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봇]회장님과 나

요새 이런다고 바빴어요.

부릉모터스는 사원복지가 잘 될 거 같습니다. 악당이니까 오히려 더 잘 할 거 같은 느낌...안젤라가 속았다고 화낸 거 보면 가능성 있잖아요.

 

부릉 모터스의 새 회장은 면담을 요청하는 노조위원장의 공문에 흔쾌히 답을 했다. 회장실 비서가 전화해서 그날 시간을 비워놓았으니 와 주시라고 했다. 몇 번은 튕기거나 자신을 노골적으로 피하는 회장들에 익숙해져 있었던 노조위원장은 조금 당황했다. 금속노조 산하 부릉 모터스의 노조는 그 중에서도 강성으로 소문이 났다. 빨간 띠 부르고 여덟자 구호를 목 터져라 외치면서 시위를 해 대는 이미지로 워낙 유명하다보니 싫어하는 것도 이해는 갔다. 하지만 근무조건 최악이라고 소문난 부릉모터스였다. 모 대기업도 요새는 노조가 있는데 무슨 노조라면 흰 눈을 뜨고 보는지. 처음에는 대화로 해결하려고 했던 게 잘 되지 않았던 것 뿐이었다. 인사부장과 치고 받고 싸웠으며 전임회장 사무실을 점거해 보기도 했고 시위도 뻑적지근하게 해 봤다. 그런데 회장도 참 끈질긴 인사였다. 임원진들과 똘똘 뭉쳐서 노조라면 흰 눈으로 보는 게 아닌가. 임금인상이고 사원복지고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처우 개선이고 뭐 하나 제대로 되는 게 없었다. 이번에는 비정규직을 정규직으로 바꾸는 데 꼭 성공하고 말 것이다. 노조위원장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금속노조가 대한민국 최대의 강성노조가 된 데는 다 이유가 있다. 열악한 노동환경을 개선하기 위한 선배들의 피와 땀이 그나마 월급이라도 남들만큼 받고, 제 목소리를 내게 만들어 준 것이다. 발악하지 않으면 아무 것도 얻지 못한다는 것을 공장에서 기계만도 못한 취급을 받으며 배웠던 옛날 7, 80년대 노조의 정신을 이어받으려고 노조위원장은 노력했다. 21세기에 들어 운동권이라는 것이 옛말이 되고 시대착오가 되었을 때 마지막으로 노동운동에 뛰어들었던 위원장이 이제 50대가 되었다.

30대 초반 젊은 회장이라고 했는데 세상 물정을 모르는 부잣집 아들이 무슨 회장이라고. 한국에서 부가 세습되는 과정은 좀 문제가 있다. 젊고 어린 남자애가 회장 자리를 꿰어찼는데, 회사에서는 다들 낙하산이라고 떠들어대고 있다.

그냥 사회를 책으로만 배워서 어줍잖은 동정심으로 노조를 이해하려고 드는 놈이면 박살을 내서 머리를 한 번 깨 주면 말이 통할 것이고, 순진하고 철없는 부잣집 도련님이면 쉽게 요리하기 좋을 것이다. 동지들의 밥줄이 나에게 달려있다! 심호흡을 하고 회의실 문을 열자, 백발이 제일 먼저 눈에 띄었다. 평범한 남색 줄무늬 정장 차림에 앳된 얼굴의 젊은 남자가 하얀 머리를 하고 서 있었다.

뭐야 저거. 젊은 남자는 손에 커피잔을 들고 있었다. 회장이랑 둘이만 보기로 했는데 저 어린 남자애는 뭐지. 회장실 비서가 남자였는데 혹시 그 비서인가. 엉거주춤한 자세로 문을 잡고 서 있던 노조 위원장은 회의실 안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어린 남자애와 자신 둘 뿐이었다. 설마 저 어린 게 회장일 리가.

“아, 저.”

“노조위원장이십니까.”

백발 남자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네, 그, 신임 회장님은...”

“제가 권리모입니다. 앉으세요.”

20대로 보이는 앳된 남자는 손에 들고 있던 커피잔을 내밀었다. 엉겁결에 커피를 받아든 노조 위원장은 그냥 자리에 앉았다. 뭐 저렇게 어린 게 회장이야.

 

앉자마자 준비해 온 제안서를 읽던 젊은 회장은 인상을 찌푸렸다.

“무슨 비정규직이 이렇게 많아요?”

“네?”

비정규직이 얼마나 많은지에 대해 열변을 토하려던 노조위원장은 잠시 멈칫했다. 내가 할 말을 왜 회장 니가 하십니까? 라는 말을 참은 것이 대단했다. 회장이 서류에 형광펜으로 줄을 그었다.

“월급 적게 주고 부려먹는 게 제일 나쁘지. 안 그래요? 제대로 월급받아 가면서 일해도 야근하다 보면 죽을 맛이잖아요. 생산라인에 계시는 분이 제일 잘 아시겠지만. 일은 똑같이 하는데 월급을 적게 주려고 비정규직 하는 거잖아요.”

노조위원장은 왜 내가 할 말을 회장이, 그것도 열을 올려가면서 성토하듯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회장은 정말 진심으로 분노하고 있었다.

“아니 뭐, 그건 그런데요.”

“게다가 야근수당을 이거밖에 지급 안 했다고요? 해도해도 너무하네.”

야근 수당만 제대로 받았으면 내가 도운네 아이들한테 분유를 한 통 더 사다먹이고 장난감을 하나 더 사 줬다, 하는 투덜거림이 들렸다.

“분유가 뭐라고요?”

“네?”

“아뇨, 방금 누구 애들한테 분유 어쩌고 하셔서 그럽니다.”

꼭 드라마에서 갓 빠져나온 것처럼 멀끔하게 앉아있던 젊은이의 등이 갑자기 무너졌다. 자세는 여전히 꼿꼿했지만, 뭔가가 빠져나간 것 같았다. 퀭한 두 눈이 크게 벌어졌다. 말을 잃고 망연자실해 있는 사람을 보고 노조위원장은 불안한 기분이 들었다.

“회장님?”

“아, 제가 혼잣말을....”

간신히 대답을 한 젊은 회장은 침울한 얼굴로 먼 곳을 쳐다보았다. 저 사람 갑자기 왜 저러나 싶어 노조위원장은 가만히 회장의 앳된 얼굴을 쳐다보았다. 갑자기 왜 시무룩해져서 저러지. 아까 한 말은 또 뭐고? 불안하게 흔들리던 눈동자가 자기 등 뒤의 먼 데를 쳐다보았다. 잠시 후 회장의 눈빛이 다시 아까와 같은 것이 되었다.

“다시 하던 이야기 하죠.”

뭔가 기괴한 위화감이 들었으나 노조위원장은 거기에 대해 입을 열지 않았다.

 

한참 이야기를 하던 리모가 제안을 했다.

“일단 적어오신 건 잘 알겠습니다. 지금 저희가 이걸 다 할 수 있는 형편은 아니에요. 탁아소는 사무실 늘린 다음에 짓겠습니다. 비정규직 고용은 차차 해야 하고요. 그렇지만 일단, 야근 수당에 대해서는 확실하게 하겠습니다.”

“너무 많이 깎으시는 거 아닙니까. 일단 야근수당이랑 사원복지, 그리고 비정규직이 우리 노조에서 제일 중요하게 여기는 부분입니다. 그 외의 부분은 양보한다 쳐도 저건 좀 어려운데요.”

“위원장님도 제가 깎을 거 아시고 100 적을 거 150 적어오신 거 아닙니까. 우리 타협해서 60-70까지만 갑시다. 저도 취임한지 얼마 안 돼서 아는 것도 없고.”

“설마 이쪽이 을이라고 생각하고 막 나오시는 건 아니겠죠?”

“설마요. 제가 연구직 출신이라 직원 복지에는 관심이 많은 편입니다. 그 부분은 믿어주셔도 좋아요.”

“뭐, 좋습니다. 하반기에 또 만나서 진행할 땐 깎으시면 곤란하고요, 우리 노조는 언제건 불의에 항의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점만 명심하십쇼.”

눈에 힘을 주며 대답하자 젊은 회장은 히죽 웃었다.

“앞으로 자주 뵙겠네요. 잘 부탁드립니다.”

노조위원장은 어딘가 이상한 새 회장이 조금 마음에 들었다. 사람이 좀 이상하긴 했지만, 일단 말이 통할 것 같았다. 위선이면 어떻고 젊어서 물정을 모르면 어떻냐. 일단 말이 통한다는데.

 

새 회장이 등장하고 회사 탕비실이 풍족해졌다.

밥심 모카 골드, 통칭 밥모골이라 불리는 노란 커피믹스와 헬식스밖에 없던 탕비실에 야근 근무자들을 위한 간식 명목으로 녹차며 루이보스, 허브차 티백과 식빵, 컵라면과 토스터기가 추가되었다. 은근슬쩍 과일이 추가되는 날도 있었고-그 계절에 제일 싼 과일들이나마 과일이 있다는 건 좋은 일이었다- 어디 양계장이랑 계약을 했다면서 회사식당에서 계란을 잔뜩 삶아놓기도 했다. 사원들은 공돌이 출신 회장이라더니 월화수목금금금 저거 먹고 일하라는 뜻인가 하고 수군거렸다. 그러나 야근수당이 제대로 나온 월급명세서를 보고 다들 경악했다. 죽도록 야근을 하라는 뜻이냐고 야유를 보내던 노조위원장은 돈으로 야근을 시키다니 애초에 야근을 많이 해야 하는 풍조가 정상이 아니라며 투덜거렸으나 야근수당 자체에 대해서는 노조 전체를 대변하여 환영하는 입장을 밝혔다. 돈이 제대로 나오는데 불평하는 사람은 없다. 헬식스 먹고 호랑이 기운을 내서 야근을 하겠노라 입을 모았다. 다들 새 회장이 돈이 어디서 나서 저러냐고 뒷말들이 많았으나 그 며칠 후 발표된 신기술을 보고 납득했다. 회사의 주가가 신나게 오르고 있었다. 돈 벌어서 직원 복지에 쬐끔 투자한다는데 임원진이 불만을 가질 리도 없었고 해서, 브룽모터스의 탕비실은 나날이 아늑해지고 있었다. 게다가, 회사 총무부에서 탕비실에 투자하는 가장 큰 이유는 따로 있었다.

"우리 탕비실 이렇게 운영해도 회장님 화 안 내세요?"

신입 연구원이 순진한 얼굴로 묻자 주임은 뭘 모르는 놈, 하는 표정으로 신입을 쳐다보았다.

"몰랐냐? 회장님 우리 회사에서 제일 야근 많이 하잖아. 그래서 밤에 탕비실 가면 자주 봐. 너도 좀 있으면 만날 걸?"

"회장이 왜요?"

"우리 신기술 다 그 사람 작품이잖아. 특허만 몇 갠데."

주임은 눈쌀을 찌푸리고는 뭔가를 떠올리듯 먼 산을 보았다.

"그러고보니 학교 다닐 때 꼭 회장님이랑 닮은 후배가 있었는데...설마. 걔는 멀쩡했어. 호피 같은 거 안 입고. 어, 안젤라 선임, 우리 학교 다닐 때 회장님 닮았던 걔 이름이 뭐였지?"

"...몰라요."

어쩐지 퉁명스러운 말투로 대답한 선임연구원은 손에 커피를 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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