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사제]담배

"무슨 담배를 그렇게 피우십니까."
"수도원장님도 안 하신 잔소리를 왜 네가 하냐. 어린 놈이."
"너무 많이 피우시니까 그렇죠. 좀 적당히 하시지."
범신이 피우던 담배를 비벼 끄고 새 담배에 불을 붙이자 준호가 싫은 표정을 지었다. 8개월만에 만난 준호는 본당 생활 잘 하고 있냐는 질문에 대충 고개를 끄덕였고 범신은 살이 빠진 것 같다는 질문에 그냥 피식 웃기만 했다. 인사를 교환한 다음 본당에 찾아온 범신을 따라 인천과 서울의 경계쯤에 있는 동네에서 구마의식을 했다. 부마자가 아주 힘도 넘치고 팔팔해서 둘 다 애를 많이 먹었다. 창문도 한 장 깨지고 부마자가 휘두른 주먹에 범신이 얻어맞기도 했다. 진땀이 나도록 기도한 끝에 구마의식은 마무리가 되었고, 정리를 하고 깨진 창문에 대해 집주인에게 사과를 한 다음 나오자 이미 늦은 밤이었다. 아파트 입구에서 범신이 담배를 하나 빼 물었고, 다 피운 다음에 새 담배를 꺼내자 나온 대화였다.
"좀 익숙해져봐."
"자주 뵐 것도 아닌데 익숙해져서 뭐 하게요."
"하 그놈 참. 너네 본당 신부님은 안 피우시냐?"
"네, 주임신부님도 안 피우시고요, 아니 요샌 어지간하면 다 금연구역인데 좀 끊으십쇼. 불편하지도 않으십니까."
"신부가 주님 외에 세속에서 마음 둘 데가 뭐 얼마나 있다고. 이거라도 피워야지."
준호가 노골적으로 싫은 표정을 지었다. 범신이 인상을 썼다.
"아가토, 넌 뭐 내가 좋아서 피우는 줄 아냐?"
"안 좋은데 왜 피우시는데요."
"이것 말고는 답이 없어서 그런다, 답이."
준호는 그때 범신의 표정을 자세히 보지 못했다. 지치고 피곤한 표정이 범신의 얼굴에 스쳐지나갔다. 준호의 앞에서 한 번도 보인 적 없는 표정이었고, 봤으면 준호는 그 얼굴을 잊지 못했을 것이다. 
"네가 아직 덜 깎이고 덜 다쳐서 그래. 너도 야, 나중에는."
"나중에는요?"
"아니다, 말을 말자. 뭐 너는 꿋꿋해서 기쁘다."
범신이 피식 웃으며 손을 모았다. 당신의 종 아가토를 보호하소서, 아멘. 범신을 따라 손을 모은 준호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신부님, 담배 좀 줄이세요."
"요샌 잔소리도 속성으로 교육받고 오니?"
"아뇨, 무슨 말씀이 그러십니까. 저는 신부님 걱정되니까 그럽니다. 몸에도 좋지 않은 걸 왜 피우세요."
준호는 눈 앞의 젊은 신부를 빤히 쳐다보고는 피식 웃고 담뱃갑을 열어 새 담배를 입에 물었다.
"아니 신부님."
뭔 신부가 사람 말을 귓등으로도 안 들어. 입속으로 중얼거리는 새파랗게 젊은 신부한테 등을 돌리며 준호는 피식 웃었다. 새파랗게 어리고, 어린 만큼 꺾이지 않는 맛이 있었다. 시퍼런 날을 숨길 생각도 못 하고 버럭거리는 게 웃기고, 예전에는 자신도 저랬을까 싶어 그저 웃음만 나왔다. 준호는 라이터에 불을 붙였다.
"예전에 어느 신부님께 담배를 배웠어. 배웠다기보단 물이 든 거 같지만. 아무튼 신부님께 왜 피우시는지 여쭤본 적이 있거든."
"주여, 그 분은 뭐라십니까?"
"맞혀봐라. 맞히면 이번 장엄구마에 쓸 돼지 정도는 내 손으로 구해 보마."
"이런 법이 어디 있습니까?"
"어허, 보조사제는 입 다물고. 어디 어른 말씀하시는데."
자기 말투가 예전 범신의 말투를 닮아간다는 데 생각이 미친 준호가 낄낄 웃으며 담배 연기를 훅 내뿜었다. 젊은 신부가 질색을 하며 성호를 그었다.
"들어서 알겠지만, 아무도 알아주지도 않고 아무 보상도 없을 테고, 세상에서 가장 낮고 낮은 일만 하면서도 세상이 너를 꺼릴 거다."
준호는 젊은 신부를 향해 입을 열었다. 신부가 진지한 표정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것이 느껴졌다. 나도 아마 저랬겠지.
"그러니 이거라도 해야 살 맛이 좀 나지 않겠니. 안 그러냐?"
"최 신부님은 술도 담배도 다 하시면서 뭘 그러십니까."
"어허, 주님의 성스러운 보혈을 함부로 입에 올리지 말라."

뭐 저런 꼴통신부가 하며 혀를 차는 부제의 모습을 보며 준호는 담뱃재를 털었다. 어느새 담배필터 근처까지 불이 붙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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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20일 전력 120분 백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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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사제]십자가

준호는 삼위일체를 믿고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으며 언젠가 그분이 다시 오실 것을 믿었다. 어려서부터 오래 고민한 끝에 생긴 믿음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머리로 열심히 고민한 끝에 믿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된 것에 가까울지도 모른다.  준호의 믿음은 굳건했다.  오래 고민한 끝에 만들어진 믿음이었으니 굳건하지 않을 수 없었다. 베이컨이었나, 신을 믿는 것이 믿지 않는 것보다 확률적으로 나으리라는 괴상한 궤변은 철학 수업 시간에 들은 이야기였다. 다들 제법 그럴싸하다고 웃었으나 준호는 별로 웃기지 않았다. 신이 있어야만 내 동생의 혼이 어느 곳에 남아 있어서, 언젠가 받게 될 구원을 기다리게 될 것이다. 
애초에 동생의 죽음은 악마의 짓 같은 것이었다. 이유도 없이 사람을 해하는 것이 악이 아닐 리 없다. 그것은 악이다. 그리고 인간의 이성이 설명할 수 없는 악이 있다면, 그 악에 대항하는 선이 있을 것이고, 신도 존재할 것이다. 준호의 믿음은 그렇게 시작했다. 신학적인 근거며 이론에 대해 계속 찾아보았다. 성경을 모두 읽고, 구원에 대해 신부님께 질문하고, 천국과 지옥과 연옥에 대해 찾을 수 있는 것은 다 찾아보았다. 결론은, 사람은 모두 죄를 지은 자이지만 자신의 죄는 더더욱 깊고, 동생의 영혼이 정말로 있다면 동생의 구원은 멀고도 아득하다는 것이었다. 동생의 혼이 구원받을 수 있기를, 내가 어떻게든 방법을 알아내기를, 할 수 있는 것은 뭐든 시도해 보고 그 중에 답이 있기를. 준호가 가진 죄가 깊은 만큼 믿음은 굳건했다. 가톨릭대학교를 다 뒤져도 준호와 같이 믿음이 깊은 자는 찾기 어려울 것이다. 그 굳은 믿음으로 예비신학교 시절을 거치고, 똑똑한 아들이 신부가 된다니 말도 안 된다고 화를 내는 아버지를 설득하고, 본당 신부님을 감동시켰다. 준호는 신을 믿었다.
성호를 긋고, 십자가 아래서 기도하는 생활이 이어졌다. 이 십자가에 매달려 우리 죄를 사해주신 분을 믿고 따른다면, 이분과 같이 희생을 한다면 어쩌면 거기에 답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게 아니라면? 배우면 배울수록 동생이 자신에 의해 구원받을 수 있는지에 대한 확신은 엷어졌다. 준호는 방황하는 신학생이 되었다. 공부가 어려운 것도 아니고, 신앙이 부족한 것이라면 말이 이상하지만 준호의 신앙은 신부가 되기에는 약간 부족했을지도 모른다. 정말로 기도에 너무 열심이어서 성적이 나쁜 것이라고 말해도 틀린 것은 아니었다. 자신이 갈 길이 이것이 맞는지에 대한 의문에 답을 얻기 위한 회의와 고민의 기도가 이어졌다.

사실은 그래서, 구마의식이라는 것에 회의적이었다. 준비는 철저히 했다. 준호는 원래 뭐든 철저히 하는 편이었다. 땡땡이도 치려면 확실히 치고 술도 마시려면 확실히 마시고, 월담을 하려거든 시시하게 하지 않아야 했다. 악마에 대해서 공부하고, 자료를 모두 읽어 암기하고, 서취노트의 내용을 읽고, 의식에 필요한 것을 준비하고, 기도문을 확실하게 기억했다. 하지만 정말 거기에 뭐가 있기는 한 거냐고 계속 질문을 해야 했다. 무언가가 있는데 아무도 뭐가 있는지 말을 해 주지 않았다. 악마라니. 종교가 악마를 쫓는다는 것은 일종의 비유가 아닌가, 사람들의 마음에 서린 불안을 없애주고 나쁜 마음을 풀어주는 것. 그것이 구마일 거라고 생각했다. 자신이 동생의 구원을 바라서 신부가 되려고 하듯, 무언가 바라는 것을 들어주고 수렁에서 건져내는 것이 종교에서 말하는 악일 것이라고. 하지만 다들 악마가 있는 것처럼 행동했다.
그래, 악마가 있어야 신이 존재한다. 그러므로 사제는 악마의 존재를 의심할 수 없다. 하지만 준호는, 악이 있어도 악마가 있으리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는 신학생 최준호 아가토는, 아무도 이야기해주지 않지만 뭐가 있다는 사실이 답답했다. 가장 답답한 것은 김신부라는 사람이었다. 자신이 하는 일이 뭐다 어떻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너 나 좀 도와야겠다고 다짜고짜 말을 붙였다. 박수사의 집 문을 두들기며 그 애가 불쌍하지도 않냐 한 번만 더 해 보자 하던 절박한 모습이 와닿아서, 준호는 그와 같이 일을 해 보기로 결심했다. 그 애가 불쌍하지도 않냐는 말이 너무나 와닿았다. 불쌍한 아이를 위해서. 
하지만 정작 그 불쌍한 아이는 뇌사상태에 들어 있었고 그 원인이 김신부일지도 모른다는 말을 들었다. 그를 감시하라고 명령받았다. 김신부에게 불손하게 굴었던 것도 그래서일 것이다.  사실은 이 자가 악일지도 모른다고 잠시 생각했다. 어린 여자아이를 성추행했건, 구마라는 핑계로 죽음으로 몰고 갔건, 무당을 가까이하고 여자 분비물이니 뭐니 하는 괴상한 짓거리를 하는 정신나간 자이건, 사람 신경을 긁어대는 무신경함이건, 이 사람이 하는 일에 대한 불신과 회의가 가슴 밑바닥에 가라앉아있었다. 하기야 성찬을 준비하며 성호를 긋고 십자가 아래에서 기도하면서도 준호는, 거기에 있는 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인지하지 못했다. 뇌사상태라던 아이가 말을 하며 자신을 풀어달라고 애원할때부터 준호의 마음 속에서 뭔가가 삐걱거렸다. 공포는 아니었다. 오히려 수치심과 불안감에 가까웠다. 원초적인 날 것 그대로의, 인격마저 부여된 악이 쇳소리를 내며 저주를 퍼부어대기 시작했다. 준호의 믿음과 신앙이 낱낱이 파헤쳐지는 순간이었다.

그래서 준호의 믿음은 밑바닥에서 새로 시작했다. 생각해보면 그랬다. 악이 있다고 믿고 있었으면 악마도 믿었어야 할 일이고, 자신이 죄사함을 얻기 위해 희생하기로 했으면 희생이 뭔지 다시 생각해 볼 일이었다. 준호는 자신의 보잘것없는 믿음과 약한 영혼을 돌아보고, 신발도 신지 못하고 도망나오면서 긁힌 발바닥의 아픔을 생각해보았다. 비참하고 절망적인 순간에도 고통을 호소하는 몸과, 그 몸 안에 담긴 힘없는 마음에 대해서 생각해보았다. 신앙에 대해 뭘 안다고, 구원에 대해 뭘 알았다고 나 같은 게 사제가 되겠다고. 알 수 없는 큰 힘들이 한 번에 자신을 휩쓸고 갔고 준호는 그 사이에 휩쓸려 쓸려가듯 도망을 쳤다. 그리고, 그때와 똑같이 도망쳐 나온 자신에 대한 혐오와 함께, 평생을 매달렸던 십자가가 마음 속에 떠올랐다. 여기까지 왔는데, 평생 구원을 하고 구원받겠노라고 매달렸는데, 여기서 답을 구하지 않으면 어디에서 답을 구할까.
불쌍한 애를 구하고 불쌍한 신부님도 구하고 나도 구하자. 준호는 그렇게 결심하고 우선 신발을 찾기로 했다.

물 속에서 빠져나오며 준호는 그때까지 했던 생각을 털어냈다. 복잡하게 생각할 거 없이 일단 믿고, 따르고 보자고. 그러다보면 누구를 구해도 구하지 않겠냐고. 그거면 됐다고 생각한 순간, 어느새 물 밖이었고 자신은 살아있었다. 여름이라도 한강에서 빠져나온 몸은 추위와 피로에 덜덜 떨렸지만, 난간에 매달아놓은 묵주를 다시 손에 쥐었을 때 묵주 끝에 달린 십자가가 따뜻하게 손바닥 안에 감겼다. 이제 돌아가지도 고민하지도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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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1월 13일 전력 120분 백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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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사제]눈

"어, 신부님. 눈 오는데요."
"허, 어쩌냐. 차 막히겠다."
인천 어느 본당에서 구마를 요청해서 낮 즈음에 성당에 왔다가 구마가 끝나고 문을 열어보니 날은 다 저물었고 눈이 내리고 있었다. 준호는 눈을 빛내며 눈을 쳐다보고 있었다. 제법 굵은 눈이 솜털처럼 공중에서 흔들거리며 떨어지고 있었다. 성당 앞마당 그늘진 곳에는 얇게 눈이 쌓여 바닥은 희미한 회색을 띠고 있었다.
"이야 함박눈입니다, 신부님. 올 겨울엔 눈이 영 쌓이지를 않던데 오늘은 제법 쌓이겠어요."
"눈 오면 좋아하는 거 그 뭐냐, 애랑 개밖에 없다며. 넌 어느 쪽이냐."
성당 처마 밑에 기대서서 담뱃불을 붙이고 있던 범신이 탄식했다. 준호는 부루퉁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에이 신부님. 저도 이제 부제 아니고 신붑니다. 너무 낮춰 부르지 마십쇼."
"지가 지를 높이는 교만은 퍽이나 신부답습니다 최 아가토 신부."
범신은 한숨을 쉬고는, 피로한 얼굴로 담배연기를 허공에 내뱉었다. 담배연기가 눈 속으로 퍼져가는 모습을 준호는 멍하게 쳐다보았다. 평소보다 밀도가 높은 찬 공기 속으로 따뜻한 하얀 연기가 스며들어가고 있었다. 
"담배가 신기하냐?"
"아뇨 그렇다기보다는, 눈이랑 잘 어울려서 그럽니다."
"...너 신부 하지 말고 문학이나 전공하지 그랬니. 룸펜이 딱 적성이네."
"요즘 누가 룸펜 같은 말을 쓴다고요. 하여간 나이 드신 티를 그렇게 내시네요."
퉁명스럽게 말하면서도 준호는 담배를 피우는 범신을 계속 쳐다보았다. 눈발이 점점 굵어져 세상이 하얗게 물들어 가는데, 자신과 범신만 검은 색이었다. 하얀 담배 연기는 계속 물감 풀어지듯 공기 속에 퍼져갔다. 검은 수단 끝의 하얀 로만 칼라마저 공기중에 흩어질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범신은 한 개피를 다 피우고 새로 불을 붙였다.
"이것만 피우고 들어가자. 너도 본당 들어가야지."
"어차피 막차 전까지만 들어가면 됩니다."
"최신부 빠져가지고, 요새 신부는 막 늦게 다니고 그래도 되나? 본당 관리 안 하냐?"
"눈 오는 날이잖습니까. 오늘 같이 아름다운 날에는 주님도 지각해도 봐주시고 그럽니다. 이런 날에는 그리운 사람을 만나야 된다고, 그 무슨 시에 나오지 않습니까."
엉뚱한 시를 엉뚱한 데에 갖다붙인 준호의 실수를 눈치채지 못한 듯 범신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리운 사람 좋아한다. 새끼 빠져가지고. 그리고 눈 그거 뭐가 좋다고. 미끄러지기 딱 좋구만. 예전에 어느 노신부님이 이런 날 소주 마시고 걸어가다 넘어지셔서 다리를 아주 호되게 다치셨어. 병원 갔다가 얼마나 혼났는지."
범신은 어딘가 그리운 눈으로 먼 곳을 쳐다보았다. 정기범 신부님을 회상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나는 여기에 있는데 왜 신부님은 다른 곳에 계시는 겁니까. 준호는 조금 울컥해서 투정부리듯 말을 했다.
"신부님, 제가 신부님 보조사제인데 어떻게 보조사제 시절만 회상하시고 그러십니까. 저 여기에 있는데."
순간 눈 사이로 담배연기가 뿌옇게 피어올랐다. 시야가 하얗게 물들어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즈음,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아가토. 너야말로 왜 보조사제였던 적만 떠올리느냐. 네 직분은 그게 아니거늘."

눈을 떴을 때는 창 밖에 눈이 하얗게 쌓여있었고, 발자국 하나 없이 하얗기만한 눈밭이 시야에 하나가득 들어왔다. 최준호 아가토 주임신부는 한숨을 쉬고,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불을 붙였다. 자신도 그 때의 신부님만큼 나이를 먹었고, 머리가 희끗희끗 세어갔다. 하지만 악몽은 변함이 없고, 꿈에서조차 그리운 얼굴도 보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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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2.26. 전력 120분 백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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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사제]속죄

정동 프란치스코 회관은 가톨릭 관련 행사가 아니라도 각종 인문학행사에 대관처로 사용되는 일이 많다. 한창 이슈가 된 사회학 도서의 출간에 앞서 저자와 독자들의 만남이 기획되어 있어, 조용한 듯 북적거리는 회관 앞에 수도복을 입은 젊은 수사가 서 있었다. 헐렁해 보이는 갈색 수도복의 등에 달린 후드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앳된 얼굴의 대학생쯤 되었을까, 어깨즈음까지 오는 머리에 머리띠를 한 여성이 다가오자 수사는 조용히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었다.
"아, 저기 혹시...최준호 아가토 부..."
"네, 최준호 아가토 신부입니다. 이영신 자매님이시군요."
"아, 이제 신부님이시겠네요..."
영신은 얼굴을 확인하려는 듯 고개를 들어 앞을 쳐다보았으나 준호는 후드를 벗지 않았다. 단호하면서 어색한 인사가 이어졌고, 영신은 자신의 실수라도 지적받은 양 고개를 숙였다.
"아니요, 저도 못 알아봤습니다. 머리도 기르시고, 시간도 많이 지나고 해서요."
"아."
"좋아 보이시네요. 다행입니다."
목소리 때문인지, 영신은 놀란 듯 준호를 쳐다보았다. 준호는 긴장한 얼굴로 서 있는 영신을 향해 조금 웃어보였으나 후드를 눌러쓰고 있는 탓에 입꼬리밖에 보이지 않았다.
"아, ...고맙습니다."
영신은 고개를 푹 숙였다. 
"고맙긴요, 잘 지내시는 걸 확인할 수 있으서 저도 기쁩니다."
준호의 목소리는 부드러웠지만 목이 꽉 잠겨 있었다. 영신을 마지막으로 본 것은 범신이 영신의 눈을 감겨주며 울부짖던 마지막 순간 뿐이었다. 어린 소녀가 결국 죽었나보다, 하는 슬픔도 잠시뿐이었고 마르베스를 강물에 던지기 위해 목숨을 걸고 뛰느라 잠시 영신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못했었다. 나중에야 소녀를 위해 성호를 그을 수 있었다. 죽지 않고 살아있다는 말을 들었을 때는 정말 기뻤고, 축하인사라도 전해주고 싶었지만 준호가 영신을 만날 수는 없었다.  범신이 재판을 받을 때도 영신의 부모가 출석을 했지 영신이 오는 일은 없었다. 미성년자잖아, 애들은 흉한 꼴 보는 거 아니다. 푸른 옷을 입고 손이 묶여 있으면서도 범신은 태연했다. 
영신의 얼굴이 흐려졌다. 
"아, 죄송해요...좀 더 일찍 인사를 드리고 싶었는데 제가, 아무 것도 못 했어서..."
"압니다. 자매님이 잘못하신 건 아무 것도 없어요."
둘 다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영신의 어머니는 그 후 영신이 성당에 나가려는 것조차 반대했다. 네가 거기를 왜 가니, 네가 살아난 건 운이 좋아서지 신의 가호 같은 거 아니다. 신의 가호가 있었으면 저 신부가, 아니지 저건 신부도 아냐, 어떻게 너한테 그러니. 네가 뛰어내리게 만들어. 죄값을 치러야지.
엄마하고 내가 신부님한테 그렇게 한 거잖아요. 신부님이 날 구한 거야, 엄마는 아무 것도 모르잖아. 살아난 건 난데 왜 내 말을 아무도 믿지를 않아? 경찰한테 가서 얘기 해야 해, 신부님은 잘못 없어. 엄마 제발. 아빠도 내 말 좀 들어봐요. 울면서 소리를 질러도, 사정을 해도 아무 것도 달라지지 않았다. 성당에도 나가지 못한 채 재활치료에 1년을 묶여있던 영신이 범신이 청송교도소에 수감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진 것은, 학교에 나갈 수 있게 되고 나서였다.
고개를 숙이고 있던 준호가 한참만에 잠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저도 원장님 말씀만 듣고 나왔습니다만...제가 여기에 있는 줄은 어떻게 아시고 연락을 하셨어요?"
"아, 저 그때 박해진 교수님한테 치료받고 있어서, 아직도 가끔 정기검진하러 교수님한테 가요. 교수님 조르고 학교 신부님들 졸라서, 부, 아니 신부님 여기 계시다고 들었어요. "
"학교 신부님?"
"저 가톨릭대 성신교정 다녀요."
"아, 그럼 신학과...졸업반이시겠네요."
"아뇨, 이제 1학년이에요. 어머니가 반대하셔서. 다른 대학 다니다가 다시 들어간 거라서요."
둘 다 입을 다물었다. 행사가 끝나고 사람들이 모두 이동을 해서인지, 다시 골목은 한산했다. 영신은 고개를 들었다. 유리문 너머에 자신의 얼굴이 비치고 있었고, 갈색 수도복이 보였다.
"그러면 최신부님은, 그분 따라서 계속..."
"네. 그러기로 했습니다. 제가 해야지요."
준호는 마지막으로 범신을 면회갔던 날을 떠올렸다. 아가토야, 네 신부님. 아니지, 이제 아가토 신부님이네. 사제서품도 다 받고, 주님의 은혜가 참으로 놀랍다. 그런 말씀 마십시오. 신부님 덕분입니다. 내가 뭘 했다고. 신부님 덕분에 저는 여기에 있고, 신부님은 거기에 계시지 않습니까. 죄송합니다. 저만... 아니다, 아니야. 핏덩이는 학교 다녀야지. 넌 잘못한 것도 없잖아. 신부님도 잘못하신 거 없잖습니까. 세상의 법이 그러하니 따라야지 어쩌겠냐,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주는 것이라고 주님도 그러셨다. 그러니까 아가토, 다녀와라. 바티칸에서 불렀지? 힘들게다. 신부님도 하셨으니 저도 할 겁니다. 미련한 놈...
마지막 인사가 미련한 놈이 다 뭡니까, 제가 미련한 건 주님도 다 아시는데 뭐하러 그런 걸 말을 해요. 준호는 울음을 간신히 삼키고 평온한 목소리를 낼 수 있을 때까지 숨을 몰아쉬었다. 영신도 아마 여기까지 자신을 만나러 오는 길이 힘들었을 것이다. 자신이 힘든 것만큼. 후드를 벗지 않는 것이 견딜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눈을 마주치고 얼굴을 보며 이야기하면, 더 많은 것이 떠오르고 더 마음이 아플 것이다. 그래도 참고 여기까지 왔으니, 명색이 신부인 내가 참아야지. 준호는 영신을 내려다보며 미소지었다.
"꼴통이라고 그렇게 욕하셨으니 뭐 어쩌겠습니까. 자매님도 너무 신경쓰지 마세요. 저야 이게 일이고요."
"저, 졸업하면 수녀가 될 거예요."
뜻밖의 말에 놀란 준호가 영신을 쳐다보았다. 영신은 진지한 얼굴로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자매님. 수도는 힘든 겁니다."
"알아요. 하지만 마음을 정했어요. 신부님 같은 수도자가 될 거예요."
"부모님은 알고 계세요?"
영신이 고개를 끄덕였고 준호는 성호를 그으며 탄식했다. 주님 뜻이 이런 것이었습니까. 범신이 이걸 봤다간 혀를 차며 둘 다 내 말은 듣지도 않고 주님 말씀만 듣는다며 뭐라고 했을 것이다. 이러려고 저희가 만났나 봅니다, 신부님이 뿌린 밀알이 이렇게 돌아오네요.
"그분...이 기뻐하지 않으실지도 몰라요."
"신부님..."
영신은 눈 앞에 있는 자신 대신, 준호도 아는 어느 신부를 부르며 고개를 숙였다. 코를 훌쩍이는 소리가 들렸다.
"잘 지내시겠죠? 천국에 가셨을 거예요 분명히."
"그분은 주님 곁에 계시겠지요."
준호가 성호를 긋자 영신이 손을 모았다. 김범신 베드로의 영혼이 편히 쉬기를.
"최신부님께는 꼭 죄송하고 고맙다고 인사하고 싶었어요. 그런데, 그분께는 어떻게 인사를 드려야..."
마지막도 못 보고 어떡해요, 우리 신부님. 혼자서 그 쓸쓸한 데서...영신이 훌쩍거리며 우는 동안 준호는 먼 하늘을 쳐다보며 말했다.
"괜찮습니다. 다 아실 거예요. 아마 지금쯤 주님 곁에서 줄담배 피우면서 우리 이야기를 하고 계실 겁니다. 주여, 저 두 꼴통을 보십시오. 제 말은 지독히도 안 듣습니다, 하면서요."

영신이 울먹이며 입꼬리를 끌어올려 웃었다. 아마 자신도 똑같은 표정을 짓고 있을 것이다. 저 착한 아이가 자신을 걱정하기라도 하면 신부님이 아가토 네가 감히, 하며 자신을 야단칠 것이다. 준호는 후드를 깊이 눌러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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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2.13 백업. 전력 12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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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사제]성녀

만약 모래알보다 작은 기적이 오늘밤 일어난다면

그녀는 성녀가 되고, 온갖 성스러운 일이 일어날 거야
-이상은, <성녀>

신학적 견지에서 기적에 대해 말해보라면, 아주 조심스럽고 섬세하면서도 다양한 해석이 나올 것이라고 생각한다. 신의 은총이 실천되는 방법으로서의 기적. 놀랍지만 사소한 것. 뭐 그런 식으로 범신은 기적을 이해해 오고 있었다. 비록 꼴통신부라는 소리는 듣고 있었지만, 신부가 아니라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다. 적어도 그가 가진 신심에 대해 의심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러니까 평범한 신부들이 가진 그런 평범한 신심이라고, 본인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언제나 그렇듯이, 평범한 신부로서 자신을 따르는 아이에게 신앙에 대해 설명했었다.
"신부님, 학교에서 남자애들이랑 싸웠어요."
"어이구, 왜 그랬어. 사이좋게 지내야지."
"그치만 신부님, 걔네가 성경에 나오는 기적이 어딨냐고 다 미신이라고 그랬어요. 아 주일학교에서 설명 들은 것만 이야기 잘 해 줬어도 내가 이기는 건데! 근데 걔네가 듣지도 않고 막 놀려서 짜증나서 좀 때렸어요. 그래서 막 선생님께 혼나구, 엄마한테도 혼나구. 생각할 수록 화 나요."
분한 기색이 가득한 얼굴을 보니, 제대로 못 쏘아붙이고 온 게 분한 모양이다. 초등학생 남자애들이 다 그렇지. 여자애들이 무슨 이야기만 하면 옆에서 트집이나 잡아대고 못살게 굴고. 담임선생님 책상에 매미허물을 올려놓고 좋아하던 자신의 어린 시절을 떠올린 범신이 피식 웃었다.
"그래서, 다음에 이기게 설명 잘 해 달라고?"
"아이 신부님, 벌써 이겼어요. 그래도 설명은 해 줘야 하니까요."
영신이가 작정하고 걷어찼으니 그 남자애들도 많이 아팠겠지. 범신은 성호를 긋고 짐짓 엄숙한 얼굴을 지었다.
"그렇다고 때리면 못 써, 이영신."
"네 신부님. 그래도 가르쳐 주세요. 기적은 진짜 있는 거죠?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도, 나자로를 살리신 것도, 떡이랑 물고기 나눠먹이신 것도 기적이잖아요, 그쵸?"
"그럼. 하느님과 예수님이 계신 것처럼 기적도 어디에나 있는 거야."
"그런데 왜 우리는 못 봐요?"
아이가 눈을 깜박이며 묻는 질문에 범신은 웃었다. 늘 아기 같았는데 벌써 이만큼 커서 첫 영성체도 하고, 신앙에 대해 질문도 하는 걸 보니 세월이 참 빨랐다. 언젠가 자기도 똑같은 질문을 한 적이 있었고, 그 때 무슨 답을 들었더라. 아 그래. 주일학교 선생님께선 너한테 보이면 그게 기적이겠냐며 웃으셨다. 범신은 아이가 알아들을 수 있게 쉬운말을 고르느라 잠깐 생각을 가다듬었다.
"기적은 어디에나 있는 거야. 우선 생각해 봐라, 매일매일 밤 되면 해가 지지?"
"네."
"그런데 그 다음날 되면 해가 뜨잖아. 얼마나 신기해.  그치? 게다가 영신이가 이렇게 신부님하고 만난 것도 기적이잖아. 영신이는 꼬마고, 신부님은 수도원에서 기도하는 신부님인데, 하필 이 성당에서 딱 마주친 거야. 이것도 기적이지."
의아한 표정으로 자신을 쳐다보던 아이가 볼멘 소리를 했다.
"에이, 그게 뭐가 기적이에요? 하나도 안 신기하잖아요. 그런 거 말구요 좀 신기한 거 없어요?"
"영신아,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그분이 행하신 것 같은 큰 기적을 바라지 않으실 거야."
"왜요?"
"우리가 매일매일 살면서 기적을 만들려면 말이다, 그게 작지 않고서야 힘에 부쳐서 어디 살겠니?"
범신의 말에 아이는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그렇게 작은데 기적이라고 불러요?"
"그럼. 주님께서는,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작은 걸 매일 해 나가며 사는 것도 기적이라고 부르시는 거야. 영신아, 주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 우리가 한 사람씩 아주 작은 기적을 만들면, 그게 모이면 참 멋있어 보일 거야. 그걸 그분이 보시기에 얼마나 아름답겠어."
아이는 한참을 고민하다 범신을 보며 방긋 웃었다. 이 순간도 참으로 기적에 가깝지 않은가. 범신은 진심으로 기도했다. 이 아이가 신실한 주님의 딸로 자라게 하소서.

범신은 오래 전, 웃을 때면 빠진 이가 보이던 어린 꼬마와 주고 받던 대화를 떠올리고 잠시 하늘을 우러러 보았다. 그렇습니다, 주님. 기적이 정말로 있다는 것을 제가 이렇게 절실히 믿습니다.  제 기도를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명동의 큰 길 너머로 명동성당이 보이고 있었고, 제법 넓은 길은 사람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거리는 평온하고, 까마귀니 쥐니 하는 불길한 것들은 자취도 보이지 않는 멋진 주말 저녁이었다. 그리고 범신은 그 거리에서 사람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신부님! 이거! 이거 드세요!"
"영신 자매님, 천천히 걸으세요. 퇴원하신지 얼마 되었다고."
자신을 부르는 소리가 들려 돌아보니, 영신이 환하게 웃으며 달려오고 있었고 준호가 손에 편의점 로고가 찍힌 종이봉투를 들고 따라 왔다. 영신이 뛰어 온 거리를 성큼성큼 걸어 따라잡은 준호가 손에 든 봉투를 범신에게 내밀었다.
"자매님이 편의점 간 게 이거 때문이더라고요. 한 동안 못 먹어서 먹고 싶다고. 신부님도 하나 드십쇼."
"응, 호빵 아냐 이거. 영신이 호빵 먹고 싶었으면 사달라고 하지."
"아니에요, 신부님. 이거 부제님이 사셨어요."
"그래? 그럼 됐다."
"아놔 저 가난한 신학생입니다. 어떻게 저한테 얻어드실 생각을 하십니까."
"넌 신학교 학사란 놈이 그럼, 이 어린 평신도 아가씨한테 얻어먹냐?"
범신의 핀잔에 준호가 궁시렁거리며 봉투 속 내용물을 꺼냈다.
"맛은 그냥 다 단팥으로 했습니다. 신부님도 그게 좋으시죠?"
"어, 요샌 호빵 속에 피자니 뭐니 이상한 것들을 그렇게 넣더라고. 호빵은 기본이 최곤데."
"그쵸? 부제님도 신부님도 저하고 똑같네요!"
뭐가 그렇게 좋은지 마냥 웃으며 호빵을 반 갈라, 따뜻한 김이 폴폴 올라오는 것을 보고는 만족스러운 얼굴로 크게 한 입 베어문 영신이 호빵을 입에 문 준호와, 호빵을 막 받아든 범신을 향해 행복하게 웃었다.
"신부님, 진짜 좋아요. 호빵도 먹을 수 있고."
"자매님 참 작은 일에 기뻐하십니다. 훌륭하세요."
"당연하죠, 전에 신부님이 저 어릴 때 그러셨는데요, 이런 작은 하루하루가 다 기적이니까 소중하게 생각해야 한다고요. 맞죠, 신부님?"
"응? 어, 너 그거 기억하고 있었구나." 
"그럼요, 당연하죠. 그러니까 이건 진짜 쬐끄만 기적이지요,그쵸?"

오늘 나에게 기적이 무어냐 묻는다면, 호빵을 입에 문 소녀의 얼굴이라 답하겠나이다. 범신은 속에서 울컥 치받쳐 오르는 것을 간신히 삼켰다. 모래알 같은 기적이 반짝거리는 성스러운 주말 저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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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2.05 전력 120분 백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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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사제] 술마시는 김최

범신은 눈 앞에 들이밀어진 것-소주 두 병과 종이컵과 새우깡 한 봉지가 든 비닐봉지-을 쳐다보았다.

"원래 술 안 마십니다, 그랬었잖아."
"제가 그랬습니까?"
봉지를 들고 있는 놈, 그러니까 눈을 껌벅거리면서 순진한 척을 하고 있는 핏덩이의 뺀질거리는 미소를 구겨버리고 싶다는 충동을 억누른 범신은 봉지를 받아들었다.
"너 봉사활동 나온 놈이 이래도 되냐."
"뭐 어때서요. 저는 지금 수도원에서 파견나오신 수사신부님께 일을 배우는 겁니다, 어디까지나 공식적으로."
신학교 개그는 왜 30년이 다 지나도록 갱신도 되지 않는지 모르겠다. 주님의 놀라우신 뜻 어쩌고 하며 성호를 긋는 어린 놈을 쥐어패고 싶다. 정신부님, 예전에 저 구박하실 때 이런 기분이셨습니까. 그분의 영혼에 평안을, 성호를 그으며 잠시 기도를 올린 범신의 앞에 쪼그리고 앉은 준호가 씩 웃었다.
신학교의 학사들은 방학 때도 본당으로 가서 지내며 미사를 도우며 전례를 공부하거나 하는 것이 일이다. 준호의 주소가 용인이었으니 이 성당이 아마 본당이리라. 수도회에서 용인 모 성당 신부가 잠시 해외에 갈 일이 생겼는데-신학 세미나라고 했다.- 미사를 집전할 신부가 더 필요하다고 범신을 보냈다.  주일 앞뒤로 한 사흘만 도와주면 된다고 했다. 주소를 보고 몰몬교도처럼 미끈하게 생긴 얼굴을 떠올린 범신은, 방학 때도 아닌데 설마 그놈이 있겠나 하고 편안한 마음으로 용인으로 갔다. 그리고 보좌신부가 우리 본당 출신 부제라고 준호를 소개할 때 그만 사레가 들려 거하게 쿨럭거리고 말았던 것이다.
"너 왜 여깄어?"
마침 부제를 가르쳐야 하는데 저도 일손이 바쁘니 미사 보고 모임 지도할 동안 좀 부탁드립니다, 사람 좋게 웃으며 보좌신부가 사제관을 나가자마자 범신은 미간을 찌푸렸다.
"수업의 일환입니다. 제가 방학 때 좀 오래 쉬었잖습니까. 어차피 주말 지나면 또 들어가 봐야 합니다."
주중에는 수업을 빡세게 듣고 주말에는 여기저기 다니면서 방학 때 못 한 걸 메꾸고 있다며 준호는 한숨을 쉬어 보였다. 구마가 끝나고 쉬느라 방학 다운 방학을 즐기지도 못한-어차피 신학생의 방학이란 게 고행의 연속이기는 하지만- 준호를 보며 범신은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보좌신부가 펼쳐놓은 일지며 여러 자료-말하자면 성당을 꾸려나가며 배워야 할 인간관계에 대한 것들이다-을 훑어보았다.
"대체 저 보좌신부는 나한테 지금 뭘 가르치라는 거냐."
"아무래도 현장의 목소리를 이야기하시려는 거 같았는데요, 저희가 하긴 어려운 얘기죠?"
"내가 뭘 하겠냐. 난 평신도들과 미사 드린지도 오래 됐어."
"부제가 가져야 할 마음가짐 같은 건 뭐, 저는 잘 하니까요."
"잘 하긴 뭘 잘해. 됐고 야, 나 잠깐 좀 쉴란다. 너 나가 있어. 가서 성경이라도 읽고 있던가."
"신부님, 그럼 저희 진짜 수업 하나 할까요?"
낄낄 웃으며 잠깐 나갔다가 온 준호의 손에 들린 봉지를 보고 범신은 한숨을 쉬었다. 지금 이 미친놈이 사제관에서 낮술을 하자는 건가.

보좌 신부님 돌아오실 때까지 한 시간 반 정도 시간이 비어요. 제가 그동안 꼭 하고 싶었는데 못 했던 걸 하려면 기회가 지금 뿐이라서 이럽니다. 서품 받기 전까지 저는 계속 바쁠 테고, 신부님도 금방 가실 거고, 아무래도 밤에 모이기는 어렵잖습니까. 하며 웃는 준호의 얼굴이 어이가 없다. 허락한 걸로 알았는지 종이컵에 소주를 따르고 새우깡 봉지를 뜯는 손길이 날렵하다.
"너 신학교에서 어지간히 마셨나보다?"
"에이 무슨 말씀이십니까. 학교 규정에 학교에서 술 마시지 말라셨습니다."
"규정은 개뿔. 그래 잔이나 줘 봐라. 빨리 마셔서 없애야지 원."
범신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반 정도 채워진 종이컵이 범신의 손에 쥐어졌다. 잔을 받자 마자 홀짝 넘긴다. 낮에 마시는 소주는 유난히 달고 쌉쌀하다. 잔을 내려놓자 마자 준호는 공손히 새우깡을 내밀었다.
"얼씨구, 왜 이렇게 유난스러워. 내가 먹는다. 내려놔."
범신의 잔을 다시 채워주고, 이번에는 범신이 따라주는 잔을 두 손으로 받은 준호는 고개를 돌리고 잔을 비웠다. 크, 하고 인상을 찌푸리는 폼이 술을 잘 마시지는 못해도 좋아한다는 건 알겠다. 소주 한 병은 일고여덟 잔이면 금방 동이 나서, 몇 잔 말 없이 주고받자 한 병이 다 비워졌다. 새 병을 딴 범신이 준호에게 한 잔 따라주었다. 술잔을 받느라 손을 모으고 앉은 준호의 자세가, 꼭 성체를 모시는 것 같다고 생각한 범신은 피식 웃었다. 내가 참 불경하기 그지없구나, 그때 준호가 입을 열었다.
"고마웠습니다."
범신은 공손한 자세로 무릎을 모으고 앉은 준호를 쳐다보았다. 뜬금없는 인사에 조금 놀랐다. 무슨 흰소리냐고 한 마디 하려던 범신은 준호의 표정을 보았다. 술 마신 놈 답지 않게 단정하고 굳은 얼굴이었다. 그냥 튀어나온 소리가 아니다. 오래 준비했던 말일 것이다.
"신부님이 아니었으면, 오늘의 저도 없습니다."
"......"
"정말로 고맙다고 꼭 말씀드리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죄송했습니다. 그 날은,"
"됐다, 뭐 지난 일을 갖고 그래. 그런 거 마음에 담아두면 마음이 녹슨다, 이놈아."
"......네."
"아, 그리고 고마우면 좀 좋은 걸로 가져오던가. 깡소주가 뭐냐."
그냥 웃는 준호를 보며 범신은 새우깡을 집어 입에 욱여넣었다. 그날 잔을 받지 않아서 계속 미안했던 거다, 뺀질거리긴 해도 꼰대라서 내심 미안해서 언젠가 꼭 사과하려고 기회만 보고 있었던 거다. 그리고 기회가 되자마자 앞뒤 안 가리고 잽싸게 잔을 준비했겠지. 아직 새파랗게 어린 녀석이 성실하기도 하다, 범신은 기특한 어린 부제를 쳐다보았다. 준호는 겸연쩍은 얼굴로 웃었다.
"나중에 본당 가면 미사주라도 드리겠습니다."
"필요 없다, 이놈이 주님의 보혈을."

언젠가 사제가 되면 이놈은 정말로 열심히 주님의 어린양들을 인도하는 목자가 될 것이다. 음으로 양으로 주님 뜻을 따르며 신실하게 살 거다. 그리고 그때는 이놈한테 이런 공치사를 듣지 않아도 될 정도로 훌륭하게 잘 클 것이다. 나보다 좋은 사제가 되겠지. 주여, 당신의 종 아가토를 굽어살피소서. 범신은 입안으로 기도를 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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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 마시는 김과 최- @wh_priests님의 리퀘입니다. 감사합니다!
2015.12.03 백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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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사제]견진성사

준호는 학교로 돌아갔다. 기도와 공부와 묵상이 이어지는 나날이었고 공백 같은 건 없었던 것처럼 준호는 다시 학교에 녹아들었다. 요새 최준호 아가토 형제가 성실해졌다고 원감신부가 칭찬했으나 그냥 웃어넘겼다. 성실으로 위장한 고행의 나날이었다. 그날 한강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자신이 어떻게 살아 돌아왔는지 누구에게도 말할 생각이 없었다. 그 후로 무수히 많은 악몽을 꾸었음에도-다행히도 개가 나오는 악몽은 수가 줄어들었다. 그것이 유일한 위안이었다. 이전보다 진실된 기도를 올리고 그리스도를 더 찬미하게 되었음에도 준호는 괴로운 마음을 어쩌지를 못했다. 거룩한 길임에도 불구하고 괴롭다니 어불성설이었다.  마음 속에 자그마한 죄의식이 싹터 준호를 괴롭혔으나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했다. 심지어 고해를 할 때에도 말을 못 했다. 이밖에 알아내지 못한 죄도 용서해 주시옵소서, 하고 읊조릴 때 가슴 한켠이 따끔거렸다.

그러나 그날, 같이 모든 것을 보고 들었으며 자기 가장 약한 부분을 알고 있는 사람한테라면 어쩌면 무언가를 이야기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그 무뚝뚝하고 깡패 같은 신부와 친하냐고 누가 물으면 준호는 그냥 일로 만나서 알게 된 신부님이라고 말할 생각이었고 아마 그도 그렇게 말할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준호는 습관처럼 프란치스코 수도회로 편지를 보냈다. 답장이 자주 오지는 않았고, 준호도 자주 편지를 보내지는 않았다. 구마가 끝나고 수도회로 다시 돌아간 범신은 여기저기 불려다니고 이것저것 수습하느라 정신없는 나날을 보내고 있노라고 학장신부가 얼핏 말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었다. 준호가 범신과 편지왕래를 한다는 것을 들은 학장신부는 주님이 하시는 일을 내가 어찌 알겠냐며 고개만 절레절레 저었다. 학장 신부의 묵인 아래 준호는 범신과 실낱같은 교류를 이어갔다. 다만 그 후로 다시 구마를 하는 일은 없었다. 그런 일이 그렇게 자주 벌어지지도 않았거니와, 정식으로 구마 사제가 되려거든 일단 서품이나 받으라고 범신이 호통을 쳐대서, 일단은 준호도 그 문제에 대해서는 말을 하지 않고 있던 참이었다. 이제 와서 날 인정 안 하시려나 하며 툴툴대던 준호에게, 김 베드로 신부가 학교 방문을 하며 널 보자고 하더라며 말을 전한 것은 학장신부였다. 언제 오시느냐는 질문에는 모르겠다고 답해서 준호를 한 번 더 열받게 했다. 지금 뭐 훈련시키나.

범신이 정신부의 유품 정리 겸 대신학교에 들른 것은 영신의 구마가 끝나고 2개월 반 정도가 지난 후였다.  어느새 가을이 되었고 학교를 돌아다니는 신학생들의 옷도 조금 더 두꺼운 것으로 바뀌어 있었다. 범신은 학장신부를 만나 준호의 안부를 묻고는 인상을 쓴 다음 몇 가지를 이야기했다. 떨떠름한 얼굴의 학장신부에게 고개만 끄덕여보이고 학장실을 나온 범신은 수덕관 앞에서 담배를 한 가치 빼물었다가 다시 집어넣었다. 요즘은 학교에서 금연이던가. 휘적휘적 걸어가던 범신은 수단을 입고 걸어가는 신학생을 붙들고 말을 걸었다. 다행히 7학년생이었다. 기숙사 가는 길이거든 최준호 아가토를 불러오라는 말에 학생은 얼른 뛰어갔다.
"최아가토, 웬 신부님이 찾으셔."
"신부님?"
"응, 낯선 분인데."
저녁 식사 후 대침묵 시간 직전의 짬을 이용해서 참고문헌을 뒤적거리고 있던-연구과 수료논문의 주제는 악의 존재가 신앙에 미치는 영향이었다- 준호는 무섭게 생긴 신부님이 찾는다는 말에 급하게 책을 덮고 기숙사 밖으로 나갔다.
"너 좀 말랐다."
"펑크난 학업 때우느라 좀 바빠서요. 잘 지내셨습니까."
"뭐 주님 덕분에 그럭저럭 산다. 바쁘냐?"
"네. 바쁩니다."
괜히 퉁명스럽게 대꾸하는 준호를 보며 범신은 혀를 찼다.
"잠깐 나하고 이야기 좀 하자."
"곧 대침묵 시간인데요."
"사제의 말에 순종하지 않는 부제도 있냐. 일단 좀 앉자."
평소엔 순종하건 말건 관심도 없으면서 이럴 때는 사제의 권위를 내세운다. 가만보면 아주 치밀하고 무서운 양반이라니까. 투덜대던 준호는 안경 너머에서 번쩍이는 범신의 시선을 느끼고 얌전히 뒤를 따라갔다. 
사람이 잘 지나가지 않는 으슥한 자리를 찾은 것을 보고 범신이 뭔가 중요한 이야기라도 꺼내나 싶었으나, 범신은 그냥 영신이가 학교에 잘 돌아갔고, 유급은 했지만 한 살 어린 반 애들하고도 잘 지낸다는 이야기며 조카가 귀엽다는 이야기며, 졸업논문을 쓰려거든 이러이러한 책을 찾아보고 이런 논문을 읽으라는 별 시덥잖은 이야기만 꺼냈다.  논문 주제가 참으로 고식적인 것이 너답다는 비아냥에 발끈한 준호가 몇 마디를 던졌고 범신은 재밌다는 듯 웃으며 준호의 속을 긁었다. 못된 양반, 사람 입에서 말을 이런 식으로 끌어내게 하다니. 결국 준호는 울며 겨자 먹는 기분으로 범신에게 이야기를 꺼냈다. 그냥 툭 던지듯 다시는 한강에는 들어가고 싶지 않다고 한 말을 범신이 놓치지 않았던 탓이다. 유황불에 타들어가는 환각과, 억지로 묵주를 쥐고 다친 다리를 끌고 다리 위를 걸어가던 순간과, 돼지를 끌어안고 물에 뛰어들던 순간까지 이야기하자 범신은 신음하며 성호를 그었다.
그때, 라고 말하고는, 둘 다 잠시 말이 없었다. 준호의 눈 아래 그늘진 부분과, 셔츠 사이로 보이는 그때보다 마른 팔을 쳐다보던 범신이 혀를 차고는 말했다.
"새로 태어났으면 그냥 주님 종이야. 나 죽었소 하고 버텨야지."
"알고 있습니다."
"머리로만 아는 거하고 실제는 다르지. 고해성사는 언제 했어?"
"지난 주에 했습니다." 
"주님께 솔직히 말씀드려라 힘들다고."
"고해신부님께는 그런 이야기 못 드리는 거 아시잖습니까."
고집스럽게 말하는 준호를 보며 범신은 이마를 짚었다. 아직 핏덩이라 버티는 법을 모른다. 그냥 꼿꼿한 척 하는 게 능사가 아닌데. 아직 어린 놈이 멀쩡한 척을 하고 있는 걸 보니 머리가 다 아팠다.
"물로 새로 태어났으면, 그 다음은 뭐냐. 기름부음이지?"
세례성사 다음에 견진성사를 받을 때에는 이마에 기름으로 십자를 그린다. 인상을 쓰며 자신을 쳐다보는 아직 젊다 못해 어린 신부를 보며 범신이 말했다.
"교리 모르냐."
"아는데요. 기름부음으로 인장을 찍어 세례를 완성시키는 견진성사. 하느님께서는 또한 우리에게 인장을 찍으시고, 우리 마음 안에 성령을 보증으로 주셨습니다, 코린토 2서 1장 21-22절. "
"알기는, 내가 오늘 너 확실하게 가르쳐줘야겠다. 가자, 기름부음 받으러."
"네? 묵주기도 바칠 시간인데요? 그리고 대침묵인데요?"
"잔말 말고 따라 와."

어영부영 범신의 손에 끌려간 곳은 대학로 구석에 있는 고깃집이었다. 젊은이들이 왁자지껄 떠들고 있었고 연기가 자욱한데다 공기의 일부분이 알코올에 푹 절어 있었다.
"왜, 와 본 적 없어?"
"네, 이쪽은 그다지...그것보다 신부님, 뭐 하시게요?"
"기름칠. 아, 여기 일단 삼겹살 3인분 하고요, 소주 한 병요."
어이없는 광경에 준호의 입이 벌어졌다.
"기름부으신다더니 세상에 이게 뭡니까?"
"맞잖아 기름."
준호가 미간에 주름을 잡았다.
"거룩한 성사를 이렇게 막 갖다붙이셔도 됩니까. 죄 받으십니다"
"주님께서는 다 아신다."
범신은 준호의 손에 집게와 삼겹살 접시를 쥐어주었다.
"제가 굽습니까?"
"당연하지, 오늘은 네가 봉사해야 되는 거야. 너 임마 돼지 덕에 사람 된 줄 알아. 얼마나 고맙니? 그러니까 돼지를, 최대한 맛있게 구워서 소명을 다 하게 하는 거다, 실시."
"주님, 거룩한 성사를 망령되이 일컫는 이 사제를 구원하소서."
궁시렁거리며 고기를 굽고 있었지만 준호의 표정은 유순했다. 범신이 왜 자신을 여기에 데려와서 하필 돼지고기를 먹고 있는지 알 것도 같았다. 몸과 마음에 성유를 붓고 정화를 시키고, 성령이 임하여 세례의 의미를 굳건히 다지는 것이다. 한 번 뒤집은 고기가 치익 소리를 내자 가위로 자른 준호가 손으로 범신을 가리켰다. 젓가락을 든 범신이 엄숙하게 선언했다.
"Accipe signaculum Doni Spiritus Sancti.(성령 특은의 인호를 받으시오.)"
"Amen."
준호는 웃으며 성호를 그었다. 쌈을 싸서 입에 넣자마자 범신이 준호의 잔에 소주를 따라주었다.
"저 술 안 마십니다."
"나보고 그걸 믿으라고?"
졌다.  범신에게 잔을 받아 고개를 돌리고 단숨에 들이킨 준호가 문득 생각난듯 말했다.
"그 돼지 이름이나 지어줄 걸 그랬죠."
"얼씨구, 그랬다간 진짜 꿈에 나와 임마. 악몽에 돼지까지 추가되면 좋냐?"
"돼지꿈은 길몽이랍니다."
어이없는 얼굴로 웃는 범신이 준호를 한 번 더 쳐다보았다. 괜찮은 척을 잘 하는 놈이라 분명히 속은 꺼멓게 타들어갔을 것이다. 자신이 그랬던 것처럼. 하지만 오늘은 악몽에 시달리지 않고 잘 잘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준호도, 범신도.
"평화가 당신과 함께."
"또한 사제와 함께."

견진성사를 맺는 인사를 입에 올리자 준호가 바로 받아쳤다. 성호를 그은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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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1.30 백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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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사제]목욕탕에 간 김최

"아빠랑 목욕 안 해! 물에서 더 놀 거야 수영할거야!" 

"어허 안 돼, 저기 무서운 아저씨가 이놈 한다?"
목욕탕은 소리가 잘 울린다. 바로 등 뒤에서 실랑이를 하는 부자가 주고받는 대화가 자기 귀에까지 들리는 것이다. 졸지에 애한테 이놈 하고 호통을 칠 팔자가 된 범신이 눈썹을 꿈틀거렸다. 범신의 등을 밀며 아이고 주님 우리 신부님 등에서 국수가락이 나오다니 이게 기적인가 봅니다 하며 너스레를 떨던 준호는 낄낄거리며 웃었다.
"신부님 무섭게 생기신 건 세상이 다 아나봅니다."
"시끄럽다, 등이나 대라."
짝 소리가 울려퍼지고 준호가 울상을 지었다. 
"신부님, 어찌 사제되신 몸으로 사적인 복수를 저지르십니까." 
"하 거 존나 시끄럽네. 야 때 밀 때 원래 등 때리고 그러는 거야, 모르냐?" 
"모릅니다! 게다가 아픕니다!"
"어허, 학교에서 목욕 제대로 안 하냐. 이놈 더러운 거 봐라. 하긴 사내놈들만 모아놨는데 깨끗할 리는 없지만 그래도 어허, 이거, 어이구, 부제님 목욕 안 하십니까."
근엄한 얼굴로 악담을 툭툭 던지며 등을 미는 손길에 사감이 가득하다. 아무래도 아까 괜히 놀렸나보다. 억울해진 준호는 울상을 지었다.
"와 억울하네 진짜. 신부님은요?"
"나는 대중탕 못 온 지 6개월이 넘었다 이놈아. 혼자 등 미는 게 쉬운 줄 아냐."
마르베스의 손이 닿아 시커멓게 썩어들어가는 몸으로 목욕탕은 커녕 반소매 옷도 입지 못했을 것이다. 생각없이 입을 놀린 게 되어버린 준호가 미안한 마음에 사과를 하려고 하는데, 등 뒤에서 목욕을 하네마네 실랑이하던 부자가 큰 소리로 외치는 소리에 둘은 굳어버렸다.
"아빠랑 목욕 안 한다니까! 나 혼자 할 수 있다고!"
"아이고 윤호야, 저 삼촌도 아빠랑 같이 목욕하러 왔잖아?" 
마구 등짝을 문지르던 손이 공중에서 멎었다. 매서운 눈빛이 두 쌍 아이와 아버지에게 쏟아진다.
"지금 저희 이야기 하시는 거예요? 이분이 저희 아버지라고요?"
준호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항의했다. 범신도 질세라 목소리를 높였다.
"내가 이 놈 애비라니, 내가 싫습니다. 이놈 이거 나한테 배우는 신학생인데 어찌나 말을 안 듣는지 원."
"저도 싫습니다. 무슨 신부님이 이렇게 험악해요."
이구동성으로 투덜거리는 걸 본 아이가 바로 입을 다물고 아버지에게 몸을 맡겼다. 덩치 큰 두 신부의 투덜거림이 제법 무서웠던 것이다. 아이 아버지는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게 김윤호 아빠 말 좀 잘 듣지. 신부님들이셨나봐요. 하도 닮으셔서 부자지간인 줄 알았네요."
둘은 서로 얼굴을 마주보고, 대놓고 싫은 표정을 지어보였다. 이런 꼰대랑/이런 미친 신부랑 닮다니 오 주여. 똑같이 중얼거리고는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내가 수도원 안 들어갔으면 그래 뭐 너만한 아들이 있었을지도 모르지."
"신부님이랑 결혼하실 자매님이 안 계시니 그럴 리 없습니다."
"내가 뭐 어때서. 나도 어려선 인기 많았어."
"주님이 지켜보고 계십니다. 거짓말 하지 마십쇼."

뭐야 이놈이. 아이고 말을 말자,됐고 등이나 마저 밀자. 투덜거리며 범신의 손에 몸을 맡긴 준호는 제법 꼼꼼하게 등을 문지르는 손길에 하품을 크게 했다. 둘 다 무사히 뜨끈한 물에 몸을 씻으며 쉴 수 있다니 이 또한 주님 은총이라. 습관처럼 성호를 그으며 준호는 감사기도를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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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1.29 백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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