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니발]죽은 순교자를 위한 제의
- 쓰고 만든 것/그 외
- 2014. 3. 9. 13:24
발렌타인데이 합작입니다. 주최하느라 고생하신 주최님과 합작에 참여해주신 분들, 그리고 읽어주신 분들께 한 번 더 감사인사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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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렌타인 데이의 순교자는 로마의 젊은이들을 위해 죽었다고 한다. 물론 정말 그랬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다산의 신을 위한 로마의 축제를 못마땅하게 여긴 기독교인들이 그 축제의 날을 순교한 성인을 위한 날로 만든 거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애초에 당일에 순교한 성 발렌티노가 누구인지도 모른다. 고작 몇 백년 전 어느 사제의 설교에서 시작된, 기이하다면 기이한 날이다. 더구나 혼인하기 위해 죽음을 무릅쓰다니, 그것부터가 말이 되지 않는다. 로마의 군인들이 그렇게 낭만적인 혼인에 목을 매는 사람들이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로마 군대에 사실혼 관계였던 군인이 얼마였다던가. 그것도 기독교 사제가 집행하는 결혼식을 위해서. 전설이 생긴 지도 천년하고도 수백 년이 더 지났고, 사랑을 고백한다는 낭만적인 포장을 뒤집어쓴지도 몇백 년이 지났다. 이제 와서 본래의 전설이 어떤 것이었는지, 왜 그런 전설이 생긴 것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아무튼 발렌타인 데이는, 축제였으리라는 점이 중요하다. 카니발에는 언제나 폭식의 향연이 따르기 마련이다. 기나긴 금욕의 뒤에 펼쳐지는 향연이라면 그럴 만한 가치가 있게 치러져야 한다. 금욕적인 순교가 폭식과 상관이 없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 순교 또한 제 살을 깎아 남을 먹이는 행위가 아닌가. 살을 씹고 피를 마신다는 점은 같다. 그러므로 자신의 식탁에서 벌어질 탐식이라면 환영이다. 단 식탁에 앉을 자가 식료품이 아닌, 동족일 경우에 한해서.
그 동족과의 식사에서 가장 방해가 되는 것은 동족 자신이다. 윌 그레이엄은 먹는 행위에 관심이 없다. 무엇을 내줘도 맛있다고 하지 않는다. 무엇이든 그냥 먹는다. 이렇다할 느낌 없이 그저 씹어 삼키기만 하는 것을 먹는다고 불러도 좋을지 모르겠다. 그에게 먹는 행위는 연료를 공급하거나 불안한 마음을 어느 정도 가시게 하거나 어색함을 없애주는 행위에 불과한 것 같다. 그렇게 추측해 본다. 하지만 카니발에 참가하는 것도 동족으로서 할 일이다. 본인은 모르겠지만. 왜 축제의 핵심에는 외부인을 끼워 넣지 않겠는가. 같은 무리 안에서 은밀하게 행해지는 축제라는 것도 분명히 존재한다.
카니발이므로, 고기이다. 나머지야 어쨌건 메인은 육식이다. 살을 찢고 육즙을 삼키는 것이 본질이다. 그리고 시류에 편승하기로 한다. 버터를 녹이고 크림을 약간 부은 다음 육수를 넣고, 크렘 드 카카오를 조금 붓는다. 초콜릿이 들어가지 않았는데도 초콜릿 향이 살짝 돈다는 점이 흥미롭다. 지금까지도 이런 자들은 많았지만, 진심으로 동족으로 여길만한 자는 많지 않았다. 하다못해 동료로 느낄 만한 자도. 밑준비가 끝난 다음에야 비로소 카카오 함량이 높은 요리용 초콜릿을 녹인다. 잠시 저어주자 버터가 들어간 초콜릿소스의 표면에서 매끄러운 윤기가 돌았다. 다른 재료는 넣지 않는 게 낫다. 스테이크 감으로 소금과 허브에 절여둔 고기는 마침 알맞게 굽기 좋은 상태다. 프라이팬을 데웠다. 올리브유를 발라놓은 고기가 팬에 올라가자마자 좋은 소리를 내며 익었다. 겉만 살짝 익힌 레어가 적당하다. 진한 소스 때문에 윌 그레이엄도 껄끄러워하지 않을 것이다.
고기가 익을 동안 몇 가지 준비만 더 하면 식사준비가 끝난다. 고기에 어울리는 좋은 와인을 준비했고, 가니쉬도 예쁘게 썰어놓았다. 윌 그레이엄의 눈에야 먹을 것으로 부리는 사치 정도로 보이겠지만 사치를 부린 음식은 맛있어 보인다. 특히 몸이 아플 때에는 아주 사소한 것이 감동적인 법이다. 지금 그는 열에 신음하며 누워있다. 예의 그 병이다. 열에 들떠 환각을 보다 여기까지 온 것이다.
어째서 여기까지 왔을까. 참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리고 한편으로 사람이 사람을 믿게 하는 것은 의외로 간단한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자신에 대해 조금만 생각해 보면 수상한 점이 많았을 것이다. 홉스가 죽기 전의 정황도 그렇고 애비게일도 그렇다. 윌 그레이엄이 거기에서 자신이 범인임을 아직도 알아내지 못한 것이, 가끔은 의아하기도 하다. 아마 어쩌면, 자신을 조금은 수상하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윌은 자신을 믿었다. 믿는다기보다는, 본능적으로 여기에 와야 한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는 것이 아니고 그러므로 믿는 것이다. 그는 아마도 여기에 정답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 정도도 해내지 못해서야 동족이라고 할 수 없다.
그래서, 조금 더 몰아붙이면서 당근과 채찍을 동시에 써 보기로 했다. 간단한 처방으로 열은 조금 내릴 수 있었다. 하지만 굳이 그렇게 하지 않고 그대로 둔 것은 가장 약해지고 궁지에 몰렸을 때, 가장 잡기 좋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약해지지 않으면 먹이조차 줄 수 없는 최상의 사냥감이다. 그리고 오늘은 우선 먹는 것부터다. 아주 작은 양으로, 조금 맛을 보고 나면 새로운 맛과 향을 가진 음식이 나오도록. 단 것을 먹고 나면 짭짤한 것을, 바삭한 것을 내 온 다음에는 입에서 녹는 거품 같은 식감을, 그리고 순한 것을 먹은 다음에는 자극적인 것을. 계속 먹을 수 있는 비결은 거기에 있다. 먹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도 예의상 먹을 수 있을 정도의 양과 다양한 맛으로. 그리고 꼭, 축제답게 먹는 것을 즐길 수 있도록. 차갑게 식힌 성게 무스의 상태를 점검해 본 다음에야 식사준비가 끝났다. 팬에서 고기를 덜어내 접시에 담고, 초콜릿 소스를 부어 장식했다. 접시의 테두리에 소스를 살며시 덜어내 장식해 레이스처럼 무늬를 만들어내는 동안 늘어붙은 초콜릿이 가는 실처럼 접시 가에 떨어진 것을, 손으로 훑었다. 평소답지 않은 일이었다. 손 끝에 묻은 초콜릿은 씁쓸하고, 끈적거리고 약간 달았다.
접시를 식탁에 올리도록 윌 그레이엄은 일어나지 않는다. 몸을 뒤척이며 앓는 소리를 낸다. 당신에게 필요한 것은 먹는 행위 그 자체이지. 소파에 누워있는 그의 귓가에 나직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윌, 일어나요."
열에 들뜬 몸으로도 재빠른 동작으로 일어난 윌 그레이엄이 경계하는 표정으로 자신을 보는 것이 즐거웠다.
"박사님."
적을 보는 표정으로 자신을 노려보았다는 것을 본인이 인식하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 눈이다. 그렇게 자신을 보는 것이 좋다.
"약을 먹기 전에 좀 제대로 먹는 게 좋겠습니다."
환자를 걱정하는 담당의의 표정이라면 아주 잘 만들어낼 수 있다. 아니 실제로 걱정하고 있으니 만드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저는……."
물론 사양할 줄 알았다.
"한 번도 내 집에서 제대로 식사한 적이 없지요."
"박사님, 그건 지금 중요하지 않아요."
"아니요, 먹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이야기했습니다. 환자에게 의사로서 말하는 겁니다, 윌."
"그런 거야 이해하지만 지금 시간이 없잖습니까."
"그게 제일 문제죠. 지금 제대로 먹고 낫지 않으면 수사를 할 수 없을 겁니다."
단호하게 거절하려던 윌 그레이엄이 뭔가 어물어물하더니 입을 다물었다. 저런 점이 좋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동시에 실망스럽기도 했다. 먹는 것이 자신의 일부이거늘 어떻게 저렇게 먹는 것에 소홀할 수가. 이 식탁이 어떤 비의를 담고 있는지 그는 모른다. 그 비밀을 아는 자만이 사실은 이 식탁을 참으로 즐길 수 있는 것이다.
"별 거 아닙니다. 부담스럽지 않을 정도의 양으로만 준비했어요."
평소보다 식탁 위의 장식을 줄이고 접시를 작은 것을 준비한 것만으로도 윌 그레이엄의 얼굴에는 안심한 기색이 떠올랐다. 예를 들어 이 수프의 육수에 얼마나 많은 채소와 고기가 들어갔는지를 안다면, 이 접시가 어떤 물건인지 안다면 저런 표정은 짓지 못하겠지. 블루 칼라로 태어나서 자란 윌은 자신 주변의 생활 수준 이상의 무언가를 접했을 때 윌의 반응은 불쾌함에 가까웠다. 자신과 다른 이질적인 것에의 거부감이다. 이 초콜릿 소스를 만들기 위해 들어간 초콜릿이 어떤 것인지, 그리고 이 고기는 자신이 얼마나 공들여서 사냥하고 다듬은 것인지. 식재료가 무엇인지 말해주고 싶다는 충동이 들었다. 이래도 이 모든 것이 이질적일까. 사람을 죽이는 자에게 공감하고 사람을 먹는 자의 심정을 알면서.
"박사님?"
잠시 손을 멈칫한 것을 알아챈 윌 그레이엄이 이상한 눈으로 자신을 본다.
"아, 아닙니다. 윌, 그럼 맛있게 먹어요."
정찬 코스의 순서를 지키지 않은 것은, 우선 이것을 먹여야 한다는 신념에서였다. 방금 구워낸 따뜻한 스테이크가 핏덩어리처럼 식탁에 올라가 있었다. 윌 그레이엄도 그렇게 느낀 것일까. 잠시 주저하던 그가 포크와 나이프를 잡았다.
"박사님도요, 즐거운 식사를."
그가 스테이크를 썰어 입에 넣는다.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미소를 지었다. 발렌타인이 축제라면, 축제의 끝은 육식이어야 한다. 힘을 주어 입 속에 든 인육을 씹자 살이 찢겼다.
즐거운 식사를. 당신에게도 즐거운 축제(cannibal)이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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