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사제]눈

"어, 신부님. 눈 오는데요."
"허, 어쩌냐. 차 막히겠다."
인천 어느 본당에서 구마를 요청해서 낮 즈음에 성당에 왔다가 구마가 끝나고 문을 열어보니 날은 다 저물었고 눈이 내리고 있었다. 준호는 눈을 빛내며 눈을 쳐다보고 있었다. 제법 굵은 눈이 솜털처럼 공중에서 흔들거리며 떨어지고 있었다. 성당 앞마당 그늘진 곳에는 얇게 눈이 쌓여 바닥은 희미한 회색을 띠고 있었다.
"이야 함박눈입니다, 신부님. 올 겨울엔 눈이 영 쌓이지를 않던데 오늘은 제법 쌓이겠어요."
"눈 오면 좋아하는 거 그 뭐냐, 애랑 개밖에 없다며. 넌 어느 쪽이냐."
성당 처마 밑에 기대서서 담뱃불을 붙이고 있던 범신이 탄식했다. 준호는 부루퉁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에이 신부님. 저도 이제 부제 아니고 신붑니다. 너무 낮춰 부르지 마십쇼."
"지가 지를 높이는 교만은 퍽이나 신부답습니다 최 아가토 신부."
범신은 한숨을 쉬고는, 피로한 얼굴로 담배연기를 허공에 내뱉었다. 담배연기가 눈 속으로 퍼져가는 모습을 준호는 멍하게 쳐다보았다. 평소보다 밀도가 높은 찬 공기 속으로 따뜻한 하얀 연기가 스며들어가고 있었다. 
"담배가 신기하냐?"
"아뇨 그렇다기보다는, 눈이랑 잘 어울려서 그럽니다."
"...너 신부 하지 말고 문학이나 전공하지 그랬니. 룸펜이 딱 적성이네."
"요즘 누가 룸펜 같은 말을 쓴다고요. 하여간 나이 드신 티를 그렇게 내시네요."
퉁명스럽게 말하면서도 준호는 담배를 피우는 범신을 계속 쳐다보았다. 눈발이 점점 굵어져 세상이 하얗게 물들어 가는데, 자신과 범신만 검은 색이었다. 하얀 담배 연기는 계속 물감 풀어지듯 공기 속에 퍼져갔다. 검은 수단 끝의 하얀 로만 칼라마저 공기중에 흩어질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범신은 한 개피를 다 피우고 새로 불을 붙였다.
"이것만 피우고 들어가자. 너도 본당 들어가야지."
"어차피 막차 전까지만 들어가면 됩니다."
"최신부 빠져가지고, 요새 신부는 막 늦게 다니고 그래도 되나? 본당 관리 안 하냐?"
"눈 오는 날이잖습니까. 오늘 같이 아름다운 날에는 주님도 지각해도 봐주시고 그럽니다. 이런 날에는 그리운 사람을 만나야 된다고, 그 무슨 시에 나오지 않습니까."
엉뚱한 시를 엉뚱한 데에 갖다붙인 준호의 실수를 눈치채지 못한 듯 범신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리운 사람 좋아한다. 새끼 빠져가지고. 그리고 눈 그거 뭐가 좋다고. 미끄러지기 딱 좋구만. 예전에 어느 노신부님이 이런 날 소주 마시고 걸어가다 넘어지셔서 다리를 아주 호되게 다치셨어. 병원 갔다가 얼마나 혼났는지."
범신은 어딘가 그리운 눈으로 먼 곳을 쳐다보았다. 정기범 신부님을 회상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나는 여기에 있는데 왜 신부님은 다른 곳에 계시는 겁니까. 준호는 조금 울컥해서 투정부리듯 말을 했다.
"신부님, 제가 신부님 보조사제인데 어떻게 보조사제 시절만 회상하시고 그러십니까. 저 여기에 있는데."
순간 눈 사이로 담배연기가 뿌옇게 피어올랐다. 시야가 하얗게 물들어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즈음,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아가토. 너야말로 왜 보조사제였던 적만 떠올리느냐. 네 직분은 그게 아니거늘."

눈을 떴을 때는 창 밖에 눈이 하얗게 쌓여있었고, 발자국 하나 없이 하얗기만한 눈밭이 시야에 하나가득 들어왔다. 최준호 아가토 주임신부는 한숨을 쉬고,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불을 붙였다. 자신도 그 때의 신부님만큼 나이를 먹었고, 머리가 희끗희끗 세어갔다. 하지만 악몽은 변함이 없고, 꿈에서조차 그리운 얼굴도 보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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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2.26. 전력 120분 백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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