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은혼]세계의 밤 5
- 쓰고 만든 것/그 외
- 2012. 10. 5. 00:05
- Posted by 유안.
이제 정말 비축분이 다 떨어졌습니다. (묵념)
전에 썼던 내용을 수정했고요 이 뒤는 이어서 쓰고 있습니다. 책은 어떻게 나올지 생각을 좀 해 봐야겠습니다. 일이 너무 바빠서...
문 밖에서 다섯 개피째 담배를 뽑아물던 히지카타는 문이 열리는 소리를 듣고 고개를 돌렸다. 붕대라기보다 천쪼가리에 가까운 걸로 양손을 둘둘 처맨 후루타카가 의식을 잃은 채 평대사들에 의해 운반되고 있었다. 사람이라기보단 고깃푸대 같았다. 눈이 마주치지도 않았지만, 얼굴을 본 순간 겁에 질린 눈동자를 마주보는 기분이 들어서 히지카타는 담배를 비벼껐다. 목 안에서 시큼한 뭔가가 올라왔다. 도대체 뭘 했냐고 물어보려는 순간 긴토키의 고함소리가 들렸다.
“히지카타 부장. 1소대 2소대가 이케다 빌딩으로 간다. 현장 지휘!”
“이 미친 새끼!”
반사적으로 히지카타는 소리질렀다. 긴토키가 이쪽을 노려보았다.
“뭐.”
“…….”
“애들 다 보는 데서 뭐 할 셈이냐.”
긴토키가 낮은 소리로 으르렁거렸다. 주위를 둘러보지 않아도 평대사들이 눈치를 보는 기미가 느껴졌다. 히지카타는 혀를 찼다.
“뭐 됐다. 오키타하고 사이토 오라고 해라! 순찰차 대기시키고.”
“네!”
그제서야 부하들이 안심하고 달려갔다. 공연히 답답해서 히지카타는 발밑에서 미처 꺼지지 않은 꽁초가 타들어가는 것을 세게 밟았다.
히지카타와 오키타, 사이토가 간 이케다 빌딩에서는 카츠라 코타로가 있었다. 카츠라는 놓쳤지만 이누이 성(聖) 대사관과 이케다 빌딩에서 일어나려던 테러는 막을 수 있었고 설치되었던 폭탄도 제거했으며, 현상수배 전단에 이름이 오른 양이지사도 몇 체포했다. 진선조의 공적으로 제법 나쁘지 않았다. 특히 이케다 빌딩의 테러를 ‘막았다’는 점은 일반 시민들에게도 진선조가 치안 유지에 필요한 조직이라는 부분을 강조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이 점을 강조하면 아마 고문건에 대한 소문이 새어나가도 그 점을 치안유지의 이름으로 억누르기에 충분할 것이다. 이래저래 웃기는 일이었다. 힘으로 나라를 누르려고 하지만, 제대로 된 힘은 아니다. 어설펐다. 독재를 하려면 제대로 할 일이지. 히지카타는 마츠다이라에게 제출할 보고서를 작성하던 중 붓을 물고 잡상에 빠져있다 흠칫 놀랐다. 언제 왔는지 긴토키가 등 뒤에 서서 보고서를 읽고 있었다.
“……카츠라 코타로는 도주. 야, 좀 잘 잡아오지.”
“그놈 새끼 약삭빠른 게 하루이틀 일이냐.”
히지카타가 얼굴을 찌푸렸다.
“그런데 사카타 부장. 보고서에 못 쓴 게 두 개 있는데.”
“응? 그걸 왜 나한테 이야기해?”
히지카타가 인상을 찌푸렸다.
“네놈이 사고를 쳐서 보고서에 못 쓴다고. 일단 좀 들어봐.”
긴토키가 애매한 얼굴로 양반다리를 하고 바닥에 앉았다.
“우선 그거. 카츠라가 널 아는 척 했다고 평대사들이 수군거리더라.”
이번에는 긴토키가 얼굴을 찌푸렸다.
“대체 현장에서 뭘 했길래 그놈들까지 수군거려?”
대충 들린 이야기로 히지카타도 사정은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양이지사가 사카타 부장을 아는 척 하는데 꼭 동료 보듯 하더라고. 무슨 웃기는 소리냐 카츠라 그놈이 선동질 하려고 일부러 그런 거 아니냐 생각해보면 모르냐 하고 윽박지르자 평대사들은 수긍하는 눈치였으나 히지카타는 내심 묘하게 기분이 나빴다. 카츠라는 그런 식으로 선동을 할 놈은 아니었다. 차라리 그 자리에서 긴토키의 목에 칼을 겨누면 또 모를까.
“그건 히지카타 부장님 네놈 소관 아니셨어요?”
긴토키는 바로 비딱한 얼굴로 내뱉었다. 대외적인 이미지 조작과 선동, 그리고 조직원들의 단속은 다 네 몫 아니었냐는 무언의 물음이었다.
“아, 입단속은 시켜놨다. 대충 그놈이 선동질한 거라고들 믿어. 그나저나 대체 어떻게 된 거냐?”
“나도 몰라.”
“이거 중요한 문젠 것 같은데.”
“중요하긴 개뿔이 중요하냐.”
긴토키는 짜증스러운 표정으로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긴토키의 표정을 살피던 히지카타가 조심스럽게 말을 붙였다.
“잡아다 올까?”
“뭔 개소리야.”
“그놈이 네놈 과거를 알지도 모르잖아.”
“너 쥐약이라도 처먹었냐? 내 과거가 뭐? 오지랖 넓게 구는 건 가서 곤도씨나 오키타 그 애새끼한테나 하라고. 왜 기분나쁘게 굴어?”
긴토키가 버럭 소리를 지르고, 히지카타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긴토키는 티나게 기분 나쁜 얼굴로 히지카타를 노려보고 있었다. 둘 다 아무 말도 하지 않다가 한참 후에 히지카타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리고 두 번째. 그렇게까지 할 거 없잖아.”
“뭘.”
“후루타카 말이다.”
“고문이야 자주 있는 일이잖아. 뭘 그러냐.”
“손에 못질하고 초 꽂은 다음에 웃으면서 구경했다면서.”
긴토키가 코웃음을 쳤다.
“뭔 소리래. 거기 부장님. 이게 그렇게 만만한 일이 아니잖아.”
“일이 만만한 거랑, 잔혹한 거랑은 별개의 문제다. 무슨 짓이야.”
“그래도. 간부들까지 무서워하던데.”
“간부란 새끼들이 그걸 무서워해?”
“도가 지나쳤던 이야기다. 평소보다 심했잖아. 너 설마.”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긴토키가 히지카타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설마는 무슨 놈의 설마.”
“…….”
“사람백정이잖아. 하려면 제대로 해야지. 넌 너무 물러.”
“…….”
“말이 좋아 경찰이지 우린 사람백정이야. 그건 네가 제일 잘 알잖아. 우리 중에 그거 모르는 사람이……아 하나 있긴 있다. 우리 국장. 그치야 뭐 그렇다 쳐도 넌 아니잖아. 오히려 네놈이 제일 잘 알지.”
“곤도 씨 이야기는 하지 마라.”
히지카타가 새 담배에 불을 붙였다. 한참이나 라이터를 딸그락거리며 불을 붙이는 꼴을 본 긴토키가 피식 웃었다.
“그래그래, 못된 짓은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넌 가서 애들 군기나 잡고 곤도 씨나 잘 도와라. 독한 놈이 둘이나 될 필요는 없지 뭐.”
긴토키가 히죽 웃으며 히지카타의 주머니에서 담배를 한 대 꺼냈다.
“끊었다더니.”
“원래 담배는 하루 끊고 다음날 또 끊는 거야. 몰랐냐.”
물장사를 논할 때 카부키쵸를 빼면 안 된다. 워낙 술집이 많기도 하지만 다양한 술집도 많았다. 특히 오카마 바를 논할 때는 카부키쵸고, 그 중에서도 마드무아젤 사이고의 가게가 제일이라 한다. 그러나 마드무아젤 사이고의 가게는 다른 용도로도 쓰이고 있었다. 사이고 토쿠모리가 전직 양이지사였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오카마 바의 나방들 사이에서도 몇 명 없었다. 그리고 그들마저도 그 가게에서 가끔 일을 돕는 긴 머리 나방이 현직 양이지사라는 것을 알 수 없었다. 즈라코라는 수상쩍기 그지없는 가명을 대고 있었지만 어차피 그 가게에 제대로 된 이름과 과거를 가진 자는 얼마 없었으니 그 정도로 즈라코에 대해 의심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날도 마드무아젤 사이고의 가게는 시끌벅적했다. 그러나 무대를 지나 안쪽으로 들어간 방은 조용했다. 특별한 손님들을 위한 공간이었다. 미닫이로 여닫게 되어있는 작은 방에는 흐린 빛을 내는 조명이 하나, 좌탁과 방석이 놓여는 것이 전부였다. 입구쪽 자리에 즈라코가 얌전하게 앉아서 건너편 벽에 기대어 앉은 화려한 나비무늬 기모노를 걸친 남자에게 술을 따르고 있었다. 술이 자기로 된 잔에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는 것 외에는, 그 주위는 조용했다. 멀리서 샤미센 소리와 노랫소리, 박수소리가 들렸다.
“확실하냐.”
“그래. 일부러 위험을 무릅쓰고 확인한 보람이 있었다. 맞더군.”
“그러냐. 그놈이 돌았다더니 정말이었나 보군.”
기모노 차림의 남자가 낮은 소리로 킬킬댔다. 하지만 카츠라의 표정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정말 어떻게 된 건지도 모른다.”
“그놈이야 원래 돌았잖아.”
“그런 뜻이 아니야. 정말로 이상했네.”
“왜 그렇게 생각하지?”
“긴토키가 나를 카츠라라고 불렀네.”
“오호.”
남자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카츠라는 우울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사상이 멀어졌어도 옛 친구는 기억해 줄 줄 알았는데, 나를 카츠라 코타로라고 불렀어. 내가 아는 긴토키가 맞다면, 그럴 리 없네.”
“그런가.”
남자는 술잔을 놓고 생각에 잠겼다.
“다카스기, 어쩌면 말일세, 긴토키는 정말로 모두 잊었는지도 몰라. 그리고 새로 인생을 시작한 거지.”
“잊어?”
다카스기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 질기기가 쇠심줄 같은 놈이 뭘 잊어? 즈라, 네가 확인한 게 확실하냐?”
“내 말을 들었잖은가. 긴토키는 우리를 몰라.”
“그 놈이 과거를 잊고, 전쟁을 잊고, 전우를 잊고, 이상도 이념도 모두 잊었다고?”
“다카스기.”
“그놈이 감히, 선생님을 잊어?”
다카스기가 이를 갈며 말을 뱉었다. 그리고 카츠라도 다카스기도 아무 말을 하지 않았다. 무대에서 누군가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는지 멀리서 떠들썩한 소리가 들렸다. 가성이 과하고 장식음이 너무 많은 노래가 한 곡이 끝날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다가 불쑥 카츠라가 입을 열었다.
“어떻게 할까.”
“뭘 말이냐.”
“긴토키 말이다.”
“잘게 썰어서 물고기 밥으로 줘야지.”
다카스기가 가벼운 어투로 말하자 카츠라가 얼굴을 찌푸렸다.
“농담하지 말게. 데려와야지.”
“데려오다니?”
“그러면?”
“죽여야지.”
“신스케!”
카츠라가 언성을 높였다. 다카스기는 매우 밝게 웃었다. 꼭 어렸을 적, 셋이 장난을 치다 가끔 볼 수 있었던 그 표정이었다.
“저놈 죽이고 에도도 가라앉히지 않으면 억울해서 내가 못 죽겠다.”
“신스케, 그런 말을 함부로 하는 게 아니다! 에도를 가라앉히다니! 그리고 친구를 죽이다니!”
“그래 뭐, 에도야 그렇다 치자. 넌 이 세상을 너무 과대평가하고 아끼는 경향이 있으니까. 그렇지만 말이다, 넌 그놈을 용서할 수 있어?”
다카스기의 목소리는 조용했다.
“용서하고 말 게 어디 있나. 친구인데.”
“즈라, 넌 그게 아직도 네 친구로 보이냐?”
“돌아올지도 몰라. 그녀석은 사카타 긴토키다. 내가 아는 긴토키가 그렇게 쉽게 우리를 잊을 리 없어. 잘 하면 분명히 돌아올 게다. 나는 놈을 믿네.”
“즈라 네 문제가 그거다. 넌 왜 대책 없이 사태를 낙관적으로 보는 거냐. 그놈 그거, 즈라 네 말 대로라면 이미 갔어. 네가 알던 그 놈은 이제 영영 안 돌아올 거다.”
“그래도.”
“돌아온다고 쳐도, 그놈이 한 짓을 생각해 봐라. 진선조 부장? 가당키나 한 소리냐?”
“그건 모르고 한 일 아닌가. 기억을 찾으면 분명 반성할 걸세.”
“반성하면? 그동안 놈이 잡아들이고 죽인 동지들은?”
“…….”
다카스기는 카츠라의 등을 토닥여 주었다.
“괜찮아, 즈라. 저놈이 그렇게 쉽게 죽진 않을 거거든.”
“그걸 위로라고 하나.”
“그럼. 위로지. 그것만이 그놈이 한때 사카타 긴토키였다는 증거일텐데 위로가 아니면 뭐겠냐.”
카츠라는 힘이 없는 손으로 머리를 쓰다듬는 다카스기의 손을 뗐다.
“난 싫다.”
“일본이 없어지는 것도 싫고 긴토키가 죽는 것도 싫다고? 그놈 참 보수적이네. 세상은 말이야 즈라. 있던 게 없어지는 게 당연한 거야. 선생님이 계시지 않고, 우리 친구 긴토키가 없듯 말이지.”
다카스기는 조용히 웃었다. 말없이 좌탁에 얼굴을 대고 엎드려있던 카츠라는 한참 후에야 고개를 들었다.
“나는 신스케 네가 싫다. 우리는 지독하게도 맞지 않았지.”
신스케는 희미하게 미소지었다. 어딘가 맥없는 미소였다. 카츠라는 분한 표정을 지었다.
“네 방식은 잘못되었다.”
“그래서.”
“하지만 긴토키를 아는 사람이 너 하나뿐이라서 화가 난다.”
“그래서, 어쩌겠다는 거야.”
“일단 진선조를 제거하겠다는 건 동의한다.”
“그리고?”
카츠라는 고개를 숙였다.
“내기를 하지.”
“호?”
“우리 쪽에서 긴토키의 신병을 맡으면 놈은 사는 거다. 하지만 네 쪽에서 맡게 되면 마음대로 하게.”
“진심이냐?”
“그 외에 도리가 있는가. 이제 내 친구라고는 자네 하나 뿐인데. 자네마저 잃고 싶진 않네.”
다카스기는 만족한 미소를 띠웠다. 웃는 얼굴을 보고 카츠라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렇지만 역시 네가 싫다.”
“동감이네. 나도 즈라 네가 싫어.”
둘은 서로 노려보았다. 노려보다 먼저 피식 웃은 것은 다카스기였고 카츠라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눈을 내리깔았다.
잠시 후 다카스기가 자리에서 일어났고, 카츠라가 그 뒤를 따라 나섰다. 배웅하듯 가게 문 앞까지 나가, 다카스기에게 하오리를 입혀주고 삿갓 끈을 여며주는 카츠라의 표정이 굳어있었다.
“심각해지지 마라. 네 쪽에서 잘 하면 될 일 아냐.”
“그러냐.”
“그럼. 그러니까 즈라, 잘 해 보라고.”
“너도 잘 해 봐라.”
다카스기가 킬킬 웃으며 걸음을 옮겼다. 건물 사이에서 선글라스에 검정 코트 차림의 남자가 어느 틈엔가 나타나 다카스기의 등 뒤를 따라가고 있었다. 가부키쵸의 밤거리에서도 어쩐지 이질적으로 보이는 그들의 모습을 보며 카츠라는 한숨을 쉬었다.
“언제부터 길이 이렇게 갈렸는지. 시작은 같았을 텐데.”
멀리서 순찰차 소리가 들렸다. 아마도 진선조일 것이다. 다카스기가 이 근처로 왔다는 정보를 잡았을지도 모르고 다른 일 때문일지도 모르지. 그리고 긴토키는 다카스기와 카츠라를 잡아들일 궁리를 하고 있을 것이다. 카츠라는 또 한 번 한숨쉬고, 시끄러운 소음이 새어나오는 가게의 문을 열었다. 문이 닫히고, 카부키쵸의 하루가 또 저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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