시 같은 거 왜 배우냐고 울부짖는 과학도들에게 항상 그렇게 말했다. 시는 나이가 들어서 보면 또 읽는 맛이 다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걸 언제 읽어야 되느냐, 10대에 읽어야 된다는 거죠. 알다시피 뇌는 어릴 때 제일 잘 돌아가요. 이건 여러분이 나보다 더 잘 알 거 아냐. 그러니, 지금 머릿 속에 부지런히 넣어 놓으세요. 언젠가, 나중에 나이 들어서 인생이 뭔지 좀 알게 되면, 그때 시를 읽는 겁니다. 읽으려고 해도 아예 모르면 못 읽으니 지금 배워 놓는 거예요.
그때 자신은 아이들과 함께 선생님의 말에 힘껏 야유했고, 너희도 시간이 지난 뒤에는 뒤에는 내 말을 이해하게 될 거라는 교과서적인 답변만 들었을 뿐이다. 그때 도운은 뭐라고 했더라? 제법 진지하게 그 말을 듣고 있었던 것 같다. 국어 성적은 자기보다 좋지도 않았으면서 수업은 정말 열심히 들었었지. 리모는 교복을 입고 웃고 떠들던 시절을 떠올렸다. 확실히 뭐든 배우고 싶고 해 보고 싶어 안달이 나 있었다. 세상 모든 것이 재미있어 보이는 동시에 따분해 보이던 신비로운 시절이었다.

도운에게 로봇을 같이 만들어보자고 한 것도 벌써 20년도 훨씬 전의 일이었다. 확실히 시간은 착실하게 흘렀다. 자신도 시간의 영향을 받았다. 늙었다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더 이상 젊다고만 말하기는 어려웠다. 그때처럼 뭐든 쉽게 이해가 되지는 않았다. 쉽게 배우거나 생각을 바꾸기도 점점 어려워졌다. 나이가 들면 계산도, 식을 이해하는 것도 한창 때처럼은 되지 않는다고 했다. 그런 점에서 아마 앞으로 점점 더 덜 젊게 생각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때보다 덜 무모하고, 덜 서투르다는 점은 좋았다. 배움에는 때가 있고, 배운 것을 깨닫는 것에도 때가 있는 법. 어려서 싫어했던 과목들은 모두 그런 메시지를 자신에게 주는 과목이었다. 확실히 소설도, 어쩌다 가끔, 일 년에 한두 권 읽을까 말까 하기는 하지만 나이 들어 다시 보니 어려서 읽을 때와는 느낌이 다르기는 했다. 상처받고 배우면서 어른이 되어간다는 게 이런 거겠지. 리모는 옆집에 사는 자신의 친구를 떠올려 보았다. 어릴 때부터 어른스러웠지만, 요즘은 더 뭐랄까, 어른스럽다고 해야 할지, 아버지다운 모습이라고 해야 할지, 아무튼 어릴 때와 다른 모습을 보이곤 했다. 자신보다 오랜 시간 동안 아버지의 삶을 경험해 왔기 때문이겠지. 뭔가 단호하고, 심지 굳은 인간이 된 것 같았다.
언젠가는, 자신도 저 아이의 아버지로서 떳떳하고 당당할 수 있을까.

세모는 시험이 끝났다고 하나두리에 오공이까지 같이 놀러나갔다. 노래방에 갈지 당구장에 갈지 고민하는 눈치였지만 아마 2:2로 게임을 하러 갈 것 같다. 오공이가 양학 수준으로 게임을 잘 한다던가. 애들 노는 게 자신이 10대 때와 큰 차이가 없다는 게 신기한 일이었다. 중간고사가 끝나고 아이들이 집을 비운 늦은 오후, 저녁 찬거리를 준비하지 않아도 좋고 하루 정도는 연구실에서 나와도 좋은 날이었다. 그 황금 같은 오후에 리모가 선택한 것은, 집안 청소였다. 로봇 청소기를 매일 돌리기야 하지만 청소는 기본적으로 사람 손이 가야 하는 일이다. 세모 시험 기간 동안 수학 공부를 봐준다 간식을 해 준다-만들다 실패해서 주방을 엉망으로 만들었다는 게 진실이지만- 하다 보니 청소를 며칠 못 했다. 먼지도 좀 털고 정리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평소에는 세모가 집안일을 하지만, 시험기간 사흘 정도는 집안일을 안 해도 된다고 말해뒀다. 무척 걱정스러운 얼굴이었지만, 이럴 때라도 좀 아이답게 자기 눈 앞의 문제만 신경쓰는 걸 보고 싶었다.
주방 렌지 아래까지 세제를 묻혀서 닦고, 거실 소파 아래까지 청소한 다음 세모 방으로 들어갔다. 연구실은 일단 집 청소를 한 다음 나중에 청소할 생각이었다. 솔직히 리모는 조금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문을 열었다. 방을 좀 어지럽혔을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이 없지 않았다. 하지만 세모의 방은 이 집에서 가장 깨끗했다. 세모가 펴둔 국어문제집이 그대로 놓여 있는 게 다였다. 뭐든 열심히 하는 아이였고, 무슨 과목이건 잘 하려고 열심이었다. 학교 선생님들은 세모가 참 어른스럽고 반듯하다고 칭찬하곤 했다. 애가 너무 반듯하고 어른스러워도 안 되는데. 리모는 아직도 이 아이가 자신을 아버지라기보다 양아버지로 인식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걱정스러웠다. 어려서 본 소설 속의 착한 여자아이는 친어머니에게는 엄마라고 부르면서 살갑게 굴었지만, 나중에 들어온 착하고 예쁘고 고운 새어머니에게는 절대로 엄마라고 부르지 못했었다. 정말 좋아하는데도 엄마보다는 어머니 소리가 먼저 나오더라는 소설 속의 묘사가 생각이 났다. 세모가 칭찬 받을 때마다 뿌듯한 것도 사실이었지만 한편으로 걱정되는 것도 사실이었다.
이게 아버지의 마음이라는 건가. 솔직히 아직도 낯선 기분이었다. 하지만 매일매일이 새롭고 즐거웠다. 자전축이 비틀리고 우주가 재구축되는 경험이기도 했다. 도운에게 언젠가, 애가 생기니 패러다임이 바뀌는 기분이라고 했더니 도운이 아인슈타인 전의 물리학과 아인슈타인 후의 물리학과 같은 기분이라고 대꾸했다. 우린 안 될 거라고 한참을 웃었던 기억이 났다. 아마 남들이 들으면 무슨 비유가 그렇냐고 하겠지만, 그들의 세계에서는 그 이상 가는 비유가 없었다. 아버지가 되기가 참 어찌나 어려운지. 아이가 자기에게 오고 벌써 몇 년이 지났고, 그간 죽을 고생도 하고 서로 의지하면서 살았지만, 아직도 자신이 아이의 아버지가 맞는지는 가끔 알 수 없었다. 자신에게는 이 아이가 하나뿐인 아들이고 가족이었지만, 그 아이도 그렇게 생각해 줄까. 중학생이 된 지금도 아이는 다정하고 상냥해서, 사춘기라고 속을 썩여대는 다른 집 아이들의 이야기가 먼 나라 이야기 같았다. 하지만, 그건 친부모자식간이라 가능한 일이겠지. 리모는, 자신이 아직 아버지로서 부족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다정하기만 해도 안 되고, 엄하기만 해도 안 되고, 마음을 있는 대로 표현하되 절제할 줄 알아야 하고, 아이가 원하는 것을 해 주되 지나치지 않아야 하고...의식을 하기 시작하면 머리가 아파온다. 숨 쉬듯 자연스럽게 아버지로 존재하는 옆집 사는 친구를 생각하며 리모는 자신이 아직도 부족해서 세모가 저렇게 반듯하고 어른스러운가 하고 생각했다.
리모는 무심결에 세모의 책상 위에 있는 문제집에 손을 댔다. 어릴 때 부모님은, 자신이 책상 위에 펴 놓고 간 공책이며 책을 꼭 읽어 보고, 숨 넘어가게 웃거나 야단을 치거나 했다. 글씨가 왜 그러니, 수업 시간에 뭐 한 거니. 세상에 이 글 좀 봐. 리모가 이런 생각도 다 하네. 자신은 한 번도 아이가 공부하는 책을 그렇게 본 적이 없었다. 수학 문제라면 같이 풀어봤고 과학 공부라면 함께 해 봤지만, 그 이상을 해 본 적은 없는 것 같다. 부모님이라면 아마, 아이를 야단치는 것도 칭찬하는 것도 좀 더 쉬웠을지도 모른다. 세모가 연필을 꽂아놓은 페이지를 편 리모는, 아주 오래 전 학교에서 선생님이 하셨던 말씀이 머릿속에서 터지듯 굴러나오는 기분이 들었다. 시는 나이 먹어서 읽어야 진짜로 이해를 할 수 있는 거야.

    가정
                  박목월


 지상에는
 아홉 켤레의 신발.
 아니 현관에는 아니 들깐에는
 아니 어느 시인의 가정에는
 알전등이 켜질 무렵을
 문수(文數)가 다른 아홉 켤레의 신발을.
 
 내 신발은
 십 구문 반(十九文半).
 눈과 얼음의 길을 걸어,
 그들 옆에 벗으면
 육문 삼(六文三)의 코가 납짝한
 귀염둥아 귀염둥아
 우리 막내둥아.
 
 미소하는
 내 얼굴을 보아라.
 얼음과 눈으로 벽(壁)을 짜올린
 여기는
 지상.
 연민한 삶의 길이여.
 내 신발은 십 구문 반(十九文半).
 
 아랫목에 모인
 아홉 마리의 강아지야
 강아지 같은 것들아.
 굴욕과 굶주림의 추운 길을 걸어
 내가 왔다.
 아버지가 왔다.
 아니 십 구문 반(十九文半)의 신발이 왔다.
 아니 지상에는
 아버지라는 어설픈 것이
 존재한다.
 미소하는
 내 얼굴을 보아라


아, 이래서 나이를 먹어야 시를 이해할 수 있다고 말한 거구나. 리모는 20년도 훨씬 전의 국어 수업이 이제야 제대로 끝난 기분이 들었다. 

그렇구나, 아버지가 된다는 것은. 오래 전 이 시를 보았을 때는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보이는 기분이었다. 이제 좀 있으면 세모는 분명 자신보다 키가 클 것이고, 신도 더 큰 것을 신을 것이다. 벌써 의수나 의족도 처음에 만든 것에 비해 얼마나 커졌는지 모른다. 그래도, 맨 처음에 이 아이를 데려 왔을 때 만들었던 작은 손발은, 아직도 자기 것처럼 기억하고 있다. 자기 손을 꼭 잡고 걷던, 차가운 손도. 자신의 손과 차갑고 작던 아이의 손의 대비며, 출소한 자신을 붙들고 울먹이던 아이며, 자기 때문에 힘들었을 때 울음을 참던 아이의 얼굴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때마다 아이를 지키기 못했던 것을 자책하던 자신의 모습도 떠올랐다. 얼음과 눈으로 벽을 짜올린 지상과 연민한 삶의 길을 지나서 온 집이라. 어쩐지 울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문제집을 놓고 세모의 방을 청소할 때까지도 괜찮았건만, 코를 훌쩍거리면서 청소기를 돌리던 리모는, 손으로 눈을 문지르다 결국 연구실에서 정비하던 제트와 제로를 수면모드로 전환해 놓고 혼자 소리 죽여 울었다. 20여년 전에 이해 못했던 것을 긴 시간이 흐른 뒤에 이해하게 되었으니 20년 분만큼 울 일도 많을 것이라고 혼자 생각했다.

아이들이 저녁을 밖에서 먹고 들어온 다음, 도운이 하나와 두리를 붙잡고 늦었다고 잔소리를 한참 하고 저녁 부실하게 먹었다고 또 한참 잔소리를 하고 대충 정리를 한 다음, 애들이랑 드라마라도 같이 볼까 하던 찰나에 전화가 왔다. 아이들은 리모컨을 잡고 서로 채널을 돌리겠다고 신경전을 벌이고 있었다. 그만 하고 서로 양보하라고 한 마디 한 다음 켠 전화에는 리모의 얼굴이 떠 있었다.
-도운, 뭐 하냐.
“잘 준비 하지.”
늦은 시간에 전화하는 일이 잘 없는 친구가 갑자기 전화를 해서 조금 놀랐다. 혹시나 무슨 일이 있는 것은 아닌가 생각하며 도운은 최대한 상식적인 답을 했다.
-그럼 자는 거 아니네?
“뭐 그렇지.”
-그럼 나랑 술 한 잔 하자.
“나야 좋지만, 애들은?”
-애들은……뭐 알아서 자야지. 이제 중학생이잖아.
“뭐 할 말이라도 있어?”
어쩐지 리모의 목소리가 좀 가라앉아 있다고 생각했다. 정작 리모는 엉뚱한 대답을 했다.
-우리 고등학교 때 문학 선생님 기억 나냐?
“응? 갑자기 무슨 소리야.”
-아니야. 아무튼 그럼 내가 너네 집으로 갈게.
“응? 우리 집엔 아무 것도 없는데?”
-내가 가져 간다. 안주는 됐고 물이나 준비해. 내일 숙취로 죽기 싫거든.
뭘 얼마나 퍼마시려고 이러나. 제법 비장하게 말하고 끊는 리모의 목소리를 들으며 도운은 잠시 멍하게 있다, 하나와 두리에게 얼른 올라가서 자라고 말했다. 아빠와 아저씨는 지금부터 좀 진지하게 긴 이야기를 해야 할 것 같다고.
어쩐지 독한 게 마시고 싶어서, 세모 모르게 연구실에 숨겨둔 비장의 중국술을 꺼내 들고 가면서, 리모는 언젠가 세모를 데리고 서점에 가서, 같이 책을 골라서 읽어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내가 좋아하는 책을 알려주고, 언젠가 너도 내가 이해하는 것을 이해하게 될 것이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그 날이 그렇게 멀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쓰고 만든 것 > 그 외' 카테고리의 다른 글

[검사제]목욕탕에 간 김최  (0) 2016.04.24
[또봇]회장님과 나  (2) 2014.09.28
[한니발]백정 살인 사건  (0) 2014.06.09
[한니발]죽은 순교자를 위한 제의  (0) 2014.03.09
[한니발]만찬  (0) 2014.02.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