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닥터후]도래하는 폭풍, 마지막 남은 타임로드, 그리고 하나 더
- 쓰고 만든 것/그 외
- 2013. 11. 17. 20:59
에클닥이라고 리퀘 받아 썼지만 쓰고 보니 테닥에 가까운 거 같기도 합니다. 몇 달 전에 써놨던 걸 찾아서 좀 정리해서 올려요.
요새 합작이다 뭐다 바빠서 뭘 쓰지를 못 해서 말이죠...
"거기 코쟁이 양반."
항상 서구쪽으로 여행을 다니는 이유가 다 있다. 동양권에 오면 도무지 저 호칭에 적응이 안 된단 말이다. 조선시대에 갔다가 이 오랑캐 어쩌고 하는 수난을 너무 많이 겪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게다가, 이게 문제다. 닥터는 난감한 표정으로 냄비 안을 쳐다보았다. 얼핏 맡기에도 끔찍하게 매운 냄새가 나는 국물 안에 둥둥 떠 있는 빨판 붙은 촉수가 아직도 꿈틀거리고 있었다.
"아 거 코쟁이 양반, 해물탕 어떻냐니까?"
"네?"
"오늘 낙지가 물이 좋았지. 잡은 김에 먹자고. 그러고 바다만 보고 있지 말고 좀 드슈. 맛이 기막혀."
"네? 네...잘 먹겠습니다, 잘."
하필 고깃배를 얻어타 본 게 화근이었다. 뻘에 처음 와 본 로즈가 뭍에서 아줌마들이랑 게 잡고 조개 잡으면서 즐거워하는 동안 남자는 뱃일을 하는 거라고 그래서 고깃배를 타 봤다. 뭐 힘닿는 대로 그물도 당겨 보고 걸린 고기도 큰 상자에 잘 챙겨담아놨다. 나름 일을 도와주고 멍한 기분으로 바다를 보며 지구의 해양생물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 부지런한 어부들이 배 가운데서 이렇게 본격적으로 뭘 조리해 먹을 줄 알았나. 그렇다고 먹지 않을 수도 없었다. 악마의 국물이 버너 위에서 끓고 있었고, 자신의 앞에도 그 국물이 한 그릇 놓였다.
"아까 그물 당길 때 보니까 영 힘을 못 쓰더만. 키만 멀대같이 크면 뭐 하나. 잘 먹어야 힘을 쓰지. 거 양놈들은 노상 빵 같은 거나 먹고 사니까 그런 거 아냐. 그거 먹고 힘을 쓰나? 사람은 밥심이지."
아뇨, 음식문화는 각 문화권에 따라 특수하게 발달하는 법이...지만 이 단순하고 우락부락한 뱃사람들 앞에서 그런 말은 별로 좋은 선택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입을 다물었다. 그릇 안에는 촉수, 아니 낙지가 들어 있었고 조개며 매운 국물이 가득했다. 어디서 챙겨놨는지 깻잎이며 파도 들어 있었다. 깻잎 특유의 매운 향기가 훅 끼치는 순간, 닥터는 콱 배에서 내려 바다를 건너가 버릴까 하는 생각도 했다. 하지만 여행자는 다른 문화에 관대해야 하는 법. 전에는 말머리 성운에서 끓는 자갈이 들어간 국도 먹어 봤고 단추만 넣고 끓인 수프도 먹어봤지. 닥터는 숟가락을 들어 빨판과 파와 국물을 한 숟가락 떴다. 입 안에 들어온 순간, 코로 뜨거운 불을 뿜는 용의 메커니즘을 온 몸으로 배운 기분이 들었다.
"이 양반 이거이거, 양놈 답잖게 참 잘 자시네! 상남자네! 거 더 드슈. 사양하지 말고 많이 먹어요. 아 이거 낙지도 좀 드시고."
뱃사람들은 호탕하게 웃으며 그를 칭찬했다. 문화적 편견이 겹겹이 깔린 칭찬의 어느 포인트에 기뻐해야 할지 모르겠다. 닥터는 애매하게 웃으며 촉수를 입에 넣고 씹었다. 어찌나 질긴지 씹히지도 않았다. 정말 촉수 같네...아니, 거 먹어보면 먹을 만 한 걸 누가 몰라요. 하지만 난 이렇게 생긴 놈을 수백 수천 명을 안다고. 걔네랑 싸웠다니까? 댁들 같으면 이런 걸 먹고 싶겠냐고. 마음 속으로만 비명을 지르고 있는 동안 뱃사람들은 뭘 하는지 시커멓고 콧물 같은 것을 썰어서 자신의 앞에 내밀고 있었다.
"이거 뭡니까?"
"어이쿠 그거 해삼이구먼, 몸에 좋아. 남자한테 참 좋은데 거, 흐흐흐, 설명할 길이 없네. 일단 좀 잡숴 보지?"
손님, 그것도 코쟁이 손님(!)을 대접하느라 자기들이 먹지 않고 참는다는 티를 팍팍 내고 있었다. 눈에서 먹고 싶다는 욕망이 흘러나오는데 안 먹고 사양했다간 산 채로 바다에 던져지겠다. 닥터 인생에서 이런 재생성은 좀 부끄럽지. 숟가락 위에 놓인 시커먼 덩어리를 한참 쳐다보던 닥터는 태연한 얼굴로 해삼을 입 안에 넣었다. 입 안에 물컹하고 비린 덩어리가 가득찼다.
도래하는 폭풍, 달렉의 학살자, 마지막 남은 타임로드, 지금까지 자신의 앞에 붙었던 그 숱하고 화려한 수식어들 위에 닥터는 한 줄을 더 기록했다. 해삼을 태연하게 먹어치운 자다, 달렉이건 사이버맨이건 덤벼 보라지. 아 로즈 엄마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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