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사제] 술마시는 김최

범신은 눈 앞에 들이밀어진 것-소주 두 병과 종이컵과 새우깡 한 봉지가 든 비닐봉지-을 쳐다보았다.

"원래 술 안 마십니다, 그랬었잖아."
"제가 그랬습니까?"
봉지를 들고 있는 놈, 그러니까 눈을 껌벅거리면서 순진한 척을 하고 있는 핏덩이의 뺀질거리는 미소를 구겨버리고 싶다는 충동을 억누른 범신은 봉지를 받아들었다.
"너 봉사활동 나온 놈이 이래도 되냐."
"뭐 어때서요. 저는 지금 수도원에서 파견나오신 수사신부님께 일을 배우는 겁니다, 어디까지나 공식적으로."
신학교 개그는 왜 30년이 다 지나도록 갱신도 되지 않는지 모르겠다. 주님의 놀라우신 뜻 어쩌고 하며 성호를 긋는 어린 놈을 쥐어패고 싶다. 정신부님, 예전에 저 구박하실 때 이런 기분이셨습니까. 그분의 영혼에 평안을, 성호를 그으며 잠시 기도를 올린 범신의 앞에 쪼그리고 앉은 준호가 씩 웃었다.
신학교의 학사들은 방학 때도 본당으로 가서 지내며 미사를 도우며 전례를 공부하거나 하는 것이 일이다. 준호의 주소가 용인이었으니 이 성당이 아마 본당이리라. 수도회에서 용인 모 성당 신부가 잠시 해외에 갈 일이 생겼는데-신학 세미나라고 했다.- 미사를 집전할 신부가 더 필요하다고 범신을 보냈다.  주일 앞뒤로 한 사흘만 도와주면 된다고 했다. 주소를 보고 몰몬교도처럼 미끈하게 생긴 얼굴을 떠올린 범신은, 방학 때도 아닌데 설마 그놈이 있겠나 하고 편안한 마음으로 용인으로 갔다. 그리고 보좌신부가 우리 본당 출신 부제라고 준호를 소개할 때 그만 사레가 들려 거하게 쿨럭거리고 말았던 것이다.
"너 왜 여깄어?"
마침 부제를 가르쳐야 하는데 저도 일손이 바쁘니 미사 보고 모임 지도할 동안 좀 부탁드립니다, 사람 좋게 웃으며 보좌신부가 사제관을 나가자마자 범신은 미간을 찌푸렸다.
"수업의 일환입니다. 제가 방학 때 좀 오래 쉬었잖습니까. 어차피 주말 지나면 또 들어가 봐야 합니다."
주중에는 수업을 빡세게 듣고 주말에는 여기저기 다니면서 방학 때 못 한 걸 메꾸고 있다며 준호는 한숨을 쉬어 보였다. 구마가 끝나고 쉬느라 방학 다운 방학을 즐기지도 못한-어차피 신학생의 방학이란 게 고행의 연속이기는 하지만- 준호를 보며 범신은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보좌신부가 펼쳐놓은 일지며 여러 자료-말하자면 성당을 꾸려나가며 배워야 할 인간관계에 대한 것들이다-을 훑어보았다.
"대체 저 보좌신부는 나한테 지금 뭘 가르치라는 거냐."
"아무래도 현장의 목소리를 이야기하시려는 거 같았는데요, 저희가 하긴 어려운 얘기죠?"
"내가 뭘 하겠냐. 난 평신도들과 미사 드린지도 오래 됐어."
"부제가 가져야 할 마음가짐 같은 건 뭐, 저는 잘 하니까요."
"잘 하긴 뭘 잘해. 됐고 야, 나 잠깐 좀 쉴란다. 너 나가 있어. 가서 성경이라도 읽고 있던가."
"신부님, 그럼 저희 진짜 수업 하나 할까요?"
낄낄 웃으며 잠깐 나갔다가 온 준호의 손에 들린 봉지를 보고 범신은 한숨을 쉬었다. 지금 이 미친놈이 사제관에서 낮술을 하자는 건가.

보좌 신부님 돌아오실 때까지 한 시간 반 정도 시간이 비어요. 제가 그동안 꼭 하고 싶었는데 못 했던 걸 하려면 기회가 지금 뿐이라서 이럽니다. 서품 받기 전까지 저는 계속 바쁠 테고, 신부님도 금방 가실 거고, 아무래도 밤에 모이기는 어렵잖습니까. 하며 웃는 준호의 얼굴이 어이가 없다. 허락한 걸로 알았는지 종이컵에 소주를 따르고 새우깡 봉지를 뜯는 손길이 날렵하다.
"너 신학교에서 어지간히 마셨나보다?"
"에이 무슨 말씀이십니까. 학교 규정에 학교에서 술 마시지 말라셨습니다."
"규정은 개뿔. 그래 잔이나 줘 봐라. 빨리 마셔서 없애야지 원."
범신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반 정도 채워진 종이컵이 범신의 손에 쥐어졌다. 잔을 받자 마자 홀짝 넘긴다. 낮에 마시는 소주는 유난히 달고 쌉쌀하다. 잔을 내려놓자 마자 준호는 공손히 새우깡을 내밀었다.
"얼씨구, 왜 이렇게 유난스러워. 내가 먹는다. 내려놔."
범신의 잔을 다시 채워주고, 이번에는 범신이 따라주는 잔을 두 손으로 받은 준호는 고개를 돌리고 잔을 비웠다. 크, 하고 인상을 찌푸리는 폼이 술을 잘 마시지는 못해도 좋아한다는 건 알겠다. 소주 한 병은 일고여덟 잔이면 금방 동이 나서, 몇 잔 말 없이 주고받자 한 병이 다 비워졌다. 새 병을 딴 범신이 준호에게 한 잔 따라주었다. 술잔을 받느라 손을 모으고 앉은 준호의 자세가, 꼭 성체를 모시는 것 같다고 생각한 범신은 피식 웃었다. 내가 참 불경하기 그지없구나, 그때 준호가 입을 열었다.
"고마웠습니다."
범신은 공손한 자세로 무릎을 모으고 앉은 준호를 쳐다보았다. 뜬금없는 인사에 조금 놀랐다. 무슨 흰소리냐고 한 마디 하려던 범신은 준호의 표정을 보았다. 술 마신 놈 답지 않게 단정하고 굳은 얼굴이었다. 그냥 튀어나온 소리가 아니다. 오래 준비했던 말일 것이다.
"신부님이 아니었으면, 오늘의 저도 없습니다."
"......"
"정말로 고맙다고 꼭 말씀드리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죄송했습니다. 그 날은,"
"됐다, 뭐 지난 일을 갖고 그래. 그런 거 마음에 담아두면 마음이 녹슨다, 이놈아."
"......네."
"아, 그리고 고마우면 좀 좋은 걸로 가져오던가. 깡소주가 뭐냐."
그냥 웃는 준호를 보며 범신은 새우깡을 집어 입에 욱여넣었다. 그날 잔을 받지 않아서 계속 미안했던 거다, 뺀질거리긴 해도 꼰대라서 내심 미안해서 언젠가 꼭 사과하려고 기회만 보고 있었던 거다. 그리고 기회가 되자마자 앞뒤 안 가리고 잽싸게 잔을 준비했겠지. 아직 새파랗게 어린 녀석이 성실하기도 하다, 범신은 기특한 어린 부제를 쳐다보았다. 준호는 겸연쩍은 얼굴로 웃었다.
"나중에 본당 가면 미사주라도 드리겠습니다."
"필요 없다, 이놈이 주님의 보혈을."

언젠가 사제가 되면 이놈은 정말로 열심히 주님의 어린양들을 인도하는 목자가 될 것이다. 음으로 양으로 주님 뜻을 따르며 신실하게 살 거다. 그리고 그때는 이놈한테 이런 공치사를 듣지 않아도 될 정도로 훌륭하게 잘 클 것이다. 나보다 좋은 사제가 되겠지. 주여, 당신의 종 아가토를 굽어살피소서. 범신은 입안으로 기도를 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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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 마시는 김과 최- @wh_priests님의 리퀘입니다. 감사합니다!
2015.12.03 백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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