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사제]성녀

만약 모래알보다 작은 기적이 오늘밤 일어난다면

그녀는 성녀가 되고, 온갖 성스러운 일이 일어날 거야
-이상은, <성녀>

신학적 견지에서 기적에 대해 말해보라면, 아주 조심스럽고 섬세하면서도 다양한 해석이 나올 것이라고 생각한다. 신의 은총이 실천되는 방법으로서의 기적. 놀랍지만 사소한 것. 뭐 그런 식으로 범신은 기적을 이해해 오고 있었다. 비록 꼴통신부라는 소리는 듣고 있었지만, 신부가 아니라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다. 적어도 그가 가진 신심에 대해 의심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러니까 평범한 신부들이 가진 그런 평범한 신심이라고, 본인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언제나 그렇듯이, 평범한 신부로서 자신을 따르는 아이에게 신앙에 대해 설명했었다.
"신부님, 학교에서 남자애들이랑 싸웠어요."
"어이구, 왜 그랬어. 사이좋게 지내야지."
"그치만 신부님, 걔네가 성경에 나오는 기적이 어딨냐고 다 미신이라고 그랬어요. 아 주일학교에서 설명 들은 것만 이야기 잘 해 줬어도 내가 이기는 건데! 근데 걔네가 듣지도 않고 막 놀려서 짜증나서 좀 때렸어요. 그래서 막 선생님께 혼나구, 엄마한테도 혼나구. 생각할 수록 화 나요."
분한 기색이 가득한 얼굴을 보니, 제대로 못 쏘아붙이고 온 게 분한 모양이다. 초등학생 남자애들이 다 그렇지. 여자애들이 무슨 이야기만 하면 옆에서 트집이나 잡아대고 못살게 굴고. 담임선생님 책상에 매미허물을 올려놓고 좋아하던 자신의 어린 시절을 떠올린 범신이 피식 웃었다.
"그래서, 다음에 이기게 설명 잘 해 달라고?"
"아이 신부님, 벌써 이겼어요. 그래도 설명은 해 줘야 하니까요."
영신이가 작정하고 걷어찼으니 그 남자애들도 많이 아팠겠지. 범신은 성호를 긋고 짐짓 엄숙한 얼굴을 지었다.
"그렇다고 때리면 못 써, 이영신."
"네 신부님. 그래도 가르쳐 주세요. 기적은 진짜 있는 거죠?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도, 나자로를 살리신 것도, 떡이랑 물고기 나눠먹이신 것도 기적이잖아요, 그쵸?"
"그럼. 하느님과 예수님이 계신 것처럼 기적도 어디에나 있는 거야."
"그런데 왜 우리는 못 봐요?"
아이가 눈을 깜박이며 묻는 질문에 범신은 웃었다. 늘 아기 같았는데 벌써 이만큼 커서 첫 영성체도 하고, 신앙에 대해 질문도 하는 걸 보니 세월이 참 빨랐다. 언젠가 자기도 똑같은 질문을 한 적이 있었고, 그 때 무슨 답을 들었더라. 아 그래. 주일학교 선생님께선 너한테 보이면 그게 기적이겠냐며 웃으셨다. 범신은 아이가 알아들을 수 있게 쉬운말을 고르느라 잠깐 생각을 가다듬었다.
"기적은 어디에나 있는 거야. 우선 생각해 봐라, 매일매일 밤 되면 해가 지지?"
"네."
"그런데 그 다음날 되면 해가 뜨잖아. 얼마나 신기해.  그치? 게다가 영신이가 이렇게 신부님하고 만난 것도 기적이잖아. 영신이는 꼬마고, 신부님은 수도원에서 기도하는 신부님인데, 하필 이 성당에서 딱 마주친 거야. 이것도 기적이지."
의아한 표정으로 자신을 쳐다보던 아이가 볼멘 소리를 했다.
"에이, 그게 뭐가 기적이에요? 하나도 안 신기하잖아요. 그런 거 말구요 좀 신기한 거 없어요?"
"영신아,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그분이 행하신 것 같은 큰 기적을 바라지 않으실 거야."
"왜요?"
"우리가 매일매일 살면서 기적을 만들려면 말이다, 그게 작지 않고서야 힘에 부쳐서 어디 살겠니?"
범신의 말에 아이는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그렇게 작은데 기적이라고 불러요?"
"그럼. 주님께서는,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작은 걸 매일 해 나가며 사는 것도 기적이라고 부르시는 거야. 영신아, 주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 우리가 한 사람씩 아주 작은 기적을 만들면, 그게 모이면 참 멋있어 보일 거야. 그걸 그분이 보시기에 얼마나 아름답겠어."
아이는 한참을 고민하다 범신을 보며 방긋 웃었다. 이 순간도 참으로 기적에 가깝지 않은가. 범신은 진심으로 기도했다. 이 아이가 신실한 주님의 딸로 자라게 하소서.

범신은 오래 전, 웃을 때면 빠진 이가 보이던 어린 꼬마와 주고 받던 대화를 떠올리고 잠시 하늘을 우러러 보았다. 그렇습니다, 주님. 기적이 정말로 있다는 것을 제가 이렇게 절실히 믿습니다.  제 기도를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명동의 큰 길 너머로 명동성당이 보이고 있었고, 제법 넓은 길은 사람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거리는 평온하고, 까마귀니 쥐니 하는 불길한 것들은 자취도 보이지 않는 멋진 주말 저녁이었다. 그리고 범신은 그 거리에서 사람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신부님! 이거! 이거 드세요!"
"영신 자매님, 천천히 걸으세요. 퇴원하신지 얼마 되었다고."
자신을 부르는 소리가 들려 돌아보니, 영신이 환하게 웃으며 달려오고 있었고 준호가 손에 편의점 로고가 찍힌 종이봉투를 들고 따라 왔다. 영신이 뛰어 온 거리를 성큼성큼 걸어 따라잡은 준호가 손에 든 봉투를 범신에게 내밀었다.
"자매님이 편의점 간 게 이거 때문이더라고요. 한 동안 못 먹어서 먹고 싶다고. 신부님도 하나 드십쇼."
"응, 호빵 아냐 이거. 영신이 호빵 먹고 싶었으면 사달라고 하지."
"아니에요, 신부님. 이거 부제님이 사셨어요."
"그래? 그럼 됐다."
"아놔 저 가난한 신학생입니다. 어떻게 저한테 얻어드실 생각을 하십니까."
"넌 신학교 학사란 놈이 그럼, 이 어린 평신도 아가씨한테 얻어먹냐?"
범신의 핀잔에 준호가 궁시렁거리며 봉투 속 내용물을 꺼냈다.
"맛은 그냥 다 단팥으로 했습니다. 신부님도 그게 좋으시죠?"
"어, 요샌 호빵 속에 피자니 뭐니 이상한 것들을 그렇게 넣더라고. 호빵은 기본이 최곤데."
"그쵸? 부제님도 신부님도 저하고 똑같네요!"
뭐가 그렇게 좋은지 마냥 웃으며 호빵을 반 갈라, 따뜻한 김이 폴폴 올라오는 것을 보고는 만족스러운 얼굴로 크게 한 입 베어문 영신이 호빵을 입에 문 준호와, 호빵을 막 받아든 범신을 향해 행복하게 웃었다.
"신부님, 진짜 좋아요. 호빵도 먹을 수 있고."
"자매님 참 작은 일에 기뻐하십니다. 훌륭하세요."
"당연하죠, 전에 신부님이 저 어릴 때 그러셨는데요, 이런 작은 하루하루가 다 기적이니까 소중하게 생각해야 한다고요. 맞죠, 신부님?"
"응? 어, 너 그거 기억하고 있었구나." 
"그럼요, 당연하죠. 그러니까 이건 진짜 쬐끄만 기적이지요,그쵸?"

오늘 나에게 기적이 무어냐 묻는다면, 호빵을 입에 문 소녀의 얼굴이라 답하겠나이다. 범신은 속에서 울컥 치받쳐 오르는 것을 간신히 삼켰다. 모래알 같은 기적이 반짝거리는 성스러운 주말 저녁이었다. 

----

2015.12.05 전력 120분 백업


'쓰고 만든 것 > 그 외' 카테고리의 다른 글

[검사제]눈  (0) 2016.04.24
[검사제]속죄  (0) 2016.04.24
[검사제] 술마시는 김최  (0) 2016.04.24
[검사제]견진성사  (0) 2016.04.24
[검사제]목욕탕에 간 김최  (0) 2016.04.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