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사제]속죄

정동 프란치스코 회관은 가톨릭 관련 행사가 아니라도 각종 인문학행사에 대관처로 사용되는 일이 많다. 한창 이슈가 된 사회학 도서의 출간에 앞서 저자와 독자들의 만남이 기획되어 있어, 조용한 듯 북적거리는 회관 앞에 수도복을 입은 젊은 수사가 서 있었다. 헐렁해 보이는 갈색 수도복의 등에 달린 후드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앳된 얼굴의 대학생쯤 되었을까, 어깨즈음까지 오는 머리에 머리띠를 한 여성이 다가오자 수사는 조용히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었다.
"아, 저기 혹시...최준호 아가토 부..."
"네, 최준호 아가토 신부입니다. 이영신 자매님이시군요."
"아, 이제 신부님이시겠네요..."
영신은 얼굴을 확인하려는 듯 고개를 들어 앞을 쳐다보았으나 준호는 후드를 벗지 않았다. 단호하면서 어색한 인사가 이어졌고, 영신은 자신의 실수라도 지적받은 양 고개를 숙였다.
"아니요, 저도 못 알아봤습니다. 머리도 기르시고, 시간도 많이 지나고 해서요."
"아."
"좋아 보이시네요. 다행입니다."
목소리 때문인지, 영신은 놀란 듯 준호를 쳐다보았다. 준호는 긴장한 얼굴로 서 있는 영신을 향해 조금 웃어보였으나 후드를 눌러쓰고 있는 탓에 입꼬리밖에 보이지 않았다.
"아, ...고맙습니다."
영신은 고개를 푹 숙였다. 
"고맙긴요, 잘 지내시는 걸 확인할 수 있으서 저도 기쁩니다."
준호의 목소리는 부드러웠지만 목이 꽉 잠겨 있었다. 영신을 마지막으로 본 것은 범신이 영신의 눈을 감겨주며 울부짖던 마지막 순간 뿐이었다. 어린 소녀가 결국 죽었나보다, 하는 슬픔도 잠시뿐이었고 마르베스를 강물에 던지기 위해 목숨을 걸고 뛰느라 잠시 영신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못했었다. 나중에야 소녀를 위해 성호를 그을 수 있었다. 죽지 않고 살아있다는 말을 들었을 때는 정말 기뻤고, 축하인사라도 전해주고 싶었지만 준호가 영신을 만날 수는 없었다.  범신이 재판을 받을 때도 영신의 부모가 출석을 했지 영신이 오는 일은 없었다. 미성년자잖아, 애들은 흉한 꼴 보는 거 아니다. 푸른 옷을 입고 손이 묶여 있으면서도 범신은 태연했다. 
영신의 얼굴이 흐려졌다. 
"아, 죄송해요...좀 더 일찍 인사를 드리고 싶었는데 제가, 아무 것도 못 했어서..."
"압니다. 자매님이 잘못하신 건 아무 것도 없어요."
둘 다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영신의 어머니는 그 후 영신이 성당에 나가려는 것조차 반대했다. 네가 거기를 왜 가니, 네가 살아난 건 운이 좋아서지 신의 가호 같은 거 아니다. 신의 가호가 있었으면 저 신부가, 아니지 저건 신부도 아냐, 어떻게 너한테 그러니. 네가 뛰어내리게 만들어. 죄값을 치러야지.
엄마하고 내가 신부님한테 그렇게 한 거잖아요. 신부님이 날 구한 거야, 엄마는 아무 것도 모르잖아. 살아난 건 난데 왜 내 말을 아무도 믿지를 않아? 경찰한테 가서 얘기 해야 해, 신부님은 잘못 없어. 엄마 제발. 아빠도 내 말 좀 들어봐요. 울면서 소리를 질러도, 사정을 해도 아무 것도 달라지지 않았다. 성당에도 나가지 못한 채 재활치료에 1년을 묶여있던 영신이 범신이 청송교도소에 수감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진 것은, 학교에 나갈 수 있게 되고 나서였다.
고개를 숙이고 있던 준호가 한참만에 잠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저도 원장님 말씀만 듣고 나왔습니다만...제가 여기에 있는 줄은 어떻게 아시고 연락을 하셨어요?"
"아, 저 그때 박해진 교수님한테 치료받고 있어서, 아직도 가끔 정기검진하러 교수님한테 가요. 교수님 조르고 학교 신부님들 졸라서, 부, 아니 신부님 여기 계시다고 들었어요. "
"학교 신부님?"
"저 가톨릭대 성신교정 다녀요."
"아, 그럼 신학과...졸업반이시겠네요."
"아뇨, 이제 1학년이에요. 어머니가 반대하셔서. 다른 대학 다니다가 다시 들어간 거라서요."
둘 다 입을 다물었다. 행사가 끝나고 사람들이 모두 이동을 해서인지, 다시 골목은 한산했다. 영신은 고개를 들었다. 유리문 너머에 자신의 얼굴이 비치고 있었고, 갈색 수도복이 보였다.
"그러면 최신부님은, 그분 따라서 계속..."
"네. 그러기로 했습니다. 제가 해야지요."
준호는 마지막으로 범신을 면회갔던 날을 떠올렸다. 아가토야, 네 신부님. 아니지, 이제 아가토 신부님이네. 사제서품도 다 받고, 주님의 은혜가 참으로 놀랍다. 그런 말씀 마십시오. 신부님 덕분입니다. 내가 뭘 했다고. 신부님 덕분에 저는 여기에 있고, 신부님은 거기에 계시지 않습니까. 죄송합니다. 저만... 아니다, 아니야. 핏덩이는 학교 다녀야지. 넌 잘못한 것도 없잖아. 신부님도 잘못하신 거 없잖습니까. 세상의 법이 그러하니 따라야지 어쩌겠냐,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주는 것이라고 주님도 그러셨다. 그러니까 아가토, 다녀와라. 바티칸에서 불렀지? 힘들게다. 신부님도 하셨으니 저도 할 겁니다. 미련한 놈...
마지막 인사가 미련한 놈이 다 뭡니까, 제가 미련한 건 주님도 다 아시는데 뭐하러 그런 걸 말을 해요. 준호는 울음을 간신히 삼키고 평온한 목소리를 낼 수 있을 때까지 숨을 몰아쉬었다. 영신도 아마 여기까지 자신을 만나러 오는 길이 힘들었을 것이다. 자신이 힘든 것만큼. 후드를 벗지 않는 것이 견딜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눈을 마주치고 얼굴을 보며 이야기하면, 더 많은 것이 떠오르고 더 마음이 아플 것이다. 그래도 참고 여기까지 왔으니, 명색이 신부인 내가 참아야지. 준호는 영신을 내려다보며 미소지었다.
"꼴통이라고 그렇게 욕하셨으니 뭐 어쩌겠습니까. 자매님도 너무 신경쓰지 마세요. 저야 이게 일이고요."
"저, 졸업하면 수녀가 될 거예요."
뜻밖의 말에 놀란 준호가 영신을 쳐다보았다. 영신은 진지한 얼굴로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자매님. 수도는 힘든 겁니다."
"알아요. 하지만 마음을 정했어요. 신부님 같은 수도자가 될 거예요."
"부모님은 알고 계세요?"
영신이 고개를 끄덕였고 준호는 성호를 그으며 탄식했다. 주님 뜻이 이런 것이었습니까. 범신이 이걸 봤다간 혀를 차며 둘 다 내 말은 듣지도 않고 주님 말씀만 듣는다며 뭐라고 했을 것이다. 이러려고 저희가 만났나 봅니다, 신부님이 뿌린 밀알이 이렇게 돌아오네요.
"그분...이 기뻐하지 않으실지도 몰라요."
"신부님..."
영신은 눈 앞에 있는 자신 대신, 준호도 아는 어느 신부를 부르며 고개를 숙였다. 코를 훌쩍이는 소리가 들렸다.
"잘 지내시겠죠? 천국에 가셨을 거예요 분명히."
"그분은 주님 곁에 계시겠지요."
준호가 성호를 긋자 영신이 손을 모았다. 김범신 베드로의 영혼이 편히 쉬기를.
"최신부님께는 꼭 죄송하고 고맙다고 인사하고 싶었어요. 그런데, 그분께는 어떻게 인사를 드려야..."
마지막도 못 보고 어떡해요, 우리 신부님. 혼자서 그 쓸쓸한 데서...영신이 훌쩍거리며 우는 동안 준호는 먼 하늘을 쳐다보며 말했다.
"괜찮습니다. 다 아실 거예요. 아마 지금쯤 주님 곁에서 줄담배 피우면서 우리 이야기를 하고 계실 겁니다. 주여, 저 두 꼴통을 보십시오. 제 말은 지독히도 안 듣습니다, 하면서요."

영신이 울먹이며 입꼬리를 끌어올려 웃었다. 아마 자신도 똑같은 표정을 짓고 있을 것이다. 저 착한 아이가 자신을 걱정하기라도 하면 신부님이 아가토 네가 감히, 하며 자신을 야단칠 것이다. 준호는 후드를 깊이 눌러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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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2.13 백업. 전력 12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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